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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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유종호는 <나목>을 일컬어 "청춘의 책"이라고 했다.

 

  ‘청춘(靑春)’하면 나는 한 가지 떠오르는 심상이 있다. 맛있는 차(茶)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께서 펄펄 끓는 물에 대추를 몇 알 던져 넣으시고, 내가 그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장면. 대추는 유리냄비를 빠져나갈 듯 말 듯, 엄청난 열기들로부터 추진력을 받아 수 십 번이고 뛰어오른다. 하지만 대추는 결코 냄비를 탈출하지 못한다. 불과 같은 청춘의 열정은 혁명을 이룩하지 못한 채, 철이 들어버린다.


  많은 평론가들이 <나목>을 '성장소설'로 분류하고, <나목>은 우리나라 여성작가가 쓴 거의 최초의 '여성성장소설'이라는 기념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故 박완서의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 아니었다. 레포트를 쓰기 위해 두 세 번 고쳐 읽고, 마지막 장인 17장을 뜯어보고 다시 봐도, 나는 어린 가지가 서로 몸을 부대끼며 바람 속에 추워하듯 11월 중순 지금의 바람에 내던져진 나의 나신(裸身)을 생각해냈다. 별 볼 일 없는. 나는 발달한다. 수많은 것들이 덧붙여진다. 그러나 발전하진 않는다. 과연 나는 성장하는 것일까. 인격은 도야하고, 목표는 성취되고 있는 것일까.


  빈둥거리다가도 불현듯 책을 붙잡고 새벽을 보내던 중 나는 "그래, 나는 발전하고 있어."라고 으레 자부한다. 하지만 포만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자부심과 병렬된 상실감에 무릎을 꿇는 것은 정말이지 비참한 일이다.


  예쁘고, 잘 생기고, 아름답고, 멋진 청춘들의 사이에서 나는 이경처럼 나 혼자만 아무런 계획 없이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목>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문장이 되어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책 옆면에 새겨져 활짝 웃고 있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인에게 묻고 싶었다. 회색빛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나목>을 꼼꼼하게 되새기고자 레포트의 글을 옮겼다. 지금까지 쓴 리뷰 중 가장 길 것이다.

 

 

 

*    *    *

 

 

# 공허,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이경이 좋아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의 회사하고 매력적인 상품들, 그 풍요한 상품들을 후광처럼 등지고 서서 저녁 화장에 여념이 없는 세일즈 걸들. 나는 이런 것들을 바라보기를 즐겼다.(pg.11)”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들에게 매료되는 것은 청춘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속이 비어 있는지 들여다보기도 전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경처럼 불만족스러운 주변 환경에 놓인 처지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그런 곳에서 좀 더 멀리 있고 싶었다. 적어도 대구나 부산쯤, 전쟁에서 멀고 집집마다 불빛이 있고 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는 곳에 있고 싶었다.(pg.12)”
  저속한 농(弄)이나 불평을 쏟아내기 일쑤인 네 명의 환쟁이들, 혹은 상스러운 최만길보다 이경의 삶을 근원 모를 어두운 곳에서부터 잡아 붙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이경의 사이에서는 으레 부녀(婦女) 사이에 오고갈 다정다감한 대화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혹 부자지간이라면 이런 광경이 잦을 수는 있을 것이다. 평소 별 의미 없는 말들로 서로 머쓱해하는 ‘아버지-아들’ 관계는 이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남자들의 정이 오고 가는 무언(無言)의 과정은 있다. 말이 적을 뿐이다.
  반면, 이경과 어머니 사이에는 창백한 허무가 가득 차 있다. “짜증”, “왈칵왈칵 치미는 혐오감”, “어머니가 싫고 미웠다.(pg.14)” 등의 고백들은 이경이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회색 풍경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떼어낼 수 없는 현재의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경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인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보낼 것이고, 수많은 지아이(GI)들을 만날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품들’과 ‘세일즈걸들’도 원한다면 하루 종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집은 어머니의 공간이다. 원치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한 이경의 묘사는 섬뜩하리만치 어둡고 무섭다.
  “그 속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얼마나 세차게 꿈틀대고 있는지를.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덩달아, 누구를, 무엇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pg.16)”
  검은 홀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한 공포와 혐오가 이경의 청춘을 가로 막고 있으므로 그녀는 사랑하고 싶어도 누구라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체증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이경에게 옥희도가 나타난 소설 속 사건은 청춘의 한 단면이 갑자기 부각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 옥희도, 황태수

