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너에게도 역시 또 다른 황금 해변에서  A ti también, en otras playas de oro,

    부식되지 않고 기다리는 보물이 있네.  Te aguarda incorruptible tu tesoro:

    광대하고, 막연하고, 피할 길 없는 죽음이.  La vasta y vaga y necesaria muerte.

 


    나에게 보르헤스는 이 하나의 연으로 기억되는 시인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덩어리의 죽음’이라는 기괴한 심상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나는 대문호의 구절에 눌려 죽음은 언제나 화려하고 값비싼 언변으로 나를 홀리려고 할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간소한 걸 좋아한다. 늘어가는 건 책 뿐이다.


    얼마 전, 그의 세 번째 전집 『알렙』을 샀는데, 곁에 두고도 읽을 엄두를 못 냈다. 막연하게나마 『장미의 이름』이나 『율리시스』를 앞에 둔 느낌과 비슷했다. 거대한 유적과 유물들이 즐비한 문화유산. 해박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먼발치에서만 소심하게 바라만보다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은 단편 「죽음과 나침반(La muerte y la brújula)」이다. 이면지에 숫자, 수학기호, 방위표 따위를 적어가며 흥미롭게 읽다보니 게 눈 감추듯 끝나버렸다. 그만큼 짧다.


    보르헤스의 문고리를 잡은 느낌이 오래 남기에 이 찰나의 만남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포우와 도일을 만나기 전, 당시 유럽의 독자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언젠가 “나는 보르헤스를 모두 읽었다. 이제 스페인어 원서를 읽을 차례이다.”라는 소감을 쓸 날이 올까 기대하며, 그와의 첫 대면을 글로 풀어본다.

 

 

*    *    *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문학과 견주려고 시도할 때, 우리가 태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 조응의 한계는 어딜 가든 지적되기 마련이다. 이 땅의 문학에서는 아직도 리얼리즘을 운운하지만 보르헤스는 1942년 이 단편을 쓰며 이미 그러한 비평의 영역을 훌쩍 넘어섰다. 소설은 아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인 것으로 추정되는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또한 환상적인 분위기는 에릭 뢴로트가 집착하는 고대 그리스어,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 YHWH를 의미한다.), ‘트리스트 르 로이’ 빌라, 18세기 교파 등으로 충분히 드러나 있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을 일컬어 “실제적인 것의 더 복잡한 관계 표현”이라 했다. 근래 들어 세계문학의 히트작들을 보면 이 장르의 것들이 많다. 바르가스 요사, 움베르토 에코, 폴 오스터, 가브리엘 마르케스. 설명이 필요 없는 거장들의 대작이 쏟아져 나온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과 나침반」이 발표된 시기가 1942년이라는 것에 놀랐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와 ‘우리’)의 한계이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플롯과 눈에 보이는 반전에도 내가 거의 직관적으로 “세련됐다.”고 느끼게 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세련’이라는 보르헤스의 특징은 오래된 문화의 유물들을 자유자재로 작품화하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말한 바대로 소설은 단순하다. 『올드보이(2003)』가 연상되는 독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레드 샬라크가 복수를 위해 만들어놓은 화려한 그물 안으로 어쩔 수 없이 유영해 들어가는 에릭 뢴로트, 복수에 대한 역(逆)복수를 감행하는 대수(최민식氏)에게 계속 좌절을 맛보게 하는 우진(유지태氏)의 이야기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레드 샬라크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의 실천이 무엇인지, 그 치밀함이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그가 어떤 식으로 그물을 펼쳐 에릭 뢴로트를 유인했는지는 후반부에 그의 입으로 직접 서술되는데, 사실 별도로 정리해보면 복잡한 계획이라기보다는 상대가 평소 관심 갖던 것을 미끼로 던지는 수준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레드의 계획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다고 느낄 건, 아마도 에릭의 추리과정일 것이다. 문헌과 신비주의 신앙, 그리고 기호를 토대로 추적하는 에릭의 ‘이성적 추리’ 말이다. 첫 번째 ‘희생양’인 율법학자 야몰린스키가 죽은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형사반장 트레비라누스의 실없는 추리가 절반은 맞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에릭을 따라 가며 18세기 교파의 신비한 역사와 그와 관련된 어떤 미스테리한 죽음의 베일을 벗겨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트리스트 르 로이의 빌라에서 레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에릭은 실패했고, ‘우리’도 그러했다. 독자는 레드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에릭의 변론, 아니 ‘요구’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살려달라는 말은 없다. 곧 죽을 목숨인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길 것 같진 않다. 그는 끝까지 이성에 매달리며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당신의 미로에는 불필요한 선이 세 개나 더 있습니다.”


    일직선상의 미로로 끝내는 것이 더 세련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죽게 생겼는데도! 그러나 레드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끝없는 일직선상의 미로를 만들어서 당신을 죽일 것을 약속한다. 단, 다음번에 당신을 죽일 때, 즉 당신이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직감이 있었다. ‘안 죽였을 것이다.’ 총은 장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총에 총알이 있었다는 언급은 이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릭은 풀려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성의 실패로 이미 에릭은 한 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감옥에 가두게 했던 옛날의 에릭에 대한 오늘의 복수는, 이 정도로 두뇌게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면 성공한 것이 아니었을까. 레드는 아마 만족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게임.


    나는 과감하게 레드의 입장에 서봤다. 나라면 안 죽였을 것이다. 그를 풀어줬을 것이다. 또 한 번의 거대한 두뇌게임을 시작했을 것이다. 에릭은 어쩔 수 없이 이성을 무기로 나의 일직성상의 끝없는 미로를 탈출하고자 할 것이고, 나는 에릭이 내가 마련한 최종지점, 즉 죽을 곳으로 점점 향하려고 고민하는 에릭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번 게임에서도 내가 이길 것이다. 에릭은 박학하나 단순한 사람이고, 박학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모른다. 승률은 100%이다. 두 번째 승리 후 그를 죽일 지, 아니면 세 번째 게임으로 이어갈 지는 또 내가 결정할 몫이다.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소름을 돋게 했다. 보르헤스의 환상과 소설 속 긴장이 내가 순간 방아쇠를 당길 범죄자의 탈을 쓰게 만든 것이다. 이 짧은 작품을 덮으며 나는 매끈한 몸매의 여성보다 더 섹시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무한미로 속의 복수와 추적. 지금은 흔해 빠진 소재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보르헤스의 상상력 앞에서 나는 쌍수를 들 수밖에 없었다. 1942. 이 숫자가 나의 세 번째 소름을 돋게 했다. 나는 레드의 방진(方陣)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에릭처럼 보르헤스의 손아귀에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맨 위에 인용한 시와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보물과 같은 죽음. 그 화려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죽음. 죽음의 유혹. 게임. 일직선상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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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춥고 구름 구질구질한 아침. 허겁지겁 먹은 밥이 뱃속에서 다시 벼가 되려는지 꿈틀거린다. 머리스타일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 강의 프린트 하날 까먹은 듯도 하다. 애써 웃어보지만 신발끈 묶는 것조차 귀찮다. 못난 오빠 배웅한다고 뒤에서 꾸벅꾸벅 동생은 졸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이런 부탁을 한다.


  “내년 생일에는 아이언맨 슈트 좀 사줘.”


  “빨리 가.”


  나의 위시리스트에는 <드래곤 길들이기>의 ‘나이트 퓨리’도 얼마 전 추가됐다. 동생에게 실없는 웃음이나 주고 현관문을 연다. ‘학교까지 날아가고 싶다.’ 내가 롤러코스터의 짜릿함을 좋아하는 건, 순전히 게으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언맨 슈트가 있었으면.’


  오늘 밤 여덟시에 나는 희뿌옇게 가려 흡사 달무리도 보이는 것 같은, 밤하늘의 보름달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주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정말 빨리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단어들이 국경을 넘어 도망가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작가 김애란을 만났다.

