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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1.30
영화 <300>을 본 것은 군대에서였다. 가장 큰 내무반에 모여 조그마한 TV를 응시하던 장정들이 탄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뻔했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이모탈’들을 가르고, 베고,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는 야성의 향연에서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CG인지 실사인지 구별할 수 없는 오묘한, 혹은 ‘광택’이 나는 화면처리가 전사들의 육체미를 한껏 부각시켰다. 몇몇 장면은 컴퓨터게임을 연상케 했다. 전쟁이 아니라 예술이었고, 학살이 아니라 화려한 기술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각 내무반으로 돌아가던 병사들 중에는 더러 “스파르타!”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남자들을 전쟁터로 나가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죽음이 아닌 영예와 승리만 선전하면 그들은 포비아(phobia)를 잊는다. 영화 <300>에 관한 부정적인 비평들은 대개 그들의 관심 밖에 있다.
제대 후, 나는 미학을 공부했다. 물론 고난이도를 자랑하는 전문적인 원서를 읽진 않았다. 몇몇 개념만 알면 될 것 같다고 시작한 공부를 크게 벌여놓은 까닭에 나의 관심이 미술로 완전히 전환된 것도 있지만 우선 진중권氏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대담하게 내지르는 일침과 같았다. 내친 김에 그의 저서를 많이 주문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매진>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영화를 보진 않았다. 몇 편은 소위 ‘암흑의 통로’를 통해 보긴 했지만 <필로우 북>, <파렌하이트>와 같은 영화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책에 실린 영화들을 다 볼 필요는 없다. 진중권氏도 서문에 “이것은 담론의 놀이이다.”라고 거듭 밝히지 않았던가. 비평이라면 각 단편들이 이 정도로 짧진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氏의 필력에 비춰 예상해보건대 그가 비평을 쓴다면 영화 하나로 책 한 권은 족히 냈을 것이니.
미학과 시대적 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런저런 반찬들’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매진>은 ‘영화’라는 이름이 붙은 한 끼의 식사와 같다. 독자들은 각자 알맞게 소화해야 한다. 유독 “맛있더라.” 싶었던 것이 있으면 직접 구해서 느긋하게 보는 것도 역시 각자의 몫이다. 편식은 아니고, 나도 몇 가지 반찬의 맛이 특히 기억난다. (나는 진중권氏가 다룬 영화 34개 중 21개를 독서 전에 봤다. 제 2, 4, 5, 7장의 영화들은 <웨이킹 라이프>를 제외하고 모두 봤다. 하지만 제 1, 8장의 영화들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편식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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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기술적 진보와 관련해서 CG의 발달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생에게 <디지털 모자이크>라는 책을 추천받아 조금 접해본 적은 있지만 사실 나와 같은 일반 관람객들이 CG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싼 기술인 만큼이나 난해하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아닌 우리가 CG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대부분이 CG로 이뤄진 영화의 영상미와 충격이 서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할 영화팬은 아마 없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고전의 서사가 CG의 몸을 빌려 웅장한 규모의 고대그리스 신화로 재탄생한 것을 나는 영화 <타이탄>에서 목격했다. 그 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생에게 “다른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들도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며 감탄을 연발했었다.
나의 반응은 CG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담긴 상상력이 실사로는 도저히 발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별세계’를 다루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큰 영화팬들은 CG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광신도가 아닐까.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 롤링의 <해리포터> 등은 CG가 없었다면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지 못했을 환상적인 별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비평가들에 의해 두 부류로 나뉜다. <아바타>는 “별 내용이 없는데도 CG의 효과를 톡톡히 본 영화”라 저평가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독자들 사이에서 이 시대를 빛낸 명저라는 찬사를 받아왔으므로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평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다. 더 나아가 <반지의 제왕>은 감독 피터 잭슨과 그와 함께 시나리오를 쓴 작가들의 역량이 더욱 빛난 경우라 할 수 있다. 소설로 <반지의 제왕>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느낀 점이겠지만 톨킨의 소설에는 지루한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해리포터>는 다소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환상문학의 어머니’라 흔히 회자되는 어슐러 르귄은 롤링을 빗대어 “소설을 쓸 줄 모르는 작가”라 비하했고,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죽음의 성물>의 재구성에 있어서 수많은 ‘해리포터팬’들을 실망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들은 세베루스의 죽음과 회상이 너무 짧고 성의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고 성토했다.)
진중권氏가 <폴라 익스프레스>를 설명하며 제시한 개념인 ‘언캐니(uncanny)’는 CG 기술의 진보로 인해 앞으로는 찾아보기 힘든 기술용어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픽사, 디즈니 등 굴지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들은 대부분이 동물을 다룬 3D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크레더블>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하지만 진중권氏가 이어 담론을 논한 <베오울프>라든지, 올해 개봉한 <틴틴>에서는 ‘언캐니적’인 현상이 많이 줄어 들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인간을 닮았으나 2% 부족한” 것에서 느껴지는 언캐니는 “CG가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는 우리의 보수적인 경향으로부터 옹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완벽한 CG의, 단 하나의 실사도 없는 환상적인 세계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을 되돌아보면 기술은 인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놀라운 수준의 압축 성장을 이뤄오지 않았던가.
