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6

 

 

  어떤 책들은 - 대다수의 책들은 그렇지 못한데 -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독자를 각성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즉 독자의 각성을 위해서 작가는 일종의 마법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마법은 영화나 게임, 판타지소설 등에 나오는 ‘현존불가능’한 기술이 아니라, 현존하는 기술이다. 뛰어난 작가들에게는 늘 이것이 갖춰져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 마법은 항상 요구되어 왔다. 면밀한 관찰력, 남다른 상상력, 겸손한 통찰력, 왕성한 독서. 그 실체는 바로 이런 것들의 총체이다. 내가 이것을 ‘마법’이라 부른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책들을 만나면 각 장(章)마다 내가 읽어온 ‘도시’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러 장의 이면지를 써야만 한다. 충분히 각성된 상태인 까닭에 이면지 위에 적힌 메모들 중 다수는 소위 ‘번뜩이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전혀 나의 것 같지 않은 문장, 생각과 생각 사이의 기발한 고리 같은 것들이 된다. 독자인 입장에서 탁월한 책들을 반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놀라운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그만큼 멈춰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것이고, 이는 이면지에 적을 것들이 많다는 것과 같다. 결국 차분히 이런 책들을 다 읽고 나면 무엇을 썼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많은 메모 분량을 앞에 둔 채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너무 많은 ‘도시’들을 거쳐 왔고, 결국 내가 이 ‘도시’들을 모두 통치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씁쓸한 패배감에 휩싸이게 된다.


  조금 노련한 독자라면 바로 이 시점에서 냉철함과 겸손함을 찾아 그 메모들을 알맞게 정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얻은 이점이란 남보다 아주 조금 더 그것들에 대해 정리했다는 만족감뿐일 것이다. 애당초 그들이 이면지 위에 적어 내려간 지도는 남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즉 그들의 지도가 남의 것보다 더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그들이 노련하게 독서를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그들에게 독서 후 찾아올 패배감의 충격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도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동시에 호기심 역시 불러온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전자를 감지해서 지도 해독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후자에 매료되어 지도를 결국 읽을 것인지에 대한 몫이다.

 

 

 

 

*    *    *

 

 


  독서 능력은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바로 현명함이다. 이 추상적인 능력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유동적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자신의 능력이 지닌 무게와 작품 수준이 지닌 무게가 서로 앉은 시소의 기울기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해했는가에 대해 자신을 속이거나 지나치게 믿지 않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단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 현명함이 제대로 작동하는 독자의 법정에서는 세 가지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째는 정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그녀의 눈에 지도가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난해한 것이라면 무리해서 그것을 해독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은 독자는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해독을 시작하며, 결국 자신을 속인 그 속임수에 또 다시 속아 넘어가면서 해독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뢰를 갖게 된다. 독서는 제각각이라지만 얼마든지 잘못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독자의 잘못된 해독은 교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스로 해독을 부인하여 새로운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힘든데, 사실 그보다 쉬운 ‘타인으로부터의 교정’도 결코 쉬운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난해한 지도를 해독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정리를 유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독의 가능성을 미미하게나마 발견한 현명한 독자가 주로 택하는 방법이다. 어떤 책은 그 책의 독서만으로는 독자들이 도무지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즉 ‘작품 외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잠들어 있기도 하다. 모든 책들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지만, 특별한 책의 경우에는 텍스트 자체의 해독이 불가피하게, 또 유별나게 텍스트 외의 지식과 지혜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런 책들을 어렵게 여길 수밖에 없고, 결국 현명한 독자는 각고의 노력으로 그 책을 정독하고 난 뒤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다. 다른 책을 더 읽거나,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현명함을 지닌 독자는 분명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책을 읽거나 외부 세계를 경험했을 것이지만 그/그녀는 겸손함으로부터 충분히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 앞에 패배하지 않은 당당한 독자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그녀는 언젠가 다시 자신의 정리를 보게 될 것이고, 또한 충분히 현명하므로 작품을 다시 읽어볼 것이다. 그 때에는 해독의 가능성이 늘어날 것이고, 혹은 뛰어난 경우 그/그녀는 단번에 모든 해독을 끝마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책을 읽은 시간 이상을 공들여 천천히 해독하는 것이다. 독서는 당연하게도 ‘문자 읽기’가 아니다. 하나의 문장이 여러 의미들과 연관되어 있고, 더군다나 독자 개인의 독서경험, 삶의 경험 등과 충돌하면서 의미가 파생되기 때문에 온전한 독서 기록은 해당 텍스트의 서너 배는 족히 될 만한 생각의 분량으로 넘쳐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독서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런 ‘독후감’을 쓸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으며,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열정적인 독자들은 훗날 그들이 남긴 기록이 불필요할 정도로 긴 것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여러 생각들이 여러 개의 기둥들로 압축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하나의 문장을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독자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풀어낼 수밖에 없으므로 많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즉, 독자는 작가가 압축한 생각을 풀어내는 독서 과정을 통해 작가의 창작 과정을 역으로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역시 온전할 수가 없다. 독자는 태생적으로 작가가 아니다. 이는 독자가 글 쓰는 사람인 경우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자신의 정리를 공들여 해독한다는 것은 지도를 있는 그대로 모두 해독한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부분을 지워가면서 작가로부터 얻은 자신의 중심 생각들만 추려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방해를 받는다. 바로 “지도에는 쓸모없는 부분이 없다.”는 일종의 진리이다.