 

 

 

 

 

 

 

 

  가히 여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가였다. 차분한 화법 사이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트와 농담에 우리는 적극적인 웃음으로 화답했다. 분위기는 좋았고,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교시(敎示)의 느낌이 전연 없었다. 공감의 의지가 확연히 느껴졌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생각이 많고 깊었다. 섬세하고 세련된 면이 있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녀의 강연을 듣고 나서 “스펀지 케익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다른 케익들보다도 스펀지 케익이라면 한 번 쯤 꾹 눌러보고 싶지 않은가. 그러면 케익은 누르는 만큼 들어갔다가 제자리로 얌전히 돌아간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날카롭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언니, 누나의 분위기였다.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아우르려고 하는. 글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품’이 얼마나 넓어야 하는가를 나는 문득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어 추려봤다. 그녀는 아포리아를 동경하던 20대에서 벗어나 자신이 30대가 되었음을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들을 나의 아포리아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면지에 거칠게 적어 내려갔다. 김애란의 문학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좋은 말들을 이 누추한 공간에 옮겨본다.

 

 

 

  “픽션이란 푹신한 빵 같은 거짓이다. 현실이 착지하려고 할 때 재빨리 그 밑으로 끼어드는.”


  “독자가 책을 덮었을 때, ‘아, 나도 나의 글을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요즘 나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에 대한, 가령 인권, 약자 등 추상명사들에 대한 대단함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가 이런 것들에 게으르면 이 단어들이 지닌 활력과 생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살려내는 것이 문학이지 않을까. 이런 짐작들을 하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농담이란 수치심을 주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위로해주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과는 어울리기 쉽지 않다. ‘나’에게의 농담은 거리낌 없을지 몰라도 그 대상이 ‘너’라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말이 글보다 앞서고, 글이 삶보다 앞서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이해란 내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종의 상상이다.”


  “가장 젊은 작품은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작품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저 선배(작가)는 얼마나 통찰력이 좋기에 100살이나 어린 나와 말이 통할까?”


  “영화가 문학의 위기를 야기했다고 하고, 최근에는 게임으로 인한 영화의 위기가 거론된다. 일본에서는 이미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잠깐 게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다. 게임은 성공과 영웅을 다루지만 문학은 실패와 평범한 인간을 소재로 삼는다. 게임은 만족할 수 있지만 문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리뷰는 ‘삼천포로 빠지는 유형’이라고 했다.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서 주제를 찾아내는 것보다는 - 물론 그것이 저급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비평이 더 어렵고 생소하다는 건 이번 학기 소설론을 들으며 내가 근래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 “맞아. 나는 옛날에 그랬었지.”라는 반추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독자를 그녀는 원하는 듯했다.


  선배 작가들, 가령 성석제, 김연수, 김영하 등 자신보다 10년은 더 작품생활을 하고 책도 10권 이상 낸 베테랑들에 대한 부러운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 것도 나는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김연수를 예로 들며, 그가 ‘토고’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토할 정도로 퇴고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해 학생들을 ‘빵’ 터뜨렸다. 요컨대, 글쓰기란 고민과 반성, 교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들에 비해 내가 그들의 글을 얼마나 대충 읽으려고 했는지 자책하게 됐다. 글 좀 쓰고 싶다는 핑계로 이러쿵저러쿵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심보를 나도 이제 버려야 할 내공 즈음 됐을 텐데, 아직도 키보드 앞에만 앉으면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 철이 덜 들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 ‘김연수’하니 그녀가 들려준 재미난 일화가 갑자기 기억났다. 홍대거리에서 작가들끼리 술을 마셨나보다. 반주에 기분이 좋아서 막대사탕을 사들고 서로서로 퇴폐적으로 쪽쪽 먹으면서 걷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지나가다가 김연수를 봤는지 “야, 김연수야. 김연수.”라고 소곤거렸단다. 그 소리를 들은 김애란이 술김에 “맞아요. 김연수에요. 김연수!”라고 소리 지르며 본의 아닌(?) 난동을 부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여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야, 김애란이야. 김애란.”이라고 했단다. 나는 공교롭게도 딱 이 때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앞자리의 남학생에게 폭우를 쏟을 뻔 했다.

 

 

 

 

 

  한편, 나는 “여자를 읽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학기에 나는 여자의 소설을 몇 편 읽었다. 박완서, 오정희, 권지예, 이현수, 공지영, 김애란. 방학 때 읽을 계획으로 윤고은과 전아리 소설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어놨고, 김애란 장편도 읽어볼 생각이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신경숙과 은희경도 조만간 천천히 읽기 시작할 것 같다.


  나에게는 도전이다. 남성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담겨졌던 시선을 여성적 소재와 플롯에 담그는 것은 생경한 일이고 때론 신경이 곤두서거나 갑갑한 작업이 되기도 한다. 오정희를 읽고 내가 어머니에게 처음 한 말이 “여자는 이렇게 생각이 많아요?”였으니.


  사람은 으레 남도 저처럼 생각하겠거니, 한다. 더군다나 개인화가 됐다는 이 사회는 남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 타인의 이해를 구하려는, 그래 놓고 공감이니 뭐니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이걸 생각하지 않으니, 성질나면 찌르고 때리고 죽이는 것 아니겠는가. 즉자적으로. 나만 생각하면 마음의 정지(pause)가 생략되기 십상이다. 생각도 없다. 그래서 나는 [-female]이라 표기할 수 있을 ‘나’를 [+female]의 영역으로 가급적 붙여보려는 것이다. 여자를 읽는 시도를 부단히 해야겠다는 새삼스런 다짐을 이번 강연이 끝나고 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김애란은 그런 두려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이 두려움이 공포가 아닌 경외의 정초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p.s  나는 성격이 그래서 뭐 한다고 하면 ‘차자작’ 가서 빨리빨리 하질 못한다. 숫기도 없고. 우물쭈물 서 있다가 거의 싸인 다 받았나 싶어 작가 옆으로 늘어선 대여섯 명의 여학생들 뒤에 가 쭈삣쭈삣 거리고 있었다. 말을 붙이려니 왜 이리 두근거리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뭐라고 좋은 말을 마지막에 해준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버스 차창에 새겨진 나의 옆모습에게 한심하다는 듯 “야, 이 자식아.”라고 쏘아봤다. 하기야 작가를 만난 건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 아직까지도 설레는 건 어쩔 수 없겠다. 잠은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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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11-2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직접 가볼수 없는 사람에게 단비같은 페이퍼였어요.

탕기 2012-11-29 22:40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북극곰 2012-11-2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김애란 작가가 한 말들을 정리해주신 부분, 저도 좋네요!

탕기 2012-11-29 22:41   좋아요 0 | URL
더 많이 적을 수도 있었는데, 강연이 강의가 될 것 같아서 어렴풋하게 기억만 하는 좋은 말들도 많아요. 다음 강연에도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락방 2012-11-29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에 대해 호기심(어쩌면 호감)이 생기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

탕기 2012-11-29 22:42   좋아요 0 | URL
저는 소설론 강의 때문에 반강제(?)로 읽었는데,
이번 방학 때에는 장편을 한 번 읽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2012-11-29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9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꽃나무 2012-11-29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작가를 만나셨군요..
소설로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직접 만나면 작품에 대해서 더 잘 이해가 되더라구요~
잘보고가요^^

탕기 2012-11-29 22:45   좋아요 0 | URL
창작과정이나 동기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니까 이해가 빨리 되더군요.
보통 독자들은 작가가 뭔가 거창한 이벤트 때문에 작품을 쓸 거라 생각하는데,
가령, 저 같은 경우는 <물속 골리앗>이 그렇지 않았나 싶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작품이 시작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새삼 "작가도 사람이구나."라고 무릎을 친 기억이 있습니다.^^

2012-12-07 0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7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6

 

 

  죽음에 대하여 나에게 허여된 유일한 사유의 통로는 피상(皮相)이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등을 읽으며 나는 내가 죽음의 여러 주제들을 거쳐 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곤 했다. 죽음을 역사적, 철학적, 혹은 미학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단, “나는 죽음과는 멀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것은 명제가 아니라 테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간혹 하지만. (참이나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명제’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예컨대, “나는 죽음과 멀어야 한다.”라든지, “나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와 같은 저항적인 선언 같은 것. 여기에 ‘언제까지나’라는 부사가 붙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선동적이겠다. 그러나 내가 왜 이 전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삶의 확고한 못 중 하나로 벽에 박아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전제를 신과 비교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것은 간혹 전지전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생동하는 봄과 찬란한 여름에 나의 몸과 정신을 휘감아 자신의 무궁무진한 힘을 유감없이 뽐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껏 의지하고 있는 수많은 전제들 중 그것은 소위 ‘갑’이었다.


