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세계의 지성' 톱10

어제 TV 등 언론에서는 노언 촘스키가 영미의 시사지들이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 선정한 '세계의 지성'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뽑혔다고 보도했다. 약 2만명이 참가한 투표에서 약 5000표를 획득, 2500표를 얻은 움베르토 에코를 더블 스코어로 따돌렸다고. 주로 영어권 네티즌이 참여한 것이므로 영미쪽 지식인들이 대거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프랑스쪽 지식인들은 톱10 안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어제 귀가길에 문화일보에서 이 '톱10'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대중문화'의 산물이기도 한 이런 투표 자체에 별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 지식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를 가늠하는 데는 유익한 지표인 듯싶어서 소개하고 몇 자 덧붙인다(내가 흥미를 느낀 건 생물학자들의 부상이었다).

1위 노엄 촘스키(미국). 직업은 언어학자로 돼 있지만, 정치비평가, 문명비평가 정도로 더 잘 알려져야 마땅한 사람이고, 주로 하는 일은 '미국 비판'이다. 네오콘 잡지의 한 편집장은 촘스키와 하워드 진을 가리켜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대중이 보기엔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비판의 테마와 강도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촘스키의 인지도가 높은 것은, 내가 보기에, 가장 쉽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그의 언어학 책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프랑스의 현학적인 지식인들에 대해서 못마땅해 한 것은 당연한다(푸코 등을 읽다가 좌절한 사람들에게 촘스키는 희망이다). 대중들이 읽을 글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라는 것.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힌 만큼 그의 '전략'은 유효해 보인다.   

 

 

 

 

촘스키의 책들은 국내에 '너무 많이' 소개돼 있다(국내엔 촘스키의 제자들도 여럿 된다). 수준 이하의 번역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렵지 않은' 책들이기 때문인 듯. 그의 전기로는 <촘스키, 끝없는 도전>(그린비, 1999)와 <촘스키>(시공사, 1999)가 같은 해에 나왔다(나는 전자를 읽고 후자를 사두었다). 바쁘신 분들은 <30분에 읽는 촘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4) 정도를 읽어주시면 되겠다. 책의 역자이자 전문번역가인 강주헌씨는 요즘 부쩍 촘스키에 빠져 있는 듯한데, 가장 최근에 나온 촘스키 책도 그가 번역한 <지식인의 책무>(황소걸음, 2005)이다. 물론 책은 제목에서부터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적 인지도에다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촘스키는 우리 시대의, 미패권주의 시대의 '사르트르'이다(사르트르적 의미의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뜻한다).

2위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 직업은 문학비평가로 돼 있지만, 기본적으론 기호학자이고 게다가 소설가이다. 아마 러시아에서 이런 류의 투표를 했다면, 촘스키를 거뜬히 따돌렸을지도 모른다. 정치비평서들이 일부 '전문서'로 소개돼 있는 촘스키와는 달리 에코의 경우는 소설과 문학비평서, 중세미학연구서 등이 시리즈로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러시아보다 국내에 더 많은 '에코'가 나와 있다(그의 '조이스'론이 소개되지 않은 게 아쉽지만). 거의 '에코 천국'이라고 할 만큼.

 

 

 

 

국내의 에코 전문출판사로는 열린책들과 새물결을 들 수 있는데, <움베르토 에코 평전>(2004)는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에코 붐'을 만들어낸 건 물론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초판은 1986)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에코 자신이 쓴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와 이윤기 선생의 번역을 교정해준 것으로 잘 알려진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가 부수적인 참고문헌이 된다. 개정판도 갖고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장미의 이름> 초판이며, 작년에 러시아어본도 구해왔기 때문에 나중에 개정판으로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인다(<푸코의 진자> <전날밤> <바우돌리노> 등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만 하도록 한다).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장 자크 아노에 의해서 영화화됐다는 것(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 주연). 그리고 대부분이 모를 만한 사실은 <장미의 이름>이 다른 역자에 의해서도 번역됐었다는 것. <장미의 이름으로>(우신사, 1986). 프랑코 모레티의 표현을 빌면 번역 또한 '도살장'이어서 살아남는 번역은 몇 안된다. 

 

 

 

 

자신의 최초 전공이기도 했던 중세미학에 관한 책으론 <중세의 미와 예술>(열린책들, 1998), 기호학자로서 명망을 얻은 책으로 <기호학과 현대예술>(열린책들, 1998)이 국내엔 소개돼 있다(<기호학과 현대예술>은 불어본의 번역이고, 영어본 번역은 <기호학이론>(문학과지성사)이다. 이 국역본보다는 영어본이 훨씬 읽기 쉽다). 기호학자로서의 출세작 <기호학 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2005)에 대해서는 한번 소개한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대신에 추천할 만한 것은 에코가 공저한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 역자가 에코의 제자이다. 에코 기호학에 관한 국내 연구서로는 박상진 교수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 2003)이 유일하지 않나 싶고,  김성도 교수의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는 에코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좀 특이한 책으론 에코의 축구광적인 면모를 기호학과 엮은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가 있다.

