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06



  그녀가 굳게 입을 다물어도, 나는 그녀가 속으로 삭힌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서 있어도, 나는 나 몰래 이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누군가가 그녀였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손만 잡아도, 안아 달라, 불편하다, 배가 고프다, 빨리 걷고 싶다, 걱정된다,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그때 한창 시를 쓰겠다고 문장과 단어에 매달리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내가 백지에 적어 내려가던 그 복잡하면서도 속 깊은 모든 말이 그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분명하게 알게 됐다. 표현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반(反)구체적으로 그 세계와 교감한다. 그래서 더 생생하다. 우리의 이해는 배움 뿐만 아니라, 이 세계와의 교감에도 빚진 바가 많다.


  좀 더 크고 나는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요목조목 잘 따지고, 앞에 나가서 발표 잘 하면서 사회인으로의 자질을 다듬어나가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 만족은 점수가 자신의 미래와 어떻게 연관되느냐와, 콕 집어 말하자면 '취업'의 여부와 크게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학생의 버릇은 이제 그 생활의 막바지에 이른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하나를 남겼다. 나는 아직도 서재에 둘러싸여 대체로 그 논리와 분석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세계와의 교감에 써야 할 정신의 여력, 뭐라고 부르든 여하튼 그 일정의 여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하는 나의 날카로운 신경에 허비하게 됐다. 내가 지금 무엇과 교감을 하고 있기는 한 걸까? 하나같이 마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대학의 방식이나 책의 논리 등으로만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온갖 '잡것'들을 주워 담아 그냥 방치한 한 기괴한 모습의 세상은 나의 갤러리[추억]에서도 한참 구석에 밀려난 셈이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너무 딱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 특히 문화생활 한다는 사람들이 '날것'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 단어가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것이리라. '날것'은 보고, 만지고, 먹어봐야 하는 것. 그것에 논리와 분석의 가열을 가하진 않으리라. 나는 그냥 이런 생각이었다.


  '교감', '날것',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나의 마음은 대략 절반 정도이다. 물론 그런 취지에서는 글이라는 것을 애당초 쓰지도 않을 것이다. 글은 '가열'에 해당하니까. 이 공간에, 스스로도 별로 탐탁지 않은 감상문들을 올리는 건 모두 가열하는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모두 가열이다. 날것을 그냥 먹으면 무슨 병에 걸린다더라 하는 의학적 지식이 우리의 '책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식이 아니던가. 사실이다. 책은 저자가 가공한 하나의 레이디메이드. 누군가는 책의 내용이 너무나도 참신해 그것에 '날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스스로 좋아하겠지만 그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장에는 마침표가 있으니, 우리는 예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셈이다. (자신의 독서능력, 즉 비판적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한 번 생각해보라. 반대로 너무 긴 문장이 있으면 우리가 어디 제대로 읽을 수나 있던가?) 아마 독서에 익숙한 사람에게 '교감', '날것'은 마이너(minor)일 것이다. 뭔가 현실에 꼭 대입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지만 나의 '메이저(major)'와 나의 '마이너'는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다. 이/저쪽에서는 불에 구워 먹지 않으면 몸에 나쁘다고 하고, 이/저쪽에서는 구우면 내가 죽는다고 한다.


  우습지만 비유 하나 해보자.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면서, 나는 지금 윤중로의 벚꽃을 보고 있다. 물론 보는 건 벚꽃이지만 내가 만지고 있는 손은 여자친구의 것이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여자친구이다. 벚꽃은 핑계이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감동, 쾌감, 슬픔, 이런 것들을 윤중로 그 짧은 벚꽃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아니, 교감한다. 그것은 아무런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처럼 글로 쓴다고 하자. 복잡했던 '날것'의 순간이 정렬되면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에 일련의 원인과 과정 등이 '발생'한다. 그런 것이 애당초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생각은 상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시를 그만 쓰기로 하면서 사랑을 시로 쓰는 건 사기 치는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나는 가면을 씌우면 안 되는 '날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주고 싶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문자로 정착시키는 것보다는 그것이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흙 위에서 썩어 없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광경을 목격하며 '표류하는 감정'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쉽지,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상당히 뼈저리지 않던가.)


  나는 몇 년 간 미술의 역사와 화가, 그리고 그들의 이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공부했었다. 당시 내가 '미술'이라는 세계에서 발견한 감동은 예술이 탄생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그냥 상상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특히 모더니즘 이후에는) 논리적 구성과 튼튼한 이론이 있다. 그러나 구성과 이론 사이에 예술가 특유의 번뜩이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발상의 순간들이 있다. 구성과 이론을 공부하던 내가 오히려 밑줄을 긋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도 어렴풋이 안다. 그들과는 달리 나는 글로 창작을 하던 때가 있었지만 무언가를 쓰기로 결정하고 구상하는 그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 사이에 고통의 아픔을 단번에 치유하고 창작 의지를 불태우도록 하는 '예술의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순간 자체가 하나의 '날것'이다. 그것이 그림과 글로 정착되는 순간 우리의 '날것'은 사라진다. (이걸 굳이 형식론으로 따지자면 좀 복잡해지니 차치하려고 하는데, 미술과 문학과는 달리 음악은 '날것'이거나 '날것'에 훨씬 가깝다. 예술 양식 사이의 비교를 다룬 책을 읽어보면 대체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읽지 않아도 직접 비교해보면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글로 '자동기술'을 하는 것이 더 본능적일까, 아니면 피아노에 앉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이런저런 건반을 두드리면서 즉석에서 이도저도 아닌 '음률'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본능적일까. 참고로 전자는 좀 어려웠는지 파리에 있던 초기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는 마약을 '빤'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게 위험하다는 걸 물론 사전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나중에' 그것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관뒀다.)


