2012.01.25

 

   가수들은 음반작업을 위해 똑같은 노래를 수 천 번이고 부를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은 완벽주의자인 그의 피나는 노력이 낳은 결과물이라 했다. 운동선수들은 정확한 동작을 하고자 하루에도 같은 과정을 수 백 번 반복한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같은 문장을 매일 읽어 입에 붙여놓고, 또한 그 문장을 반복해서 들어 귀에 들여놓아야 한다. 반복은 향상을 위한 노력 중 하나이다. 반복에 익숙해져 어떤 행동에 대해 신뢰가 생기면 인간은 심지어 목숨을 거는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해서, 반복은 삶의 보증수표이다.


  오늘 영어공부 겸 읽은 <뉴욕타임즈>의 한 예술관련 리뷰에도 ‘반복’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큰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 ‘캐롤 보겔’이라는 기자가 쓴 20일자 기사는 미국 화계의 거장 엘스워스 켈리를 다룬 리뷰였다. 그가 동년배의 팝아티스트들이나 미니멀리스트들과는 달리 추상화를 고집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 향년 88세인 그의 회고전이 여러 곳에서 개최되고 있는 미국의 추세를 반영한 듯했다. 그런데 기사 중 엘스워스를 화단에 안착시킨 한 인사가 이 고령의 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내게 뜻밖의 인상을 줬다.

  “He’s the last artist to repeat himself,” Mr. Storr said. “But he always comes back to his basic vocabulary: surface, scale, color, image. And he always gets it as simple as he can.”


  최근 들어 ‘복기(復棋)’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까닭에 ‘repeat himself’는 ‘repeat myself’로 받아들여졌다. ‘basic vocabulary’도 내게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거의 매일 들어왔던 말, “기초를 닦아라.”는 이런 때를 위해 교훈 삼아야 하는 것이리라. “타인에게서가 아닌 나 자신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복기의 원론은 내게 ‘실용’이라는 효과의 여부를 떠나 하나의 ‘젊은’ 철학이 되었다.


  이런 글을 쓰며, 생각해보건대 나는 나의 삶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엇을 반복하여 잘하고 싶은가?”를 묻게 되었다. 새해도 되었고, 목표도 다시 바로 잡았으니 이런 새삼스러운 질문은 나를 건강하게 해준다. 반복하여 기술적으로 향상되어야 하는 부분에 나는 항상 ‘글쓰기’를 던져 넣는다.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고 해도 필사(筆寫)가 아니라면 매번 달라지는 것이 작문인지라, 어떤 글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는데 있어 매양 힘들다. 글쓰기가 단순한 동작이 아님은 자명하다. 기분에 따라 문체도 달라지고,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쓸라치면 문장의 자신감도 현저히 떨어진다. 비극적 사건을 다루는데 리드미컬한 구성이 적절하다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내게 “글을 반복하여 잘하게 된다.”라는 논리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어떨까?


  주제 하나로 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을 한글문서로 타이핑하는 것이든, 필사하는 것이든 반복해서 써보는 것이다. 즉, “반복한다.”라는 범위를 좁혀보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거나 암기하는 것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사랑하던 학습법이다. 좋은 씨앗이라도 질 좋은 토양에 심어야 잘 나는 법이라는 뜻이리라. 토양이 좋으면 나쁜 씨앗이라도 예쁜 꽃을 피우고, 왕왕 열매를 맺게끔 바로잡아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닐까. 그리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면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 여럿 있게 되는데, 여기엔 필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글을 곱씹어보는 것도 포함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3년 간 꾸렸던 미술 블로그의 옛글들을 한글문서로 바꿔 몇 권의 책으로 보관하고자 얼마 전부터 작업을 하고 있다. 공부와 소통을 목적으로 쓴 글들이라, 정리와 1~2회의 퇴고 외에는 특별히 손 쓴 적이 없었다. 때문에 문서편집을 하며 되돌아보는 지금 그것들은 나를 무척 창피하게 만든다. 모르면 용감해진다고 하더라.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마치 잘 아는 듯 흉내를 내고 싶기도 했었다. 겸손해져야 한다고 깨달은 후부터 글은 공부의 난이도만큼 갈수록 어려워졌고, 결국 내가 간직해야 하는 글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 초년생 무렵의, 제대 후 모두 지워버린 자폐적 글들보다는 알찬 것들이라 책으로 꾸며보고자 남겨뒀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들은 하나같이 복기해봐야 하는 것들이었다.