 

 

 

 

에코는 잡지에 기고하는 짤막한 에세이로도 유명한데, 국내엔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열린책들, 1995)으로 또 흥행몰이를 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열린책들, 1999)은 그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이후에도 물론 열린책들에서는 그의 에세이집들을 꾸준히 내고 있으나 내가 사거나 읽지 않았으므로 언급을 자제하겠다. 에코의 에세이들에 비교적 일찍부터 눈길을 준 출판사가 새물결이고,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1993)을 시작으로 댓 권을 연이어 출간했었다. 얼마전에 그 책들이 재출간됐다(일부는 독일어판의 번역이다). 이 정도면 에코는 촘스키 뺨치는 지성인이다.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영국).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일 듯하지만, 도킨스가 그래도 3위에 오를 줄은 미처 몰랐다. 영국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도킨스에 관해서는 여러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간단하게 훑어보기로 한다.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도킨스의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두산동아, 1992)이고, 그의 책으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이다. 물론 그때 도킨스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막연하게 '이타적 행위'라는 게 모종의 심리적/도착적 만족감을 주는 '이기적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는데, 늘 그렇듯이 서점을 두리번 거리던 차에 <이기적인 유전자>란 책이 눈에 띄었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유레카!'(우리식 버전으론 '심봤다!') 이후에 원서의 개정판을 옮긴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1993)이 출간됐고, 절친한 친구는 나의 권유에 따라 그 책을 읽고서 '유레카!'를 복창했다(그는 한동안 나만큼 도킨스를 욹어먹고 다녔다). 지금의 <이기적 유전자>(2002)는 보다 세련된 장정을 하고 있는바(표지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름하여 '고전100선'이요, 대학생/청소년 필독서이다.    

 

 

 

 

이후 도킨스의 주저라고 할 만한 책으론 <눈먼시계공>(민음사, 1994)과 10년만에 재간된 <눈먼 시계공>(사이언스북스, 2004)이 있다. 작년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은 내가 원서까지 사둔 책이지만 아직 읽지 않았으므로 감동을 적기는 어렵지만, 하여간에 다른 책들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최신간인 <악마의 사도>는 이전에 소개한바 있듯이 주로 칼럼모음집인데, '인간' 도킨스의 체취를 가장 강하게 내뿜는다. 도킨스 다이제스트를 원하는 독자라면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이제이북스, 2002)를 보셔도 좋겠다(다이제스트라 감질이 나겠지만).

 

 

 

 

세계석학 30인과의 대담집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가야넷, 2000)에는 촘스키와 에코는 물론 도킨스와의 대담도 실려 있다(지젝도 들어가 있다!). 내가 감히 사두지 못한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스, 2002)에도 도킨스는 (당연히)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내 기억에 존 브로크맨이 편집한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에서도 도킨스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호적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의 비교는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를 참조할 수 있다.

4위 바츨라프 하벨(체코). 이 리스트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동유럽 지식인. 직업은 극작가이자 정치인으로 돼 있는데, 대통령을 역임한바 있으니 저명한 인사이지만 국내에는 별로 연고가 없는 듯하다.

 

 

 

 

뒤져보면 하벨의 책으론 <대통령의 꿈>(들꽃세상, 1992)이 처음 소개됐었고, '하벨 대통령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사상'이란 부제의 <프라하의 여름>(고려원, 1994)과 드라마 <청중>(예니, 2000)이 소개돼 있는 정도. 동구권 희곡모음집인 <탱고 外>(현대미학사, 1994)에도 <도시 재개발 계획>이라는 하벨의 작품이 들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지역적 편향성 때문에 러시아/동구권 지식인들에 대한 소개/이해는 턱없이 부족한 편. 멋쩍은 김에 하벨의 나라 체코에 대한 안내서 두 권 정도만을 적어두기로 하자. 체코 문학 전공자인 김규진 교수의 <체코 문화>(한국외대출판부, 2000), 그리고 체코 여행 가이드북 <체코>(휘슬러, 2005).

