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너에게도 역시 또 다른 황금 해변에서  A ti también, en otras playas de oro,

    부식되지 않고 기다리는 보물이 있네.  Te aguarda incorruptible tu tesoro:

    광대하고, 막연하고, 피할 길 없는 죽음이.  La vasta y vaga y necesaria muerte.

 


    나에게 보르헤스는 이 하나의 연으로 기억되는 시인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덩어리의 죽음’이라는 기괴한 심상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나는 대문호의 구절에 눌려 죽음은 언제나 화려하고 값비싼 언변으로 나를 홀리려고 할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간소한 걸 좋아한다. 늘어가는 건 책 뿐이다.


    얼마 전, 그의 세 번째 전집 『알렙』을 샀는데, 곁에 두고도 읽을 엄두를 못 냈다. 막연하게나마 『장미의 이름』이나 『율리시스』를 앞에 둔 느낌과 비슷했다. 거대한 유적과 유물들이 즐비한 문화유산. 해박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먼발치에서만 소심하게 바라만보다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은 단편 「죽음과 나침반(La muerte y la brújula)」이다. 이면지에 숫자, 수학기호, 방위표 따위를 적어가며 흥미롭게 읽다보니 게 눈 감추듯 끝나버렸다. 그만큼 짧다.


    보르헤스의 문고리를 잡은 느낌이 오래 남기에 이 찰나의 만남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포우와 도일을 만나기 전, 당시 유럽의 독자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언젠가 “나는 보르헤스를 모두 읽었다. 이제 스페인어 원서를 읽을 차례이다.”라는 소감을 쓸 날이 올까 기대하며, 그와의 첫 대면을 글로 풀어본다.

 

 

*    *    *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문학과 견주려고 시도할 때, 우리가 태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 조응의 한계는 어딜 가든 지적되기 마련이다. 이 땅의 문학에서는 아직도 리얼리즘을 운운하지만 보르헤스는 1942년 이 단편을 쓰며 이미 그러한 비평의 영역을 훌쩍 넘어섰다. 소설은 아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인 것으로 추정되는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또한 환상적인 분위기는 에릭 뢴로트가 집착하는 고대 그리스어,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 YHWH를 의미한다.), ‘트리스트 르 로이’ 빌라, 18세기 교파 등으로 충분히 드러나 있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을 일컬어 “실제적인 것의 더 복잡한 관계 표현”이라 했다. 근래 들어 세계문학의 히트작들을 보면 이 장르의 것들이 많다. 바르가스 요사, 움베르토 에코, 폴 오스터, 가브리엘 마르케스. 설명이 필요 없는 거장들의 대작이 쏟아져 나온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과 나침반」이 발표된 시기가 1942년이라는 것에 놀랐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와 ‘우리’)의 한계이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플롯과 눈에 보이는 반전에도 내가 거의 직관적으로 “세련됐다.”고 느끼게 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세련’이라는 보르헤스의 특징은 오래된 문화의 유물들을 자유자재로 작품화하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말한 바대로 소설은 단순하다. 『올드보이(2003)』가 연상되는 독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레드 샬라크가 복수를 위해 만들어놓은 화려한 그물 안으로 어쩔 수 없이 유영해 들어가는 에릭 뢴로트, 복수에 대한 역(逆)복수를 감행하는 대수(최민식氏)에게 계속 좌절을 맛보게 하는 우진(유지태氏)의 이야기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레드 샬라크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의 실천이 무엇인지, 그 치밀함이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그가 어떤 식으로 그물을 펼쳐 에릭 뢴로트를 유인했는지는 후반부에 그의 입으로 직접 서술되는데, 사실 별도로 정리해보면 복잡한 계획이라기보다는 상대가 평소 관심 갖던 것을 미끼로 던지는 수준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레드의 계획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다고 느낄 건, 아마도 에릭의 추리과정일 것이다. 문헌과 신비주의 신앙, 그리고 기호를 토대로 추적하는 에릭의 ‘이성적 추리’ 말이다. 첫 번째 ‘희생양’인 율법학자 야몰린스키가 죽은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형사반장 트레비라누스의 실없는 추리가 절반은 맞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에릭을 따라 가며 18세기 교파의 신비한 역사와 그와 관련된 어떤 미스테리한 죽음의 베일을 벗겨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트리스트 르 로이의 빌라에서 레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에릭은 실패했고, ‘우리’도 그러했다. 독자는 레드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에릭의 변론, 아니 ‘요구’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살려달라는 말은 없다. 곧 죽을 목숨인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길 것 같진 않다. 그는 끝까지 이성에 매달리며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당신의 미로에는 불필요한 선이 세 개나 더 있습니다.”


    일직선상의 미로로 끝내는 것이 더 세련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죽게 생겼는데도! 그러나 레드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끝없는 일직선상의 미로를 만들어서 당신을 죽일 것을 약속한다. 단, 다음번에 당신을 죽일 때, 즉 당신이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직감이 있었다. ‘안 죽였을 것이다.’ 총은 장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총에 총알이 있었다는 언급은 이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릭은 풀려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성의 실패로 이미 에릭은 한 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감옥에 가두게 했던 옛날의 에릭에 대한 오늘의 복수는, 이 정도로 두뇌게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면 성공한 것이 아니었을까. 레드는 아마 만족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게임.


    나는 과감하게 레드의 입장에 서봤다. 나라면 안 죽였을 것이다. 그를 풀어줬을 것이다. 또 한 번의 거대한 두뇌게임을 시작했을 것이다. 에릭은 어쩔 수 없이 이성을 무기로 나의 일직성상의 끝없는 미로를 탈출하고자 할 것이고, 나는 에릭이 내가 마련한 최종지점, 즉 죽을 곳으로 점점 향하려고 고민하는 에릭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번 게임에서도 내가 이길 것이다. 에릭은 박학하나 단순한 사람이고, 박학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모른다. 승률은 100%이다. 두 번째 승리 후 그를 죽일 지, 아니면 세 번째 게임으로 이어갈 지는 또 내가 결정할 몫이다.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소름을 돋게 했다. 보르헤스의 환상과 소설 속 긴장이 내가 순간 방아쇠를 당길 범죄자의 탈을 쓰게 만든 것이다. 이 짧은 작품을 덮으며 나는 매끈한 몸매의 여성보다 더 섹시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무한미로 속의 복수와 추적. 지금은 흔해 빠진 소재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보르헤스의 상상력 앞에서 나는 쌍수를 들 수밖에 없었다. 1942. 이 숫자가 나의 세 번째 소름을 돋게 했다. 나는 레드의 방진(方陣)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에릭처럼 보르헤스의 손아귀에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맨 위에 인용한 시와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보물과 같은 죽음. 그 화려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죽음. 죽음의 유혹. 게임. 일직선상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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