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나는 사람
5월이나 6월이었을 것이다. 철학 강의시간에 내 옆자리에는 새내기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청강인데도 열심이었다.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참 많아 보였다. “나는 왜 새내기 때에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폐적으로 글쓰기에만 몰두 하고, 생활은 기형이 되었으며, 결국 안으로 찌부러졌던 날들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참 부러웠다. 그런데 그보다는 사실 그가 철학을 대하는 태도가 더 부러웠다. 지식이라면 나도 있었다. 그가 모르는 것들 중 내가 아주 잘 아는 것도 있으리라. 문제는 그것이 나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가,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가이다. 나에게 있어 지식의 양(量)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으니. 알고 있어도 실천하거나 말로 뱉어내거나, 글로 풀어쓸 줄 모르는 지식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질적으로 제련된 지식은 사람을 고민토록 한다. “알았다.”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그의 고민하는 태도였다. 5년이라는 시간을 물리고 싶은 유치한 욕망이 문득 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처럼 긴장을 유독 많이 하는 성격인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없는 용기가 있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 앞에서도 질문과 의견을 열성적으로 던지는 태도는 그의 “아는 것과 고민한 것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누구든 살아가면서 그런 태도를 가질 때가 있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이다. 아, 그러고 보면 나는 문학을 사랑하긴 했는가? 미술을 사랑하긴 했는가? 아직 못 찾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대학에서 사랑하는 학문을 못 만나는 건 비운이다.
주변을 돌아볼까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면접, 지원서, 기업 초청 오리엔테이션 이야기를 한다. 주변을 바라볼 때, 나의 위치가 비로소 정확해지는데, 나는 어디에도 없다. 순위와 점수, 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말해줘도, 그들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의 위치를 내가 새내기 때 알았더라면 나는 매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부럽기도, 대견스럽기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를 자극하기도 했다. 다음 학기를 두 달 남짓 앞두고 그가 기억나는 이유이다.

미술을 놓고, 책을 읽다.
바닥에 쌓인 책이 많아진 탓에 몇 달 전 부모님께서 새로 장만해주신 고동색 책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다 올 한 해 내가 한 일들과 읽은 책들과 얻은 것들을 나름 헤아려보고자 했다. 무엇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분기점 같은 때가 있었다.
나는 네이버에서 <탕기의 아틀리에>라는 미술 블로그를 몇 년 간 꾸려왔었다. 블로그 이웃은 미술책 저자들, 화가들, 미술애호가들, 모두 나에게 도움을 주신 좋은 분들이었다. 좋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조용히 찾아주는 소중한 그분들이 있었기에 미술공부가 더욱 수월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데, 가끔 나에게는 큰 역사 속 사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부단히 노력해서 길게 포스팅 해온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 몇 권의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다. 포스트 하나 당 A4용지 5~8장 정도는 되니, “이걸 다 언제 정리해?”라며 의욕을 잃을 때마다 그간 공부해온 양을 피부로 직접 느낀다. 쉽게 쓰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있어 어설픈 것들도 많다. 정말 많은 것을 토해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나는 그 블로그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몰래 옮겨왔다. 더 많이 배우고, 글을 연마해 책으로 인사드리겠다고 이웃분들께 약속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술만 공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것에 집중하던 시간을 그간 읽었던 책을 복기하고, 인문학과 여타 학문의 답습에 나눠 쓰기 위해 블로그를 지웠다.
여럿 쌓여 있는 미술책들을 보다가 문득 네이버 블로그를 그만 둔 뒤 갖게 된 해방감이 떠올랐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미술책과 논문, 해외사이트 포스트들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날에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해 포스트를 두 개나 올린 적도 있었고, 다른 날에는 공부는커녕 책도 한 줄 안 읽은 날도 있었다. 뭔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거의 반사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는 이런 변덕이 득이 되기도, 혹은 독이 되기도 한다. 겨울 같다고 할까? 삼한사온 말이다.