  이경이 옥희도를 만났을 무렵, 이경의 심정은 복잡했다.
  “잠시 그와 나의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섬뜩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주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 같아서였다.(pg.22)”
  그녀는 옥희도와 마주친 첫 눈길에서 그의 상태에 대해 정확한 단서들을 포착한다. 네 명의 환쟁이들이 퇴근하고 남은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적에는 “훈훈한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단순한 호감 이상의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사이를 보며 나는 얼마 후 한 편의 애잔한 러브스토리가 진행될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아직까지는 일방적인 관심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방에 관심이 오고 갔다고 하더라도 관심의 정도는 이경의 것이 옥희도의 것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옥희도는 의자에 앉아 묵묵히 초상화를 그리듯 자신에게 내려앉은 모든 상황과 그로 인한 고독을 인내하고 있다. 주어진 것들에게서 그저 탈출하고자 안달이 나 있는 쪽은 이경이다.
  “춥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pg.25)”
  늦은 밤, 미군병사와 한 여자가 함께 걸어가는 광경을 보고, 이경은 사랑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 탓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큰 상심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춥다.”는 것은 크리스마스와 설을 전후한 엄동의 그 추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무렵이었으므로 평화를 믿지 않게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추위’가 이경의 곁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폭탄이 굉음을 내며 또 한 채의 집을 날려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바로 지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려고 한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미련한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흔드는 인물이 바로 황태수이다. 그는 중키에 평범한 얼굴을 가졌다. 이경은 곧바로 황태수의 외모를 주시한다.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외모를 묘사하는 그 부분은 이경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경은 옥희도의 외모를 묘사한 적이 없다. 옥희도에게서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상심이다. 그녀가 황태수의 외모를 먼저 본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에게서는 상심을 발견하지 못해 어떤 공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든지, 혹은 아래서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첫 만남의 구도 때문이라든지. 하지만 그녀에게 두 남자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 이경의 집착

  황태수는 이경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첫 데이트 장소인 유토피아에서 둘이 구석자리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네 명의 별 볼 일 없는 환쟁이들 사이에서 옥희도만을 생각하며, “나는 문득 옥희도 씨만은 다른 환쟁이들과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하고 바랐다.(pg.40)”고 말하는 그녀처럼 황태수도 난장판인 파티장에서 그녀를 끌고 나와 “너는 딴 여자들과는 좀 달라야 돼(pg.77).”라며 이경에게 자신의 여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이경이 당초 황태수에게 갖고 있었던 친숙한 느낌은 사라져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 느낌을 붙잡아두기 위해 쓸모없는 말을 하는 쪽은 역시 이경이다. 평범한 저 남자로부터도 이경은 별안간 어떤 위안을 받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황태수는 옥희도와 함께 이경의 일상을 버티는 튼튼한 기둥이 되는데, 그 형국은 기이하다. 황태수는 이경을 받쳐주고, 이경은 옥희도에게 기대어 있다.
  옥희도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경의 일방적인 이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연이은 결근에 불안해한다. “선생님이 좋아요. 괜찮겠죠?(pg.63)”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괜찮다고 대답한 옥희도로부터 사랑의 확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이다. 옥희도에게서 “침팬지의 고독(pg.66)”을 목도하는 것과 그가 자신을 사랑할까에 대한 그녀 스스로의 질문은 서로를 부정하며 얽혀 있다.
  때문에 옥희도가 결근했을 때, 그녀는 황태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라고 질문하지 않고 “혹시 여기를 그만두시려는 거 아닐까요?(pg.71)”라고 묻는다. 불안증은 문병을 가서도 계속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심화되었다고 해야 옳다. 옥희도의 아내가 예상 외로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자신의 ‘착함’에 화가 나고, 옥희도의 아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옥희도를 바가지 긁을 위인이 되지 못함에 또 한 번 화가 난다. 자신의 무릎에서 사과를 먹던 옥희도의 아이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이경의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더 화가 나는 까닭은 옥희도와 그의 아내가 그녀를 아이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옥희도에 대한 이와 같은 이경의 과도한 집착 반대편에는 황태수의 사려가 있다. 그는 이경에게 거의 모든 신경을 쓰면서 그녀가 한 말, 옷매무새, 머리스타일 등을 기억한다. 보통 이 정도라면 여자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사려일 것이다. 속으로 조바심을 느꼈을 것이지만 황태수는 이경이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 있는 “사과를 사근사근 먹는 볼이 붉은 사내애를 갖고 싶지 않아?”나 “그야 경아와 날 반반쯤 닮았겠지.(pg.82)”라는 말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넌지시 흘려놓는다.
  이경은 지금의 삶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저속한 말로 농을 주고받는 환쟁이들이 있다. 그들 무리로부터 자신이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인식에 대한 확신은 옥희도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황태수도 환쟁이의 무리와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따라서 옥희도 뿐만 아니라 그도 이경에게는 흥미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외모였다. 아니면 옥희도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그녀가 공감했던 상심이 부재했다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경이 벗어나고자 하는 삶은 저속한 세계가 아니라 허(虛)의 세계이다. 환쟁이들의 육담과 거리낌 없는 발화들로부터 연상되는 저 하급의 세계는 청소부 아줌마들, 그리고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파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좁은 견해를 가지고 세상에 대해 판단하고 욕을 하는, 그러한 걸쭉한 분위기에는 진씨가 이경을 울린 줄 알고 “맥없이 착해지는” 환쟁이들의 정도 담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러한 세계야말로 이경에게는 어머니의 회색빛과 완벽하게 대조되는 ‘인간냄새’ 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조차도 황태수는 이경을 분리시킨다. 두 번의 연이은 탈출을 생각지 못했던 것인지, 이경은 ‘불륜’이라는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옥희도를 사랑하려고 한다.