CG와 함께 이 시대의 영화 관람객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 것은 서사의 해체이다. 고전은 언제나 향유되며, 그 권위가 향유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마련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수많은 영화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심지어 흑백 무성영화를 전혀 본 적이 없는 젊은 영화팬들에게도 ‘향수’라는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영화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층위의 서사가 한꺼번에 진행되는 영화가 이 시대의 문제작들로 그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나비효과>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영화 <밴티지 포인트>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주인공이 다양한 시대에서 별로 늙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평행공존’하듯 진행되는 영화(패션과 관련된 강의에서 봤는데, 제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도 있다. 진중권氏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양자영화(콴툼시네마)’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 영화는 눈이 아닌 뇌를 통해 보는 영화로 관람자들마다 서로 다른 서사가 진행되게 된다.
만약 이런 기술이 실행된다면 우리에게 서사는 개인적인 체험이 되어 더 이상 단일성을 띤 ‘공유체’로써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를 가진 개념 중 하나인데, 이는 온라인게임의 스토리진행 형식과 일면 닮은 점이 있다. 온라인게임에는 굵직한 스토리가 있고, 그 외에 선택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스토리들이 있다. 물론 유저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스토리에 집중을 하거나, 캐릭터의 힘을 기를 목적으로 다른 스토리들을 마치 “헬스클럽에 다니는 사람의 심정”마냥 진행한다. 추천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온라인게임은 ‘자율’이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모든 이가 동일한 서사를 체험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사는 개인적 체험이 된다.
콴툼시네마도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서사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서사는 훨씬 깊은 개인적 체험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이다. A가 B에게 “나는 그 장면에서 왼쪽이 아닌 오른쪽 길을 선택했거든. 그랬다가 거의 죽을 뻔 했어.”라고 말했다고 하자. B는 바로 그 선택의 장면에서 상상을 동원한 약간의 공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A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겪지 못했던 사건들이 연속됨을 알게 되고, 결국 공감의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서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체험자들의 심리를 읽고 미리 대비하여 자신의 몸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상황과 같다. 서사는 확정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사실상 유기체가 될 것이다. 비록 작가가 공을 들여 만든 수많은 ‘경우의 수’라고 하더라도 관람객에게 높은 수준의 콴툼시네마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가상체험’이 될 소지가 높다.
여기서 ‘가상체험’은 CG와 서사의 해체 외에도 시각적 충격, 혹은 진중권氏가 자주 쓰는 용어인 ‘촉각적 충격(혹은 체험)’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클로버필드>는 “자세하게 보여주거나, 혹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하면서 관람객들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 초반부터 관람객들을 로버트 카파로 만들어버린다. 아마 관람객들이 노르망디 해안에서 충격에 노출되는 시간은 30분이 족히 넘을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카비젤에게 아람어(예수가 활동했을 당시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등 중동에서 국제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예수의 수난(passion)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관람객들을 당시 예수를 따르던, 혹은 그의 삶을 목격한 한 무리의 중동사람들로 바꿔놓는다. <클로버필드>는 영화 <REC>와 마찬가지로 1인칭 기법을 사용해 관람객들에게 엄청난 멀미와 현기증을 준다. 그러면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고전적 의미’의 관람은 이런 영화들 앞에서 일제히 해체된다.
영화의 기법과 관련해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것들은 대체적으로 이 정도이며, 영화가 짚고 간 다양한 주제, 예컨대 사이보그, 유령선, 미디어, 권력, 망상, 부조리, 폭력, 천재, 동화(童話), 역사 등도 진중권氏는 다채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가벼운 문장인 것 같으나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봐야 하는 내용이다. 현대를 규정하고, 구성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지금의 담론들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유의 기회라 생각된다. 영화팬이라면 그가 언급하지 않은 영화들도 해당 챕터들에 삽입해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나갈 수도 있다.
“누가 영화를 이렇게 복잡하게 봅니까?”라고 물어본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저자가 부제를 달아놨듯이 이건 ‘인문학적 상상’이며, ‘즐거운 사유놀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영화를 말하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바로 알아들은 이는 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를 단순한 픽션이 아닌 ‘시대읽기의 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런 식의 투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재미있고, 무섭고, 환상적이고, 슬프고, 때론 아리다. 이 다양한 얼굴을 가진 작품들을 보며 우리의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해보는 일은, 그리하여 재미있고, 무섭고, 환상적이고, 슬프고, 때론 아릴 수밖에 없다. 인문학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세태에 이 책과 같은 시도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크로스오버(cross-over)의 매력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