  의심해보라는 말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무장해제’니, ‘나체’니, 하여간 옷을 벗게 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표현들이 의심에 들러붙은 채 마치 교양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진심으로 대전제들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10~15도 정도 갸우뚱하는 순간 느껴지는 소름은 매우 불쾌하기까지 하다. 전제를 의심하는 나 자신을 불손하게 여기면서. 그 찰나는 수도꼭지에서 갑자기 굵은 짐승 울음소리가 남과 동시에, 공손하게 모은 나의 두 손 위로 녹물이 노골적으로 쏟아질 때의 심각한 짜증을 동반한다.


  “아, X발.” 솔직한 욕설이 화장실을 가득 채우고, 나는 손을 이리저리 털려고 하지만 사방에 오물의 자국들이 남을 것 같아 불청결의 흔적을 잠시 손 안에 묶어둔다. 바로 그 순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이 더러운 영토가 혹시 내가 벗어날 수 없을 만치 광활한 것은 아닌지 - 혹은 백 년은 족히 헤맬 미로와 같은지 -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불길한 느낌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문장의 앞과 뒤에 빠짐없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렇다, 이 감동스럽고 혈기 넘치는 ‘필사(必死)’라는 단어를 신발로 삼아 사위(四圍)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발바닥에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必死 때문이다. mortality. 피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저려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 더러운 영토 위에 아무렇게나 눌러 붙어버린다. 대전제가 자모(子母)의 기호들로 낱낱이 해체되는 적나라한 광경이 아름다운 석양과 어울려 기괴하게 보인다. 해체된 전제가 “나는 죽음과 가깝다.”로, ‘-는’이라는 보조사가 빠지고 원근의 형용사가 교체된 채로 다시 꾸려지는 일은 없다. 대전제의 붕괴와 함께 나는 나머지 모든 전제들을 강탈당했다.


  죽음. 유일한 리얼리티. 오정희의 두 단편 「동경(1982)」과 「얼굴(1999)」에서 나는 죽음을 앞에 둔 ‘늙음(老)’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그렇지 않은가? ‘/늘금/’은 균열이 난 벽돌 위에 찰싹 붙어 있는 기생적 존재처럼 불쾌한 발음이지 않은가?)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저 깊고 어두운 그것의 안으로, 내가 흘린 것도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칠칠맞긴’. 나는 낯을 붉혔다. 아무도 없는데, ‘요즘 눈물 날 만큼 바람이 시리잖아’고 나는 변명을 떨어뜨려 눈물의 뒤를 쫓게 했다. 진심은 여전히 막연한 죽음과 대면한 채 나를 그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게.


  나는 대전제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어떤 작업을 해야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고민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에서처럼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의 제국에서 정1품의 관모(官帽)를 쓸 일은 없다. 매일 오고 가는 신촌 명물거리이며, 대학 캠퍼스이며, 홍대역 근처이며, 합정이며, 연대 앞 정류장, 그리고 사람 많기로 손에 꼽아주는 이곳 일산이며, 그런 이름의 성곽들은 그야말로 잡다한 들숨과 날숨의 저자거리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따금 시리아와 방글라데시, 이집트 등지에서 수많은 목숨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라졌음을 일회적으로 경청할 뿐이다. 게임에서는 ‘몬스터’나 ‘에너미(enemy)’를 키보드로 처단한다. 가까운 죽음만이 특별한 이벤트와 악몽의 소재가 된다. 나는 이런 것들이 우리 세대가 죽음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둘째 치고, 죽이는 행위의 고전적 의미마저 퇴출당한 상태.


  그러니 노인의 삶이 내가 읽고 접해야 할 주제들 중 낮은 서열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굳이 ‘카르페 디엠’을 누군가가 외쳐주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삶에서 5~60년 이후의 단조로운 일상을 그려보는 것은 시도할 생각도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건 일상을 조명하는 수많은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꿔 말하면 「동경」을 쓴 1982년에 그녀는 서른다섯이었는데, 생각해보면 한국문학사적으로 거의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젊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서른다섯이면 한창 자리 잡은 일상의 매력에 취해 있거나 젊음을 반추할 시기라지 않던가.


  나는 오정희가 동네 노인정에 나가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권태롭고도 아린 맛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한낮의 풍경을 상상해봤다. 무섭도록 긴 시야가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망원경’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갈릴레이가 벨기에에서 수입해서 행성들을 관찰했다는, 그런 용도를 제외한다면. 이미 우리가 볼 인생의 먼 날들은 주변에 산재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늙음을 혐오하는 자연스런 감정을 부끄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가? 철학자나 정치인이나 작가나, 여하튼 역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옆에 나란히 놓인 괄호 속에 생몰을 나타내는 두 종류의 숫자가 있고, 둘 사이에 물결 표시가 나 있는 그 기호들을 보고 있자면, 닫힌 괄호 앞에서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나는 2100년까진 못 살 것이니 괄호 앞 숫자에는 ‘2’, ‘1’의 입주가 확정되어 있는 셈이다. 숫자라는 기호로 기억될, 때론 묘비 후면에 새겨진 한자들로도 기억될 생사의 여정은 지극히 막연하기만 하다. 나는 궁금했다. 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까.


  「동경(銅鏡)」에는 삶에의 갈망이 자전거를 타고 이따금 경적을 울리는 아이,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 노부부의 집을 방문한 젊은 청년 따위 등으로 드러나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싱싱하게 보일 것이다. 반면, 30분을 산책하면 적당히 땀을 흘린다는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는 아이의 자전거 속도와 확연히 대비된다. 버스를 타기 위해 집 앞 거리를 지날 때면 나는 으레 이른 아침이든 대낮이든 산보를 즐기고 있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그 느린 속도. 내가 허용할 수 없는 공백이 그들의 뒷모습에 새겨져 있다.


  내가 동경(憧憬)하는 건 그런 속도가 아니다. 이따금 버스에서 볼 수 있는, 광화문으로 서울 나들이를 나가는 중절모의 ‘멋쟁이 노년 신사’가 미래의 나였으면 한다. 쪼그라들고 초라해지긴 싫다. 정년을 앞둔 교수들도 멋있다. 그들이 캠퍼스를 느릿하게 걷고 있으면 나는 그 뒤를 따라 붙어 속도를 흉내내보곤 했다. 얼마 전 사라진 가을에는 그들의 우수에 젖은 눈빛도 참으로 근사해보였다. 다만 나는 그들이 지극한 예외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누구나 그렇듯 자신은 굴러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부한다지 않은가.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큰 충격이었다. 반신불구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할아버지가 방에 누워 있고, 그의 ‘똥오줌’을 가려주던 아내는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다 - 그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겠다고 나간다. 노부부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검은 개가 저승사자마냥, 할아버지가 홀로 있는 방 안에 들어와 죽은 뒤를 맛있게 먹고 나른한 잠에 빠졌을 때, 그 소름끼치는 장면에서 독자라면 누구나 죽음의 한 양태를 느꼈으리라.


  “저무는 날, 길은 더욱 멀고 아득하다.(「얼굴」中)


  50대에 접어든 오정희의 시선은 「동경」에서보다 한층 죽음에 근접해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 표현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하루의 무게가 얼핏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반신불구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폐차장의 고물들처럼 볼품없이 ‘찌부러지는’ 나약한 육체가 정신의 영역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삶을 꿈꿀까? 죽음을 받아들일까? 두 경계가 없는 생각이란 있을까? 나는 다시 두려워졌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나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등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음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정신적 준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막연한 각성과 다짐 따위를 꿀꺽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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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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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6

※ 수요일에 우리 학교에서 김애란 작가 초청강연을 한다. 이번 학기, 나는 김경수 교수님의 현대소설론을 듣고 있는데, 이 리뷰는 초청강연을 위해 미리 읽고 제출할 간단한 레포트 글이다.