 

# 색, 변화

  철이 드는 것은 교활해지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우리가 흔히 주고받을 때 들을 수 있는 이 말의 함의는 수많은 역경들과 의미들 앞에서 물 흐르듯 대처하라는 뜻이리라. 반면 청춘은 장벽이 다가오면 부딪히고, 왜곡된 의미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기일 것이다. 남성독자인 내가 여성화자인 이경의 심정, 특히 옥희도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려는 놀라운 고집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한 것은 ‘청춘의 공통분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래가 두렵기는 하지만 적어도 조금이나마 이곳에 변화를 주고 이 몸과 주변에 색과 생기를 불어넣었으면 하는 바람이 당장의 역경보다 더욱 가까이에 있다.
  색과 생기가 없다면 역경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경에게는 ‘어둠’이 바로 그 역경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황태수의 애무를 받으면서도 바깥세상의 어둠의 알맞은 농도를 가늠하고 있는 모습이 이경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경을 딛기 위해 이경이 시도해본 것은 많다. 기타를 부수려고 어머니와 몸싸움을 벌였던 것이나, 황태수와의 데이트를 위해 설빔을 차려입는 장면 등이 그렇다. 특히 나는 후자를 인상 깊게 봤다.
  화려한 것, 다홍치마, 색동저고리. 색에 대한 갈구가 그녀에게 하나의 환상을 만든다. 사실 나는 이경이 환상 속에서 환하게 웃는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장면을 다소 의외라는 듯 읽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장면에서 옥희도가 나와야하는 순서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울 속에서 화사한 옷태를 뽐내던 이경은 2년 전의 그녀였다. 기타를 부수며 작별하고자 했던 과거보다 더 먼 과거의 존재.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기에 결핍된 희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받은 상흔, 그리고 ‘살벌한 거리;에서 그녀가 알게 된 지금에의 집착대로라면 화려한 옷은 옥희도에게 이어놓아야 할 탈출 욕구의 물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옥희도의 색은 회색이었다. 상심의 색. 때문에 이경이 설빔을 입고 나가 만난 사람은 황태수였다.
  기타를 부수는 것도, 설빔을 입는 것도 실패하고, 또한 청소도 실패한다.
  “엄마. 우린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 아녜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 게 아녜요?(pg.98)”
  휴일을 맞이해 집안을 청소하다가 이경은 ‘불로장생의 심벌’들을 닦는다. 어쩌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희망일 것이다. “조상들의 꿈을 아무리 공들여 닦아도 내 꿈이 달래지지는 않았다.(pg.99)”는 이경의 심정은 그녀가 단순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근시안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미숙과 이경의 대화는 이경이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미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상담을 받으러 찾아온 미숙에게 이경은 ‘잡종’이라는 단어로 큰 충격을 준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으나, 미숙은 그 단어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는 일종의 ‘터닝포인트’로 삼는다. 그런데 미숙이 이경에게 돌아와 한 말은 이렇다.
  “미국 가는 것 말구 또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를테면 결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한 거죠. 애기를 낳으려면 치러야 할 과정이랄까, 그런 걸 그 피 에프 씨와 갖는다는 상상조차 소름끼쳐요.(pg.125)”
  미래에 관한 계획으로 말하자면 그 인식의 수준은 미숙이 이경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경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결혼’이라는 단어를 애써 머리에서 지우려고 한 까닭일 수도 있겠다. 이 단어가 자신의 마음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하는 순간 이경이 생각해야 하는 건 ‘옥희도와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침팬지 인형 앞에서, 이경이 느끼기에 오랜만에 만난 옥희도와의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그저 옥희도와 함께 있는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다.