용케도 그런 체질로 미술을 꾸물꾸물 지렁이처럼 공부하며, 돌아보건대 적잖은 것을 얻었다. 본래 공부의 목적은 대학교 진학이었다. 준비가 소홀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니, 준비가 소홀한 것은 맞을지 모르겠으나, 미술을 열성적으로 공부한 것은 사실이다. 시험에 미술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으니, 떨어질 수밖에. 좋아하는 화가도 생겼고, 좋아하는 시대도 생겼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서양문화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가면서 나는 공통과 차이에 따른 정신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종교가 공통된 문제로 연상되어 그와 관련된 유익한 계절학기 강의와 책들을 접했고, 지금도 그 관심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거의 공황상태였다. 그 때처럼 나 자신에게 실망한 적도 없었다. 막상 심한 낙담을 겪었을 때에는 “그것도 경험이 된다.”는 조언은 아예 들리지 않는다. 냉철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나는 그 조언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 추운 날이 아니어서 어머니와 함께 장 보고 돌아오는 길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픔이 추억이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추억하느냐가 사람의 앞날을 결정한다고들 한다. 글로 읽거나 말도 듣기만 하면 몸이 알지 못하는 그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오랜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기억한다. 1년 전 그 때, 나는 내가 여태껏 배운 미술의 모든 것이 결국 쓸모없어질 것이라 좌절했었다. 하지만 나는 미술로 말미암아 가지를 뻗어나간 여러 관심들을 통해 여러 책을 읽고, 이따금 미술을 연결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3년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모님의 조언은 적중했다. 나보다 앞서 더 많은 삶의 좌절을 겪어보셨을 부모님의 경험은 나에게 큰 지혜가 다가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즘 어른을 다짜고짜 싫어하려는 많은 아이들이 깨달아야 할 점인데, 삶의 경험을 갖고 있는 연장자의 말은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뒤늦게 깨달으니 몸이 알아간다.
이제 나는 잡식한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읽은 책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사실 집중되는 분야는 따로 있지만 잡식성에다가 책을 얌전하게 읽지 못하는 나의 게걸스러운 습성이 지금은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을 잠시 놓으니, 편식하던 나의 3년을 보상하려는 듯 나는 거의 몰아치기로 (학기 중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많은 책을 읽고, 예전에 읽은 것들을 복기하곤 했다. 더불어 독서의 방향도 정하게 되었다.

소설 읽기는 힘들어
소설 읽기를 유난히 힘겨워했기 때문에, 돌이켜보건대 학교와 집을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얻은 3시간을 쪼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은 그리 선명치 않다.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나 위화의 소설 두 편 <허삼관 매혈기>와 <살아간다는 것>은 재독한 것이고, 처음 읽었을 때에도 워낙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다시 읽는 것인데도 카뮈의 <이방인>,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오웰의 <동물농장>, 쿳시의 <마이클 K>, 레싱의 <다섯째 아이>, 케르테스의 <운명> 같은 책들은 분위기를 빼곤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논픽션을 읽으며 생긴 독서습관이 픽션의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길게, 그리고 자주 접해야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논픽션 책들만 가득 쌓여 있다.
일본의 유명한 한 장서가의 조언처럼 굳이 픽션을 안 읽겠다고 벼른 적은 없다. 언젠가 픽션의 강한 향기에 이끌리게 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고 보니 그 향기를 아주 처음 느껴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회상해보면 내게 그 향기를 처음 전해준 이는 쥐스킨트였다. 고등학생 때, 한 여자친구와 <좀머 씨 이야기>에 대해 열렬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오른다.