 

 

1. 너의 여름은 어떠니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미영이 팔뚝에 남긴, 혹은 그녀의 팔뚝에 남겨진 상흔과 병만의 사막 이야기는 나에게 추억과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나도 미영처럼 누군가의 팔뚝을 잡았을 것이고, 악력의 세기가 때론 지나친 집착 탓에 상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셌을 것이다. 그 힘의 흔적과 상처로부터 아픈 추억이 새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막은 바로 그러한 현실이지 않을까.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대책 없이 당하게 된다는 그곳. 추억은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pg.37)”처럼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예기치 않게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미영의 눈물은 그런 까닭에 의미가 있다. 만약 선배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아무런 고통의 자각도 없었더라면 미영은 병만의 장례식에 가서 소설의 마지막에서처럼 울 수 없었을 것이다.

 

 

 

 

2. 벌레들

 

  장미빌라에 이사해온 뒤 아내가 가졌던 한동안의 행복한 나날들이 남편의 첫 외박, “해충의 우두머리(pg.73)”라 묘사된 애벌레, 그리고 온갖 날카로운 소음들로부터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던 임신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pg.81)”는 출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참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pg.54)” 바람 따라 흔들린다고 묘사된 나무가 굴착기의 맹공으로 쓰러질 때, 아내는 산통을 느꼈다.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A구역으로 떨어진 “손에 안 맞는 결혼반지를 넣어둔 파란색 벨뱃 상자(pg.74)”를 줍기 위해 내려갔을 때, 아내는 나무의 뚫린 밑둥에서 쏟아져 나오는 벌레들에 놀란다.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pg.79)” 있는 것 같은 광경 바로 옆에서 아내는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출산을 시도한다. “살려주세요(pg.80).”라는 아내의 비명은 굴착기가 자신의 몸을 찍어 내릴 때 나무가 지르고자 했던 외마디가 아니었을까.


  한편, 결혼반지가 손에 맞지 않았다는 구절로부터 소설의 이후를 상상해볼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했다. 불투명한 출산의 여부, 외박하는 남편이 혹시 외도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보는 아내의 육감, 그리고 불쾌한 환경 등이 비극을 심화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3. 물속 골리앗

 

  언제 단수될 지 알 수 없어 꾸려놨던 ‘물봉투’들을 터뜨리는 어머니의 모습으로부터 나는 자신이 쌓아둔 희망들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상다반사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봤다. 「물속 골리앗」에는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애쓰는 모습들이 절박하게 묘사되어 있다.


  끝없이 내리는 비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재앙들이 무상(無想)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뜻하는 듯하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 띠었다.(pg.87)”는 구절에서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과 규모를 지닌 역경 앞에서는 명확한 판단을 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벌레들」에서처럼 「물속 골리앗」의 나무도 인세(人世)에 비춰 본 상징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pg.86)”이야말로 나무가 지닌 생의 의지인 것처럼 인간의 것 역시 그러하다. 소년은 나무답게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인간의 경우도 그렇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답게 죽는 것이란 소년이 처해 있는, 흡사 재난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무지막지한 재앙 앞에서 처참하게 물에 불어 식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남는다는 것’ 사이의 미묘한 어감 차이가 「벌레들」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김애란은 절박한 소년의 이야기로 풀어내며 후자가 바로 현실일 수밖에 없는 비극으로부터 일말의 희망을 끌어내려고 한 것 같다. 아버지가 즐겨하던 체조가 ‘나’에게는 물 밖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의 일정한 하나의 방향처럼 살아남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에는, 소설 상에서는 어렵다. 그런 삶에 나의 경험을 비춰보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4.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흔히 ‘루저(loser)’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감동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앞부분을 읽다가 ‘용대’의 처지를 알게 됐을 때 내가 갑작스레 이면지에 적은 질문이었다. 친척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그의 상황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법한 것이다. “이 새끼가 하다 하다 별 지랄을 다 한다(pg.136)”며 용대의 뺨을 날린 형의 행동도 그러하다. 그렇게 비난받던 용대의 삶을 후비고 들어온 임명화의 의미는, 때문에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용대가 하는 일이 택시기사라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운전대를 잡고 그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인데, 그 중에는 “반짝이는 동전(pg.144)”처럼 값어치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감동적인 노래는 끝내 그것의 정체를 몰라야 더 좋은 것으로 남는다고 한 여자의 말이 용대에게는 임명화의 기억과 대응된 것이다. ‘지훈’에게는 잘 살아있다고 둘러댔지만 이미 죽은 아내에 대해서 용대는 끝내 죄스런 울음을 터뜨린다.


  위암에 걸린 줄 진짜 모르고 시집온 거냐고, “뒤지려면 혼자 뒤지지 누구 인생을 조지려고 그러냐.(pg.163)” ‘쌍년’이라 윽박지른 그의 진심은 그녀를 살리려는 간곡함이었겠지만 마음 한 켠에는 욕이 담겨져 있었고, 그것이 지금껏 살아왔던 그의 성격 탓에 마구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아내 나라의 말을 배우며 스스로 나아지고 있다고 여긴 그에게 아내의 죽음은 어쩌면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멉니까?”라는 마지막 음성으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추측된다.


  우리가 무언가에 올라타고 - 택시이든 버스이든 지하철이든 케이블카이든 상관없는 모든 탈 것들 - 어딘가로 향하고자 하는 목적 지향적인 삶은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고, 때론 비극 없는 도착지가 여기서부터 얼마나 먼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5. 하루의 축


  “어째서 이렇게 한 가족의 단란이 시시하게 망가지는가(pg.196)”라는 과거의 질문에 대한 답을 ‘기옥 씨’는 끝내 찾지 못했다. 외동아들 ‘영웅’에게 이어놨던 단 하나의 끈도 이미 망가진 가족의 단란을 상징하는 아들의 편지, 사식 좀 보내달라는 짧은 편지로부터 끊어질 듯 위태롭게 대롱거렸다. 일방적인 아들의 훼손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뭐 흘릴까(pg.192).”


  기옥 씨의 이 궁금증을 비롯해서 그녀가 내내 공항에서 보는 ‘버리는 것’, ‘흘려진 것’, ‘배출한 것(싼 것)’, ‘헤어지는 것’ 등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의미는 우리의 삶에 여기저기난 생채기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든 가려서 타인의 눈에는 띠지 않게끔 처신하는 것뿐이리라, 생각한다.


  혹 처신이, 아니 ‘자기방어’가 순탄치 않는 날이면 파트장 앞에 탈모를 ‘노출’한 기옥 씨와 같은 입장에 되고 말 것이다. 무심코 훼손당한 삶의 여러 면들이 「벌레들」에서 아내를 놀라게 한 큰 애벌레처럼 고개를 벌떡 든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무서운 걸 보기라도 한 듯(pg.201)” 뒷걸음치게 될 것이다.

 

 

 

 

6. 큐티클

 

  「큐티클」의 ‘나’는 나에게 중심이 서 있지 않은 인물로 비춰졌다. 그건 곧 나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행동들마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생산력에 맞춰 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를, “유행과 문법(pg.213)”에 따르면 안색이 얼마나 맑아지고, 심지어는 아직 20대인데도 어제보다 오늘의 얼굴이 더 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불안 그 자체이다. 누군가의 잘 묶여진 신발끈을 보면 나의 신발 매무새도 한 번 고쳐봐야 할 것 같은 일상적인 비교와 그로부터 말미암는 불안. ‘자기관리’라는 항목에 체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일종의 ‘태만죄(怠慢罪)’가 성립될 것 같은 불안이다.


  이렇게 나의 어딘가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걸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일상의 또 다른 비극은,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보여주기 싫은 것이 타인에게 기억된다는 것에 있다. 소위 작품 속 ‘겨땀’의 창피함처럼.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깨져버린다는 비극도 있다. 때문에 손톱이라는 조그마한 곳에 들어가는 시간이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큰 것, 혹 ‘궁극적인 것’이라 표현할 수 있는 삶의 어떤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데, 일상은 배꼽을 배보다 크게 만들곤 한다. 크고 작은 것 사이의 맥락이 뒤집혀버린 일상은 하릴없는 말이나 하고, 맥주나 마시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힘들 것이다.

