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6

 

 

  죽음에 대하여 나에게 허여된 유일한 사유의 통로는 피상(皮相)이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등을 읽으며 나는 내가 죽음의 여러 주제들을 거쳐 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곤 했다. 죽음을 역사적, 철학적, 혹은 미학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단, “나는 죽음과는 멀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것은 명제가 아니라 테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간혹 하지만. (참이나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명제’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예컨대, “나는 죽음과 멀어야 한다.”라든지, “나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와 같은 저항적인 선언 같은 것. 여기에 ‘언제까지나’라는 부사가 붙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선동적이겠다. 그러나 내가 왜 이 전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삶의 확고한 못 중 하나로 벽에 박아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전제를 신과 비교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것은 간혹 전지전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생동하는 봄과 찬란한 여름에 나의 몸과 정신을 휘감아 자신의 무궁무진한 힘을 유감없이 뽐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껏 의지하고 있는 수많은 전제들 중 그것은 소위 ‘갑’이었다.


  의심해보라는 말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무장해제’니, ‘나체’니, 하여간 옷을 벗게 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표현들이 의심에 들러붙은 채 마치 교양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진심으로 대전제들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10~15도 정도 갸우뚱하는 순간 느껴지는 소름은 매우 불쾌하기까지 하다. 전제를 의심하는 나 자신을 불손하게 여기면서. 그 찰나는 수도꼭지에서 갑자기 굵은 짐승 울음소리가 남과 동시에, 공손하게 모은 나의 두 손 위로 녹물이 노골적으로 쏟아질 때의 심각한 짜증을 동반한다.


  “아, X발.” 솔직한 욕설이 화장실을 가득 채우고, 나는 손을 이리저리 털려고 하지만 사방에 오물의 자국들이 남을 것 같아 불청결의 흔적을 잠시 손 안에 묶어둔다. 바로 그 순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이 더러운 영토가 혹시 내가 벗어날 수 없을 만치 광활한 것은 아닌지 - 혹은 백 년은 족히 헤맬 미로와 같은지 -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불길한 느낌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문장의 앞과 뒤에 빠짐없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렇다, 이 감동스럽고 혈기 넘치는 ‘필사(必死)’라는 단어를 신발로 삼아 사위(四圍)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발바닥에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必死 때문이다. mortality. 피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저려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 더러운 영토 위에 아무렇게나 눌러 붙어버린다. 대전제가 자모(子母)의 기호들로 낱낱이 해체되는 적나라한 광경이 아름다운 석양과 어울려 기괴하게 보인다. 해체된 전제가 “나는 죽음과 가깝다.”로, ‘-는’이라는 보조사가 빠지고 원근의 형용사가 교체된 채로 다시 꾸려지는 일은 없다. 대전제의 붕괴와 함께 나는 나머지 모든 전제들을 강탈당했다.


  죽음. 유일한 리얼리티. 오정희의 두 단편 「동경(1982)」과 「얼굴(1999)」에서 나는 죽음을 앞에 둔 ‘늙음(老)’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그렇지 않은가? ‘/늘금/’은 균열이 난 벽돌 위에 찰싹 붙어 있는 기생적 존재처럼 불쾌한 발음이지 않은가?)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저 깊고 어두운 그것의 안으로, 내가 흘린 것도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칠칠맞긴’. 나는 낯을 붉혔다. 아무도 없는데, ‘요즘 눈물 날 만큼 바람이 시리잖아’고 나는 변명을 떨어뜨려 눈물의 뒤를 쫓게 했다. 진심은 여전히 막연한 죽음과 대면한 채 나를 그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게.


  나는 대전제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어떤 작업을 해야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고민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에서처럼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의 제국에서 정1품의 관모(官帽)를 쓸 일은 없다. 매일 오고 가는 신촌 명물거리이며, 대학 캠퍼스이며, 홍대역 근처이며, 합정이며, 연대 앞 정류장, 그리고 사람 많기로 손에 꼽아주는 이곳 일산이며, 그런 이름의 성곽들은 그야말로 잡다한 들숨과 날숨의 저자거리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따금 시리아와 방글라데시, 이집트 등지에서 수많은 목숨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라졌음을 일회적으로 경청할 뿐이다. 게임에서는 ‘몬스터’나 ‘에너미(enemy)’를 키보드로 처단한다. 가까운 죽음만이 특별한 이벤트와 악몽의 소재가 된다. 나는 이런 것들이 우리 세대가 죽음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둘째 치고, 죽이는 행위의 고전적 의미마저 퇴출당한 상태.


