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1

새해 첫 날, 함박눈이 내렸다. 창밖의 나무들은 제각각의 덩치만큼 눈을 얹고 서 있다. 나무의 눈은 가지가 휘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쌓일 수 있다. 나무도 억지로 휘어 제 몸 위의 눈을 털어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녹아 무거운 물이 되지 않는 한, 나는 저들의 모양에서 ‘적당’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오후. 마을에 요정처럼 쌓여 있던 눈을 쓸고 들어와 개운하게 씻은 뒤 커피 한 잔을 옆에 끼고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이것도 질환이다. 소위 ‘센치’해지면 눈보다는 손이 더 간지럽다.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나’를 덜어내게 되는데, 때때로 느끼기를 그 모양이 퍽 초라하다.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 정도야?”라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비근한 일이고, 때때로 더 나아가 주변의 책들을 별로 읽고 싶지 않은 무기력까지 부르지 않은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나무처럼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쌓아둬야 하는데, 인간은 제 편한 것만 하려고 드는 버릇이 있어 한 번 글쓰기의 자태에 유혹되면 독서의 얼굴이 별로 예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와 이별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사랑이다.
젊을 때 많이 읽으라는 교수들의 말이 하나같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지난 해 일곱 개의 강의 중 다섯 개의 종강 때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독서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넘어갔다. 명퇴를 앞둔 - 나와 같은 일산에 거하시는 - 한 노(老)교수는 버스에서 스마트폰 보지 않고 책 한 장이라도 더 넘겨보는 사람이 없다며 혀를 찼다.
독서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이다. 눈으로 문장들을 따라 내려가는 것, 책장을 넘기는 것, 하물며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것 모두가 아날로그이다. 디지털처럼 0과 1로만 단순하게 이해하고 단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처럼 독서는 하나의 연속이다. 앞선 독서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뒤이은 독서가 기대된다. 따라서 독서는 기술의 혁명적 진화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부분이 있는, 인간의 사고 영역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기술이 생활과 사고를 바꾼다지만 독서는 강조하건대 ‘연속’이며, ‘역사’이다. 오늘날 타자기와 삐삐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으나, 플라톤과 공자를 읽는 사람은 있다. 1시의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읽었던 책을 7시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읽는다. 독서는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의 끝에 묻어 시계의 360도 전체에 각자의 지문을 남기는 것이다. 해석은 각 시간의 사람들에게 제 몫으로 주어진다.
읽는 건 기억하는 일이다. 독서는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영향력 있는 저자들이 매해 쏟아내는 책들은 이 시대의 우리가 기억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일상의 온갖 제약으로부터 정작 잊으면 안 될 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을 때, 세상의 한편에서는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작업이, 그 고독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책이 세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굳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이 문자로 변환되면 세상 본연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마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움직이지만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지구처럼 움직이며,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때론 무관한 것 같은 삶을 살아가고, 죽고, 또 태어난다.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실제 삶을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소위 ‘골방철학자’나 ‘개똥철학’처럼 그저 기억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으나, 그렇다고 기억의 가치가 저평가될 이유는 전연 없다.
최근 읽고 있는 장석주의 『일상의 인문학』에 이런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세월이 갈수록 기억의 부실함이 그것을 망각의 자리에로 넘기겠지만, 우리는 망각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어제를 망각하고 역사를 망각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유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법을 망각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망각하고, 망각의 악순환 속에서 표류하면서, 바쁘게 살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땅히 기억해야 할 만 한 일들을 고의적으로 유기하며, 그것을 망각의 불가피함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망각이 심해지면,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망각하고, 망각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각은 삶을 망친다. 망각은 곧 기원의 기억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기억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책과의 조우는 결코 피할 수 없다. 잠깐이라도 읽는 삶, 짧게라도 메모하는 삶은 빠르게 뛰는 우리의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가치들을 최대한 붙잡아두는 삶이다. 그것은 결코 멋있거나, 낭만적이거나, 운치 있는 일이 아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꼬고 최대한 우아하게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고 “멋있다. 부럽다.”며 독서를 시작하고자 마음먹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독서는 힘들고, 고독하며, 때론 잔인할 정도의 자기비판도 서슴지 않고 실행하라 강제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우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 트라우마를 제외하면 - 거의 유일한 길이고, 삶의 가치를 수호하는 - 무력을 동원하는 것을 제외하면 - 역시 거의 유일한 길이다.
나무의 가지에 얹힌 눈을 나에게도 얹어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 결론은 당연히 “새해에는 더 많은 책을 읽어야지.”라는 교과서적이고, ‘초등학생 일기’적인 다짐으로 이어지는데, 나이가 얹힐수록 나는 이런 종류의 다짐이 유치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절실하고 무겁고, 때문에 더 나에게 알맞은 것으로 느껴진다. 독서를 많이 하겠다는 것은 그냥 책장을 넘기겠다는 뜻이 아니므로. 때로 그건 날선 각오이기도 하므로.
p.s 이 졸문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올 한 해 "인생을 바꿀 책" 한 권 '얻어 걸릴' 놀라운 행운이 함께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