  적절하지 않은 문장을 고치거나 틀린 전문용어를 바로잡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수준이다. 2~3차의 퇴고를 꾸준히 한다면 이런 종류의 실수는 쉽게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영역에 있는 듯하다. 내가 복기 중 생각해보는 것은 글을 썼을 당시의 마음이다. 주제에 대해 잘 몰랐었을 무렵, 혹은 글에 너무 많은 힘이나 기교를 줄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무렵을 상기해보는 것은, 더군다나 소심한 나 같은 이에게는 나름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아픈 만큼 큰 도움이 된다. 쓴 약이 몸에는 좋더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에는 뺄 말이 하나도 없다. 부족한 것은 여전히 많지만 내가 예전의 글들보다 지금의 것들에 신뢰를 얹어놓는 까닭은 나날이 진행되는 복기이다.


  어제의 글보다는 오늘의 글이 더 나아야 한다. 특별히 글에 기교를 부리지 않으려는 나의 성향 탓일까. 나에게 글은 작문 당시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해진 틀 없이 들쑥날쑥하고, 사변이 많은 것이 (나 스스로 봐도) 눈에 띠는 특징이다. 이 방법은 작문 전에 마음을 정갈히 하지 않으면 글이 배설 수준까지 추락한다는 큰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정돈된 마음으로는 어떤 글이든 “잘 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마음을 잘 드러낼 수 있다.”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나에게 ‘복기’란 나 스스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의 성찰과 다름없다. 글을 생각하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이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아물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상처가 생길 때마다 나는 하나의 문장에 매달려 그 마음에까지 다다르는 긴 작업을 오랫동안 견뎌내야만 한다.


  새해만 같으라고 하더라. 의지가 나를 어디까지 밀고 갈지, 어디에서부터 내가 그 의지를 다시 밀고 가야할지는 연극이 진행되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글과 영상으로써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새파란 학생이라, 용기를 가지라는 덕담을 나 자신에게 주워들어본다. 올해는 다시 복학하는 만큼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를 실험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일로 임진년의 서막을 함께 열어줄 다섯 권의 책을 샀다. 두꺼운 책이 두 권이나 있어 비싸게 주고 살 뻔했던 것을 반값 할인을 빌미로 샀다. ‘이달의 당선작’으로 얻은 알사탕(환전했더니 4만원이나 나왔다!)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 까닭에 알차게 읽어주겠노라 벼르고도 있다. 이런 책들이다.

 

 

 

 

 

 

 

 

 

 

 

 

 

 

 

  니체는 “잘 모르지만 가까이 하고픈 철학자”이다. 철학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나에게 거창한 목표가 있다면 두꺼운 철학원서를 한 번은 읽어보는 것. 4년 만의 복학에 벌벌 떨던 나를 격려해주신 한 철학교수님의 도움이 몇 가지 동기 중 하나일 것이고, 그밖에 이진경氏, 박민영氏, 진중권氏, 버트런드 러셀, 우치다 타츠루 등의 책이 빈약한 나의 ‘철학적 지식’을 반성케 했다. 이번에는 이수영氏의 <명랑철학>을 통해 다시 한 번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살찌울 참으로 과감하게 철학책을 구해봤다.