  모험심 가득한 탐험가는 지도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며, 심지어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공백에는 어떤 신비한 이야기와 사람들, 그리고 보물과 유적들이 있을까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리의 과정에서는 독자는 이러한 상상을 다소 물려야 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독서에 개입되는 여러 종류의 상상들 중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순도 높은 광물은 극히 드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정이 없으면 독서는 쏟아내는 만큼 족족 귀금속이 되는, 그야말로 연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지만 또한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독서는 연금술이 아니라, 해변에서 좁쌀 정도 크기의 보물을 찾아내는 고독한 고통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는 독자는 독서에 매우 능숙한 사람으로, 그/그녀는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번 성공적인 독서를 해냈을 것이다. 수많은 기호와 도형들, 그러한 잡다한 메모들 사이에서 커다란 길을 찾고, 그 길이 당도하는 곳의 표기들을 하나씩 살펴본 뒤 자신이 길 위로 끌고 다니는 수레에 선별적으로 담아내는 복잡한 작업을 말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신중한 일이기 때문에 그/그녀는 해독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독서를 하는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효력이 있어서 선별적으로 담은 표기들을 마지막에 가서는 또 한 번 고르고 고르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그/그녀의 최종 지도는 말 그대로 서랍장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작게, 즉 ‘캐비넷 페인팅’처럼 작아진다. 이 지도에는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도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를 유랑하며 보물찾기에 나설 수 있다. 즉, 이 최종 지도는 작품을 쓴 작가의 것 못지않게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

 

 

 

 

*    *    *

 

 


  나는 적게나마 - 그러나 크게 불만족스럽지는 않은 양으로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책을 덮었을 때부터는 어떤 과정이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오고 있다. 특히 내가 고려한 책들은 앞서 말한 ‘마법’으로 지어진 책이며, 따라서 그 고민 자체는 복잡하게 표기된 나의 메모를 정리하는 작업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간편하게 읽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책은 애당초 고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들이 ‘마법’으로 지어진 책들보다 하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도를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쉽고 짧은 책들은 어떤 경우에 한해서는 독자들에게 훨씬 큰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하고 쉽고 짧은 것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장점들과는 달리 이 사회와 문화에 피치 못하게 요구되는 관찰력과 깊은 사고 등 진중한 특성에 관해서는 단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이러한 특성의 부재들을 신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언젠가 그 리뷰를 다루며 나름 정리해보겠지만 우리 사회는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생각을 원하며, 그 생각은 실용적이어야 하고 -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 즉각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길게 돌아가는 ‘마법’으로 지어진 책은 어쩔 도리가 없이 덜 팔리게 되고, 이는 우리가 기꺼이 흡수할 여러 생각들 중에서 그것들이 제 목소리를 낼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일종의 손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날로그적이긴 하지만 손으로 직접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나란히 병기하면서 조금 더 깊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낯설기 때문에 때론 아찔하기까지 할 정도로 깊게 나의 눈을 텍스트 너머의 빈 공간까지 침투시키는 작업을 매일 이어가고 있다. 독서의 시간 외에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다. 망상에 젖어 밤하늘을 바라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나만의 세계를 키워가는 종류의 작업과 독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독서의 시간은 사실 무척 예외적인 시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예외성이 나에게 선물하는 하나의 큰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남들보다 빠르게 걸어가지 않는, 때론 멈춰 서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가 나의 속도를 나의 통제력으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는 강력한 성취감을 얻는다. 물론 이 성취감은 여러 어려운 수준의 책들을 접하면서 얼마든지 겸손함을 발휘해 없애고, 다시 얻어내고, 또 다시 없앨 수 있다. 성취감마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로 독자들을 인도해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독서의 순환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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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2-0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지내요, 탕기님? :)

