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30
젱하스는 헌팅턴의 실책을 두 가지로 나눠본다. 거시적 차원의 실책은 우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교 문화의 축을 중국과 북한으로 보고, 이슬람 문화의 축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알제리 등으로 보는 그의 시선은 두 문화를 굳이 대비하려는 서구적 편견에서 비롯된, 보편화의 오류를 범한 통찰이다. 보편화의 오류는 우리에게는 일상과도 같다. 일부 여성들의 사치를 보도한 인터넷의 선정적인 기사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논리를 갖고 있다. 보수적 남성들은 이런 기사들을 접한 뒤 “모든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라고 거의 결론짓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어떤 정보를 흡수할 때, 우리는 의외로 편견과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이는 저명한 학계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다. 특히 문화 간 비교를 필요로 하는 학문인 경우에 그러하다. 종교도 대표적인 예이다. 문명을 논하는 젱하스가 이 책의 대부분을 종교에 대한 면밀한 분석으로 채운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보편화의 오류는 대부분 상대방에 대해 거의 모를 때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일부만 보고 그것을 전체인 듯 여기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말일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해 거듭 언급하진 않겠다.
‘문명의 충돌’을 테제로 놓고 봤을 때, 헌팅턴이 위와 같은 오류를 범한 까닭은, 젱하스가 지적한 것처럼 정치적인 현상 때문이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이에 포함된다 하겠다. 저들이 서구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때론 문화를 무시한 경향을 목격하곤 한다. 문화적 가치가 시대에 따라 잘못 발현(여기서 “잘못”이란 후대의 평가이다.)되는 까닭의 대부분은 정치와 경제 때문임을 우리가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다. 헌팅턴처럼 북한을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축으로 본다면 북한과 중국 사이의 문화 차이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체제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체제는 깊이 내재되어 있는 문화정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하게 하는 일종의 감시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화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 흔히 당연하다 여겨왔던 그 시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받게 된다. 이에 젱하스가 말한다. “모든 방면에서 문화주의적 논지를 가져오는 첩경”은 다름 아닌 문화 분석의 부족이라고 말이다.
두 번째 오류는 미시적 차원에서 일어났는데, 여기서 ‘미시(微示)’란 큰 문화가 작은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 차원의 오류는 위의 것만큼이나 자명하다. 젱하스는 소수민족의 문제를 예로 든다. 소수민족은 거대한 중앙정치집단으로 구성된 세력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기에 그런 명칭으로 불린다. 그런데 전 세계가 근대화의 조류에 휩쓸리고, 그 흐름을 소수민족들 역시 경험하다보니 그들의 요구수준이 높아졌다. 이윽고 독립의 문제가 온갖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 문제와 부딪히며 전 세계에 보도될 정도의 핫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헌팅턴은 이 과정 내에 문화적 요인들이 있음을 지적했고, 젱하스도 그것은 옳다고 본다. 하지만 젱하스는 헌팅턴과는 달리 문화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가 부각되고 진행되는, 이른바 ‘갈등의 단계’에서 문화는 종속적 위치에 머문다. 후대가 평가하기를, 다만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가 제 몫을 했노라고 술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화를 유기체로 보는 시각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문화가 갈등보다 덜 역동적이라는 것은 자명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갈등이란, 젱하스는 ‘단절선’이라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구조적으로 형성된 체계적 차별과 특권의 형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이다. 문화가 정치적 슬로건으로 변질된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이해는 헌팅턴의 것보다 더 세련되게 다가온다.
헌팅턴도 <문명의 충돌>에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의 분석보다는 결론 부분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훨씬 많이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문명의 충돌>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정도의 좋은 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갈등과 충돌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결론을 뒷받침할만한 긍정적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풀어 말해보면 이렇다.
헌팅턴은 젱하스가 상기 언급한 두 가지 문제, 즉 거시와 미시의 문제를 거론하고서도 결론에 이르러서는 “비간섭과 방관의 원칙”, 그리고 “공동 중재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쉽게 말해 서구적 가치를 비서구에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재는 있어야 하기에 서구적 가치보다 더 도덕적일 수 있는 도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얇은 도덕’이다. 이는 ‘긴밀한 도덕’의 반대개념이다. ‘긴밀한 도덕’은, 가령 국가 간의 1:1 갈등 상황(혹은 다자간도 괜찮다.)에서 서로의 도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오히려 도덕 사이에서 갈등만 야기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사이의 도덕이 상황마다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 규모가 커지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얇은 도덕’이다. 이해하기 쉽게 풀자면 “뜬구름 같은 도덕”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런 도덕에 기초하여,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의 ‘세계윤리’와 같은 것이 정립될 수도 있다. ‘얇은 도덕’은 야만적인 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 문명적인 것이다. 이 문명은 오랜 역사의 고통을 대가로 치러 ‘얇은 도덕’을 만들어냈기에 그것이 반드시 서구적이라는 편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의 주장은 헌팅턴의 책에서 독자들이 반드시 체득해야 하는 정보였으나, 헌팅턴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의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문화적 비교만을 펼쳤고, 젱하스는 그것을 “옳은 결론을 이끌어낸 잘못된 분석”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젱하스는 과연 어떤 ‘방법’을 우리에게 내놓을 수 있을까? 다음 장에서 그는 <문명의 충돌>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내놓겠다고 선언한다.