 

# 일그러지는 욕망

  옥희도가 아닌 다른 선택으로 현재의 어둠, 즉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큰아버지의 방문도 있었고, 말이(末伊)의 편지도 있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진이 오빠의 방문도 있었다. 그가 와서 이경에게 하고자 한 말의 핵심은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져라.(pg.140)”였다. ‘화안한’이라는 표현에 이경이 혹하기도 한다. 순간 그녀는 “빛과 기쁨이 있는 생활에의 갈망(pg.141)”을 느끼게 된다. 학업도 이을 수 있을 것이고, 원하는 것이라면 뭐라도 더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미워하고 김칫국을 마셔야 하는 일(pg.141)”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 또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부산으로 가려고 하지 못한다. 진이 오빠에게 속으로 욕을 해봐도 “미치지 않을 자신(pg.145)” 또한 없다.
  지우고 싶은 멍에가 새 출발을 저지하는 비가역적 관계에 대해, 나의 경험으로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잊고픈 기억이 자주 생각나는 때는 있지만 그것이 이경에게서 찾을 수 있는 극도의 불안으로 이어진 때를 나는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나는 그녀가 부산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어머니에 대한 미운 정을 꼽기도 했고, 옥희도를 혹 생각하는 건 아닌가를 의심도 해봤다. 모로 봐도 “지독한 한발(旱魃)의 땅(pg.126)”이라 표현한 이곳에서 이경은 얼어붙은 채 서 있는 것 같았다. 합리적 판단이 중지되고, 그로부터 말미암을 행동 역시 차단되어 있는 상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판단은 단순한 호오(好惡)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상징적으로 미숙과 다이아나 김의 대조를 들 수 있다. 미숙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다이아나 김에 대한 소문에 는 “낯가죽 두꺼운 쌍년(pg.153)”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사나운 감정으로 대응한다. 미숙이 질겁할 정도의 이 표현은 사실 소설 속에 나열된 이경의 심정 중 가장 선정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부정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안에 갇혀버린 채 세상을 판단하기도 한다. “나만 빼놓고 저희들끼리는 다 알고 있을 게다.(pg.155)”라며 오직 자신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해버린다. 얼마나 확신이 없냐면 침팬지 앞에 가는 것이 좋겠는지, 그조차도 모를 정도이다. 결정되지 않는 판단에 지쳤을 때, 이경이 선택한 건 황태수와의 저녁식사이다. 그 선택의 이유가 일차적이다.
  “상대가 반드시 태수여야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그냥 남성이라는 신비한 성(性)이 불의에 나를 유인하고, 나는 부득이 그와의 접촉에 황홀하게 애착했다.(pg.159)”
  그녀는 고민에서 벗어나 육체적인 감각으로 이내 돌아와 버린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소설의 후반부 전체를 지배할 단 하나의 사건으로 그녀를 빠뜨려버린다. 황태수의 형수에게 ‘동서’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옥희도 생각을 한다. 앞선 일은 그저 “부연 회색의 일부분(pg.167)”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반쪽의 사랑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채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망각하고 있는 이경에게 옥희도의 분명한 발언이 바로 다음 장(章)인 제 11장에서 쏟아지는 것은 전개 상 우연이 아니다. 이경은 옥희도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처음 쓴다. 그러나 옥희도로부터 돌아오는 말은 그녀가 바라는 말이 결코 아니었다.
  “어울리는 사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축복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pg.170)”
  자신은 철부지가 아니고, 이경 나이 또래의 딸도 있으므로 그녀와의 사랑은 파멸의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옥희도에게 있다. 따라서 그녀를 사랑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냉혹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러한 수준의 아픔이 이경에게는 부재한다. “염려 말고 저를 사랑하고 가지세요. 어차피 저에겐 긴 미래가 없을 테니까요.(pg.172)” 바로 전쟁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경의 생각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과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 지독한 반쪽의 슬픔과 허기증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 환희와 포만을 얻는 것일까(pg.173)”를 생각하는 장면을 읽으며 나는 그것이 옥희도와의 반쪽짜리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으나, 두 번째 독서에서는 저 안타까운 사랑이 다름 아닌 어머니와 이경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반쪽의 사랑은 환희와 포만을 얻을 수 없으므로 한쪽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이상 자신 역시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입될 ‘존재’가 옥희도일 수는 없다. 맹목적 집착은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존재’가 바로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이경의 생각들이 그 근거가 된다.
  “어떡하면 가끔 엄마의 딸이 되기를 고만둘 수 있을까고.(pg.173)”
  그리하여 이경은 의치를 끼네 마네의 문제로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문득 정돈된 장롱에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허와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장롱처럼 어머니도 ‘허’ 그 자체이다. 고가에 자신 혼자만 살고 있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pg.176)”이 든다.
  타인과 소통하고픈 생각에 진이 오빠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편지가 하고픈 말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어머니는 정상이다. 둘째, 혼란스러운 건 나다. 셋째, 나는 죽고 싶으면서도 살고 싶은 모순된 바람을 갖고 있다.

