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2011.12.20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하루에 거의 한 편씩 시를 쓰곤 했다. 나는 시와 애증관계에 있었고, 그것은 나의 계륵이었다. 방문을 닫고 얼마간은 소설만 쓴 적도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차츰 알게 되었다. 가끔 작가들 앞이라면 부끄러웠을 정도의 저자세로 작품을 대하고, 미술을 “배운다.”는 취지로 각종 지식을 섭렵하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나는 늘 예술을 접하고 있었다. 세상에 공개되어 오랜 시간의 공격, 수많은 눈들의 검열을 거쳤으나 지금껏 명작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은, 혹은 막 그런 위치에 오르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용기의 산물이었다. 나에게 재능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명들의 인정을 안 받아본 것도 아니고, 이름은 낮으나 공식적 자리에서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조차 자만할 수 없었다. 늘 굶주려 있었거나, 아니면 더 솔직하게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리라. 사춘기의 얄팍한 고민에서부터 아직 접해보지 않은 철학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시를 통해 성찰하고자 했고, 그로 인해 분명 보이지 않는 장애를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간 달성한 것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날 일기에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겠다.”며 작정하고, 창작의 어려움에 대한 잇단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시로부터 밀어낸 것은 요컨대 부족한 사랑과 형편없는 집중 때문이었다. 용기가 있었다면 시를 더 사랑했을 수도, 시에 훨씬 더 깊게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용기는 재능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용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재능의 텃밭에선 작물이 두터운 땅을 뚫고 나올 수 없다. 나에게는 잡초만 무성했던 것이다. 잡초를 뽑고 난 뒤 공부한 것이 미술이었고. 그러나 밭의 주인이 해마다 준비해뒀던 옛 씨앗들을 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이따금 시를 읽을라치면 먼저 작가의 뛰어남에 혀를 내두르고, 나중에는 “왜 용기의 비는 내리지 않았던가?”며 후회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비를 내려달라 소리쳐 애원한 적이 있기는 했는가? 결국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착실한 독자보다는 더 참여적이긴 해도 예비문학도의 발치에는 가지 못하는 정도라고, 나는 몇 해 전 끈을 묶었다. 그래놓고 남은 미련이 나를 시의 더욱 은밀하고도 가까운 독자로 만들어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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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단락들은 폴 존슨이 쓴 <창조자들>의 서문을 다 읽고, 막 초서를 읽으려던 참에 적은 것이다. 굳이 리뷰를 위해 정리한 생각은 아니지만 써놓고 보니 서문이 됐다. 어떤 독서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장(場)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경향이 뚜렷한 듯하다. 실력을 갖춘 누가 봤다면 괄시했을법한, 그래도 시를 꿈꾸던 나의 옛 경험이 <창조자들>을 읽는데 상상 외의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미경험자가 아니기에 폴이 그의 책에 적어놓은 문학, 미술, 혹은 음악 관련 개념어들과 창조에 관한 관념어들이 살에 달라붙듯 다가왔고, 나 스스로 “나는 저들 중 누구와 가장 가까운 성향이었을까?”를 물어놓고 답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독서할 수 있었다. 그들과 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겠거니와 숱한 독자들의 비근한 오류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꿈꾸던 것에 대한 향수를 대신하여 자기평가를 했던 것이니, 이런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쾌락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핑계를 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깊게 따졌을 때, 나는 이들과 견줄 구색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폴이 소개한 인물들 중 나는 미술을 공부한다는 까닭에 뒤러, 터너, 그리고 피카소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평 중 처음 듣는 것을 제외하자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어 다소 실망했고, 오히려 나의 관심은 문인들에게 있었다. 요컨대, 나는 문학도의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문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아주 안 읽은 것은 아니다. 다만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인생의 대종(大鐘)을 울릴 정도로 큰 영향을 준 작가가 없었다. 몇몇이 기억날 뿐이었다. 시를 외우려는 열정도 없었기에 나는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의 절절하면서도 한국미 넘치는 그 구절들조차 암기한 것이 하나 없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유종호氏가 일러준 대로 좋은 글을 쓰고자 하면 짤막하게나마 동시(童詩) 정도는 암송해서 좋은 리듬감을 갖춰야 한다는데, 나는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게을리 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소설의 기억나는 구절을 대라고 하면 외지 못하나, 그래도 나이폴, 위화, 솔제니친 등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이래저래 변명거리를 찾아봤자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 스스로를 문외한이라 불러도 어울리는 표현이다.