탕기 2013-02-06 18:42   좋아요 0 | URL
네 권을 같이 읽고 있어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읽고, 이면지에 쓰고, 생각 지도 그리고, 그러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
아, 이번 달 말이면 곧 개학이라 조금씩 공부모드(?) 준비도 해야겠군요!

2013-02-08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8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4

 

 

1

 

  나는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찾아내는 사람.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작은 점으로 수축시킬 수도, 각자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큰 거인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연함은 의미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다채로움을 연결시키는 뛰어난 상상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들을 동경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체로 몇 안 되는 어정쩡한 것들만 반복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집요하다. 그들의 집요함은 가느다란 거미줄과 같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이 거미줄에 걸린 대상은 자신이 지닌 의미를 발설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의 집요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여러 거미줄로 이뤄진 의미망을 만든다.

 

 

 


2

 

  나는 그들을 좋아하므로 그들이 의미망을 만들어가는 동작 하나하나를 보는 것 역시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의 글을 읽는 일이다. 거미줄이 글로 짜여 있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글은 훌륭한 직물 재료이다. 고고학적 유물과도 같고, 범인이 남겨놓은 고유의 지문이라 해도 좋겠다.


  비유컨대, 흔적 없이 올라가는 건물은 없다. 그리고 그 건물에는 건축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방이 여러 개 있다. 건축가는 그 방에 건축의 철학을 남겨놓는다. 그 방에 들어가는 건, 건물에 들어가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건축가들처럼 집요하게 매달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명되어 있다. 그것은 늘 곁에 두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무엇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무언가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3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유연하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한다. 너무나도 잘 해서 그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영속적으로 추구되어 오는 수많은 가치들을 저마다의 언어로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언어로 된 정리는 마치 노란 종이 위의 검은 점과 같아, 그것을 보면 그것이 가리키지 않는 전체(노랑)가 보인다.


  우리의 ‘무언가’란 그들이 언어로 정리해놓은 가치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의 점으로 전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언가’는 결국 그들이 정리한 하나의 작은 점으로 소급된다. 역설적이게도 이 작은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유연한 까닭은 그들이 작은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작은 것을 잊어버리진 않으므로 모든 것과 작은 것은 그들의 세상에서 시간차 없이 공존한다. 종이의 노란 바탕과 검은 점이 실제로 공존하는 것처럼.

 

 

 

4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노란 바탕 위의 검은 점만을 찾진 않을 것이다. 파란 바탕, 하얀 바탕, 그리고 심지어는 검은 바탕 위의 검은 점을 찾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에게 전체는 매우 다양한 색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의 수만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수많은 세계를 보게 된다. 그들은 어딜 가나 작은 것에 맨 처음 집중할 것이지만 그 때마다 거대한 세계 여러 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함을 아는 그들의 세계에는 맹목이라는 것이 없다.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작은 것만 보는 것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 행동이 펼쳐놓을 수 있는 모든 의미와 가치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은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것을 보는 일이기도, 결코 작지 않은 것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유연하고 놀라운 상상은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축복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중 아주 적은 부류만 작은 것을 본다.


  작은 것을 보는 능력은 태생적이지만 학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중 대부분은 작은 것을 보는 능력을 깨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운 좋게 기회를 얻은 사람들의 대부분도 훗날 그것을 별 가치 없는 것이라 아주 쉽게 치부해버린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5


  작은 것을 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는 때때로 감상에 젖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보상 받을 길이 없는 막대한 손해임을 안다면 호소를 그치고 일상에 다시 수긍하게 된다. 바로 이 선택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최대의 실수이다. 그들은 노란 바탕의 검은 점을 보면 검은 점만 보게 될 것이고, 노란 바탕을 보면 노란색만 보게 될 것이다.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면 검은 점이 다른 색 위에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노란 바탕이 다른 색 점 주위에 깔려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상상의 모든 능력이 빠르게 소실되어 가는 비극적인 고통을 맛보게 된다.