 

# 선홍빛 과거

  옥희도는 잠시 이경의 곁을 떠나있게 된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서 그림을 그릴 말미를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이경에게 다가온 존재는 옥희도와는 달리 이경에게 육체적 일탈의 욕망을 일깨워주는 ‘죠오’라는 지 아이이다. 그는 “높은 담장 작은 창 속의 신비(pg.196)”라는 표현으로 이경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담장을 넘어 창을 들여다보면 신비는 깨지게 될 것이다. 나는 레비나스가 미래를 여성의 신비성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얼핏 생각해냈다. 그리고 이경이 죠오에게 정복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도 이어졌다.
  나의 불안은 그녀가 죠오를 어떤 의미로 이용하려고 했는지 알게 된 후에 더욱 커졌다. 어머니와의 화해를 위해 이경은 빈대떡을 사가지고 돌아가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허로 딸과 마주한다. 결국 이경이 선택한 것은 죠오를 고가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어머니가 어떻게든 반응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죠오는 오지 않았고, 이경은 옥희도를 ‘간조오 날’을 핑계로 찾아가게 된다. 그녀는 단 하루도 그녀를 무의미한 세계 속에 놔두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의 인내심 없는 생각과 행동들은 독자들에게 청춘의 어지러운 이미지를 그대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옥희도의 집에 찾아가 이경이 보게 되는 것은 고목(枯木) 그림이다. 이경은 자신이 서 있는 땅과 비유하며 그 나무가 ‘한발(旱魃)’에 고사했다고 여긴다.
  “왜 그런 잔인한 한발이 고사시킨 고목을 나는 그의 캔버스에서 보았을까?(pg.206)”
  그림 앞에서 당혹감을 느낀 이경은 옥희도의 아내에게, 정상적인 마음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간섭을 쏟아내며 그녀도 당혹감을 느끼게 만든다. “넌, 도대체 뭐니?(pg.209)”라는 아내의 질문에 이경은 “내가 뭔지 몰라서 물어요?”라며 자신이 옥희도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선명하게 밝혀놓는다. 그럼에도 아내는 옥희도가 불륜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 속에 정말 모른다며 역정을 낸다.
  옥희도의 아내는 그녀가 가진 특유의 이해심과 사려로 이 상황들을 자신만의 평온한 마음속에 용해시킬 것이 분명했다. 결핍은 오히려 이경에게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명백한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나는 지 아이의 기갈을 도울 수는 있어도 옥희도 씨의 기갈을 도울 수는 도저히 없음을 서글프게 깨닫는다.(pg.210)”
  이러한 깨달음은 다이아나 김을 만나 그녀를 속으로 실컷 욕해놓고, 막상 죠오를 찾아가게 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깨달음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그를 통해 수많은 군더더기의 나를 벗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나를 찢고, 때로는 내 뒤에 숨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제 나름으로 요변하는 여러 개의 나를 벗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죠오의 도움으로 나는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틀림없이 진짜 나를 보여줄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내 영육(靈肉)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pg.217)”
  이경은 속으로 자신의 행동이 다이아나 김과 결정적으로 다른 까닭은 그 ‘엽전’은 돈이면 다 되는 사람인 반면 자신은 사랑과 새로운 삶, 적나라한 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항변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행동은 다이아나 김의 것과, 즉 창부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연히도 죠오와의 관계에 앞서 이경은 붉은 침대시트로부터 과거를 기억해낸다. 사루비아의 역겨운 선홍빛 과거.