 

 

 

 

7. 호텔 니약 따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의외로 죽이 잘 맞는다. 신중과 배짱. 20대의 불안한 삶을 서로에게 기대어 왔던 것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충족시켜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위안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내 몫을 살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 걸음은 혼자 걸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때문에 은지와 서윤이 처한 상황은 이렇다.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pg.251)

 

  「하루의 축」에 등장했던 공항에서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한 건 「호텔 니약 따」에서였다. (혹 기옥 씨가 은지를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든지 출발은 산뜻하고, 그 기분은 한동안 이어진다. 「벌레들」에서처럼, 하지만 그 행복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불협화음이 생기고, 여러 사건들이 두 사람의 사이에 개입된다. 전 세계 청춘들의 성지(聖地)라 흔히 불리는 카오산 로드에서 서윤과 은지는 끝내 틀어지게 된다. 이등변삼각형의 한 변이 순간 기형적으로 늘어나면서 도형 자체가 깨져버릴 것 같이 소설은 끝이 난다. 먼 타국에서의 비극은 막연한 고립감마저 불러일으킨다.

 

 

 

 

8. 서른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pg.293~294)


  「서른」에서 발신자인 ‘나’가 ‘면목동 학원의 아이들’에게 가졌던 마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pg.297)”라는 구절을 앞에 두고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아직 자라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고 가는 버스의 TV에서 우연찮게 얼마 전부터 나는 청출어람(靑出於藍)과 비슷한 의미의 사자성어를 반복적으로 보게 됐다. 후배가 나보다 미래에는 나아질 수도 있으니 존경하듯 대하라는 뜻이었는데, 막상 사자성어의 정체가 생각나진 않는다. 여하튼 나는 그것을 떠올리며 ‘나’의 푸념을 “너는 자라 나보다 큰 사람이 되겠지……더 멋있어지겠지.”라고 바꾸고 나만 모든 것이 잘 안 되가는 중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함을 보채봤다.


  남자친구의 속임수에 빠진 다단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끌어들인 ‘혜미’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고백은 열심히는 산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런 사람(pg.316)”이 되는 이 시대 청춘들이 털어놓을 수 있는 고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만일 언니가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 제가 혜미가 있는 병원에 찾아갔다는 뜻일 거예요.(pg.318)” 다행이도 ‘나’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 위한 일말의 시작으로 ‘혜미’를 찾아간 듯하다. 그러나 이미 식물인간이 된 ‘혜미’에게서 ‘나’가 들을 수 있는 것이란 어떤 종류의 용서가, 혹은 복수심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청춘의 한 자화상이 ‘나’의 삶의 중앙에 버티고 ‘나’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무서운 대면의 순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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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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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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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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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유종호는 <나목>을 일컬어 "청춘의 책"이라고 했다.

 

  ‘청춘(靑春)’하면 나는 한 가지 떠오르는 심상이 있다. 맛있는 차(茶)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께서 펄펄 끓는 물에 대추를 몇 알 던져 넣으시고, 내가 그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장면. 대추는 유리냄비를 빠져나갈 듯 말 듯, 엄청난 열기들로부터 추진력을 받아 수 십 번이고 뛰어오른다. 하지만 대추는 결코 냄비를 탈출하지 못한다. 불과 같은 청춘의 열정은 혁명을 이룩하지 못한 채, 철이 들어버린다.


  많은 평론가들이 <나목>을 '성장소설'로 분류하고, <나목>은 우리나라 여성작가가 쓴 거의 최초의 '여성성장소설'이라는 기념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故 박완서의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 아니었다. 레포트를 쓰기 위해 두 세 번 고쳐 읽고, 마지막 장인 17장을 뜯어보고 다시 봐도, 나는 어린 가지가 서로 몸을 부대끼며 바람 속에 추워하듯 11월 중순 지금의 바람에 내던져진 나의 나신(裸身)을 생각해냈다. 별 볼 일 없는. 나는 발달한다. 수많은 것들이 덧붙여진다. 그러나 발전하진 않는다. 과연 나는 성장하는 것일까. 인격은 도야하고, 목표는 성취되고 있는 것일까.


  빈둥거리다가도 불현듯 책을 붙잡고 새벽을 보내던 중 나는 "그래, 나는 발전하고 있어."라고 으레 자부한다. 하지만 포만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자부심과 병렬된 상실감에 무릎을 꿇는 것은 정말이지 비참한 일이다.


  예쁘고, 잘 생기고, 아름답고, 멋진 청춘들의 사이에서 나는 이경처럼 나 혼자만 아무런 계획 없이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목>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문장이 되어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책 옆면에 새겨져 활짝 웃고 있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인에게 묻고 싶었다. 회색빛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나목>을 꼼꼼하게 되새기고자 레포트의 글을 옮겼다. 지금까지 쓴 리뷰 중 가장 길 것이다.

 

 

 

*    *    *

 

 

# 공허,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이경이 좋아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의 회사하고 매력적인 상품들, 그 풍요한 상품들을 후광처럼 등지고 서서 저녁 화장에 여념이 없는 세일즈 걸들. 나는 이런 것들을 바라보기를 즐겼다.(pg.11)”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들에게 매료되는 것은 청춘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속이 비어 있는지 들여다보기도 전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경처럼 불만족스러운 주변 환경에 놓인 처지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그런 곳에서 좀 더 멀리 있고 싶었다. 적어도 대구나 부산쯤, 전쟁에서 멀고 집집마다 불빛이 있고 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는 곳에 있고 싶었다.(pg.12)”
  저속한 농(弄)이나 불평을 쏟아내기 일쑤인 네 명의 환쟁이들, 혹은 상스러운 최만길보다 이경의 삶을 근원 모를 어두운 곳에서부터 잡아 붙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이경의 사이에서는 으레 부녀(婦女) 사이에 오고갈 다정다감한 대화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혹 부자지간이라면 이런 광경이 잦을 수는 있을 것이다. 평소 별 의미 없는 말들로 서로 머쓱해하는 ‘아버지-아들’ 관계는 이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남자들의 정이 오고 가는 무언(無言)의 과정은 있다. 말이 적을 뿐이다.
  반면, 이경과 어머니 사이에는 창백한 허무가 가득 차 있다. “짜증”, “왈칵왈칵 치미는 혐오감”, “어머니가 싫고 미웠다.(pg.14)” 등의 고백들은 이경이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회색 풍경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떼어낼 수 없는 현재의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경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인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보낼 것이고, 수많은 지아이(GI)들을 만날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품들’과 ‘세일즈걸들’도 원한다면 하루 종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집은 어머니의 공간이다. 원치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이경의 묘사는 섬뜩하리만치 어둡고 무섭다.
  “그 속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얼마나 세차게 꿈틀대고 있는지를.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덩달아, 누구를, 무엇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pg.16)”
  검은 홀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한 공포와 혐오가 이경의 청춘을 가로 막고 있으므로 그녀는 사랑하고 싶어도 누구라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체증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이경에게 옥희도가 나타난 소설 속 사건은 청춘의 한 단면이 갑자기 부각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 옥희도, 황태수

  이경이 옥희도를 만났을 무렵, 이경의 심정은 복잡했다.
  “잠시 그와 나의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섬뜩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주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 같아서였다.(pg.22)”
  그녀는 옥희도와 마주친 첫 눈길에서 그의 상태에 대해 정확한 단서들을 포착한다. 네 명의 환쟁이들이 퇴근하고 남은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적에는 “훈훈한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단순한 호감 이상의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사이를 보며 나는 얼마 후 한 편의 애잔한 러브스토리가 진행될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아직까지는 일방적인 관심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방에 관심이 오고 갔다고 하더라도 관심의 정도는 이경의 것이 옥희도의 것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옥희도는 의자에 앉아 묵묵히 초상화를 그리듯 자신에게 내려앉은 모든 상황과 그로 인한 고독을 인내하고 있다. 주어진 것들에게서 그저 탈출하고자 안달이 나 있는 쪽은 이경이다.
  “춥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pg.25)”
  늦은 밤, 미군병사와 한 여자가 함께 걸어가는 광경을 보고, 이경은 사랑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 탓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큰 상심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춥다.”는 것은 크리스마스와 설을 전후한 엄동의 그 추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무렵이었으므로 평화를 믿지 않게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추위’가 이경의 곁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폭탄이 굉음을 내며 또 한 채의 집을 날려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바로 지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려고 한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미련한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흔드는 인물이 바로 황태수이다. 그는 중키에 평범한 얼굴을 가졌다. 이경은 곧바로 황태수의 외모를 주시한다.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외모를 묘사하는 그 부분은 이경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경은 옥희도의 외모를 묘사한 적이 없다. 옥희도에게서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상심이다. 그녀가 황태수의 외모를 먼저 본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에게서는 상심을 발견하지 못해 어떤 공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든지, 혹은 아래서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첫 만남의 구도 때문이라든지. 하지만 그녀에게 두 남자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 이경의 집착

