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24

 

 

1

 

  나는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찾아내는 사람.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작은 점으로 수축시킬 수도, 각자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큰 거인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연함은 의미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다채로움을 연결시키는 뛰어난 상상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들을 동경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체로 몇 안 되는 어정쩡한 것들만 반복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집요하다. 그들의 집요함은 가느다란 거미줄과 같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이 거미줄에 걸린 대상은 자신이 지닌 의미를 발설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의 집요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여러 거미줄로 이뤄진 의미망을 만든다.

 

 

 


2

 

  나는 그들을 좋아하므로 그들이 의미망을 만들어가는 동작 하나하나를 보는 것 역시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의 글을 읽는 일이다. 거미줄이 글로 짜여 있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글은 훌륭한 직물 재료이다. 고고학적 유물과도 같고, 범인이 남겨놓은 고유의 지문이라 해도 좋겠다.


  비유컨대, 흔적 없이 올라가는 건물은 없다. 그리고 그 건물에는 건축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방이 여러 개 있다. 건축가는 그 방에 건축의 철학을 남겨놓는다. 그 방에 들어가는 건, 건물에 들어가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건축가들처럼 집요하게 매달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명되어 있다. 그것은 늘 곁에 두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무엇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무언가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3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유연하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한다. 너무나도 잘 해서 그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영속적으로 추구되어 오는 수많은 가치들을 저마다의 언어로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언어로 된 정리는 마치 노란 종이 위의 검은 점과 같아, 그것을 보면 그것이 가리키지 않는 전체(노랑)가 보인다.


  우리의 ‘무언가’란 그들이 언어로 정리해놓은 가치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의 점으로 전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언가’는 결국 그들이 정리한 하나의 작은 점으로 소급된다. 역설적이게도 이 작은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유연한 까닭은 그들이 작은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작은 것을 잊어버리진 않으므로 모든 것과 작은 것은 그들의 세상에서 시간차 없이 공존한다. 종이의 노란 바탕과 검은 점이 실제로 공존하는 것처럼.

 

 

 

4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노란 바탕 위의 검은 점만을 찾진 않을 것이다. 파란 바탕, 하얀 바탕, 그리고 심지어는 검은 바탕 위의 검은 점을 찾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에게 전체는 매우 다양한 색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의 수만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수많은 세계를 보게 된다. 그들은 어딜 가나 작은 것에 맨 처음 집중할 것이지만 그 때마다 거대한 세계 여러 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함을 아는 그들의 세계에는 맹목이라는 것이 없다.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작은 것만 보는 것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 행동이 펼쳐놓을 수 있는 모든 의미와 가치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은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것을 보는 일이기도, 결코 작지 않은 것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유연하고 놀라운 상상은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축복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중 아주 적은 부류만 작은 것을 본다.


  작은 것을 보는 능력은 태생적이지만 학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중 대부분은 작은 것을 보는 능력을 깨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운 좋게 기회를 얻은 사람들의 대부분도 훗날 그것을 별 가치 없는 것이라 아주 쉽게 치부해버린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5


  작은 것을 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는 때때로 감상에 젖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보상 받을 길이 없는 막대한 손해임을 안다면 호소를 그치고 일상에 다시 수긍하게 된다. 바로 이 선택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최대의 실수이다. 그들은 노란 바탕의 검은 점을 보면 검은 점만 보게 될 것이고, 노란 바탕을 보면 노란색만 보게 될 것이다.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면 검은 점이 다른 색 위에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노란 바탕이 다른 색 점 주위에 깔려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상상의 모든 능력이 빠르게 소실되어 가는 비극적인 고통을 맛보게 된다.


  작은 것은 중요하다. 작은 것은 확장되는 세계이고,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작게 쪼그라드는 세계이다.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작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작은 것을 볼 수 없으면 큰 것도 볼 수 없다.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런데 작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큰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의 주장에 휩쓸려 가다보면 우리도 상상의 부재로부터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시각의 유연함을 고찰하고자 한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대체로 큰 것을 잘 보기 때문이다. 큰 것을 보는 것은, 여간해서 실수할 수가 없는 쉬운 일이다. 그것은 잘 보이기 때문에 잘 볼 수밖에 없다.


  큰 것만 볼 줄 아는 이들에게 큰 것의 부분들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나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해서 우리가 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나눈 여러 부분들을 합해 다시 전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는 실망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뭘 나눴는지도 모른다.

 

 

 

6


  책을 읽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은, 사려 깊고 진지한 저자들의 대부분이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아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독서는 유연한 세계를 체험해보는 것과 같다. 작았던 세계가 커지고, 큰 세계는 작아지며, 마치 전자처럼 작은 세계와 큰 세계가 한 공간에 동시에 공존하는 이상한 일도 체험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사유 방식이 바로 이렇다. 그것은 동시적이고 복잡하다. 작은 것만, 그리고 큰 것만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낯설고 어려울 뿐이다.


  유연함은 곧 고뇌의 최대 간격이다. A와 B라는 세계가 있다면 고뇌는 두 세계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최대한 벌려놓는다. 세계의 간격을 실감하는 만큼 우리는 얼마든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뇌가 인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고뇌는 축복이다. 고뇌는 상상이고, 또한 유연함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본래 갖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고, 정신의 나태함 속에 그것을 고통이라 인식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본래 인간은 고뇌한다. 그것은 멋있는 것도, 끔찍한 것도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중 대부분은 본성을 잊고 산다. 소수의 고뇌를 아포리아나 삶의 지침표로 참고만 할 뿐, 그들은 스스로 고뇌하지 않는다.

 

 

 

7

 

  비유컨대 인류가 멸망하는 날은 아마 지구상의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고뇌의 본성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뇌의 포기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비참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에 침체된 사람들이 단 하나의 단어와 단 하나의 진리만을 입 모아 말하는 사회가 늘 그러했듯이, 이 비참한 상황은 고뇌하는 자를 별종, 정신병자, 혹은 광인으로 취급하도록 종용하여 결국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생각이 없는, 소위 ‘소설과 같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한 나의 고찰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다행스러운 우려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작은 것’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가 우려하는 상황, 그것 단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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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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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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