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5

 

 

 

 

 

  나와 동기 녀석은 그 날도 다소 이른 저녁을 먹고 터벅터벅 정문까지 걸어내려 갔다.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눈이 내려도 신나지 않은 것이 못내 서글프다며 동기 녀석은 연신 담배를 물었고, 나는 호주머니에 찌른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열심히 해야지?” 무엇을 그렇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당연하지. 졸업이 앞인데.”라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것’에 또 한 번 서글퍼졌다. 흥청망청 게으르게 사는 것도 아닌데, 늘 뭔가를 잘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뭐라도 제대로 연습하고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살면 삶의 지혜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이론대로라면 말이야. 뭘 알고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연신 허연 입김만 여기저기 날리고 있었다. 사위(四圍)가 급속히 낯설어지는 건 이런 때이다.


  지금껏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걷는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남학생들의 단화가 눈길을 처벅처벅 밟는 소리는, 여학생들의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때리는 선명한 소리는 들리는데, 나의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때가 있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애 처음 해보는 것 같은 아주 기본적인 일들, 예컨대 걷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숨 쉬는 것, 말하는 것, 의자에 앉는 것 따위들. 연말이 되니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된다. 연습과 훈련이라……

 

 

*    *    *

 

 

 

  올해 여든여덟의 생을 마친 그녀의 말을 기억해본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그녀의 시집에 방문한 여행객이 되어, 나는 이름 모를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나서 무명의 돌담에 낙서를 적는다.


  “태어남과 죽음은 성역(聖域)이다. 그곳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할애된 시간을 위해 나는 책을 읽는다. 그것은 연습과 훈련이다. 서명. 한국에서 온 여행객 J. 추신 :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국인들을 대신해 진실한 온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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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를 본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옆면에 할머니 주름이 생긴 책들이 꽂혀 있다. 양장본은 커버 모퉁이만 빼면 그나마 멀쩡하다. 읽긴 했으나, 아무래도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는 저들을 양손 꽉 차게 쥔다. 왼손으로는 옆면을 비스듬히 잡고, 오른손 엄지에 힘을 주며 빠르게 책장을 넘겨본다. 시원한 바람이 눈앞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책 특유의 체취가 미약하게나마 코끝에 얹힌다.


  책의 냄새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차이를 제외한다면 천편일률적이다. 그 냄새로부터 우리는 책의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다. 그렇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책의 냄새는 책의 내용이 아니다. 책의 내용은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을 닫고 정신으로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이 순간, 우리는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은밀한 곳으로 들어간다. 음부보다 남 보여주기 더 창피한 곳으로.


  작가는 호수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다. 독자인 우리는 깊은 호수이다. 어디에 돌이 떨어지느냐에 따라 반응하는 사람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떤 돌은 너무 커서 호수 전체가 출렁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동이 서서히 사라지더라도 작가가 던진 돌은 우리 안에 침잠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돌들 중 몇몇을 골라 그것이 호수를 때리며 가라앉았던 충격을 최대한 되살려보고자 노력한다.


  그건 정말이지 노력이다. 충격의 고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인간의 본능과도 배리되는 일이다. 감각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독서는 가히 3D 중 하나로 기억될 법 하다. 그러니 고통과 꾸준히 독대하고자 로댕의 조각처럼 앉아 체처럼 담배를 꼬나물거나 눈살을 찌푸려가며 눈을 지그시 감는 저들의 자세는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늘 피하려고만 했는데, 저들은 평생을 직시하여 온몸을 짜내 책을 쓰는구나!


  책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양질의 고통이다. 어떤 이는 서머싯 몸의 장편 한 권을 읽고 인생을 알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위화의 소설 한 편을 읽고 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했다.


  고통을 읽는 삶은, 효용과 목적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삶이 대개 인간의 단면에서만 펼쳐진다면 독서는 우리의 몸을 강제로 뒤집어 등은 배가 익숙하던 곳으로, 배는 등이 온기를 남긴 곳으로 향하게 한다. 참으로 낯설고 힘든 일이다. 책의 첫 장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장까지 향하는 여정이란. 그리고 한 권에서 시작해 삶의 마지막 책에까지 이르는 고통의 작업이란. 예찬 받아 마땅한 고통이 아닐까.


  나는 죽기 전 유언으로 먼 저승길의 벗으로 삼을 책 한 권 옆구리에 끼워달라고 할 것이다. 그 한 권의 책을 찾는 일. 때론 성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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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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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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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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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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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 0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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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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