  작은 것은 중요하다. 작은 것은 확장되는 세계이고,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작게 쪼그라드는 세계이다.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작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작은 것을 볼 수 없으면 큰 것도 볼 수 없다.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런데 작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큰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의 주장에 휩쓸려 가다보면 우리도 상상의 부재로부터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시각의 유연함을 고찰하고자 한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대체로 큰 것을 잘 보기 때문이다. 큰 것을 보는 것은, 여간해서 실수할 수가 없는 쉬운 일이다. 그것은 잘 보이기 때문에 잘 볼 수밖에 없다.


  큰 것만 볼 줄 아는 이들에게 큰 것의 부분들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나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해서 우리가 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나눈 여러 부분들을 합해 다시 전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는 실망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뭘 나눴는지도 모른다.

 

 

 

6


  책을 읽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은, 사려 깊고 진지한 저자들의 대부분이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아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독서는 유연한 세계를 체험해보는 것과 같다. 작았던 세계가 커지고, 큰 세계는 작아지며, 마치 전자처럼 작은 세계와 큰 세계가 한 공간에 동시에 공존하는 이상한 일도 체험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사유 방식이 바로 이렇다. 그것은 동시적이고 복잡하다. 작은 것만, 그리고 큰 것만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낯설고 어려울 뿐이다.


  유연함은 곧 고뇌의 최대 간격이다. A와 B라는 세계가 있다면 고뇌는 두 세계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최대한 벌려놓는다. 세계의 간격을 실감하는 만큼 우리는 얼마든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뇌가 인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고뇌는 축복이다. 고뇌는 상상이고, 또한 유연함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본래 갖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고, 정신의 나태함 속에 그것을 고통이라 인식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본래 인간은 고뇌한다. 그것은 멋있는 것도, 끔찍한 것도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중 대부분은 본성을 잊고 산다. 소수의 고뇌를 아포리아나 삶의 지침표로 참고만 할 뿐, 그들은 스스로 고뇌하지 않는다.

 

 

 

7

 

  비유컨대 인류가 멸망하는 날은 아마 지구상의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고뇌의 본성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뇌의 포기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비참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에 침체된 사람들이 단 하나의 단어와 단 하나의 진리만을 입 모아 말하는 사회가 늘 그러했듯이, 이 비참한 상황은 고뇌하는 자를 별종, 정신병자, 혹은 광인으로 취급하도록 종용하여 결국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생각이 없는, 소위 ‘소설과 같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한 나의 고찰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다행스러운 우려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작은 것’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가 우려하는 상황, 그것 단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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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1

 

 

 

 

 

 

 

 

  새해 첫 날, 함박눈이 내렸다. 창밖의 나무들은 제각각의 덩치만큼 눈을 얹고 서 있다. 나무의 눈은 가지가 휘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쌓일 수 있다. 나무도 억지로 휘어 제 몸 위의 눈을 털어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녹아 무거운 물이 되지 않는 한, 나는 저들의 모양에서 ‘적당’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오후. 마을에 요정처럼 쌓여 있던 눈을 쓸고 들어와 개운하게 씻은 뒤 커피 한 잔을 옆에 끼고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이것도 질환이다. 소위 ‘센치’해지면 눈보다는 손이 더 간지럽다.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나’를 덜어내게 되는데, 때때로 느끼기를 그 모양이 퍽 초라하다.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 정도야?”라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비근한 일이고, 때때로 더 나아가 주변의 책들을 별로 읽고 싶지 않은 무기력까지 부르지 않은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나무처럼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쌓아둬야 하는데, 인간은 제 편한 것만 하려고 드는 버릇이 있어 한 번 글쓰기의 자태에 유혹되면 독서의 얼굴이 별로 예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와 이별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사랑이다.

 

  젊을 때 많이 읽으라는 교수들의 말이 하나같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지난 해 일곱 개의 강의 중 다섯 개의 종강 때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독서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넘어갔다. 명퇴를 앞둔 - 나와 같은 일산에 거하시는 - 한 노(老)교수는 버스에서 스마트폰 보지 않고 책 한 장이라도 더 넘겨보는 사람이 없다며 혀를 찼다.

