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8

 

  이번 달은 거의 내내 창작의 구상에 빠져 있었기에, 이틀에 한 권 정도 읽던 독서가 뜸했다. 채우는 것과 덜어내는 것은 다르다. 조금이나마 시상의 고통에 빠져봤거나, 말도 안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지어내본 사람이라면 그 필연적 차이를 알 것이다. 일기도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둘은 매우 긴밀하다. 따라서 쓰고자 하는 이는 읽어야 하고, 읽은 이는 써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가?"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놓고 스스로 그 능력을 소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듯하다. 이 주제의 책은 매우 다양한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명작가가 돈을 벌고 싶으면 자신의 작문 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내기만 해도 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어 봤자, 독서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책을 많이 읽어라."라는 말은 집과 학교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듣는 훈계이다. 그 훈계를, 뭔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고자 1만원은 족히 될 "뻔한" 교양서 하나 사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이 세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의 책을 사서 읽으면 자연스럽게 하고픈 말이 생기고, 그것을 부단히 쏟아내며 타인과 비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장이 견고해지는 것인데, 글을 생각이 아닌 표현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좋다. 온갖 생각의 낙서를 해가며 한 챕터만 읽어놓고 그것에 대해 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튼튼한 주장과 넓은 사고를 만들어준다. 독서는 30분만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생각은 3시간이든, 3일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발췌본이 읽어도 좋다. 그리고 요즘은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독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말로 끄는 수레 세 개를 채울 정도로 책을 읽었다는 옛 현인들의 오래된 조언을 무시하란 것은 아니다. 많이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노력한다는 뜻이다. 새삼 하는 말이나, 독서는 단순한 책과의 조우가 아니지 않은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방법은 많다. 권위 높은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괜히 자신의 사고와 리듬을, 돈을 들여 바꾸는 것보다는 나 자신의 성향을 충분히 알고 책을 접하는 노력이 현명한 방법이다. 따라서 책 읽는 법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양심 있는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독서의 왕도를 두리뭉실하게 권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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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부터 내달, 아니 내년의 달력 첫 장까지 읽을 책들을 주문해놨다. 성탄절 전날에 주문했는데, 배송에 혼선이 있어 오늘에야 왔다. 많은 탐서가들이 그렇겠지만 겨울날 배송된 새 책을 받아들었을 때 느껴지는 표면의 한기는 나의 마음을 항상 설레게 한다. 미술을 조금 공부했다는 이유로 책의 표지 디자인을 한껏 음미하기도 하는데, 근래 표지가 독창적이지 않은 책은 거들떠 보이도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모르겠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다 가끔 오래된 것 같은, 별 눈요깃거리도 안 되는, 고리타분할 것 같은 표지의 책을 우연히 펼쳤을 때, 예상 외의 놀라운 이야기와 사려 깊은 저자의 마음을 읽게 된다면 그 순간 느껴지는 환희는 가히 탐험가가 미지의 섬 동굴에서 보물창고를 발견했을 때와 비견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서울의 큰 서점들을 다닐 때면 한 번 즈음은 구석진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보기도 하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평점이 매겨져 있지 않은,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책을 간략한 개괄이나마 훑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책이 여덟 권이다. 새벽을 틈타 그 서문들을 읽은 뒤에 정리한다.

 

 

 

 

 

 

 

 

 

 

 

 

 

 

 

 

 

 

 

 

 

 

 

 

 

 

 

 

 

  '그늘진 정신'이라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흔히 양지라고 부르지는 않는, 고독과 권태, 멜랑콜리 같은 정신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피터 투이의 <권태>와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를 주문했고,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유로 산 책이다. 틸 뢰네베르크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과 윌리엄 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는 이번 달 초에 흥미 있게 읽었던 <많아지면 달라진다>와 이어지는 책들이 될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연결과 시간"의 새로운 개념이 어떤 운동성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건 비단 견지가 부족한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은 얼마간 버트랜드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와 더불어 읽을 것 같다. (순수하지만은 않은, 혹은 순수할 수 없는) 대중운동을 다소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습관은 이현우氏가 간략하게 소개해준 지젝의 발언을 접한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호퍼의 '맹신자'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 그리즈월드의 <위도 10도>는 평소 종교전쟁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주저 없이 고르게 된 책이다. 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쟁을 다뤘지만 이 두 종교의 분쟁만 다루더라도 (내가 지난 계절학기에 들은 종교분쟁관련 강의에 따르자면) 전 세계의 종교분쟁 8할은 진단할 수 있다. 잠깐 읽어본 서문과 나이지리아 관련 첫 챕터에서부터 이미 빠져 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이미 고전이라 들었다. 환자의 병을 '병력'이 아닌 환자 개인의 역사로 다루는 올리버의 글에서는 높은 통찰력과 사려가 느껴진다. 따뜻한 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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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9 0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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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0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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