  황태수는 이경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첫 데이트 장소인 유토피아에서 둘이 구석자리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네 명의 별 볼 일 없는 환쟁이들 사이에서 옥희도만을 생각하며, “나는 문득 옥희도 씨만은 다른 환쟁이들과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하고 바랐다.(pg.40)”고 말하는 그녀처럼 황태수도 난장판인 파티장에서 그녀를 끌고 나와 “너는 딴 여자들과는 좀 달라야 돼(pg.77).”라며 이경에게 자신의 여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이경이 당초 황태수에게 갖고 있었던 친숙한 느낌은 사라져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 느낌을 붙잡아두기 위해 쓸모없는 말을 하는 쪽은 역시 이경이다. 평범한 저 남자로부터도 이경은 별안간 어떤 위안을 받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황태수는 옥희도와 함께 이경의 일상을 버티는 튼튼한 기둥이 되는데, 그 형국은 기이하다. 황태수는 이경을 받쳐주고, 이경은 옥희도에게 기대어 있다.
  옥희도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경의 일방적인 이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연이은 결근에 불안해한다. “선생님이 좋아요. 괜찮겠죠?(pg.63)”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괜찮다고 대답한 옥희도로부터 사랑의 확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이다. 옥희도에게서 “침팬지의 고독(pg.66)”을 목도하는 것과 그가 자신을 사랑할까에 대한 그녀 스스로의 질문은 서로를 부정하며 얽혀 있다.
  때문에 옥희도가 결근했을 때, 그녀는 황태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라고 질문하지 않고 “혹시 여기를 그만두시려는 거 아닐까요?(pg.71)”라고 묻는다. 불안증은 문병을 가서도 계속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심화되었다고 해야 옳다. 옥희도의 아내가 예상 외로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자신의 ‘착함’에 화가 나고, 옥희도의 아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옥희도를 바가지 긁을 위인이 되지 못함에 또 한 번 화가 난다. 자신의 무릎에서 사과를 먹던 옥희도의 아이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이경의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더 화가 나는 까닭은 옥희도와 그의 아내가 그녀를 아이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옥희도에 대한 이와 같은 이경의 과도한 집착 반대편에는 황태수의 사려가 있다. 그는 이경에게 거의 모든 신경을 쓰면서 그녀가 한 말, 옷매무새, 머리스타일 등을 기억한다. 보통 이 정도라면 여자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사려일 것이다. 속으로 조바심을 느꼈을 것이지만 황태수는 이경이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 있는 “사과를 사근사근 먹는 볼이 붉은 사내애를 갖고 싶지 않아?”나 “그야 경아와 날 반반쯤 닮았겠지.(pg.82)”라는 말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넌지시 흘려놓는다.
  이경은 지금의 삶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저속한 말로 농을 주고받는 환쟁이들이 있다. 그들 무리로부터 자신이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인식에 대한 확신은 옥희도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황태수도 환쟁이의 무리와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따라서 옥희도 뿐만 아니라 그도 이경에게는 흥미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외모였다. 아니면 옥희도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그녀가 공감했던 상심이 부재했다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경이 벗어나고자 하는 삶은 저속한 세계가 아니라 허(虛)의 세계이다. 환쟁이들의 육담과 거리낌 없는 발화들로부터 연상되는 저 하급의 세계는 청소부 아줌마들, 그리고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파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좁은 견해를 가지고 세상에 대해 판단하고 욕을 하는, 그러한 걸쭉한 분위기에는 진씨가 이경을 울린 줄 알고 “맥없이 착해지는” 환쟁이들의 정도 담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러한 세계야말로 이경에게는 어머니의 회색빛과 완벽하게 대조되는 ‘인간냄새’ 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조차도 황태수는 이경을 분리시킨다. 두 번의 연이은 탈출을 생각지 못했던 것인지, 이경은 ‘불륜’이라는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옥희도를 사랑하려고 한다.

 

# 색, 변화

  철이 드는 것은 교활해지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우리가 흔히 주고받을 때 들을 수 있는 이 말의 함의는 수많은 역경들과 의미들 앞에서 물 흐르듯 대처하라는 뜻이리라. 반면 청춘은 장벽이 다가오면 부딪히고, 왜곡된 의미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기일 것이다. 남성독자인 내가 여성화자인 이경의 심정, 특히 옥희도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려는 놀라운 고집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한 것은 ‘청춘의 공통분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래가 두렵기는 하지만 적어도 조금이나마 이곳에 변화를 주고 이 몸과 주변에 색과 생기를 불어넣었으면 하는 바람이 당장의 역경보다 더욱 가까이에 있다.
  색과 생기가 없다면 역경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경에게는 ‘어둠’이 바로 그 역경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황태수의 애무를 받으면서도 바깥세상의 어둠의 알맞은 농도를 가늠하고 있는 모습이 이경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경을 딛기 위해 이경이 시도해본 것은 많다. 기타를 부수려고 어머니와 몸싸움을 벌였던 것이나, 황태수와의 데이트를 위해 설빔을 차려입는 장면 등이 그렇다. 특히 나는 후자를 인상 깊게 봤다.
  화려한 것, 다홍치마, 색동저고리. 색에 대한 갈구가 그녀에게 하나의 환상을 만든다. 사실 나는 이경이 환상 속에서 환하게 웃는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장면을 다소 의외라는 듯 읽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장면에서 옥희도가 나와야하는 순서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울 속에서 화사한 옷태를 뽐내던 이경은 2년 전의 그녀였다. 기타를 부수며 작별하고자 했던 과거보다 더 먼 과거의 존재.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기에 결핍된 희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받은 상흔, 그리고 ‘살벌한 거리;에서 그녀가 알게 된 지금에의 집착대로라면 화려한 옷은 옥희도에게 이어놓아야 할 탈출 욕구의 물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옥희도의 색은 회색이었다. 상심의 색. 때문에 이경이 설빔을 입고 나가 만난 사람은 황태수였다.
  기타를 부수는 것도, 설빔을 입는 것도 실패하고, 또한 청소도 실패한다.
  “엄마. 우린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 아녜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 게 아녜요?(pg.98)”
  휴일을 맞이해 집안을 청소하다가 이경은 ‘불로장생의 심벌’들을 닦는다. 어쩌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희망일 것이다. “조상들의 꿈을 아무리 공들여 닦아도 내 꿈이 달래지지는 않았다.(pg.99)”는 이경의 심정은 그녀가 단순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근시안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미숙과 이경의 대화는 이경이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미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상담을 받으러 찾아온 미숙에게 이경은 ‘잡종’이라는 단어로 큰 충격을 준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으나, 미숙은 그 단어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는 일종의 ‘터닝포인트’로 삼는다. 그런데 미숙이 이경에게 돌아와 한 말은 이렇다.
  “미국 가는 것 말구 또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를테면 결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한 거죠. 애기를 낳으려면 치러야 할 과정이랄까, 그런 걸 그 피 에프 씨와 갖는다는 상상조차 소름끼쳐요.(pg.125)”
  미래에 관한 계획으로 말하자면 그 인식의 수준은 미숙이 이경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경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결혼’이라는 단어를 애써 머리에서 지우려고 한 까닭일 수도 있겠다. 이 단어가 자신의 마음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하는 순간 이경이 생각해야 하는 건 ‘옥희도와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침팬지 인형 앞에서, 이경이 느끼기에 오랜만에 만난 옥희도와의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그저 옥희도와 함께 있는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다.