 

  독서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이다. 눈으로 문장들을 따라 내려가는 것, 책장을 넘기는 것, 하물며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것 모두가 아날로그이다. 디지털처럼 0과 1로만 단순하게 이해하고 단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처럼 독서는 하나의 연속이다. 앞선 독서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뒤이은 독서가 기대된다. 따라서 독서는 기술의 혁명적 진화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부분이 있는, 인간의 사고 영역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기술이 생활과 사고를 바꾼다지만 독서는 강조하건대 ‘연속’이며, ‘역사’이다. 오늘날 타자기와 삐삐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으나, 플라톤과 공자를 읽는 사람은 있다. 1시의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읽었던 책을 7시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읽는다. 독서는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의 끝에 묻어 시계의 360도 전체에 각자의 지문을 남기는 것이다. 해석은 각 시간의 사람들에게 제 몫으로 주어진다.

 

  읽는 건 기억하는 일이다. 독서는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영향력 있는 저자들이 매해 쏟아내는 책들은 이 시대의 우리가 기억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일상의 온갖 제약으로부터 정작 잊으면 안 될 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을 때, 세상의 한편에서는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작업이, 그 고독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책이 세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굳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이 문자로 변환되면 세상 본연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마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움직이지만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지구처럼 움직이며,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때론 무관한 것 같은 삶을 살아가고, 죽고, 또 태어난다.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실제 삶을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소위 ‘골방철학자’나 ‘개똥철학’처럼 그저 기억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으나, 그렇다고 기억의 가치가 저평가될 이유는 전연 없다.

 

  최근 읽고 있는 장석주의 『일상의 인문학』에 이런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세월이 갈수록 기억의 부실함이 그것을 망각의 자리에로 넘기겠지만, 우리는 망각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어제를 망각하고 역사를 망각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유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법을 망각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망각하고, 망각의 악순환 속에서 표류하면서, 바쁘게 살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땅히 기억해야 할 만 한 일들을 고의적으로 유기하며, 그것을 망각의 불가피함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망각이 심해지면,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망각하고, 망각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각은 삶을 망친다. 망각은 곧 기원의 기억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기억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책과의 조우는 결코 피할 수 없다. 잠깐이라도 읽는 삶, 짧게라도 메모하는 삶은 빠르게 뛰는 우리의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가치들을 최대한 붙잡아두는 삶이다. 그것은 결코 멋있거나, 낭만적이거나, 운치 있는 일이 아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꼬고 최대한 우아하게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고 “멋있다. 부럽다.”며 독서를 시작하고자 마음먹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독서는 힘들고, 고독하며, 때론 잔인할 정도의 자기비판도 서슴지 않고 실행하라 강제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우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 트라우마를 제외하면 - 거의 유일한 길이고, 삶의 가치를 수호하는 - 무력을 동원하는 것을 제외하면 - 역시 거의 유일한 길이다.

 

  나무의 가지에 얹힌 눈을 나에게도 얹어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 결론은 당연히 “새해에는 더 많은 책을 읽어야지.”라는 교과서적이고, ‘초등학생 일기’적인 다짐으로 이어지는데, 나이가 얹힐수록 나는 이런 종류의 다짐이 유치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절실하고 무겁고, 때문에 더 나에게 알맞은 것으로 느껴진다. 독서를 많이 하겠다는 것은 그냥 책장을 넘기겠다는 뜻이 아니므로. 때로 그건 날선 각오이기도 하므로.

 

 

 

p.s 이 졸문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올 한 해 "인생을 바꿀 책" 한 권 '얻어 걸릴' 놀라운 행운이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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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0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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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3-01-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잘 받아 먹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

탕기 2013-01-07 00: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숲노래 2013-12-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을 다룬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얼굴로 눈을 맞으면서 살갗과 온몸으로 '눈이라고 하는 책'을 읽을 수도 있어요.

곧 새로운 새해가 되겠네요~
 

2012.12.15

 

 

 

 

 

  나와 동기 녀석은 그 날도 다소 이른 저녁을 먹고 터벅터벅 정문까지 걸어내려 갔다.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눈이 내려도 신나지 않은 것이 못내 서글프다며 동기 녀석은 연신 담배를 물었고, 나는 호주머니에 찌른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열심히 해야지?” 무엇을 그렇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당연하지. 졸업이 앞인데.”라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것’에 또 한 번 서글퍼졌다. 흥청망청 게으르게 사는 것도 아닌데, 늘 뭔가를 잘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뭐라도 제대로 연습하고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살면 삶의 지혜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이론대로라면 말이야. 뭘 알고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연신 허연 입김만 여기저기 날리고 있었다. 사위(四圍)가 급속히 낯설어지는 건 이런 때이다.