  사실 초서, 셰익스피어, 엘리엇, 트웨인 등 영어문학의 최고봉들이라 평가받는 거인들의 원어(原語)본을 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지라, 폴이 그들을 평하거나 인용한 부분의 역자 번역 구절을 읽어도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없었다. 받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카라바조에게 감명해서 그의 작품 중 그가 몰타에서 그린 <세례요한의 참수>를, 누구 못지않은 열정으로 소개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 그림을 보지 않은 이에게, 그리고 카라바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이에게 그 감동이 전해지겠는가. 초서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로부터 기법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 부분에서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라틴어를 배워야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가 방언을 포함해서 약 24,000여개의 단어와 표현을 만들었다는데, 나는 그 수에 혀를 내두를 정도에 족하면 될까? 아니면 그것들을 다 찾아봐야 할까? 또한 그는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지녀 그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넣었다고 하는데, 영시를 접한 적이 거의 없고, 더군다나 영시를 읽을 정도의 언어능력도 안 되는 내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할까? 그것들을 나의 경험과 비교하여 유추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읽는 이들은, 아마 나와 대부분 같은 처지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폴이 열거한 사례들을 하나의 거대한 그릇에 담은 뒤 그것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혹시 모른다. 누군가는 바흐에 정통한 이라, 폴이 말하는 모든 정보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할지. 혹은 다른 누군가는, 예컨대 퓨진에 대해 잘 알고, 건축을 해본 경험도 있어 무릎을 치며 뿌듯해할지. 하지만 대개 우리는 영문학애호가임과 동시에 미술애호가, 거기에다 패션의 역사와 감각을 꿰뚫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을 아주 좋아하고, 더불어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는 동시에 악기를 아주 잘 다뤄 음악을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여기에다 일본 회화사까지 정통한, 소위 말하는 전인(全人)이 아니다. 세세한 정보들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면 앞 문단에서 내가 말한 온갖 불이해(不理解)의 좌절을 겪게 된다. 나는 엘리엇과 제인 오스틴에 대해 잘 모르는 까닭에 대학 논문 몇 편(우리나라에는 엘리엇학회가 있다.)을 찾아 읽었는데 오히려 두 번째 불이해의 공격을 허용했다. 도움이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나, 폴의 의도로부터 더 멀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창조자들이란 어떤 이들이란 말일까? 폴은, 요컨대 그들이 뭘 썼고, 그렸으며, 만들었는지는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도 있고, 반대로 차이점도 찾아낼 수 있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척 힘들겠지만 폴은 이들의 헌신, 미침, 용기, 고독 등을 말한다. 위고처럼 워낙 탐욕적이었던 이도 있고, 트웨인처럼 탐욕을 인정하며 그보다는 웃음을 더욱 추구한 ‘쇼맨’도 있고, 엘리엇처럼 욕망을 억제하면서 은밀하게 작품 속에 드러내는, 하지만 일상은 거의 청교도와 같았던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으며, 그런 헌신적 창조의 밑바탕에는 그것을 가능케 할 정도의 방대한 지식이 들어가 있었다. 뭘 배우든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고, 선택한 배움은 늘 도움을 줬다. 엘리엇은 엄청난 독서량과 학습능력, 그리고 문학에 대한 집중으로 그 방면에 있어서는 가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구사한 단어들 중 일부 외설적인 것들은 그가 젊었을 때에 (아이러니하지만) 푹 빠져 있었던 보들레르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그의 보수적인 삶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반면, 셰익스피어와 초서는 글쓰기와 단어에 도취돼서 명예를 얻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저속한 단어들을 엄청나게 쏟아내곤 했다. 이는 모두 삶의 유희를 높게 평가하고, 한편으로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트웨인은 어떠했는가? 그의 매력적인 재담은 그를 미국의 서부개척이 낳은 ‘근대의 호메로스’로 만들어줬다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의 기반은 이야기꾼들 사이에서 겪은 그의 경험이었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독자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체득한 탁월함이었다. 트웨인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톨킨에 비춰 보자면 톨킨이 <호빗>을 통해 펼쳐놓았던 빌보와 드워프들, 베오른, 그리고 골룸 사이에 오고 간 “나름 재미있는” 대화들은 트웨인의 발치에도 못 미칠 정도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은 퍽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트웨인은 톨킨과 같은 일은 하지 못했다.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집중적으로 투자한 전무후무한 일은 그의 시대 이후 환상소설가들에게 “뭘 해도 톨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을 겪게 만들지 않았던가. 다시금 그가 조명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트웨인보다는 톨킨의 위력이 더욱 가시화되기도 하는 중이다. 하지만 트웨인의 글이 분명 더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맞다. 