  미술 블로그를 할 적의 일인데, 나에게 큰 격려를 준 이웃분 중 한 분이 내게 “꼭 반 룬과 같은 저자가 되어주세요.”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사실 그 때 나는 반 룬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터라, 그냥 “고맙습니다.”라는 답변만 할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매우 성공한 대중적 저자라는 평과 함께 그의 서술방식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반된 평가까지 다양한 리뷰들이 있었다. 그 분의 격려를 허투루 듣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번역서라 할지라도 그의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책은 하나같이 비쌌다. 다행이도 이번 알라딘 메일에 4만원은 족히 넘는 고가의 책들을 반값 할인해준다는 정보가 있어 찾아보던 차에 반갑게 “지르게” 됐다. 예술사 전체를 아우르는 ‘큰 눈’을 배양한다는 목적 외에도 나에게는 “반 룬의 글이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반 룬의 예술사>. 고심하며 읽어봐야 할 책이다.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1>도 비슷한 이유로 샀다. 비싼 책이 반값 할인을 했고, 저자에 대한 평이 좋았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저자 남경태氏가 역자이다. 1권을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2권도 사야겠다는 심보로 일단 ‘지름신’을 물려놓고 보니, 1권의 분량이 무려 1200페이지를 훌쩍 넘긴다. 막대한 분량을 다룰 수 있는 저자가 이 시대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기대가 되는 책이다. 저자가 취급한 정보들이 다양할수록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통설이고, 피터의 이 책도 그런 평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통시적인 ‘거대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저자들이 적어진 것이 문제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지식의 미술관>을 리뷰할 때도 한 말이지만 이 시대에는 파편화된 지식이 너무 많지 않은가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도킨스와 세이건을 읽을 때, 그리고 대학교 철학 강의 중에 나는 ‘설계논증’이라는 것을 비교적 자세하게 접했다. 평소 종교적 창조론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것이 종교에 대한 모든 회의라고는 할 수 없다.)이라, “설계논증은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항간의 반응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화론적 설명의 ‘목적’을 신에게 닿아놓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을 쓴 두 저자가 서론에서 말한 “이의제기에 변명할 방법을 보유”한 전형적인 종교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저급한 사상이라 여기는 선민사상을 낳은 종교의 모태가 진화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논증 자체가 나에게 전혀 설득력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고찰에 있어 나에게 남은 몇 가지 과제 중 하나는 설계논증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박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는 근래 나온 책들 중 나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극한 책 중 하나였다. 신간알림 메일로 얻게 된 논쟁적 책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최근 공들여 읽고 있는 <위도 10도>는 분명 종교적 분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명백한 인종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예전부터 프란츠 파농을 읽고 싶었지만 “어렵거나 너무 충격적일 것 같다.”는 비근한 핑계로 밀어뒀었다. 파농을 읽기 전에 ‘예비학습’ 겸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를 읽어 이 첨예한 문제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책을 잘못 골랐다고 느꼈다면 이 책 역시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이 주제 자체가 자신을 다룬 그 어떤 책이든 충격을 무기로 장착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해 벽두부터 나를 몰아세우는 기분이 든다. 어려운 만큼 피해가면 안 된다는 오기가 그리 만든 듯하다. 지나친 회의주의나 부정적 견해가 생기지 않도록 긍정적 예들도 곁들어 찾아가며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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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2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위도 10도>는 꼭 리뷰 써줘요. 그거 보고 싶었어요. 알게 된 것도 탕기님 서재에서지만.. 책 많이 구입했군요. 연휴 잘 보냈어요?

탕기 2012-01-27 11:1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님.^^ 연휴 잘 보내셨죠? 당선작으로 모은 돈이 있어서 큰 부담없이 두꺼운 책도 사봤습니다. 연휴 끝나고,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 뭔가 체계적으로 하려고 이런저런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하고 있어요. 아, <위도 10도>도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한... 1/3 읽었어요. 다른 책도 같이 읽고 있어서 아마 다음달 초에야 리뷰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