2011년, 기억에 남는 책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논픽션 중 내게 가장 신선했던 것은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였다. 현대인들이 공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매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국가성장의 동력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나에게도 잉여의 시간을 어떤 노력으로 채워가야 하는지 귀띔해준 책이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도킨스를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도킨스가 눈에 보이는, 그래서 종교인들에게는 다소 거슬릴 수 있는 공격을 서슴지 않고 감행한다면 세이건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그 점에 있어서는 도킨스도 물론 마찬가지인데) 합리와 논리로써 종교맹신주의자들의 틈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들의 책은 과학을 맹신하려는 사람들이 자위할 목적으로 읽는다든지, 혹은 과학을 더 비중 있게 “이미” 다루고 있는 이들이 조언을 얻을 요량으로 접하는 것 말고도, 아니 그보다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나는 아직 삶의 경험이 적고, 아는 바 역시 적어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양자의 입장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못한다. 종교와 과학을 모두 알면 두 문제를 긴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 교과서적인 말은 지켜지지 않기에 더욱 중요한 시대적 교훈 중 하나이다.
복기한 책 중에서는 <믿음의 엔진>과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가 기억에 남는다. 리뷰로 올리진 않았지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KBS 다큐멘터리 <마음>의 책 버전도 읽기를 권한다. 맹종보다는 이해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런 부류의 책들이 내리는 결론은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믿음을 변형, 혹은 왜곡시킨다.”나 “인간은 쉬운 것을 좋아하려는 경향이 있다.”라든지, 혹은 “그것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와 같은 것들이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뒤늦게 지각하게 되는” 습성을 극복할 첫 번째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합하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해괴한 일들”의 원인도 알게 되고, 그것들에 대한 보다 넓은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창조와 관련된 좋은 책들도 올 한 해에는 많이 접했다. 본래 미술공부를 위해 구입한 것이지만 나 역시 창조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기에 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왔던 <창조자들>이나 <생각의 탄생>, 리뷰하진 않았지만 <신이 내린 광기>, 그리고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나 <위험한 생각들>과 같은 책들이 이해의 폭을 넓혀줬다. 또한 창조가 교육과 닿아 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를 리뷰하면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비판해보는 시간도 나 스스로는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교육자 집안이라 유독 그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인데, 이따금 언론들의 논설을 읽다보면 ‘인권’이라는 문제와 ‘교육’이라는 문제의 융합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연말에 가까워져 잡스의 사망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리가 창조와 관련해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 것도 나에게는 많은 영향을 줬다.
리뷰로 올리진 않은, 사실 리뷰로 올리기도 힘든 책으로 내가 깨달음을 가장 많이 얻은 책은 박민영氏의 <즐거움의 가치사전>이었다. 이 책은 챕터별로 나눠 읽어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내용이 좋기에 여러 곳에서 추천도서로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는데, 나는 이 책을 이라는 그의 또 다른 책의 뒷날개를 보고 샀다. 어려운 것을 소화하여 재정리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그는 대단히 뛰어난 저자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한 책들 사이에 꽂아놓으면 절로 빛나는 책. 그런 것을 쓰기란, 문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나에게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읽힌 책이었다.

좋은 다큐멘터리 보고 생각하기
책과 영상은 다르다. 영상은 시각에 민감한 우리에게 훨씬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책은 연상을 해야 하고, 쉴 새 없이 복기해야 한다. 더 깊은 사고가 가능하게 독서를 이따금 정지하기도 하는데, 이른바 pause라 불리는 그 시간들은 독서가 가진 가장 뛰어난 기능 중 하나이다. 영상은 쏟아진다. 따라서 대부분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흥미를 갖게 하는 점에서는 독서보다 훨씬 유리할 수 있다. 다행이도 나는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책을 두루 좋아하기에 잡식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 듯하다.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라.”라며 문자만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책은 싫다.”며 영상에만 빠지는 사람들의 외골수적 경향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둘 다 좋지 않은가.