  책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주로 빠지는 인생의 함정은 정제된 걸 지나치게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된다. 책을 읽으면서도 소위 '익스트림'한 걸 좋아할 수 있다. 비싼 돈 주고 마운틴바이크를 즐기거나, 짜릿한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도 애독가들 중 분명 많다. (오히려 애독가들이 그런 생생한 체험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예로 흔히들 회고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 극단을 오고 가는 경험들이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준다고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즐기면서 추구하는 그 나름의 것이고, 문제는 그것마저도 다시 책이나 글 속으로 정제시키려는 경향이다. 나도 포함되겠는데, 우리나라의 수많은 블로거들도 그렇다. 정제된 감정들이 소통하기에도 편하다. 사실 '날것'은 개인에게 그 교감의 몫이 전적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익은 고기가 된다. 먹기[서로 나누기]에는 좋겠지만 교감의 일부분은 표현되지 않은 채 우리의 비밀로 남아 있거나, 혹은 먹을 때의 기분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폐기되어 버린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독서의 감정에도 분명 '날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제 그런 '날것'을 책에서 건져 올려봤는가? 나는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을 읽고 나자마자, 새벽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샅샅이 살펴봤다.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나무 위의 남작'이 하늘을 나는 기구를 붙잡고 먼 하늘로 사라졌다는 책의 결말에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날것'의 감정은 지금 글을 통해 회상되는 처지에 놓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멸했다. 글은 그 감정의 묘비인 셈이다.) 분명 '날것'이 아닌 세계에도 '날것'은 존재한다. '날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과 교감하는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첫 번째 파동이자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다양한 강도를 지니겠지만 대체로 강렬한 편이다. 하지만 그 길이가 짧다. 우리를 일순간 주목시킬 수 있을 정도의 폭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독서와 글쓰기, 혹은 비슷한 종류의 '정착시키기'를 통해서 감정의 난민들을 어떻게든 다시 우리 안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잘 안 돌아가면 우리가 으레 하는 '조각모음'처럼.


  위에서 나는 '날것'에 집중하고 싶다는 나의 '반쪽짜리 욕망'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감정이 정착되는 우리의 비근한 일상으로 되돌아왔는데, 이건 '날것'의 입장에 서 있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나는 내로라하는 장서가들도 하루 즈음은 "저 지겨운 책의 세상으로부터 떠났으면 좋겠네."라고 넋두리를 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겁이 나서 확신까진 못하겠지만, 분명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방벽'은 '날것'이 아니라 '책(문자)'이다. 그렇다고 굳이 이런 환경에 질식할 필요는 없다. 용기를 갖고 딜레마와 또 한 번 부딪히는 것이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어디 나갔다가 여기 다시 앉게 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과정 자체도 이미 다르거니와 일단 앉게 된 '이유'가 다르다. 마지못해 앉아 있는 것과 앉아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앉는 것은 동기가 확연히 다르다.


  오래도록 나는 '날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이상향인 것처럼 여겨왔다. 책을 열심히 읽을 때에는 "책이 세상의 전부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뿌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맞아. 전부는 아니지."라고 수긍했다. 이때, 나의 수긍에 한 몫 한 것은 '날것'에 대한 동경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비아냥거릴 때 말한 그 세상의 진의는 '날것'이 아니라, 책 밖에 있는 거친 세상일 것이다. 나는 조금 달리 생각해서 내가 세상과 접하는 방식의 이원성을 고민했다. 교감하느냐, 읽느냐. 둘은 광의(廣義)이다. 정말 내가 E.T.와 손가락 하나로 교감한다는 것, 혹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날것'을 그대로 놔두느냐, 그걸 요목조목 묘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성의 고민이 여물지 않았던 때에 나는 한쪽만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책이 지겨울 때에는 "독서, 이딴 거 다 때려치우고 말지."라는 앙탈을 부릴 때가 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두 방법 사이를 끝없이 왕래하면서 나는 어떤 견고한 두 축을 만들어간다. (물론 '날것'은 그 모습을 절대 보이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냥 편의상 상상한다면 말이다.) 두 세계가 나의 안에서 결코 동시에 자신의 음을 내는 일은 없겠지만 하나는 '도'의 음으로, 다른 하나는 '레'의 음으로, 혹은 어떤 음으로든 서로 다른 높이의 소리를 가진 채 나에게 하나의 큰 세계를 보여준다. 아이러니이다. 둘은 공존하지 못하면서도 긴 시간의 선상에서는 분명 공존하고 있다. 한 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을 떠올리며 갑자기 나는 '날것'으로의 어떤 깨달음(연관성이라고 할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적어보는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사라질 나의 '날것'에 대한 추모이자, '날것'이 낳은 아들과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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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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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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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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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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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1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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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2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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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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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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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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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2





  작가는 책을 통해 세계를 말하며 독자와 만난다. 독자는 책을 통해 세계를 읽으며 작가와 만난다. 순수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작가의 고된 창작을 음미하며 세 가지를 얻는다. 책, 세계, 그리고 작가.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단계는 책을 액면 그대로 읽는 첫 번째 행위, 책에서 세계를 읽어내는 두 번째 행위, (상상 속의 장소에서) 작가와 만나 대화하는 세 번째 행위로 나뉜다. 물론 단계별로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나, 세 번째 행위로 갈수록 독서는 은밀해진다. 이 은밀함을 통해서만 '좋아하는 작가'라는 소중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나는 머지않아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전조를 느끼고 있다. 보물의 이름은 이탈로 칼비노이다.