  그러니 노인의 삶이 내가 읽고 접해야 할 주제들 중 낮은 서열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굳이 ‘카르페 디엠’을 누군가가 외쳐주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삶에서 5~60년 이후의 단조로운 일상을 그려보는 것은 시도할 생각도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건 일상을 조명하는 수많은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꿔 말하면 「동경」을 쓴 1982년에 그녀는 서른다섯이었는데, 생각해보면 한국문학사적으로 거의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젊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서른다섯이면 한창 자리 잡은 일상의 매력에 취해 있거나 젊음을 반추할 시기라지 않던가.


  나는 오정희가 동네 노인정에 나가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권태롭고도 아린 맛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한낮의 풍경을 상상해봤다. 무섭도록 긴 시야가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망원경’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갈릴레이가 벨기에에서 수입해서 행성들을 관찰했다는, 그런 용도를 제외한다면. 이미 우리가 볼 인생의 먼 날들은 주변에 산재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늙음을 혐오하는 자연스런 감정을 부끄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가? 철학자나 정치인이나 작가나, 여하튼 역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옆에 나란히 놓인 괄호 속에 생몰을 나타내는 두 종류의 숫자가 있고, 둘 사이에 물결 표시가 나 있는 그 기호들을 보고 있자면, 닫힌 괄호 앞에서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나는 2100년까진 못 살 것이니 괄호 앞 숫자에는 ‘2’, ‘1’의 입주가 확정되어 있는 셈이다. 숫자라는 기호로 기억될, 때론 묘비 후면에 새겨진 한자들로도 기억될 생사의 여정은 지극히 막연하기만 하다. 나는 궁금했다. 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까.


  「동경(銅鏡)」에는 삶에의 갈망이 자전거를 타고 이따금 경적을 울리는 아이,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 노부부의 집을 방문한 젊은 청년 따위 등으로 드러나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싱싱하게 보일 것이다. 반면, 30분을 산책하면 적당히 땀을 흘린다는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는 아이의 자전거 속도와 확연히 대비된다. 버스를 타기 위해 집 앞 거리를 지날 때면 나는 으레 이른 아침이든 대낮이든 산보를 즐기고 있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그 느린 속도. 내가 허용할 수 없는 공백이 그들의 뒷모습에 새겨져 있다.


  내가 동경(憧憬)하는 건 그런 속도가 아니다. 이따금 버스에서 볼 수 있는, 광화문으로 서울 나들이를 나가는 중절모의 ‘멋쟁이 노년 신사’가 미래의 나였으면 한다. 쪼그라들고 초라해지긴 싫다. 정년을 앞둔 교수들도 멋있다. 그들이 캠퍼스를 느릿하게 걷고 있으면 나는 그 뒤를 따라 붙어 속도를 흉내내보곤 했다. 얼마 전 사라진 가을에는 그들의 우수에 젖은 눈빛도 참으로 근사해보였다. 다만 나는 그들이 지극한 예외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누구나 그렇듯 자신은 굴러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부한다지 않은가.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큰 충격이었다. 반신불구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할아버지가 방에 누워 있고, 그의 ‘똥오줌’을 가려주던 아내는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다 - 그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겠다고 나간다. 노부부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검은 개가 저승사자마냥, 할아버지가 홀로 있는 방 안에 들어와 죽은 뒤를 맛있게 먹고 나른한 잠에 빠졌을 때, 그 소름끼치는 장면에서 독자라면 누구나 죽음의 한 양태를 느꼈으리라.


  “저무는 날, 길은 더욱 멀고 아득하다.(「얼굴」中)


  50대에 접어든 오정희의 시선은 「동경」에서보다 한층 죽음에 근접해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 표현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하루의 무게가 얼핏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반신불구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폐차장의 고물들처럼 볼품없이 ‘찌부러지는’ 나약한 육체가 정신의 영역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삶을 꿈꿀까? 죽음을 받아들일까? 두 경계가 없는 생각이란 있을까? 나는 다시 두려워졌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나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등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음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정신적 준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막연한 각성과 다짐 따위를 꿀꺽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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