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31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 아니며, 고소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고상함이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 선과 악에 대한 동일시이며, 동정의 눈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 위화(余華)
  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가. 작가란 결국 일종의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일까. 영악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무관심으로 대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용기를 큰 것이라 착각해 작가의 꿈을 꾼다는 것은, 그리하여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동정을 가지라니. 우리는 적(敵)을 동정할 수 있는가? 그들을 말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심히 떨리는 입술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화해의 두 손을 내밀 수 있는가? 행동하지 못하는데 글 쓰는 건 죄악이다. 그렇다. 애당초 우리가 쓸 수 있는 글의 주제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때론 우리는 침묵한다. 그것이 고상함인 것으로 착각한다. 온갖 문제에 대해 입 여는 헤픈 사람들이 있고, 그런 이들 사이에서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에는 이도저도 아닌 이들만 힘들다. 위화를 읽다보면 “아무에게나 작가라는 칭호 붙여주지 말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 참으로 높은 자리이다. 그 자리로 향하는 계단에 발이라도 붙인 듯 구는 사람들이라니. 이따금 작가라 소개하는 자들이 나와 칼럼에 써놓은 글들을 읽다보면 맛없어서 뱉곤 한다. 영양가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먹겠건만.

 

 

“문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제화하고, 딱딱하게 굳어 화석이 되어가는 역사를 ‘살아 있는 현재’로 되살려내는 작업이다. 박제화·화석화는 기억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기억의 죽음과 의미의 영도(零度)로부터 다시 기억과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 문학이다.” - 장석주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가졌는데, 몬드리안은 못 가졌던 것이 하나 있다. 미술 얘기라 재미없을 수도 있으나, (이 글을 읽는 이도 별로 없다. 걱정도 팔자다!) 그것은 바로 대각선이다. 공책에다가 정사각형을 하나 그려보고, 그 다음에는 직삼각형을 하나 그려보면 그 텐션(tension)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몬드리안은 사각형만 그렸다. 이 자리에서 그의 회화철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언급하진 못하겠으나, 여하튼 테오와 피에트는 대각선 하나 때문에 토라졌다.
  현대회화에서 대각선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직삼각형도 곡선과 비교하면 텐션이 부족하다. 곡선도 낙서에 비하면 텐션이 부족하다. 텐션이 증가할수록 앞선 형태들은 ‘화석’이 된다. 장석주氏도 ‘의미의 영도’라 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회화의 영도’라 한 것과 매우 닮은 말이다. 말레비치는 그곳에서부터 회화의 길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 봤다. 그리고 로드첸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의 죽음”을 선포했다.
  이들은 재미없다. 오히려 톰블리의 알 수 없는 낙서가 더 재밌다. (심지어 더 비싸기까지 하다!) 여기서 픽션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화석학자들을 비하하는 말은 아닌데,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장석주氏의 말마따나 픽션은 지금 앞에서 뭔가를 움직이도록 만든다. <마이클 K>를 읽으며 그 회색빛 남아공 풍경 때문에 얼마나 낙담했던가. 또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며 “내가 저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기에 자연스레 방관자가 되었을 때, 나는 몹시 우울하지 않았는가. 위화는 또 나를 얼마나 많이 울렸는가, 말이다. 그것은 뜨겁다. 뜨겁게 꿈틀거리고,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혹 모를 일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톰 리들의 일기장처럼 나를 어딘가의 세계로, 아니면 추억 속으로 아주 빠뜨리는 신비한 일이 일어날지.

 

 