  내가 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나는 책 읽기 계획을 세워놨다가 즉흥적으로 다시 목록을 만든는 일이 잦은 변덕쟁이이기도 하다. 별 고민 없이 생각해보면 책과 나의 만남은 정말이지 순전히 우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독자의 직감이라는 것도 있고, 일단 펼쳤을 때 초반이 재미있으면 지루해지는 부분까지는 일단 단숨에 읽어버리는 감각주의적(?) 습성 역시 한 몫 하는 것도 같다. 여하튼 칼비노는 어느 순간 나에게 들어와 있었다. '○○의 뇌 구조'라고 해서 누리꾼들이 패러디하기 좋아하는 뇌 단면으로 근래 나를 표현해보자면 분명 '칼비노'라는 부분이 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다섯 작품을 읽었다. 그간 이 공간에 리뷰들을 쭉 올려왔는데, 〈민음사〉에서 이현경氏가 번역한 '우리의 선조들(I Nostri Antenati)' 3부작과 『보이지 않는 도시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 이현경氏가 번역한 『우주 만화』이다. 주요 인터넷문고들, 국회도서관, 내가 다니는 대학교도서관을 검색해봤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소설은 여섯 개인 것으로 보인다. 남은 하나는 지금 읽고 있는 그의 첫 작품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Il sentiero dei nidi di ragno, 1947)』 이다. (그 외에 민음사에서 나온『왜 고전을 읽는가(이소연氏 번역)』도 그를 아는 국내 독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다. 직설적으로 밝히긴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타인의 평론을 먼저 읽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읽으며 부딪혀보자는 '주의'인 셈이다. 영어 번역본들은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어로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은 완역됐는데, 그걸 사보기에는 영어 실력도 모자라고, 직수입 도서가 워낙 비싸서 솔직히 읽을 엄두를 내기가 쉽진 않다.) 그의 젊은 시절(24세) 작품인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까지 읽으면 시기별 대표작들을 큰 범위로 훑어보면서 그의 작품론과 작가론에 대한 여러 대학논문들을 아마 어렵지 않게 공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일단 앞으로 번역될 그의 작품들까지 포함해서 여러 작품들을 반복해서 읽어 문학세계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칼비노와 만날 앞으로의 여정에 앞서 지금까지 그와 만났던 기억들을 졸문으로나마 회상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     *     *




1. 『반쪼가리 자작(Il Visconte Dimezzato, 1952)』


  내가 처음 읽은 건 『반쪼가리 자작』이다. '우리의 조상들' 3부작을 여는 작품이자, 개인적으로는 칼비노에게 단숨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도 이 작품과 만난 첫 순간을 기억한다. 간결하고 명확한 전개. 하지만 급작스럽고,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내용. 쉽게 말해 그 이후가 궁금해지는 전개 때문에 나는 책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이 작품은 선악(善惡)의 분명한 경계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구심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칼비노는 주인공 메다르도를 전쟁터에 내보내 대포 앞에서 두 동강을 내버린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난 그의 한 쪽은 의사가 살려 악한 메다르도가 됐고, 다른 한 쪽은 수행자가 살려 착한 메다르도가 됐다. 둘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소설에서도 명확하게 제시된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그러나 그런 행동을 보는 마을 사람들은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 위그노 교도들은 자신들의 안녕만을 기원하는 안이함으로, 마을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가 목 매달아놓은 시체들을 바라보며 악행의 결과가 그 장소에서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리고 그 시체들을 만든 기계의 장인 피에트로키오도는 자신의 안에 그런 기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사악함이 존재하진 않나 하는 불안감으로 선악 사이의 애매함을 드러낸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은 선하고 악한 행동 사이의 애매한 태도가 악함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어떻게 키우게 되는지, 도덕적으로 숙고해보게 하는 뼈아픈 역작이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주인공 메다르도를 둘러 싼 '일반적인' 인물들이 대변해준다. 우리는 맹목적인 선은 지나칠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때론 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둘은 사실 우리의 안에서 상당 부분 희석된 채 존재한다. 명확하지 않다. 마이클 샌델에 대한 지난 여론의 주목을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에게 제시된 과제는 '토론'이었으나, 우리는 희석된 선악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역량이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안타까운 사실만을 재확인했었다. 그 후, 그의 이름은 예상 외로 우리나라에서 빠르게 식어버렸다.


  나는 아직 이 '희석된 선악'의 관계에 대해 칼비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놀라운 의술로 두 메다르도를 다시 하나로 붙여버린 선의(船醫) 트렐로니의 행동과 말에 대한 의미를 더 생각해봐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필요는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나는 그에 대해 좀 더 집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을 들려주는 어린 '나'를 의무(善)와 도깨비불(惡)의 세상에 남겨두고 트렐로니가 다시 한 번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항해의 모험을 떠나버린 것, 그 '떠남'의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존재하지 않는 기사(Il Cavaliere Inesistente, 1959)』


  '우리의 조상들'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작품은 칼비노가 '존재'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통 우리는 존재를 단선적으로만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하거나, 혹은 '타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보통 둘을 종합해서 '거울'을 존재에 대한 사고의 매개체로 자주 사용하며,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칼비노는 훗날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p.70)"라며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상상을 통한 존재에 대한 사유 방법은 다양하다. 칼비노는 그 예를 몇 가지 보여주기 위해 다양하고 이상한 인물들을 만들었다.