물론 영상도 영상 나름이다. 소위 fresh한 마음 상태를 만들기 위해, 혹은 웃음을 통해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찾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버라이어티 이상의 기능을 하기 힘들다. 그것도 적당히 즐기면 좋은데, 중독되면 문제이다. <많아지면 달라진다.>에서 셔키가 지적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시간들은, 심하게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셔키가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인터넷 온라인 게임을 하라고. 그 정도로 그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재미’라는 개념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다큐멘터리의 재미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누리는 재미가 어디 그것 한 가지 뿐이던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쾌락을 유발하는 정도의 재미는 반복적으로 체득하기 아주 용이한 중독성을 갖는다. 그리고 얻기도 쉽다. 그런데 의외로 지적 쾌락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은 영역에 있다. 단,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이 ‘다른 추구’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수준급 다큐멘터리들이 다수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 제작담당자들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BBC의 기준에 비춰보면 해외로 수출할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차마고도> 이후 그런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와 다양한 분야의 쉽고 간편한 이해를 돕는 오밀조밀한 양질의 다큐멘터리들은 거의 매주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를 지니고 있다.
지식에서 있어서 호기심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알고자 하지 않으면 결국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오랜 생각인데, 다큐멘터리는 우리를 학문의 문 앞까지 데려다놓을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길잡이이다. 그래서 나는 미술을 공부할 때,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에서 나아가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자 꿈을 꾸기도 했었다. 이미지와 음향으로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좋은 강의를 듣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강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만든 것이기에 완성도는 더 높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내레이션으로 그곳의 풍물과 전경을 설명하는 저예산 다큐멘터리부터 시작해서 수학의 비밀을 여러 부작으로 나눠 설명하는 전문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와 같은 다국적 방송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스케일 큰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근래 들어 대부분의 것들은 세련된 형태로 제작되고 있다. 서구의 다큐멘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에 이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나라의 교육적 병폐들도 상당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한다. 수준에 맞게끔 공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영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널리 실행되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그걸 보고자 할까, 이렇게 물어놓고 즉각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도 장애물 중 하나이다.
다큐멘터리는 중립성이 강하다. 책보다도 훨씬 강하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하여 양자의 의견을 모두 사례로 드는 경우에는 웬만한 칼럼보다도 탄탄하다. 무엇보다도 “직접 보여준다.”는 이점이 있다. 다큐멘터리 한 편만 봐도 다음 한 주를 그것과 관련된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보는데 할애할 수 있다. 피드백을 활용하는 노력만 보인다면 그 어떤 수업보다도 유익하다. 권위에 기대어, 혹은 경제적 성공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며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인간의 생리라고는 하지만 학문 앞에서는 적어도 아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순수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마치며
몇 시간이 지나면 지구는 이제 자신이 작년에 운행했던 그 노선을 얼추 비슷하게 따라가며 태양을 한 바퀴 더 돌기 시작할 것이다. 내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물리적으로 얼마나 다를까? 제인 구달의 책에 나오는 침팬지들에게도 송년의 아쉬움과 새해맞이의 설렘이 있을까? 왜 유독 인간만 시간 앞에서 청승을 떨까? 보신각 타종과 함께 폭죽이 터질 것이고,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인사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의식이 아주 중요하다. 자정까지 깨어 있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내년이 그렇게 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 하얗게 질려버리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바로 ‘다짐’이라는 것이다.
나의 다짐은 별 것 없다. 조금 더 바르게, 조금 더 열심히 사는 것이다. 지금 하는 것들에 약간의 속도가 더 붙었으면 하는 작은 욕심도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가, 지금의 나에게는 세세한 것에까지 욕심의 약물을 투여하지 말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알려준다. 뭉뚱그린, 보편적인, 아니 실현될 수 없는 큰 목표를 그렇게 잡아놓고 길잡이로 만든다. 틱낫한 스님이 그러셨다. 달에 가기를 바라고 걸어도 달에는 갈 수 없으나, 그만큼 멀리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내가 가진 용량에 수긍하며, 그 용량만큼만 일하는 것도 실은 힘드니, 욕심은 적을수록 좋겠다. 그래도 독서에는 욕심이 많이 생긴다. 아, “이 종이들을 더 많이 넘겼으면” 하는 바람은 도무지 떨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막 바람이 하나 생겼다. 보름달은 아니겠지만 오늘 밤하늘에 빌면 혹시 들어줄까? 책값 좀 싸게 해달라고.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