어쩌면 폴의 표현처럼 “너저분하거나 어설프거나”, 그렇지만 오로지 재미있는 것들이 말 그대로 독자들에게 훨씬 재미있게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웨인이 삼류의 저속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 정정해서, 최고의 대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대단한 일인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다양하다.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접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톨킨을 읽으면 그의 세계로 ‘점프’하게 되고, 롤링을 읽으면 어느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혹시 저 변기가 마법부로 통하는 비밀의 길이 아닌지 실제로 의심하게 되며, 위화를 읽으면 뿌리 깊은 인간애를 느낀다. 그리고 모든 대작들은 읽는 중에 재미있고, 읽은 후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개인에게 가까운 주제라면 더욱 기억에 남게 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심지어 신체도 바꿔놓는다! 작가의 순수한 동기가, 혹은 탐욕적 동기라도 좋은데, 어쨌든 창조의 항로를 거쳐 독자의 부두에 정박하고, 결국 길고 짧은 문장, 밝고 어두운 색채, 높고 낮은 음 등으로 수입되면, 비근한 비유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거대한 삶의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열렬한 독자에게는 자신이 왜 그토록 예술에 몰두하는지에 대한 비밀을, 반대로 예비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이 예술을 하려는 철학과 동기를 재점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창조의 비밀 중 하나가 용기라는데, 그런 비밀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을 것만 같은 우리의 삶에, 대관절 용기는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서문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가장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장애가 오히려 엄청난 용기와 의지력을 일깨웠다. 혐오와 자기 비하의 삶은 최고의 창작품을 무수히 쏟아 내면서 새롭게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프랑스 화가 툴루즈-로트렉와 관련된 평 중 일부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그 못지않은, 스스로 돌이켜봤을 때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과 같은, 하지만 남이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산을 넘기 위한 방법이 하나밖에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마 우리가 기억하는 “내 생애 첫 번째 대성통곡 때에 부모님께서 해주신 말”이라든지, 교과서에서 본 “교과서적인 삶”의 비밀과 관련해서, 혹은 그 외의 숱한 경험들로 말이다. 그것은 용기이다. 베토벤, 미켈란젤로,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삶을 긍정으로 보든, 총체적인 멜랑콜리로 보든 그것은 큰 상관이 없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드느냐에 있다. 그리하여 용기가 생기고, 그 순수한 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끄는가가 문제이다. 대단히 지루한 말일 수도, 그리고 별 차이가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는 크다. 폴이 말한다.
  “창조는 즐겁기보다는 인내해야 하는 괴롭고 혹독한 경험이며, 차라리 창조자가 아니길 바라는 때도 많다는 게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에너지는 소비된다. 이와 같은 예술가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때론 그들 못지않은 엄청난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에너지로 만든 용기가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폴은 그들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한다. 이 부사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의 삶과 비교하여 얼마간 읽은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를 복기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에 에너지를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엘리엇의 회고처럼 만약 우리가 삶의 시간을 일말이라도 낭비하지 않고자 하는 자기훈련에 뛰어난 이들이라면 우리가 TV에 한 눈을 팔거나 인터넷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시대를 움직일 어마어마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놀라운 집중력에 대해서 부러워하거나 그것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폄하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일상과 예술의 대조적 삶 중 하나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창조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그건 용기가 부족한 이들이 변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정말 창피한 핑계가 아닐까. 상기된 기억을 인질로 삼아 추궁해보고, 지금을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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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2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4 0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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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