  주인공이자 이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기사 아질울포는 갑옷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의지만 있다. 우리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나'라는 존재를 직접 상상하기는 힘들다. 분리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춥거나 더운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몸을 어쩔 수 없이 인식하게 된다. 플라톤처럼 정신의 이상적 상태를 아예 보이지 않는 하늘 위의 어떤 공간으로 상정하지 않는 이상(그것도 아니면 종교적 의미로 생각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둘의 분리를 직접적으로 상상하거나,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아질울포'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상상을 해본다. 가령, 이 기사는 육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 우리가 거의 매일 하는 행위, 즉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당연히 "삶의 끈들을 다시 엮는" 일상과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드는" 꿈 사이를 우리가 마음대로 왕래하는 사실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정규적이지 않은 것, 나태한 것,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 등의 행동도 용납할 수가 없다. 한 학자는 아질울포를 "거의 완벽한 무의식을 통해 관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자동화된' 인간의 상징(the symbol of the 'robotized' man, who performs bureaucratic acts with near-absolute unconsciousness)"이라고 평가했다.(「La seduzione del cavaliere inesistente」, 『Romansk Forum』, Margareth Hagen, 2002.02)


  두드리면 텅 빈 소리 밖에 나지 않는 갑옷이거나 그 안의 의지일 뿐인 아질울포도 이상한 존재인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 여러 존재들을 (우리가 보기에는) 흉내 내는 '구르둘루'도 칼비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굉장히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말 그대로 여러 존재가 된다. 따라서 자유롭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것은 분열증 같기도 하고, 동시적으로 여러 존재가 되고자 하는 현대인의 지나친 욕망 같은 것을 나타내는 듯도 하다. 그의 행동을 처음 봤을 때에는 속된 말로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그의 처지에 연민과 동정을 보내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구르둘루는 실존에 대한 위기이기도 하다.


  복수를 꿈꾸는 청년 랭보는 이해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수해야 될 대상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로 잰 것 같은 아질울포의 기사정신에 감명을 받는다. '롤모델' 같은 존재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아질울포로부터 랭보는 우리가 주로 하는 고민인 "나는 누구인가?"와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에 빠진다. 결국 그는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 앞에서 "나의 적이 맞는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한 번 실존의 문제 앞에 봉착하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쉽게 확신할 수가 없다. 해결책은 그냥 한 쪽을 믿어버리는 것뿐이다. 나는 그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한 흔적은 남기기 때문에 아질울포의 '의지'와는 다른 개념이다. 사랑은 실체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 말미에 가서는 아질울포가 사라지는 반면 랭보와 브라다만테, 토리스먼드와 소프로니아의 사랑은 남는다. 이 두 커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남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지는 건 순전히 아질울포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칼비노의 개입이 아닐까 하는 부분, 그러니까 글쓰기의 어려움을 '테오도라'라는 서술자의 입으로 호소하는 부분이 평소 글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글은 상상으로 쓴다." "영혼구원의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기록과 글쓰기는 다르다." 이 세 가지 호소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3. 『나무 위의 남작(Il Barone Rampante, 1957)』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분량 상 가장 많기 때문에 담고 있는 내용도 많다. 그러나 복잡한 소설은 아니다. 모든 것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상적으로 종합된다. 주인공 코지모가 하늘에서 나타난 기구를 타고 돌연 사라져버리는 장면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픽션들 중에서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엔딩컷'이었다. 문득 하늘을 쳐다볼 때, 이따금 코지모가 매달려 있을지도 모를 기구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는 나의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다.


  12세 때 '지상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는 동생이자 서술자인 비아조가 말했던 것처럼 은자(隱者)이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 살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땅으로 굽어 있어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책을 많이 읽으나 책에서만 생각을 그치지 않으며, 명사들과 편지로 교분을 쌓지만 명예에서만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식지 않는 계몽주의 열정은 당대 '프랑스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나란히 놓여 칼비오의 평가를 받는다. 아니, 평가를 받는 쪽은 실제 일어난 '형식주의적인 혁명'이다. 19세기는 "젊은이들의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은 모두 재가 되었다.(p.396)"고 묘사되며, 그 재가 된 시대에서 기인(奇人) 코지모마저 떠나자, 그의 마을 옴브로사에서는 외래종에 밀려 나무들이 사라진다. 그가 타고 다녔던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독자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각자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혹은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미지근한 절망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겠다.






4. 『우주 만화(Le cosmicomiche, 1965)』


  김칫국 잘 마시는 나는 벌써 '내년에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으로 두 권을 골라놨는데, 『우주 만화』가 그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시절 나를 좌절에 빠뜨렸던 가오싱젠(高行健)의『영혼의 산(靈山)』이다.) 이 픽션은 과학과 상상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크프우프크(QFWFQ)'라는 초시간적 존재(혹은 우주의 시간에 해당하는 존재)을 사유하게끔 한다. 때문에 『우주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과학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든 체계들, 예컨대 천문우주학이나 진화론 등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은 '제 2의 지구'가 발견될 것이라는 최근의 희망에 부풀어 여러 우주 사진들을 살펴보거나(그러나 '제 2의 지구'로 가장 근접할 것이라 예상됐던 행성 HD 189733b은 사실 항성과 너무 가까워 기온이 매우 높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풍이 부는 목성형 행성임으로 밝혀졌다. 이 행성은 지구로부터 63광년 떨어져 있으며, 허블 천체망원경의 데이터를 분석해 NASA가 어제(2013년 7월 11일) 위와 같은 공식 발표를 했다. 링크를 해둔다. http://www.nasa.gov/content/nasa-hubble-finds-a-true-blue-planet/#.Ud_ojzsqzgA),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과 나의 존재에 대해 가볍게나마 고민을 한 사람들을 위한 우주적 사유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 사실만으로 이뤄져 있진 않다. 최초의 존재들이 우주에서 놀이를 하거나, 달과 지구 사이를 장대 하나에 의지한 채 멋지게 점프해 이동하거나, 혹은 기중기가 달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과학과 픽션 사이에서 우리는 사유의 공간을 얻는다.


