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 10도 -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
엘리자 그리즈월드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012.02.03

 

 

  우리나라는 잘 사는 편이다. (이 말은 리뷰에서 다루게 될 다섯 나라와 비교했을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계 10위권 안에 진입하기 위한 대(對)21세기적 목표도 가지고 있다. 국가선전을 목적으로 만든 공익광고를 가끔 TV에서 보면 자랑스럽기도 하다. ‘88만원 세대’도 후한 점수라며 나와 같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취업난 속에 허덕이지만 그래도 물질적 풍요를 얻어먹은 격이니, 고마워할 줄도 알아야 하리라. 나의 아버지는 학비를 벌기 위해 주경야독을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학창시절 만나 자장면 한 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신다. 하지만 나는 매달 지혜를 탐닉하겠다는 요량으로 거의 8~10만원 정도하는 책값을 이곳에 쏟아 붓고 있다. (사놓고 소위 ‘뻥튀기’된 광고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 때는 분을 삭이지 못하기도 하지만) 나는 가난을 모른다. 그리하여 분쟁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있는 세상의 실없는 넋두리”로 들릴 때가 있다. 그만큼 세상을 모른다.


  그리하여 먼 곳의 경치를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저곳에 가보고 싶다.”, 혹은 “저곳은 나와 상관없는 곳이다.”라는 생각. 금강산에서 그랬다. 나는 금강산 육로관광의 1세대이다. ‘세대’라 하니 거창한데, 기념비적인 현장에 참여한 것은 맞다. 검문 차 버스에 올라 탄 북한 장교의 날카로운 눈매, 소가 건초수레를 끌고 가는 시골의 풍경, 이루 말할 수 없는 절경의 금강산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북한은 ‘심리적 원거리’이다. 나의 망원경은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분단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실상을 울타리 너머에서라도 봐왔는데,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함께 이질감이 생겼다. ‘이곳’에서 어떤 간부가 어떤 여성을 겁탈하든, 압록강을 건너던 탈북자 가족이 한꺼번에 잡혀 몰살당하든 나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큰’ 상관. 이것이 뭔지도 사실 잘 모른다.


  볕 좋은 여기에서는 음지가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는 <위도 10도>를 읽는 나를 거칠게 음지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힘겹게 읽었다. 먼 곳의 풍경이 코앞까지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 때 느껴지는 현기증과 공포도 있었다. 신앙이 돈독한, 특히 기독교 신자와 무슬림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 책의 내용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긴 리뷰이지만 하고픈 말은 곱절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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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궁금했다. 사람이 유일신을 믿게 되는 경위. 그래서 읽은 책이 <믿음의 엔진>과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였다. 최근 이와 비슷한 주제로 출판되는 여러 책들도 결국 같은 말을 한다. (굳이 비싸게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자’에게 “참된 신앙”이라는 세계는 공감할 수 없는 곳이다. 열고 싶지 않은 문은 고리도 잡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지적 편식이다. 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신앙인이 보면 ‘불신’이고, 근본주의자가 보면 ‘이단’이며, 내가 스스로 봤을 때는 ‘유연함’이다. 서구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고, 대체로 의식주에 큰 불편이 없을 정도의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교육수준도 중간 이상인 우리나라는 일본, 싱가포르 등과 함께 전형적인 ‘서구적 아시아 국가’로 분류된다. 조금 거친 분류이므로 세세한 것들은 차치했으니, 이런 분류가 무지의 소산이 아님을 밝혀야겠다. 여하튼 이런 사회의 분위기는 나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자’를 만든다.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다. 이른바 종교최소주의의 사회이다. 독실하기로는 유별난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들(이들이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자들을 파견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약 12,000여명으로 추산된다.)은 예외이겠지만.


  반면, <위도 10도>에 나온 국가들, 예컨대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경제적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고속성장을 기반으로 아시아에서는 비교적 부국에 속한다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속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이 책을 통독해보면 이들의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더 추려낼 수 있다. 식민통치를 겪었고, 그 이후의 민주화과정이 실패하거나 독재정권이 국가를 장악했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고, 때론 그것이 서구와 이슬람의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렵은 서구의 식민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때의 선교사들은 국가와 자신의 종교가 공익(共益)을 추구한다고 여겨 열성적인 포교를 했다. 종교가 정부와 연루되자, 그것은 자연스럽게 ‘국가 마케팅’이 되었다. 이슬람교도들 중 대부분이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다.