 

# 일그러지는 욕망

  옥희도가 아닌 다른 선택으로 현재의 어둠, 즉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큰아버지의 방문도 있었고, 말이(末伊)의 편지도 있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진이 오빠의 방문도 있었다. 그가 와서 이경에게 하고자 한 말의 핵심은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져라.(pg.140)”였다. ‘화안한’이라는 표현에 이경이 혹하기도 한다. 순간 그녀는 “빛과 기쁨이 있는 생활에의 갈망(pg.141)”을 느끼게 된다. 학업도 이을 수 있을 것이고, 원하는 것이라면 뭐라도 더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미워하고 김칫국을 마셔야 하는 일(pg.141)”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 또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부산으로 가려고 하지 못한다. 진이 오빠에게 속으로 욕을 해봐도 “미치지 않을 자신(pg.145)” 또한 없다.
  지우고 싶은 멍에가 새 출발을 저지하는 비가역적 관계에 대해, 나의 경험으로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잊고픈 기억이 자주 생각나는 때는 있지만 그것이 이경에게서 찾을 수 있는 극도의 불안으로 이어진 때를 나는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나는 그녀가 부산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어머니에 대한 미운 정을 꼽기도 했고, 옥희도를 혹 생각하는 건 아닌가를 의심도 해봤다. 모로 봐도 “지독한 한발(旱魃)의 땅(pg.126)”이라 표현한 이곳에서 이경은 얼어붙은 채 서 있는 것 같았다. 합리적 판단이 중지되고, 그로부터 말미암을 행동 역시 차단되어 있는 상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판단은 단순한 호오(好惡)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상징적으로 미숙과 다이아나 김의 대조를 들 수 있다. 미숙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다이아나 김에 대한 소문에 는 “낯가죽 두꺼운 쌍년(pg.153)”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사나운 감정으로 대응한다. 미숙이 질겁할 정도의 이 표현은 사실 소설 속에 나열된 이경의 심정 중 가장 선정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부정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안에 갇혀버린 채 세상을 판단하기도 한다. “나만 빼놓고 저희들끼리는 다 알고 있을 게다.(pg.155)”라며 오직 자신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해버린다. 얼마나 확신이 없냐면 침팬지 앞에 가는 것이 좋겠는지, 그조차도 모를 정도이다. 결정되지 않는 판단에 지쳤을 때, 이경이 선택한 건 황태수와의 저녁식사이다. 그 선택의 이유가 일차적이다.
  “상대가 반드시 태수여야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그냥 남성이라는 신비한 성(性)이 불의에 나를 유인하고, 나는 부득이 그와의 접촉에 황홀하게 애착했다.(pg.159)”
  그녀는 고민에서 벗어나 육체적인 감각으로 이내 돌아와 버린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소설의 후반부 전체를 지배할 단 하나의 사건으로 그녀를 빠뜨려버린다. 황태수의 형수에게 ‘동서’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옥희도 생각을 한다. 앞선 일은 그저 “부연 회색의 일부분(pg.167)”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반쪽의 사랑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채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망각하고 있는 이경에게 옥희도의 분명한 발언이 바로 다음 장(章)인 제 11장에서 쏟아지는 것은 전개 상 우연이 아니다. 이경은 옥희도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처음 쓴다. 그러나 옥희도로부터 돌아오는 말은 그녀가 바라는 말이 결코 아니었다.
  “어울리는 사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축복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pg.170)”
  자신은 철부지가 아니고, 이경 나이 또래의 딸도 있으므로 그녀와의 사랑은 파멸의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옥희도에게 있다. 따라서 그녀를 사랑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냉혹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러한 수준의 아픔이 이경에게는 부재한다. “염려 말고 저를 사랑하고 가지세요. 어차피 저에겐 긴 미래가 없을 테니까요.(pg.172)” 바로 전쟁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경의 생각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과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 지독한 반쪽의 슬픔과 허기증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 환희와 포만을 얻는 것일까(pg.173)”를 생각하는 장면을 읽으며 나는 그것이 옥희도와의 반쪽짜리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으나, 두 번째 독서에서는 저 안타까운 사랑이 다름 아닌 어머니와 이경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반쪽의 사랑은 환희와 포만을 얻을 수 없으므로 한쪽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이상 자신 역시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입될 ‘존재’가 옥희도일 수는 없다. 맹목적 집착은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존재’가 바로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이경의 생각들이 그 근거가 된다.
  “어떡하면 가끔 엄마의 딸이 되기를 고만둘 수 있을까고.(pg.173)”
  그리하여 이경은 의치를 끼네 마네의 문제로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문득 정돈된 장롱에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허와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장롱처럼 어머니도 ‘허’ 그 자체이다. 고가에 자신 혼자만 살고 있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pg.176)”이 든다.
  타인과 소통하고픈 생각에 진이 오빠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편지가 하고픈 말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어머니는 정상이다. 둘째, 혼란스러운 건 나다. 셋째, 나는 죽고 싶으면서도 살고 싶은 모순된 바람을 갖고 있다.

 

# 선홍빛 과거

  옥희도는 잠시 이경의 곁을 떠나있게 된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서 그림을 그릴 말미를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이경에게 다가온 존재는 옥희도와는 달리 이경에게 육체적 일탈의 욕망을 일깨워주는 ‘죠오’라는 지 아이이다. 그는 “높은 담장 작은 창 속의 신비(pg.196)”라는 표현으로 이경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담장을 넘어 창을 들여다보면 신비는 깨지게 될 것이다. 나는 레비나스가 미래를 여성의 신비성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얼핏 생각해냈다. 그리고 이경이 죠오에게 정복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도 이어졌다.
  나의 불안은 그녀가 죠오를 어떤 의미로 이용하려고 했는지 알게 된 후에 더욱 커졌다. 어머니와의 화해를 위해 이경은 빈대떡을 사가지고 돌아가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허로 딸과 마주한다. 결국 이경이 선택한 것은 죠오를 고가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어머니가 어떻게든 반응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죠오는 오지 않았고, 이경은 옥희도를 ‘간조오 날’을 핑계로 찾아가게 된다. 그녀는 단 하루도 그녀를 무의미한 세계 속에 놔두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의 인내심 없는 생각과 행동들은 독자들에게 청춘의 어지러운 이미지를 그대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옥희도의 집에 찾아가 이경이 보게 되는 것은 고목(枯木) 그림이다. 이경은 자신이 서 있는 땅과 비유하며 그 나무가 ‘한발(旱魃)’에 고사했다고 여긴다.
  “왜 그런 잔인한 한발이 고사시킨 고목을 나는 그의 캔버스에서 보았을까?(pg.206)”
  그림 앞에서 당혹감을 느낀 이경은 옥희도의 아내에게, 정상적인 마음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간섭을 쏟아내며 그녀도 당혹감을 느끼게 만든다. “넌, 도대체 뭐니?(pg.209)”라는 아내의 질문에 이경은 “내가 뭔지 몰라서 물어요?”라며 자신이 옥희도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선명하게 밝혀놓는다. 그럼에도 아내는 옥희도가 불륜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 속에 정말 모른다며 역정을 낸다.
  옥희도의 아내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이해심과 사려로 이 상황들을 자신만의 평온한 마음속에 용해시킬 것이 분명했다. 결핍은 오히려 이경에게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명백한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나는 지 아이의 기갈을 도울 수는 있어도 옥희도 씨의 기갈을 도울 수는 도저히 없음을 서글프게 깨닫는다.(pg.210)”
  이러한 깨달음은 다이아나 김을 만나 그녀를 속으로 실컷 욕해놓고, 막상 죠오를 찾아가게 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깨달음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그를 통해 수많은 군더더기의 나를 벗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나를 찢고, 때로는 내 뒤에 숨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제 나름으로 요변하는 여러 개의 나를 벗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죠오의 도움으로 나는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틀림없이 진짜 나를 보여줄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내 영육(靈肉)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pg.217)”
  이경은 속으로 자신의 행동이 다이아나 김과 결정적으로 다른 까닭은 그 ‘엽전’은 돈이면 다 되는 사람인 반면 자신은 사랑과 새로운 삶, 적나라한 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항변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행동은 다이아나 김의 것과, 즉 창부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연히도 죠오와의 관계에 앞서 이경은 붉은 침대시트로부터 과거를 기억해낸다. 사루비아의 역겨운 선홍빛 과거.