  내가 칼비노에게 빠져버린 결정적으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섬세함, 깊은 통찰력, 엄청난 규모를 다루는 상상력이었다. 문제에 대한 집착이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 이렇게 표현해놓긴 했지만 내가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뿐더러, 대체 통찰력이 깊다고 했는데 얼마나 깊은 것인지 가늠하지도 못할 정도로 『우주 만화』는 방대한 작품이다. '크프우프크'라는 가공의 존재로 여러 단편들을 연결시켜 우주의 다양한 시간대를 훑고 지나가는데, 각 시간대마다 깊은 의미들이 별도로 존재하는가 싶다가도 그 의미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모이는 것도 같다. 원시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진화의 근본(즉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의 '경계적 존재'들로부터 시작해서 공룡, 그리고 그 후의 존재들로 이어지는 사유)을, 천문학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시간과 공간의 근본(여기에는 '창조'나 '시원(時原)'에 대한 위트 있는 사유도 포함)을, 생물학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우리 몸속의 미시적 근본을 확인해볼 수 있다.






5.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 1972)』


  이 책은 이번 주 리뷰에서 여러 이야기로 다뤘기 때문에 길게 뒤돌아보진 않겠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유도 깊다. 시적(詩的)인 내용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단비와도 같을 것이다. 55개의 도시(이현경氏는 55개의 작품이라 했지만,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랄라제'라는 도시가 따로 묘사되므로 56개의 도시이다.)에서는 각 장(章)의 도시를 형용하는 표현들에 대한 사유들이 등장한다. 길어봤자 한글 번역으로 채 5~6페이지도 안 되는, 대부분은 1~2페이지에 그치는 사유들이지만 그만큼 압축적이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하루 1~2페이지만 읽어도 자신의 글로는 10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이니까. '55'은 결코 작은 수가 아니다. 나처럼 그 많은 도시들로 이뤄진 지도(나는 그것을 '삶의 지도'라 생각했는데)를 그리다가 처참하게 실패할 수도 있고, 애당초 지도 그리는 것을 포기하는 현명함을 발휘해 칼비노의 사유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도 있다.


  다 읽고 나면 "도시(이 '도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인생의 가치들을 무수히 많이 대치시킬 수도 있다.)는 무엇이 구성하는가?"에 대한 사유의 기억보다는 "무엇을 우리는 잊고, 무엇을 우리는 모르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의 시선을 안개 속으로 돌려놓는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비록 폴로가 황제에게 여러 형상들, 관계들, 그리고 의미들을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더라도 우리에게는 굳이 그것이 '도시'라는 한정된 기호에 그치지 않아도 된다.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 작품의 제목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보이지 않는(invisibili)'이 된다. 우리가 평생 추구하며 산다는 어떤 것들. 그 인생이 고되고 때론 지옥처럼 느껴지더라도 칼비노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빌어 힘 있는 어조로 "현실은 지옥이지만 당신은 지옥이기를 거부하라. 지옥이 아닌 부분을 찾으라."라고 말한다. 이 어조는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독자들은 그 많은 도시들이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다. 그 환상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방향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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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저는 이제서야, 이 글 읽고나서 이탈로칼비노 (사기) 시작했어요. (읽기가 아님) 일단 한 권 읽어보려고. 전에 추천한 게 3부작 먼저 시작하라고 했었는데.. 저 뭐샀게요? 이건 저도 다 읽으면 그때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탕기 2013-07-18 11:59   좋아요 0 | URL
음... 『반쪼가리 자작』인가요? :) 잘 모르겠네요.
저는 잠시 소설은 서재에 꽂아두고 인문학 책들에 빠져 있습니다.
아. 나중에 읽으려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도 사뒀고요.
칼비노 읽으시면 리뷰 써주세요. 읽으러 갈게요. ;)
 

2013.07.05


  누군가가 왜 이 블로그에 오래도록 글이 올라오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 나도 그녀가 묻기 전까지는 사실 그렇게 오래도록 내가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몇 주는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제 곧 네 달째가 되어가니 그 도중에 아마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세를 가다듬고 글을 쓰는 버릇이 생긴 지 십 수 년이 되는 지금까지 이런 긴 '공백'은 꽤 있었던 것 같다.


  방학 때보다 책을 덜 읽긴 했지만 문장을 탐하고 세계를 경외하며 나의 '작음'을 생각하는 일상은 여전하다. 그러나 확실히 '내가 뱉어내는 나'는 줄었다. 아니, 없었다고 해야 옳다. 혀 끝까지 나와 발음을 하려던 말이 다물어버린 입에 막혀 버리는 것처럼, 나는 A4용지 몇 장이 되는 글을 쓰고 삭제하는 일을 반복했다. 예전에는 자만과 싸워 이겨야 하는 힘든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능히 할 수 있게 됐다. 글이 긴 만큼, 그리고 특히 자신이 생각해도 서두가 매력적인 만큼 글을 지우는 건 힘들다. 그러나 죽여야 할 글은 죽여야 한다. 정 살려두고 싶다면 (그리고 글로 뱉어진 '수많은 나'들의 왕성한 활동력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오직 자신만이 기억하는 은밀한 곳에 넣어둬야 하고.


  게으름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한 번에 많은 글을 읽거나 쓰는 작업을 오래도록 하지 않고 있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정력적으로 읽고 쓰기를 반복하던 무렵, 갑자기 작가와 글이 하는 말을 조용히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는 직감이 드는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은 일절 적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날이 더워 정 책이 읽히지 않는 때는 비밀 블로그에 그 책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하는 일을 했다. 이렇게 읽는 양이 줄고, 쓰는 양이 없어지면 아주 짧은 문장 하나에서도 놀라운 생명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생명을 나의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는 것이다. 그런 유희를 하다 보면 그 짧은 문장이 여태 읽은 책 몇 권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모습이 보인다. 그 문장이 어느 사상, 다른 문장, 그리고 짧은 단어에 부딪히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책들을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한다.