8장의 시작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잠시 독서하기를 멈추고, “이런 말은 수전 손택 정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허공에 질문을 했는데, 흔히 종교 간 차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냉철한 판단으로 무장한 학자들처럼 젱하스 역시 깊은 혜안을 갖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는 미국이 유럽적 가치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던 오래 전의 ‘연방 정신’을 인용문으로 언급하며 그 ‘미국’을 ‘이슬람’으로 바꿔 표현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패러디도 이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데, 사실 이는 문화 갈등과 종교 갈등 사이의 무의미한 구분을 꼬집는 젱하스의 비판인 것이었다.
유럽이 구세계가 되고, 막 신세계로 떠오른 미국은 그들의 가치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었다. 나는 미술을 공부했으므로 그것을 예로 들어보건대, 20세기 초반에 들어 뉴욕이 세계미술시장의 중심이 된 것도, 잭슨 폴록이 미국 최초의 “월드 아티스트”가 된 것도 다 이와 같은 노력 때문이었고, 그 부단함은 이따금 파격을 만나며 21세기를 대비한 새로운 정신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워홀, 로스코, 라우셴버그 등의 스타급 작가들뿐만 아니라, 마크 트웨인, 마이클 잭슨, 할리우드, 오프라 윈프리, <아메리칸 아이돌>, 디즈니, 픽사,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스티브 잡스 등이 바로 20세기를 선도한 문화코드임은 우리가 직접 체험해서 잘 알고 있다.
항간의 말마따나 20세기는 진정한 미국의 시대였다. 그들이 보잘 것 없는 나라 중 하나로 취급되었을 때, 그들의 “방어 자세, 반헤게모니적 정신, 혹은 저항적 태도” 등은 매우 포괄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이다. 따라서 젱하스는 단호하게 말했을 때, “문화는 곧 정치적 문화이다.”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메리카가 언제부터인가 별로 행복하지 않은 신세계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점에 올랐을 때, 그들은 오히려 저항 받는 이들이 되었다. 오늘날 그들을 비난하는, 괄시하는, 혹은 (실제로 일상에서 그럴 수는 없겠지만) 거의 무시하려는 경향이 주류인 까닭이다. 요컨대 우리는 대부분 반(反)미국적 가치로부터 대안을 찾으려는 중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미국은 굉장히 성공한 경우이다. 역사상 그들의 독립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성공적이었다.
아프리카는 어떨까? 혹은 남미와 아시아도 좋은 예이다. 최근 읽기 시작한 엘리자 그리즈월드의 <위도 10도>라든지,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해서 읽은 소설인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보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원인은 비정상적인 독립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사실상 아프리카 권력의 대부분을 지닌 나라이다. 인구도 많고, 유전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외부의 세력이 개입하여 갈등을 조장하거나 중재함으로써 그들의 이득을 취하기 안성맞춤인 나라이다. 남부의 기독교와 북부의 이슬람교의 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글이나 위키피디아에서 그들의 싸움을 검색해본다면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불완전한 민주주의(1999년 군사독재 이후 설립된 민주주의 정부는 거의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아적 수준과 비견된다 하겠다.)는 그 어떤 종교적 중재도 해내지 못했고, 더 나아가 자생 경제발전의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다. 개인의 정체성이 종교로써 성립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문제는 집단에 있다. 집단의 정체성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졌을 때, 정부는 통제력을 거의 잃는다. 반면, 미국은 경제발전과 종교중재를 훌륭하게 해내면서 현대판 제국의 힘을 얻었다.
이번에는 동구이다. 그들은 서구와는 달랐고, 아프리카와도 물론 달랐다. 아프리카가 어느 정도 서구식 개발을 모토로 삼았다가 처절한 실패를 맛봐오는 중인 것과는 다르게 동구는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를 통해 갈등을 애당초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오로지 그것을 억압으로써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북한도 한창 그런 중이다. 문제는 실존사회주의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을 때부터 일어났는데, 그들이 택한 노선은 자연스럽게 반제국주의적인 저항정신이었다. 명목상 그들의 적(敵)은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은 “무장한 서구”의 대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단, 미국이 그들의 대변인이 아닌 ‘최강자’임을 자처했기에 동구의 국가들은 한사코 그들의 간섭을 용납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실존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자명하다. 문화가 복합적으로 양성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나마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 갈등 없는 사회.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만은 사실 그보다는 지금 우리의 사회, 즉 근대화의 추진력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 “괴기스럽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종속되고, 다른 누군가는 지배한다. 종속과 지배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번진다.