(읽을 만한 책은) 물론 좋은 책이며, 생활경험의 진지한 결정(結晶)이자 사유와 감성을 꽃피우는 원동력으로, 종종 문화의 기록을 쇄신하는, 한 시대정신의 최고봉이다. 이런 책은 신기축을 세우고 신국면을 개척하여 절대로 세파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그 깊이가 얕든 깊든, 판에 박힌 말로 에돌지 않고 실천적 혈맥과 생기를 길어 올릴 것이며, 개념과 용어의 남발로 독자와 세상을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은 (중략) 인류 지혜의 발화점이자 광원으로서 개개의 인간정신에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이다.” - 한샤오궁(韓少功)
  <열렬한 책읽기> 서문의 한 대목인데, 그는 “읽을 만한 책”, “버릴 책”, “갖고 있으면 좋은 책”으로 장서를 분류하는 법을 소개했다. 서재를 살펴보면 내게는 아직 읽을 만한 책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읽었는가?”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니, 돌아보건대 나의 책장에는 미술책이 가장 많이 꽂혀 있고, 종교/신화관련서적, 문화관련서적, 문학관련서적, 소설책, 역사책 등이 그 다음으로 많은 듯하다. 아, 시집도 꽤 많이 있다. 수(數)를 다루는 책은 거의 없다. 수학에 젬병이었던 트라우마가 여전하다. 그래도 우주과학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면 수학이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따금 NASA와 Science 사이트에 들어가 영어읽기 연습도 할 겸사겸사 기사들을 읽는데, 몰라도 재밌다.
  한샤오궁의 “좋은 책” 정의는 나에게 미션과 같다. 컴퓨터 게임에는 미션이 있다. 미션을 완수했을 때, 게임유저들은 “미션을 클리어(clear)했다.”라는 표현을 쓴다. 익숙한 그것에 비유해보건대, 나는 저 조건들 중 하나라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큰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멜랑콜리의 수준을 웃돌 폭발력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산 너머 동네의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다. 신기축과 신국면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세파에 부화뇌동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비단 글에서 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토로 삼고 있다. 개념과 용어의 남발이란 과연 어느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도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거창한 꿈을 꿔보자면 나는 결국 발화점이자 광원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허투루 말하거나 글을 부리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 중 하나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그건 초등학생도 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으로 방학일기를 쓴 적이 문득 생각난다. 어렸을 땐 웃으며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다 큰 사람이 그러면 간판 내려야 한다. 요즘 비평가들이 예리한 눈으로 진단하길, 그런 작가들이 많다고 하니 책도 꼼꼼히 따져 읽자. 아니, 나부터 그렇게 해야지 되겠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 조운찬 경향신문 선임기자의 비평 中
  김우창氏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알 것 같다. “쿨하다.”라는 표현은 칭찬이다. 저 위에서 말한 위화의 고상함과도 같은 말이 아닌가. 나는 노트에 조운찬氏의 평을 팬으로 또박또박 꾹꾹 눌러 쓰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은 다음에 ‘이성적 성찰의 힘’과 ‘포용적 사고’에 밑줄을 막 그어댔다. 내겐 없는 그것들. 아, 배가 고프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 장정일
  이그잼뽈(example). 나는 그동안 블로그 포스트나, 혹은 남 보여주지 않고 폴더에 남겨둔 글을 쓸 때 얼마나 많은 보기와 일례, 그리고 비유를 사용했는지, 생각해보니 돌아본 적은 없는 듯하다. 마침 3년 동안 쓴 포스트를 한글문서로 바꾸는 중이니 얼추 통계를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물론 비유도 비유 나름이다. 좋은 것은 거듭 응용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한다. 작문에 있어 쉽게 풀어 쓰고자 할 때, 비유만큼 좋은 전략은 없다. 생각해보면 비유를 다루기 위해서는 지금 유행하는 세태도 꽤 뚫고 있어야 함이 당연지사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것이 고상함과 상스러움 사이를 예리하게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상스러움’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잘 모른다. 대중적 글쓰기에 대해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우리나라의 관행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글 쓰려는 이들은 자신의 스타일이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도 미리 예단해봐야 한다. 결국 운전할 때 사이드미러 잘 보고 다니라는 말과 진배없다.

 

 

“참, 책은 과거가 아니야. 열여덟에 읽은 책도 지금 읽으면 전혀 처음 읽는 책 같아요. 책처럼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는게 없어. 나는 책이 자궁이고 내가 태아인 것 같아요. 서재 안에 있을 때가 가장 몸이 달아오르지.”
(한 책을 펴들더니)
“아, 이것 봐! ‘준성(準星)’이란 게 있네. 불확실한 별이라... 뱃속에 있는 태아 같은 거겠지? 이런 말을 만나면, 아, 미치지!”
“종이가 아까워서. 그냥 버리면 천벌 받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나 같은 사람은 나무를 죽여 가며 사는 존재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천벌을 덜 받으려면 종이를 아껴야죠. 백지는 내 종교예요. 보면 절 안 할 수 없고 달려가서 껴안지 않을 수가 없어요.”
- 고은

  거장은 늘 나를 반성하게 한다. <한겨레> 신문에 고은 시인의 관련기사가 있어 한참을 읽고 또 읽다가 파일로 저장해놓은 구절들인데, 노(老)시인의 넋두리야말로 진정한 ‘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봤다. 그렇다. 조금이나마 시를 사랑했을 때, 나는 단어 하나와 문장 하나에도 그리 열광했었다. 그것이 소화되면 나는 점점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이상한 경험도 했었다. 문제는 결국 시간이었고, 추진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거장들의 한마디를 조약돌 삼아 마음의 웅덩이에 빠뜨릴 수 있는 나만의 풍경화와 같은 배경을 만들어준다. 수면이 일렁이면 나는 “미치는 것”이다.

  시작(詩作)을 관둔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이다. 이따금 볼펜을 쥐고 하얀 노트를 바라보면 뭐라도 불쑥 튀어나오겠지,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나는 어제도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을 실패했다. 내년에는 한 문장이라도 시의 행으로써 써봐야겠다고 벼르고는 있는데, 무릇 욕심만 앞서면 그건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천벌을 받을 첩경이 아니겠는가 싶다. 천벌을 애써 찾아가 받는 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언제 열릴까? 백지에 자음과 모음으로 적혀 내려가던 비밀의 상형문자들 사이로 피어나던 시상(詩想)들, 그 신비스러운 체험은 언제쯤 나에게 다시 찾아올까? 그러나 막상 기대는 안 한다. 라면물처럼 빨리 끓다 이내 식어버리는 사랑으로 시인의 경지를 탐냈던 적도 추억으로만 남은 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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