  책을 적게 읽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내뱉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물론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핫아이템'은 (아무래도 난 이 '아이템'을 좀 더 발랄하게 소개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버리기'이다. 서재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 숨 막히는 물 속에서, 책 '버리기'는 그 공간을 물이 아닌 '내 방'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자기암시이다. 요컨대, 책을 조금 읽다가 영 아니겠으면 바로 덮어버리는 행위는 책과 세계의 압박으로부터 나를 다시 책 읽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세계와 역사를 경외의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있지만 그런 인격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를 숨막히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장서가들도 이런 동병상련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압박은 의무감을 만든다.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결국 어려워도 다시금 펴든다. 오해가 생기고, 책의 의미가 내 안에서 심각하게 변질되기도 한다. 이런 게 물론 독서생활에 있어 피치 못할 실패이긴 하나, 그런 실패는 아무래도 줄이는 것이 좋다. 그래서 책을 버리는 것이다.


  강신주가 지승호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전략)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나의 삶과 어떻게 같이 갈 거냐 하는 문제예요. 짜장면 먹기로 했으면 짜장면만 먹어야죠. 괜히 스테이크도 같이 먹지 말고. 관조적으로 보면 다 먹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안 그래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실천은 어느 때가 가장 효과적일지 결정해야 해요."(강신주, 지승호,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中)


  예컨대, (일전에 밝힌 적이 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 시인을 꿈꾸며, 혹은 시인 겸 소설가를 꿈꾸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걸작들을 독파하겠다고 벼렸었다. 가장 참담한 실패는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읽다가 1권에서 포기한 것이었다. 내용이 길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고등학생의 '세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는 "세계는 더 넓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지만 이때의 "넓다."라는 형용사는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말 그대로 막연한, 그리고 뼈저린 경험일 뿐이다. 이것은 항간의 말처럼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는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대학생 때부터 드는 것이 보통일 것인데, 이때부터는 위와 같은 실패는 알아서 줄이는 것이 좋다. 강신주가 한 위의 말 뒤에는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여러 여자 만나는 것보다는 "아, 지금 이 여자다." 싶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으레들 그렇게 말하고, 특히 연예인들이 자신의 연애담을 밝히며 여러 이성을 만나야 결혼 잘 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실 강신주의 말은 아주 지당하다. 직감적으로 자신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여기는 때는 존재한다. 가능성이 낮을 뿐이다. 그러나 독서에 있어서 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아, 지금 이 책이다."라는 감을 항상 유지하는 법이다. 말인즉, 지금 자신이 어떤 분야, 사상, 감성 혹은 작가를 원하는지 수시로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신주가 말한, "나의 삶과 어떻게 같이 갈 거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독서 방법이라는 것은,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버리고, "이거다." 싶으면 펼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 마음대로 읽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상하관계로 세상을 이해할 때에, 그것은 나의 패배에 대한 뼈저린 증거품처럼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기적인 세상을 이해한 뒤부터 그 책은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실존한다. "내가 왜 세상을 다 이해해야만 하는가?"라며 시니컬하게, 또 버릇없이 물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듯 저것도 존재한다는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따금 책을 사기 위해 여러 블로거들의 리뷰를 산책하러 다니곤 하는데, 그들이 펼치는 지식싸움, 아니면 자신의 서지학 수준을 뽐내기라도 하듯 줄줄이 늘여놓는 '모를 말'들,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 그들이 자신들만의 자와 연필로 그어놓은 잣대들을 보게 된다. (옛날의 나는 그들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읽다 보면 분명 책을 한 두 번 가볍게 읽은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도 아니라는 것은 책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게 된다.


  좋은 작가가 있듯, 좋은 독자가 있다. 좋은 작가가 갖춰야 하는 역량이 좋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요구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작가가 좋은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 역(逆)은, 즉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가 아니다."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이지 않아도 독자는 세계에 대한, 작가에 대한, 그리고 작품에 대한 마음가짐, 즉 태도의 변화로 수준 높은 인식과 건강한 인격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런 독자들은 타인의 추천, 화려한 인터넷 광고, 항간의 소문 따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건조된 거대한 배를 만들어 대양을 유랑할 수 있다. 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좌초시켜 어느 외딴 섬에서 다시 새로운 배를 건조할 수 있을 것이다.


  4개월 간 좌초됐던, 좌초됐는지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나의 배는 지금 이 글의 밑에 깔려 있고, 나는 새로운 배를 건조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은 이전을 추억하고 반성하는, 그리고 배를 만들 목재를 모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 그것들이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는지, 타인에게는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나의 서랍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다. 나의 잣대를 함부로 세상에 들이밀기 위해 휘두른 칼질로, 나의 서랍 벽 이곳저곳에 흠이 가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론 흠이 없는 때는 없다. 그것이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서랍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나'의 실존 그 자체이므로. 읽고 쓰고, 버리고 멈추는 나의 긴 호흡은 세계 위로 올라가려는 어린 나를 끌어내리는 힘겨운 작업이다. 아무 말 하지 않기에 더욱 힘들다. 침묵. 누군가가 나를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입다물게 하는 것. 피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중략)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中)


  이 글로 침묵은 깨졌다. 하고픈 말이 많을 때, 그때가 입 다물고 있는 시기라고 하더라도, 막상 깨진 침묵은 "너는 하고자 하는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라고 나를 깨우쳐 준다. 이건 매우 슬픈 순간이며, 동시에 매우 기쁜 순간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긴 침묵을 염두에 두며, 나는 침묵의 저편으로, 새로운 배의 밑으로 사라질 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타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이 순간이, 나에게는 선언이 된 것 같다. 누구든 그렇다. 스스로에게 외치는 때가 있다. 그 순간, 침묵은 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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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4

 

 

  학기가 시작되었다. 강의 하나 들으러 갔으나, 교수가 함흥차사였다. 첫날부터 휴강. 간만에 캠퍼스 소요나 하다 돌아왔다. 신입생들이 ‘애기’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나를 보며 “그 때가 좋은 거야.”라고 하고, 나는 앳된 새내기들을 보며 “정말 좋은 때야.”한다. 이른 방황을 후회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봄이다. 모든 것이 용서되는 봄이다.


