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6
어떤 책들은 - 대다수의 책들은 그렇지 못한데 -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독자를 각성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즉 독자의 각성을 위해서 작가는 일종의 마법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마법은 영화나 게임, 판타지소설 등에 나오는 ‘현존불가능’한 기술이 아니라, 현존하는 기술이다. 뛰어난 작가들에게는 늘 이것이 갖춰져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 마법은 항상 요구되어 왔다. 면밀한 관찰력, 남다른 상상력, 겸손한 통찰력, 왕성한 독서. 그 실체는 바로 이런 것들의 총체이다. 내가 이것을 ‘마법’이라 부른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책들을 만나면 각 장(章)마다 내가 읽어온 ‘도시’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러 장의 이면지를 써야만 한다. 충분히 각성된 상태인 까닭에 이면지 위에 적힌 메모들 중 다수는 소위 ‘번뜩이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전혀 나의 것 같지 않은 문장, 생각과 생각 사이의 기발한 고리 같은 것들이 된다. 독자인 입장에서 탁월한 책들을 반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놀라운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그만큼 멈춰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것이고, 이는 이면지에 적을 것들이 많다는 것과 같다. 결국 차분히 이런 책들을 다 읽고 나면 무엇을 썼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많은 메모 분량을 앞에 둔 채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너무 많은 ‘도시’들을 거쳐 왔고, 결국 내가 이 ‘도시’들을 모두 통치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씁쓸한 패배감에 휩싸이게 된다.
조금 노련한 독자라면 바로 이 시점에서 냉철함과 겸손함을 찾아 그 메모들을 알맞게 정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얻은 이점이란 남보다 아주 조금 더 그것들에 대해 정리했다는 만족감뿐일 것이다. 애당초 그들이 이면지 위에 적어 내려간 지도는 남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즉 그들의 지도가 남의 것보다 더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그들이 노련하게 독서를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그들에게 독서 후 찾아올 패배감의 충격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도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동시에 호기심 역시 불러온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전자를 감지해서 지도 해독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후자에 매료되어 지도를 결국 읽을 것인지에 대한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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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능력은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바로 현명함이다. 이 추상적인 능력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유동적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자신의 능력이 지닌 무게와 작품 수준이 지닌 무게가 서로 앉은 시소의 기울기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해했는가에 대해 자신을 속이거나 지나치게 믿지 않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단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 현명함이 제대로 작동하는 독자의 법정에서는 세 가지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째는 정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그녀의 눈에 지도가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난해한 것이라면 무리해서 그것을 해독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은 독자는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해독을 시작하며, 결국 자신을 속인 그 속임수에 또 다시 속아 넘어가면서 해독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뢰를 갖게 된다. 독서는 제각각이라지만 얼마든지 잘못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독자의 잘못된 해독은 교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스로 해독을 부인하여 새로운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힘든데, 사실 그보다 쉬운 ‘타인으로부터의 교정’도 결코 쉬운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난해한 지도를 해독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정리를 유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독의 가능성을 미미하게나마 발견한 현명한 독자가 주로 택하는 방법이다. 어떤 책은 그 책의 독서만으로는 독자들이 도무지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즉 ‘작품 외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잠들어 있기도 하다. 모든 책들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지만, 특별한 책의 경우에는 텍스트 자체의 해독이 불가피하게, 또 유별나게 텍스트 외의 지식과 지혜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런 책들을 어렵게 여길 수밖에 없고, 결국 현명한 독자는 각고의 노력으로 그 책을 정독하고 난 뒤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다. 다른 책을 더 읽거나,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현명함을 지닌 독자는 분명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책을 읽거나 외부 세계를 경험했을 것이지만 그/그녀는 겸손함으로부터 충분히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 앞에 패배하지 않은 당당한 독자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그녀는 언젠가 다시 자신의 정리를 보게 될 것이고, 또한 충분히 현명하므로 작품을 다시 읽어볼 것이다. 그 때에는 해독의 가능성이 늘어날 것이고, 혹은 뛰어난 경우 그/그녀는 단번에 모든 해독을 끝마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책을 읽은 시간 이상을 공들여 천천히 해독하는 것이다. 독서는 당연하게도 ‘문자 읽기’가 아니다. 하나의 문장이 여러 의미들과 연관되어 있고, 더군다나 독자 개인의 독서경험, 삶의 경험 등과 충돌하면서 의미가 파생되기 때문에 온전한 독서 기록은 해당 텍스트의 서너 배는 족히 될 만한 생각의 분량으로 넘쳐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독서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런 ‘독후감’을 쓸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으며,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열정적인 독자들은 훗날 그들이 남긴 기록이 불필요할 정도로 긴 것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여러 생각들이 여러 개의 기둥들로 압축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하나의 문장을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독자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풀어낼 수밖에 없으므로 많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즉, 독자는 작가가 압축한 생각을 풀어내는 독서 과정을 통해 작가의 창작 과정을 역으로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역시 온전할 수가 없다. 독자는 태생적으로 작가가 아니다. 이는 독자가 글 쓰는 사람인 경우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자신의 정리를 공들여 해독한다는 것은 지도를 있는 그대로 모두 해독한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부분을 지워가면서 작가로부터 얻은 자신의 중심 생각들만 추려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방해를 받는다. 바로 “지도에는 쓸모없는 부분이 없다.”는 일종의 진리이다.