 

# 살고 싶다, 혹은 죽고 싶다.

  “여태껏 우리 식구만 유독 안온과 만복을 누렸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 없었다.(pg.233)”라는 구절은 하나의 복선과도 같다. 큰아버지 가족보다 아낀다는 까닭에 욱이와 혁이 오빠에게 더 은밀한 숨을 곳인 행랑채를 내주도록 한 이경의 보챔이 결과적으로는 끔찍한 참사로 이어졌다. “나 때문이었을까?(pg.258)”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자책했다. 그리고 이 자책은 어머니의 단 한 마디 넋두리를 곡해하게 만든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pg.243)”
  어머니는 분명 남아(男兒)를 선호하던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저 넋두리는 이경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녀에게 두 아들의 처참한 비명횡사는 극복하기 힘든 이미지로 매우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생각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이경은 뒷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이경이 가끔 던져보곤 했던 어머니와의 좋은 기억으로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마디의 넋두리가 이경과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순식간에 벌려놓았고, 정서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로 확인되었다. 어머니는 신열이 있거나 주로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빨리 회복한 이경은 마당의 은행나무 밑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죽고 싶다.”라는 막연한 감정 사이로 키워갔다.
  “Don't break me.”
  이 외마디의 외침은 분명 은행나무 밑에서 그녀가 키워왔던 의지로부터 세차게 뻗어 나온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찾아간 곳은 옥희도의 집이었고, 집 앞에서 부른 건 옥희도가 아니라 “아주머니(pg.249)”였다. 자신에게 “죽고 싶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애석하게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말라비틀어진 고목, 그녀가 옥희도의 그림 속에서 봤던 그 고목으로 상징될 수 있을 어머니가 아닌 풍만한 옥희도의 아내에게 기대고 싶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잠을 청하며 옥희도와 아내 사이를 질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예전보다 한결 얌전해졌다. 격렬한 감정은 꿈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간밤의 휴식으로 이경의 질투는 예전의 날 선 모양으로 형태를 갖춰갔다.
  “신세 많이 졌어요. 꼭 갚고야 말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pg.257)”
  옥희도의 아내에 대한 질투는 다이아나 김에 대한 혐오로 곧장 이어졌다. 자신에게 더 관대해진 탓이다. 그녀는 질투와 혐오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절박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고, 옥희도의 아내에게는 질투를, 그리고 다이아나 김에게는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 이러한 노력 속에는 옥희도와의 사랑을 위해 윤리를 하나의 훼방요소로 보는 삐딱한 인식이 흘러넘친다.
  “언닌 화냥년만도 훨씬 못하군요.(pg.262)”
  그러나 현실은 그저 그러한 것만도 못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우리[柵]속에 갇힌 원숭이”로 본다. 그 ‘우리[柵]’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선 사건들로부터 충분히 밝혀져 있다. 만약 그녀가 질투와 혐오를 통해 그 우리를 깨보려고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 식어간다는 것