  봄이 얼굴을 보인 때라지만 건물 밖 구석진 곳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다. 지난 겨우내 높다랗게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하얀 겨울이었다. 눈에 대한 예찬, 눈에 대한 사랑, 눈에 대한 짜증, 눈에 대한 분노 등이 있었다. 생동할 앞으로의 세상을 잠시 물리고, 지난 추위에 나는 무엇을 꿈꿨는지 돌아본다. 정리와 출발을 다짐하기에, 사실 신정은 너무 춥다. 꽃샘추위 물러간 지금이 제격이다.


  분에 넘치지 않게, 소박하게 꾸리는 것. 곁에는 조금씩 두고, 욕심 줄이는 것. 한 해 여러 목표들이 있지만 가지를 쳐내 내가 진정으로 닿고 싶은 도시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나도 이제 어른들의 현명함을 자연스레 따라할 무언가가 마치 ‘내공’처럼 쌓여가는 것 같다. 부족하다고 채근하면서도 폭식은 삼가는 것. 날마다 쌓여가는 것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덜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잡다하면 별로 건강하지도 못하다. 무거우면 오래 걷지도 못한다. 알았으니, 이제 다짐한데로 한 번 가보는 거다.


  그래도 막연한 욕심이, 마치 아직 녹지 않은 눈처럼 뭉텅이로 남아 있다. 책이다. 많이 읽고 싶은 욕심은 많이 읽지 못했다고 느끼는 결핍감 때문에 쉽사리 떨쳐내기가 어렵다. 생각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확연하게 체감하는 까닭도 있다. 넓어진 세계에서는 예전에 완독하지 못했던 책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얻곤 하지 않은가. 빈곤했던 나의 나라는 떠들썩한 백성들로 가득한 여러 도시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 도시의 이름만 들어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 알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미시(微示)의 세계는 직접 발을 담가봐야 또 알 일이다. 큰 눈과 작은 눈을 동시에 갖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것도 욕심의 또 다른 까닭이겠다.


  약간 고봉(高峰)으로, 생각보다는 조금 더 푸짐하게 올해 2013년의 책 스물여덟 권을 골라봤다. (고르고 보니, 우연히 내 나이와 같다.) 학기 중에는 한 달에 픽션과 논픽션을 각각 한 권씩, 방학 중에는 매월 각각 두 권씩 꾸준히 읽으면 이 욕심도 하나의 도시가 되리라 생각해본다. 따지고 보면 2주에 한 권인데, 그게 실상 바빠지기 시작하면 고민이 많아 잘 잡히지 않기도 하고, 쉬운 책만 골라 읽는 것도, 대충 읽는 것도 아니니, 넉넉잡아 십 보 정도 양보한다면 많아야 스무 권에서 스물다섯 권 정도 읽지 않겠나 싶지만. 보다 넓은 지평을 기대한다.

 

 

픽션 14선

1.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2.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3. 친기즈 아이뜨마또프, 『백년보다 긴 하루』
4. 보후밀 흐라발, 『영국왕을 모셨지』
5. 임레 케르테스, 『운명』
6.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7.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8. 카렐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
9. 알베르 카뮈, 『페스트』
10. 오르한 파묵, 『하얀 성』
11.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2. 모옌, 『열세 걸음』
13. 조지 오웰, 『1984』
14.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논픽션 14선
1. 로렌 아이슬리, 『광대한 여행』
2.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행복의 경제학』
3. 알리스터 맥그래스, 『과학과 종교 과연 무엇이 다른가?』
4.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
5. 주디스 리치 해리스, 『개성의 탄생』
6.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7.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8. 백영경 外,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9. 에릭 홉스봄, 『폭력의 시대』
10. 월터 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11. 레오 카츠, 『법은 왜 부조리한가』
12. 토마스 프랭크,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13.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14. 제프리. K. 올릭, 『기억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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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6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1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3-2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하는 의미로 추천!

탕기 2013-03-24 00:21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아이리님 ^^
 

2013.02.26

 

 

  방학의 마지막 주이다. 조용히 빈둥거린 시간 위로 열일곱 권의 선명한 자국이 보인다. 조금 더 부지런했어야 했다. 여성작가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것, 돌이켜보며 많이 반성하고 있다. 내심 서른 권은 읽지 않겠나 싶었는데, 절반만 겨우 넘겼다. 양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평소 주장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여분과 여력이 느껴진 탓일 것이다.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새삼 질투와 경외심 섞인 감탄을 보낸다.

 

 


1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성향은 ‘근본적’인 것으로 굳어가는 듯하다. 지금의 나, 혹은 우리의 삶을 비판할 수 있는 거리까지 책이 나를 밀어낸다. 그것은 강제적인 힘이다. 그래서 밀려나는 나는 아파할 수밖에,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슬퍼할 수밖에 없다.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 적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거리까지 밀려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덜 밀려난 것 같은 허무에 빠지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런 책들을 읽고 소위 ‘힐링’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더 아파졌다고 숨기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한 저항력도 없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제시하여 그곳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저 궁극의 노스탤지어들이 정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까? 치유가 ‘일시적인 완화’나 ‘순간적인 무통증’을 일컫는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걸 ‘완쾌’를 뜻하는 말로 사용하진 않는가?


  여기, 나를 더 아프게 한 세 권의 책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읽었으나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한 작품인데)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셋 모두 상실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나와 같은 부류의 독자들이라면 이 책들 앞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도 견디기 힘들다. 그것은 중력의 원리에 대해 말해준다. 우리가 있는 힘껏 지상으로부터 뛰어 올랐을 때, 그 때가 나는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무렵부터 우리는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도 ‘상실된 세계’가 온전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오랜 시간을 재구성해보면 지금의 우리가 확실히 떨어지는 중이라는 걸,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걸 입증할 진리들이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발견되었다.