  종교도 세력이다. 그들은 팽창하기를 원한다. 가톨릭에서는 미사가 끝나면 신부가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한다. 개신교도들은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아파트 단지와 대도시 중심가를 돌아다닌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슬림들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돈, 혹은 반(反)기독교주의를 이용해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부교(富敎)’라고도 불린다. 인도의 힌두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말씀’이 아닌 ‘권력’이 된 종교는 말씀을 빙자한 권리를 주장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전 세계의 자기화를 꾀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보편적 권리가 될 수 없다. 십자군전쟁과 지하드는 같은 투쟁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런 역사는 “흉악한 원혼들이 서로 역사의 잘잘못을 따지며 옥신각신한” 역사와 다르지 않다.


  종교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말씀’에 있지 않다. 세부적 내용은 물론 다르겠으나, 공자와 싯다르타, 예수와 무함마드가 한 말은 차이가 거의 없다. 신을 근거로 들더라도 인, 의, 예, 지, 애 등 우리가 흔히 들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순수한 도덕에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종교의 ‘말씀’이 그들이 강한 이유라면 종교 사이의 충돌과 편차는 있을 수 없다. 종교가 강해진 이유는 그것이 “국가를 휘어잡는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무역’도 있겠다. 개종이든, 배교이든 권력의 확보를 위해 종교의 권위를 순간적으로 상승시켜 이단자들을 사형시키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A라는 나라는 기독교를 전통적으로 믿고, B국가는 이슬람공화국이다. A에서 독재자가 출현해 군부와 언론을 장악해 그 나름의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분명히 나온다. 독재자는 B국가와의 전쟁을 빌미로 강력한 탄압을 실시할 수 있다. 이때, 독재자가 처단할 수 있는 대상은 A국가 내의 비(非)기독교 세력뿐만이 아니다. 죄는 만들 수 있다. 종교가 국가의 옷이 되었을 때, 그것은 권력의 훌륭한 방탄복이 된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이나 서구 등 강대 세력의 지원을 받던 독재가가 그들의 힘을 더 이상 등에 업지 못했을 경우에도 종교는 큰 힘이 되어 준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과 서구의 입장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독재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해당 국가의 종교적 권위가 너무 강해 개입이 용이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먼저 독재자를 처단하거나 상황에 개입한다. 미국은 이런 방법으로 이슬람과의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 중에 있다. 그런 까닭에 아랍혁명에 미국이 개입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혁명에 참여한 국가들의 과도정부가 확고하지 않은 것이 좋다. 미국은 그들의 상처가 깊을수록 이슬람이 크게 분열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 것이 뻔하다. 오히려 미국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지금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행이라고 하긴 뭐하나 유럽발 경제위기가 이란의 강경책 탓에 이미 올랐어야 정상일 배럴당 원유값을 고정시켜주고 있다. 곧 이라크에서 열릴 아랍연합회의에 미국이 어떤 외압을 불어넣을지가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관심사로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세 국가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는 특히 종교로 인한 전통지역사회의 분리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엘리자도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인도네시아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각종 종교의 권위를 인정해 겉으로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완성한 듯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정부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하며 친미 계열로 기울었을 때,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무슬림들이 정부를 외면한 것이다. 결과는 뻔하다. 정부는 권좌유지를 위해 이슬람과 손을 잡았다. 이런 땅에서 기독교를 선교한다는 것은 ‘순교’를 피치 못하게 동반하도록 한다. 그런데 엘리자의 말처럼 종교는 이상한 특징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종교 활동의 수수께끼는 바로 ‘박해 아래서 더욱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pg.231)” 진실로 순수하게 신만을 섬기며 선교하다 순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순교가 전략적 카드로 사용되는 세태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밖에 없다.


  마르쿠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억압받고 짓밟힌 피식민자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기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박민영 著 <이즘> 참고)” 테러리즘의 철학적 근거이다. (인종주의에 대항한 프란츠 파농의 테러리즘이 여기에 기초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그 결과를 우리는 거의 매일 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팽창지향적인 종교에서 순교자는 전략적 ‘선봉군’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선교를 하다 순교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첨예하게 말들은 오가지만 실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있다고 해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충격적 사건이 되는 이곳에서 ‘저곳’의 선교와 순교가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확인하는 일은 아마 나도 그렇고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이에 대해서 그곳 사람들의 말을 들어봄도 좋을 듯하다.