  지금껏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걷는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남학생들의 단화가 눈길을 처벅처벅 밟는 소리는, 여학생들의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때리는 선명한 소리는 들리는데, 나의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때가 있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애 처음 해보는 것 같은 아주 기본적인 일들, 예컨대 걷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숨 쉬는 것, 말하는 것, 의자에 앉는 것 따위들. 연말이 되니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된다. 연습과 훈련이라……

 

 

*    *    *

 

 

 

  올해 여든여덟의 생을 마친 그녀의 말을 기억해본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그녀의 시집에 방문한 여행객이 되어, 나는 이름 모를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나서 무명의 돌담에 낙서를 적는다.


  “태어남과 죽음은 성역(聖域)이다. 그곳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할애된 시간을 위해 나는 책을 읽는다. 그것은 연습과 훈련이다. 서명. 한국에서 온 여행객 J. 추신 :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국인들을 대신해 진실한 온정을.”

 

 

 

 

*    *    *

 

 

 

  서재를 본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옆면에 할머니 주름이 생긴 책들이 꽂혀 있다. 양장본은 커버 모퉁이만 빼면 그나마 멀쩡하다. 읽긴 했으나, 아무래도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는 저들을 양손 꽉 차게 쥔다. 왼손으로는 옆면을 비스듬히 잡고, 오른손 엄지에 힘을 주며 빠르게 책장을 넘겨본다. 시원한 바람이 눈앞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책 특유의 체취가 미약하게나마 코끝에 얹힌다.


  책의 냄새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차이를 제외한다면 천편일률적이다. 그 냄새로부터 우리는 책의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다. 그렇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책의 냄새는 책의 내용이 아니다. 책의 내용은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을 닫고 정신으로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이 순간, 우리는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은밀한 곳으로 들어간다. 음부보다 남 보여주기 더 창피한 곳으로.


  작가는 호수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다. 독자인 우리는 깊은 호수이다. 어디에 돌이 떨어지느냐에 따라 반응하는 사람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떤 돌은 너무 커서 호수 전체가 출렁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동이 서서히 사라지더라도 작가가 던진 돌은 우리 안에 침잠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돌들 중 몇몇을 골라 그것이 호수를 때리며 가라앉았던 충격을 최대한 되살려보고자 노력한다.


  그건 정말이지 노력이다. 충격의 고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인간의 본능과도 배리되는 일이다. 감각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독서는 가히 3D 중 하나로 기억될 법 하다. 그러니 고통과 꾸준히 독대하고자 로댕의 조각처럼 앉아 체처럼 담배를 꼬나물거나 눈살을 찌푸려가며 눈을 지그시 감는 저들의 자세는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늘 피하려고만 했는데, 저들은 평생을 직시하여 온몸을 짜내 책을 쓰는구나!


  책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양질의 고통이다. 어떤 이는 서머싯 몸의 장편 한 권을 읽고 인생을 알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위화의 소설 한 편을 읽고 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했다.


  고통을 읽는 삶은, 효용과 목적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삶이 대개 인간의 단면에서만 펼쳐진다면 독서는 우리의 몸을 강제로 뒤집어 등은 배가 익숙하던 곳으로, 배는 등이 온기를 남긴 곳으로 향하게 한다. 참으로 낯설고 힘든 일이다. 책의 첫 장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장까지 향하는 여정이란. 그리고 한 권에서 시작해 삶의 마지막 책에까지 이르는 고통의 작업이란. 예찬 받아 마땅한 고통이 아닐까.


  나는 죽기 전 유언으로 먼 저승길의 벗으로 삼을 책 한 권 옆구리에 끼워달라고 할 것이다. 그 한 권의 책을 찾는 일. 때론 성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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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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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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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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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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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 0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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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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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춥고 구름 구질구질한 아침. 허겁지겁 먹은 밥이 뱃속에서 다시 벼가 되려는지 꿈틀거린다. 머리스타일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 강의 프린트 하날 까먹은 듯도 하다. 애써 웃어보지만 신발끈 묶는 것조차 귀찮다. 못난 오빠 배웅한다고 뒤에서 꾸벅꾸벅 동생은 졸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이런 부탁을 한다.