 

# 살고 싶다, 혹은 죽고 싶다.

  “여태껏 우리 식구만 유독 안온과 만복을 누렸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 없었다.(pg.233)”라는 구절은 하나의 복선과도 같다. 큰아버지 가족보다 아낀다는 까닭에 욱이와 혁이 오빠에게 더 은밀한 숨을 곳인 행랑채를 내주도록 한 이경의 보챔이 결과적으로는 끔찍한 참사로 이어졌다. “나 때문이었을까?(pg.258)”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자책했다. 그리고 이 자책은 어머니의 단 한 마디 넋두리를 곡해하게 만든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pg.243)”
  어머니는 분명 남아(男兒)를 선호하던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저 넋두리는 이경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녀에게 두 아들의 처참한 비명횡사는 극복하기 힘든 이미지로 매우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생각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이경은 뒷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이경이 가끔 던져보곤 했던 어머니와의 좋은 기억으로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마디의 넋두리가 이경과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순식간에 벌려놓았고, 정서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로 확인되었다. 어머니는 신열이 있거나 주로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빨리 회복한 이경은 마당의 은행나무 밑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죽고 싶다.”라는 막연한 감정 사이로 키워갔다.
  “Don't break me.”
  이 외마디의 외침은 분명 은행나무 밑에서 그녀가 키워왔던 의지로부터 세차게 뻗어 나온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찾아간 곳은 옥희도의 집이었고, 집 앞에서 부른 건 옥희도가 아니라 “아주머니(pg.249)”였다. 자신에게 “죽고 싶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애석하게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말라비틀어진 고목, 그녀가 옥희도의 그림 속에서 봤던 그 고목으로 상징될 수 있을 어머니가 아닌 풍만한 옥희도의 아내에게 기대고 싶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잠을 청하며 옥희도와 아내 사이를 질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예전보다 한결 얌전해졌다. 격렬한 감정은 꿈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간밤의 휴식으로 이경의 질투는 예전의 날 선 모양으로 형태를 갖춰갔다.
  “신세 많이 졌어요. 꼭 갚고야 말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pg.257)”
  옥희도의 아내에 대한 질투는 다이아나 김에 대한 혐오로 곧장 이어졌다. 자신에게 더 관대해진 탓이다. 그녀는 질투와 혐오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절박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고, 옥희도의 아내에게는 질투를, 그리고 다이아나 김에게는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 이러한 노력 속에는 옥희도와의 사랑을 위해 윤리를 하나의 훼방요소로 보는 삐딱한 인식이 흘러넘친다.
  “언닌 화냥년만도 훨씬 못하군요.(pg.262)”
  그러나 현실은 그저 그러한 것만도 못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우리[柵]속에 갇힌 원숭이”로 본다. 그 ‘우리[柵]’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선 사건들로부터 충분히 밝혀져 있다. 만약 그녀가 질투와 혐오를 통해 그 우리를 깨보려고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 식어간다는 것

  바로 그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바로 그 무렵’이란 그녀가 질투와 혐오로 또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함직한 때이다. 황태수의 형수, 즉 사돈댁이 상(喪)을 도맡아 처리하고, 이경은 맥없이 이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건은 옥희도의 아내가 위로하러 왔을 때 비로소 터진다. 호곡을 위한 엉뚱한 생각으로 문상 온 사람을 충분히 속일 수 있으리라 예상한 이경은 “거짓말이에요.”, “나 같은 걸 기다릴 게 뭐예요? 후후후……(pg.281)”라며 자신이 그동안 어머니와 상당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경의 엉뚱한 생각을 가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진실이라 믿게 된다. 이경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인데, 더 이상 역정을 낼 기운도 없이 그녀는 포기한다.
  “아무렴 그렇구말구. 가엾은 것!(pg.281)”
  이경이 가장 듣기 싫어하던 종류의 연민으로부터 그녀는 또 한 번 공격을 받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타의로 또 하나의 내(pg.282)”가 되는데, 이 과정은 그녀가 사회에 녹아드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것과 다름없다. 소설 속의 상황은 이경이 황태수와 결혼하기 바로 직전의 분위기에 이르게 되고, 일은 사돈댁의 부산한 움직임 탓에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만 같아 보였다.
  이경도 속도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황태수와 옥희도를 한 자리에서 만나 둘 중 한 사람의 일을 처리해야만 될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삼자대면의 긴장에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옥희도였다. 그에게는 이경이 아니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네.(pg.289)” 그리고 자신이 이경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이경과 옥희도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옥희도가 화가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던 그 날들을 “회색빛 절망(pg.290)”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곳에서 색채를 갈구했고, 그러한 갈구는 이경이 알록달록한 설빔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장면과 정확히 대응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부도덕할 수밖에 없는 갈구였다. 이 점에서 옥희도와 이경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네에게 이런 책망을 듣기 전에 경아와의 사이가 끝나 있어야 하는 건데……(pg.291)”
  이경은 옥희도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줄 몰랐다. 옥희도는 그것이 이경을 더 옭아매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마지막에는 홀로 서서 용감한 고아가 되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보면 옥희도의 비겁함을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림으로 곧 안정을 찾게 될 것이었고, 곁에는 늘 그렇듯 가족이 있을 것이었다. 이경에게서 색채에의 갈구를 발견했으나 그것이 부도덕한 일임을 알았을 때, 그는 언제라도 이경을 떨쳐낼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겁함이라는 것은 이경에게도 씌워져 있는 죄목이다. 그녀는 옥희도의 아내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감을 혐오로 바꿔 옥희도를 독차지하고 싶어 했으니. 혹 이경이 속마음으로는 황태수로의 회귀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 그녀가 황태수에게 돌아가 첫 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 말이다.

 

# 청춘, 여행

  나는 17장의 해석에 집중하면서 이 소설을 도저히 성장소설로는 읽지 못하겠다는 나의 원색적인 직관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부산에 있는 친척이나 ‘사돈댁’의 시선에서야 어엿한 사회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결말이겠지만 이경의 청춘은 적어도 그녀의 입장으로 보자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실패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자주 상기된다.
  “남편 태수가 미처 소유하지도 상처내지도 못한 또 하나의 나. 나의 체온이 끝내 데울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나.(pg.297)”
  그 ‘나’라는 것은 이경 스스로도 어떻게 해보지 못했던 청춘의 그 날카로운 집착과 왜곡된 열정, 그로 인해 때론 선명하게도 보였을 비도덕적인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상식적 궤도로 이끄는 황태수로부터 이질감을 느끼곤 하는 이경은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에게 편한 아내가 되고자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말뿐인 감정일 수도 있다. 남편의 의지에 따라 집을 다 뜯어고쳤지만 은행나무만은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한 모퉁이가 내 은밀한 곳에 남겨진 것이다.(pg.300)”
  옥희도의 유작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하는 남편을 비꼬며 “당신이 생각해 낼 만한 천박한 추측이군.”이라든지, “당신 따위가 알 게 뭐예요.(pg.300)”라는 속마음을 감추는 그녀에게 상식의 세계는 여전히 청춘의 실패가 낳은 불완전한 연장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정보다도 갈망이 앞서고 있고, 가족을 앞에 두고도 은행잎에서 훈향을 찾고자 더듬거리는 모습도 그러하다. 유작전에 도착해 나목(裸木)을 보는 장면에서는 자신이 과거에 한 여인이었음을 새삼 되새김질한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pg.304)”
  남편은 그런 서성거림에서 자신을 구한 존재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낯설다. 그녀의 눈에는 늦가을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어린 나무들이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pg.306)” 못하는 청춘의 존재들로 비춰진다.
  그녀는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모든 존재들이란 서로에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후부터 그녀가 겪은 인간관계라는 것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선명한 거리이고, 그녀가 억지로라도 좁혀보려고 했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적어도 열정적이지 못한 ‘아내’로의 삶을 반추해보건대 이경은 “오랜 여행(pg.304)”을 막연하게나마 동경하고 있진 않았을까. 중년의 황태수가 낯선 것처럼 중년의 자신도 그녀는 그렇게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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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0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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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2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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