  “주일에만 하느님을 믿을 만큼 정신 상태가 ‘느슨한’ 서양 기독교인과는 달리, 위도 10도에 분포된 신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부인할 여유가 없었다.(pg.233)
  “형편이 넉넉한 삶 속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요?(pg.290)
  “저희는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종교에 크게 의지합니다.(pg.291)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종교가 아닌 전통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종교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사례도 엘리자는 비중 있게 소개한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적인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이다. 그들의 종교와 경제발전이 동반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의 국가목표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의 종교법인 ‘샤리아’를 세속의 영역으로 수용하면서, 한 인물이 했던 말처럼 “이란혁명을 죽이며” 말레이시아 특유의 약진을 이뤄오는 중이다. (이란혁명은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 하에 호메이니가 국가지도자로 등장한 1979년의 민주혁명을 의미한다. 이때 이란은 서구화를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말레이족과는 차별화된 전통을 지닌 소수민족들은 무슬림이 되면 돈을 준다는 여당의 공략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준다는 기독교에 힘을 실어주며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이를 단순한 여야의 구도로 보면 곤란하다.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야당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레이시아 안에 강제적으로 통합되면 부족문화가 사멸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고도로 연결된 시대에 단절로써 문화를 고수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생각이라 비판하는 이도 있겠으나, 그것은 문명적 사고일 뿐이다.


  “가난한 나라의 타락한 대통령”은 필리핀에게도 들어맞는 묘사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인 필리핀은 남부의 무슬림과 그들의 땅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개입으로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다. 디터 젱하스도 그의 <문명 내의 충돌>에서 가난이 종교분쟁의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라고 밝힌 바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는 별로 중요치 않을 수 있는 소규모 원유매장량이 필리핀의 남부를 병들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이 무슬림들의 땅으로 이주를 강행하고 있고, 일부 가톨릭 폭력조직(Ilaga : ‘들쥐’라고 불린다.)은 학살을 일삼는다. 엘리자는 이런 상황을 원유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엘리자는 초지일관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그녀가 평가를 내리는 부분은 종교분쟁의 근본이 목격되는 곳뿐이다. 그곳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미국도, 해당 국가의 정부도 모두 비판을 받는다. 이런 태도 사이사이로 그녀는 종교인들(선교자나 신도)과 분쟁대상자들의 대화를 적나라하게 싣는다. 읽다보면 기가 찬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전후좌우가 종교적 신념으로 막혀 있는 대화이기 때문에 그것의 논리는 철저하게 순환논증 속에서 돌고 돈다. 반대의견은 튕겨져 나가거나 사멸되기를, 혹은 동화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런데 엘리자가 방문한 6개국, 그리고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종교분쟁의 최전선에서는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부국의 종교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갖는다. 생존의 문제이며, 권력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엘리자의 ‘위도 10도’라는 명칭은 종교보다 더 큰 존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석유가 나고, 보다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전쟁이 일어나고, 식민주의의 상처가 씻기지 않은 곳에서 분쟁의 진물이 올라온다.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라는 어린 아이 같은 소감을 한숨과 함께 먼저 내뱉었다. (하지만 내려놓은 <위도 10도> 옆에는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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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힌 바 있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이며, 동시에 자유사상가이고, 종교보다는 과학과 합리, 그리고 도덕철학의 기반을 더욱 신뢰한다. 유일신은 입증되기 전까지 믿지 않고, 지적 태만과 맹종으로부터 발생되는 인류의 모든 문제 앞에 반성코자 한다. 따라서 종교 사이의 종교적 논쟁은 나에게 “어떤 분쟁을 야기하는가?”를 제외하면 큰 의미가 없다. <위도 10도>는 그런 나의 성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우연일까? 나는 방금 저녁때까지만 하더라도 한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영화 <천사와 악마>를 봤다. 여러 번 본 것인데, 볼 때마다 사뭇 느끼는 바가 늘어난다. 영화의 말미에 한 추기경이 극중인물인 로버트 랭던에게 말한다.
  “종교는 흠이 많소. 인간이 흠이 많은 존재이니. 날 비롯해서 세상 모두가.”


  나에게 종교적 진리는 이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흠과 인간의 흠은 분쟁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리 있거나, ‘등잔 밑’에 있는 것이다. 생각의 여유가 없는 곳에서는 종교가 강해진다. 종교는 그곳에서 팽창한다. 이것이 21세기 과학과 지성들의 지적 도전장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종교가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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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3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