  “내년 생일에는 아이언맨 슈트 좀 사줘.”


  “빨리 가.”


  나의 위시리스트에는 <드래곤 길들이기>의 ‘나이트 퓨리’도 얼마 전 추가됐다. 동생에게 실없는 웃음이나 주고 현관문을 연다. ‘학교까지 날아가고 싶다.’ 내가 롤러코스터의 짜릿함을 좋아하는 건, 순전히 게으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언맨 슈트가 있었으면.’


  오늘 밤 여덟시에 나는 희뿌옇게 가려 흡사 달무리도 보이는 것 같은, 밤하늘의 보름달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주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정말 빨리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단어들이 국경을 넘어 도망가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작가 김애란을 만났다.

 

 

 

 

 

 

 

 

  가히 여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가였다. 차분한 화법 사이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트와 농담에 우리는 적극적인 웃음으로 화답했다. 분위기는 좋았고,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교시(敎示)의 느낌이 전연 없었다. 공감의 의지가 확연히 느껴졌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생각이 많고 깊었다. 섬세하고 세련된 면이 있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녀의 강연을 듣고 나서 “스펀지 케익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다른 케익들보다도 스펀지 케익이라면 한 번 쯤 꾹 눌러보고 싶지 않은가. 그러면 케익은 누르는 만큼 들어갔다가 제자리로 얌전히 돌아간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날카롭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언니, 누나의 분위기였다.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아우르려고 하는. 글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품’이 얼마나 넓어야 하는가를 나는 문득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어 추려봤다. 그녀는 아포리아를 동경하던 20대에서 벗어나 자신이 30대가 되었음을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들을 나의 아포리아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면지에 거칠게 적어 내려갔다. 김애란의 문학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좋은 말들을 이 누추한 공간에 옮겨본다.

 

 

 

  “픽션이란 푹신한 빵 같은 거짓이다. 현실이 착지하려고 할 때 재빨리 그 밑으로 끼어드는.”


  “독자가 책을 덮었을 때, ‘아, 나도 나의 글을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요즘 나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에 대한, 가령 인권, 약자 등 추상명사들에 대한 대단함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가 이런 것들에 게으르면 이 단어들이 지닌 활력과 생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살려내는 것이 문학이지 않을까. 이런 짐작들을 하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농담이란 수치심을 주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위로해주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과는 어울리기 쉽지 않다. ‘나’에게의 농담은 거리낌 없을지 몰라도 그 대상이 ‘너’라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말이 글보다 앞서고, 글이 삶보다 앞서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이해란 내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종의 상상이다.”


  “가장 젊은 작품은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작품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저 선배(작가)는 얼마나 통찰력이 좋기에 100살이나 어린 나와 말이 통할까?”


  “영화가 문학의 위기를 야기했다고 하고, 최근에는 게임으로 인한 영화의 위기가 거론된다. 일본에서는 이미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잠깐 게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다. 게임은 성공과 영웅을 다루지만 문학은 실패와 평범한 인간을 소재로 삼는다. 게임은 만족할 수 있지만 문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리뷰는 ‘삼천포로 빠지는 유형’이라고 했다.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서 주제를 찾아내는 것보다는 - 물론 그것이 저급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비평이 더 어렵고 생소하다는 건 이번 학기 소설론을 들으며 내가 근래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 “맞아. 나는 옛날에 그랬었지.”라는 반추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독자를 그녀는 원하는 듯했다.


  선배 작가들, 가령 성석제, 김연수, 김영하 등 자신보다 10년은 더 작품생활을 하고 책도 10권 이상 낸 베테랑들에 대한 부러운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 것도 나는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김연수를 예로 들며, 그가 ‘토고’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토할 정도로 퇴고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해 학생들을 ‘빵’ 터뜨렸다. 요컨대, 글쓰기란 고민과 반성, 교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들에 비해 내가 그들의 글을 얼마나 대충 읽으려고 했는지 자책하게 됐다. 글 좀 쓰고 싶다는 핑계로 이러쿵저러쿵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심보를 나도 이제 버려야 할 내공 즈음 됐을 텐데, 아직도 키보드 앞에만 앉으면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 철이 덜 들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 ‘김연수’하니 그녀가 들려준 재미난 일화가 갑자기 기억났다. 홍대거리에서 작가들끼리 술을 마셨나보다. 반주에 기분이 좋아서 막대사탕을 사들고 서로서로 퇴폐적으로 쪽쪽 먹으면서 걷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지나가다가 김연수를 봤는지 “야, 김연수야. 김연수.”라고 소곤거렸단다. 그 소리를 들은 김애란이 술김에 “맞아요. 김연수에요. 김연수!”라고 소리 지르며 본의 아닌(?) 난동을 부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여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야, 김애란이야. 김애란.”이라고 했단다. 나는 공교롭게도 딱 이 때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앞자리의 남학생에게 폭우를 쏟을 뻔 했다.