이런 세계의 조류에 대응하기 위한 일차적인 움직임은 아무래도 민족주의이다. 최근 들어 광신적 근본주의가 극우주의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고, 히틀러의 주장과 일부 종교의 선민사상이 대단히 매력적인 시대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가볍게 듣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지금 독일 사람들은 극우파가 정당을 서서히 장악해가는 과정을 목도하고 있고, 일본은 군비 경쟁에 다시 뛰어들기 위해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는 무기를 수출하지 않았던 과거의 법을 유연하게 만들고 있으며, 대부분의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위도 10도’에서는 여전히 테러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정일 위원장 사망 시 위로를 하려는 일부 사람들과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을 기억하자는 격렬한 반북주의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터넷 총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력이 이상한 방향으로 낭비된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룩하면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의 살아 있는 전설로 회자되는 동방사룡(東方四龍) 중 하나인 우리나라는 그나마 극단적 사건을 몸소 체험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이를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매우 안이한 태도이다.
상기 언급한 위의 모든 문제들을 ‘문화’라는 차원에서 취급한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갈등을 문화를 중심으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젱하스의 구절을 하나 인용하는 것이 빠른 이해를 도울 수 있을듯하다.
“문화 갈등은 또한 동원될 수 있는 권력의 원천이 빈곤한 상태에서 언어, 종교, 그리고 역사가 억지로 동원되고 도구화되어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경우, 문화를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문화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권력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 문화적 원천을 해석하는 것은 문구 해석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욕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문화가 ‘우리’에게 유입되어 온갖 문제를 야기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일견 부당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젱하스의 서구문화 두둔이 아니다. (이 책은 도저히 그렇게 읽히지도 않는다!) 탈식민지 역사를 겪은 거의 모든 나라들의 역사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서구가 근대화를 겪은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순전히 서구를 “도구”로써 사용했을 뿐이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서구식’으로 변해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서구에서는 위계질서에 따른 서열의 병폐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윗사람’이라고 하면 ‘아랫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만큼의 권력이 주어진 의미의 언어로 용인된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온갖 정치적 비리들이 서구에서 온 것일까? 호남과 영남의 지역주의도? 박노자, 진중권, 강준만, 유시민 등이 우리나라를 뒤집는 발언으로 끄집어낸 병폐들이 모두 서구에서 온 것일까? “그렇다.”며 자랑스럽게 자위(自慰)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더 넓게 봤을 때,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에도 해당된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회자하곤 하는 “이슬람”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테러와 학살, 착취 등으로 문제를 만들 뿐이지,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꾸란>에 적혀 있는 문구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크게 확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발언을 하는 이들을 골라 편집해 보도하는 대다수의 방송사들은 그들의 서구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방영을 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이슬람은 문제될 때만 언급된다. 그들이 메카에서 위대한 종교행사를 연다거나, 자선축구경기를 열어도 보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슬람 내부에도 수많은 종파들이 존재한다. 터키에서는 수피 교도들이 신비한 춤을 추지만 이라크에서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후세인’이라는 이름이 교파를 이유로 엄청난 학살을 벌여 결국 미국으로부터 ‘축출’당했다.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화 바람 때문에 세계의 봄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 표현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기반, 제도적 장치 없이, 아마 그들이 만들려고는 할 것이지만 결코 달성하기 힘들 그런 것들의 도움 없이 탈식민주의의 노선을 밟았던 상기 아프리카, 아시아, 혹은 동구의 퇴보한 민주주의를 경험할 것이라는 예측은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젱하스의 구절들을 읽으며 우리가 직접 들어왔던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확장 해석할 수 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꾸준히, 그가 서문에서부터 주장했던 것처럼 헌팅턴의 테제를 반박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서구를 문화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오늘날 전 세계적인 세태 역시 ‘서구’라는 문화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무지로부터 출발한, 창피한 역사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견지이다. 여기에는 큰 지혜가 존재한다. 문화를 가장한 권력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화된 문화 갈등’의 원인을 지목다면 우리는 무지몽매한 간에 타인을 보편화시켜 쓸데없는 싸움을 일으키려고 않을 것이다. 현실은 권력이 움직인다.
‘문화’란 없다. 오로지 충돌을 조장하는 권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 낯선 시각에 익숙해져야 우리는 비로소 전 세계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 젱하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할 어떤 가치에 대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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