  바로 그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바로 그 무렵’이란 그녀가 질투와 혐오로 또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함직한 때이다. 황태수의 형수, 즉 사돈댁이 상(喪)을 도맡아 처리하고, 이경은 맥없이 이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건은 옥희도의 아내가 위로하러 왔을 때 비로소 터진다. 호곡을 위한 엉뚱한 생각으로 문상 온 사람을 충분히 속일 수 있으리라 예상한 이경은 “거짓말이에요.”, “나 같은 걸 기다릴 게 뭐예요? 후후후……(pg.281)”라며 자신이 그동안 어머니와 상당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경의 엉뚱한 생각을 가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진실이라 믿게 된다. 이경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인데, 더 이상 역정을 낼 기운도 없이 그녀는 포기한다.
  “아무렴 그렇구말구. 가엾은 것!(pg.281)”
  이경이 가장 듣기 싫어하던 종류의 연민으로부터 그녀는 또 한 번 공격을 받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타의로 또 하나의 내(pg.282)”가 되는데, 이 과정은 그녀가 사회에 녹아드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것과 다름없다. 소설 속의 상황은 이경이 황태수와 결혼하기 바로 직전의 분위기에 이르게 되고, 일은 사돈댁의 부산한 움직임 탓에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만 같아 보였다.
  이경도 속도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황태수와 옥희도를 한 자리에서 만나 둘 중 한 사람의 일을 처리해야만 될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삼자대면의 긴장에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옥희도였다. 그에게는 이경이 아니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네.(pg.289)” 그리고 자신이 이경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이경과 옥희도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옥희도가 화가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던 그 날들을 “회색빛 절망(pg.290)”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곳에서 색채를 갈구했고, 그러한 갈구는 이경이 알록달록한 설빔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장면과 정확히 대응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부도덕할 수밖에 없는 갈구였다. 이 점에서 옥희도와 이경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네에게 이런 책망을 듣기 전에 경아와의 사이가 끝나 있어야 하는 건데……(pg.291)”
  이경은 옥희도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줄 몰랐다. 옥희도는 그것이 이경을 더 옭아매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마지막에는 홀로 서서 용감한 고아가 되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보면 옥희도의 비겁함을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림으로 곧 안정을 찾게 될 것이었고, 곁에는 늘 그렇듯 가족이 있을 것이었다. 이경에게서 색채에의 갈구를 발견했으나 그것이 부도덕한 일임을 알았을 때, 그는 언제라도 이경을 떨쳐낼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겁함이라는 것은 이경에게도 씌워져 있는 죄목이다. 그녀는 옥희도의 아내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감을 혐오로 바꿔 옥희도를 독차지하고 싶어 했으니. 혹 이경이 속마음으로는 황태수로의 회귀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 그녀가 황태수에게 돌아가 첫 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 말이다.

 

# 청춘, 여행

  나는 17장의 해석에 집중하면서 이 소설을 도저히 성장소설로는 읽지 못하겠다는 나의 원색적인 직관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부산에 있는 친척이나 ‘사돈댁’의 시선에서야 어엿한 사회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결말이겠지만 이경의 청춘은 적어도 그녀의 입장으로 보자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실패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자주 상기된다.
  “남편 태수가 미처 소유하지도 상처내지도 못한 또 하나의 나. 나의 체온이 끝내 데울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나.(pg.297)”
  그 ‘나’라는 것은 이경 스스로도 어떻게 해보지 못했던 청춘의 그 날카로운 집착과 왜곡된 열정, 그로 인해 때론 선명하게도 보였을 비도덕적인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상식적 궤도로 이끄는 황태수로부터 이질감을 느끼곤 하는 이경은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에게 편한 아내가 되고자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말뿐인 감정일 수도 있다. 남편의 의지에 따라 집을 다 뜯어고쳤지만 은행나무만은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한 모퉁이가 내 은밀한 곳에 남겨진 것이다.(pg.300)”
  옥희도의 유작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하는 남편을 비꼬며 “당신이 생각해 낼 만한 천박한 추측이군.”이라든지, “당신 따위가 알 게 뭐예요.(pg.300)”라는 속마음을 감추는 그녀에게 상식의 세계는 여전히 청춘의 실패가 낳은 불완전한 연장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정보다도 갈망이 앞서고 있고, 가족을 앞에 두고도 은행잎에서 훈향을 찾고자 더듬거리는 모습도 그러하다. 유작전에 도착해 나목(裸木)을 보는 장면에서는 자신이 과거에 한 여인이었음을 새삼 되새김질한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pg.304)”
  남편은 그런 서성거림에서 자신을 구한 존재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낯설다. 그녀의 눈에는 늦가을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어린 나무들이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pg.306)” 못하는 청춘의 존재들로 비춰진다.
  그녀는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모든 존재들이란 서로에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후부터 그녀가 겪은 인간관계라는 것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선명한 거리이고, 그녀가 억지로라도 좁혀보려고 했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적어도 열정적이지 못한 ‘아내’로의 삶을 반추해보건대 이경은 “오랜 여행(pg.304)”을 막연하게나마 동경하고 있진 않았을까. 중년의 황태수가 낯선 것처럼 중년의 자신도 그녀는 그렇게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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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0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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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2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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