 

 

 

 

 

  한편, 나는 “여자를 읽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학기에 나는 여자의 소설을 몇 편 읽었다. 박완서, 오정희, 권지예, 이현수, 공지영, 김애란. 방학 때 읽을 계획으로 윤고은과 전아리 소설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어놨고, 김애란 장편도 읽어볼 생각이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신경숙과 은희경도 조만간 천천히 읽기 시작할 것 같다.


  나에게는 도전이다. 남성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담겨졌던 시선을 여성적 소재와 플롯에 담그는 것은 생경한 일이고 때론 신경이 곤두서거나 갑갑한 작업이 되기도 한다. 오정희를 읽고 내가 어머니에게 처음 한 말이 “여자는 이렇게 생각이 많아요?”였으니.


  사람은 으레 남도 저처럼 생각하겠거니, 한다. 더군다나 개인화가 됐다는 이 사회는 남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 타인의 이해를 구하려는, 그래 놓고 공감이니 뭐니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이걸 생각하지 않으니, 성질나면 찌르고 때리고 죽이는 것 아니겠는가. 즉자적으로. 나만 생각하면 마음의 정지(pause)가 생략되기 십상이다. 생각도 없다. 그래서 나는 [-female]이라 표기할 수 있을 ‘나’를 [+female]의 영역으로 가급적 붙여보려는 것이다. 여자를 읽는 시도를 부단히 해야겠다는 새삼스런 다짐을 이번 강연이 끝나고 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김애란은 그런 두려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이 두려움이 공포가 아닌 경외의 정초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p.s  나는 성격이 그래서 뭐 한다고 하면 ‘차자작’ 가서 빨리빨리 하질 못한다. 숫기도 없고. 우물쭈물 서 있다가 거의 싸인 다 받았나 싶어 작가 옆으로 늘어선 대여섯 명의 여학생들 뒤에 가 쭈삣쭈삣 거리고 있었다. 말을 붙이려니 왜 이리 두근거리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뭐라고 좋은 말을 마지막에 해준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버스 차창에 새겨진 나의 옆모습에게 한심하다는 듯 “야, 이 자식아.”라고 쏘아봤다. 하기야 작가를 만난 건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 아직까지도 설레는 건 어쩔 수 없겠다. 잠은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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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11-2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직접 가볼수 없는 사람에게 단비같은 페이퍼였어요.

탕기 2012-11-29 22:40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북극곰 2012-11-2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김애란 작가가 한 말들을 정리해주신 부분, 저도 좋네요!

탕기 2012-11-29 22:41   좋아요 0 | URL
더 많이 적을 수도 있었는데, 강연이 강의가 될 것 같아서 어렴풋하게 기억만 하는 좋은 말들도 많아요. 다음 강연에도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락방 2012-11-29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에 대해 호기심(어쩌면 호감)이 생기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

탕기 2012-11-29 22:42   좋아요 0 | URL
저는 소설론 강의 때문에 반강제(?)로 읽었는데,
이번 방학 때에는 장편을 한 번 읽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2012-11-29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9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꽃나무 2012-11-29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작가를 만나셨군요..
소설로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직접 만나면 작품에 대해서 더 잘 이해가 되더라구요~
잘보고가요^^

탕기 2012-11-29 22:45   좋아요 0 | URL
창작과정이나 동기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니까 이해가 빨리 되더군요.
보통 독자들은 작가가 뭔가 거창한 이벤트 때문에 작품을 쓸 거라 생각하는데,
가령, 저 같은 경우는 <물속 골리앗>이 그렇지 않았나 싶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작품이 시작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새삼 "작가도 사람이구나."라고 무릎을 친 기억이 있습니다.^^

2012-12-07 0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7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