모험심 가득한 탐험가는 지도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며, 심지어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공백에는 어떤 신비한 이야기와 사람들, 그리고 보물과 유적들이 있을까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리의 과정에서는 독자는 이러한 상상을 다소 물려야 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독서에 개입되는 여러 종류의 상상들 중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순도 높은 광물은 극히 드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정이 없으면 독서는 쏟아내는 만큼 족족 귀금속이 되는, 그야말로 연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지만 또한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독서는 연금술이 아니라, 해변에서 좁쌀 정도 크기의 보물을 찾아내는 고독한 고통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는 독자는 독서에 매우 능숙한 사람으로, 그/그녀는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번 성공적인 독서를 해냈을 것이다. 수많은 기호와 도형들, 그러한 잡다한 메모들 사이에서 커다란 길을 찾고, 그 길이 당도하는 곳의 표기들을 하나씩 살펴본 뒤 자신이 길 위로 끌고 다니는 수레에 선별적으로 담아내는 복잡한 작업을 말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신중한 일이기 때문에 그/그녀는 해독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독서를 하는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효력이 있어서 선별적으로 담은 표기들을 마지막에 가서는 또 한 번 고르고 고르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그/그녀의 최종 지도는 말 그대로 서랍장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작게, 즉 ‘캐비넷 페인팅’처럼 작아진다. 이 지도에는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도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를 유랑하며 보물찾기에 나설 수 있다. 즉, 이 최종 지도는 작품을 쓴 작가의 것 못지않게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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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게나마 - 그러나 크게 불만족스럽지는 않은 양으로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책을 덮었을 때부터는 어떤 과정이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오고 있다. 특히 내가 고려한 책들은 앞서 말한 ‘마법’으로 지어진 책이며, 따라서 그 고민 자체는 복잡하게 표기된 나의 메모를 정리하는 작업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간편하게 읽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책은 애당초 고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들이 ‘마법’으로 지어진 책들보다 하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도를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쉽고 짧은 책들은 어떤 경우에 한해서는 독자들에게 훨씬 큰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하고 쉽고 짧은 것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장점들과는 달리 이 사회와 문화에 피치 못하게 요구되는 관찰력과 깊은 사고 등 진중한 특성에 관해서는 단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이러한 특성의 부재들을 신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언젠가 그 리뷰를 다루며 나름 정리해보겠지만 우리 사회는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생각을 원하며, 그 생각은 실용적이어야 하고 -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 즉각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길게 돌아가는 ‘마법’으로 지어진 책은 어쩔 도리가 없이 덜 팔리게 되고, 이는 우리가 기꺼이 흡수할 여러 생각들 중에서 그것들이 제 목소리를 낼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일종의 손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날로그적이긴 하지만 손으로 직접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나란히 병기하면서 조금 더 깊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낯설기 때문에 때론 아찔하기까지 할 정도로 깊게 나의 눈을 텍스트 너머의 빈 공간까지 침투시키는 작업을 매일 이어가고 있다. 독서의 시간 외에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다. 망상에 젖어 밤하늘을 바라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나만의 세계를 키워가는 종류의 작업과 독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독서의 시간은 사실 무척 예외적인 시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예외성이 나에게 선물하는 하나의 큰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남들보다 빠르게 걸어가지 않는, 때론 멈춰 서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가 나의 속도를 나의 통제력으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는 강력한 성취감을 얻는다. 물론 이 성취감은 여러 어려운 수준의 책들을 접하면서 얼마든지 겸손함을 발휘해 없애고, 다시 얻어내고, 또 다시 없앨 수 있다. 성취감마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로 독자들을 인도해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독서의 순환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