  문제는 그걸 거부한다는 것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추진력을 덧대어주는 것들은 많다. 떨어지는 우리들에게 다시 ‘상승감’을 느끼게 해줘서 실존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 같은 여러 도구적 대상들은 많다. 그걸 쓸 것인지, 안 쓸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지만 어쩌면 몫은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의무인 것도 같다. 우리는 어디까지 날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 세 권의 책 모두 이러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2

 

  칼비노를 알게 된 것으로 나는 “정신적 고향을 찾았다.”고 선언해도 될까? 아직 구비하지 못한 그의 책들이 있으니, 예전도 그렇게 말했었지만 아직은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를 읽으면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건설해가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여러 면에서 그를 내 안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작품도, 글도, 인물도.


  앞으로 그의 책들을 더 찾아 읽을 것이지만 우선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완독했다는 나름의 자부심으로 그를 정의해보자면, 칼비노는 나에게 “위대한 스토리텔러”가 갖추고 있는 여러 장점들에 대해 알려준 작가이다.


  그는 거의 뜸들이지 않고 독자들을 자신의 환상적인 세계에 끌고 들어간다. 그런 면에서 그의 ‘판타지’에는 터프한 면이 있다. 그러나 터프한 사람들에게 으레 가질 수 있는 편견과는 달리 칼비노는 매우 섬세하다. 유년 시절 자연과 함께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묘사력은 그가 풍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 물론 인물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그려낼 때에도 그의 위력은 여전히 실감할 수 있다. 때문에 나에게 칼비노는 일종의 ‘양성적인 작가’로 기억된다. 아니면 창과 방패를 고루 잘 쓰는 소위 ‘밸런스 잡힌’ 라틴계 글래디에이터의 느낌이랄까?

 

 

 


 

 

 

 

 

 

 

 

 

 

 

 

 

 

  재밌기만 했으면 그는 세계적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에서, 그러니까 그가 20대 후반부터 30대를 보내며 연이어 쓴 세 개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다. 칼비노는 줄곧 ‘인간성’에 질문을 던진다. 선악(善惡), 자연과의 조화, 사랑, 실존, 생의 열정 등.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모든 작가들이 이런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고 그들 나름대로 펜을 들었겠지만 칼비노는 무게감 있는 내용을 품었으면서도 독자들을 끝내 자신의 환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고, 유독 특이한 작가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일상으로 돌아와도 질문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저력을 한 번 더 느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주 거짓말 같은 이야기.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그의 세계가 우리를 현실과 더 먼 곳까지 데려다주면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 것이다.


  몇 년 안에 나는 그의 전작을 다 섭렵할 생각이다. 다시 한 번 읽으면서는 나름 그를 분석도 해볼 것이고, 그의 세계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입체적으로 해부해보면서 내가 그의 전략을 나의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도 고민해볼 것이다. 이 모든 작업에 한참 앞서, 나는 설렌다. 그만큼 그를 나의 서재 맨 앞에 모셔둘 생각이다.

 

 


3

 

  최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고 있다. ‘종교경전 읽기’라는 나만의 장기 프로젝트이다. 바가바드기타, 꾸란, 성경 등을 마련해 읽을 것인데, 대략 10년을 잡고 있다. 30대가 저물어가는 즈음에는 하나의 큰 이해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진화론과 SETI를 지지하는 무신론자인 나에게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남다르다. 신앙인들과 과학지상주의자들은 나의 목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몇 주 지나지도 않았는데 생채기와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예컨대 우파니샤드는 첫 대목부터 나에게 충격을 줬다.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한다는 아뜨만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면지에 “과학적으로 풀어 쓰자면 ‘모든 곳에서의 동시적 존재성’이 될 것인데, 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장자를 배운 기억이 있어 무문무독(無門無毒)과, 그러니까 무경계의 경지와 동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내가 실로 아뜨만과 무문무독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했다.)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집요한 탐구 속에 들어있는 고통의 입자들에게만 화학적 결합을 허용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나 행동으로는 저들의 경지를 보다 쉽게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욕심도 사실 있다. 진리는 책에 없다는 ‘불교식 진리’가 맞는 것도 같은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경전이라는 것이 대중들을 위해 일찍이 편찬된 것이기도 할 테고.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자에 새겨진 진리가 이미 달아난 후라고들 하지 않는가. 장기 프로젝트의 끝에 가면 “이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독서의 본질이 백이면 백 다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  본다. 주머니에 넣은 것보다 못 넣은 것이 더 많은 행위가 바로 독서이다. 그래서 더 많이 넣어보려고 욕심도 부려보고, 실패를 통해 한계를 알고, 경계를 확장시키고, 그렇게 세계의 전체와, 혹은 근원과 계속 닿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이 독서이다.

 

 


4

 

  이번 학기의 독서목록도 나름 정해봤다. 늘 그렇듯 이런 목록도 ‘지켜지지 못할 계획’ 정도가 되겠지만 시작은 기세 좋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사실 벌써 조금씩 읽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 작가로는 처음 만난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다시 읽게 된 보흐밀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그리고 에세이인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 이렇게 다섯 작품을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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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2-2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된 세계를 재구성'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도 인간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열입곱 발자국, 아주 선명히 찍으신 것 같은데요. 권수가 중요한게 아니니까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우선 담아갑니다.

탕기 2013-02-26 12:05   좋아요 0 | URL
hnine님께서 읽고 계신다는 책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바우만의 책은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고 쓰신 글, 나중에 읽으러 가겠습니다 :)

2013-02-2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