5위 크리스토퍼 히친스(영국). 직업은 정치평론가라고 돼 있는데, 톱10의 지식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인물이다. 나의 견문이 짧은 것인가 하고 검색해 보았더니, 국내에 소개된 건 <키신저재판>(아침이슬, 2001) 달랑 한 권이다. 하면, 나의 '무식'을 탓할 수는 없는 것.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검색해 보니까 <선교사의 입장: 마더 테레사의 이데올로기>(1995)란 책이 있고,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저한 <희생자를 탓하기: 사이비 학문과 팔레스타인문제>(1988), 아담 바르토스란 이와 공저한 <국제 영토: UN, 1945-95>(1994)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아마도 영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가인 모양(우리의 경우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6위 폴 크루그먼(미국). 내가 이름을 아는 몇 안되는 현역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엔 反부시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며(뉴욕타임즈에 칼럼을 쓴다) 해마다 노벨경제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다고. 촘스키와 함께 MIT에 몸담고 있고, 1953년생이니까 나이도 비교적 젊다.

 

 

 

 

그의 책으론 <경제학의 향연>(부키, 1997)이 유일하게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 그가 공저처럼 돼 있는 <복잡계 경제학2>(평범사, 1998)도 갖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책정리를 하면서 <복잡계 경제학1>과 함께 쓰레기장으로 갔다. 아마도 그 책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자기 조직의 경제(Self-organizing Economy)>(부키, 2002)일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대충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데, '복잡계 경제학 개척자'로도 평가된다는 크루그먼은 이 책에서 "복잡계 경제학의 사고방식과 모델을 다"룬다고. "그는 '불안정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instability)'와 '불규칙한 성장으로부터의 질서(order from random growth)'라는 자기 조직화의 두 원리가 어떻게 도시의 형성과 기술 집중 및 경기 순환 등 제반의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자기조직계'에 대한 책들이 한동안 붐을 탄 적이 있는데,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카오스: 현대 과학의 대혁명>(동문사, 1993)이 발단이었다(물론 얀치의 <자기조직하는 우주> 같은 신과학 천문학서도 있었다). 이어서 <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까치, 1997) 등이 나왔고, <복잡계란 무엇인가>, <왜 복잡계 경제학인가> 같은 일본서들이 번역/소개됐다. '복잡계 경제학'에서 크루그먼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수확체증의 법칙'을 주창했던 브라이언 아서인데, 크루그먼은 이를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듯. 이 '자기조직화'는 문학/예술에서도 많이 나오는 테마이며, 들뢰즈를 읽다가도 종종 마주치는 용어이다. 그러니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하는 크루그먼의 나머지 책들이다. 

 

 

 

 

7위는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작년 10월에 데리다가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하버마스와 함께 이 명단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로한 세계철학계의 원로이지만 하버마스는 언제나 '막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막내였으며(물론 그의 제자들이 2세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1세대 학자들의 파워와 명망에 미치지 못한다) 20세기 독일철학의 막내이다.

 

 

 

 

독일 관념론의 적자를 자처하는 독일의 '괴물'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에코리브르)가 지난 여름에 출간됐었다. 회슬레는 방한강연을 가진바 있으며 그때의 인연으로 한국여성과 결혼했다)가 꼽은바, (거명 당시에 생존하고 있던) 20세기 최고의 독일 철학자는 바이스체커, 가다머, 칼-오토 아펠, 하버마스 4인이었다(거기서도 하버마스는 가장 '젊은' 철학자였다).

 

 

 

 

하버마스의 책들은 국내에 '충분히'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질과는 무관하게. 예컨대,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인식과 관심>(고려원, 1996)은 오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책이며, 따라서 '대중들'은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프랑스의 난다긴다하는 철학자들을 '신보수주의' 철학자로 몰아세우며 그의 '거장적' 면모를 부각시킨 책이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이다(이 또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있다). 기억에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인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 2001)부터 <소통행위이론1>(의암, 1995, 이건 2권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대표적인 '부실'번역 사례이다)를 거쳐서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에 이르는 주저들은 대부분 국역본을 갖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의사소통의 철학>(민음사)와 대담 <테러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하버마스에 대한 국내 연구만 해도 (상대적으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8위 아마티아 센(인도). 경제학자. 인도 출신으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의 책들은 수상에 힘입어 바로 출간된 바 있다. <불평등의 재검토>(한울, 1999), <윤리학과 경제학>(한울, 1999)이 그것이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도 불린다니까 그걸로도 그의 학문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그런데도 케임브리지대의 교수이다!).

 


 

 

 

센의 신간은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이며, 소개에 따르면 "아마티아 센은 이 책에서 개인을 단순히 분배된 혜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고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국가, 시장, 법 체계, 정당, 언론, 이익단체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회적 장치들이 개인의 실질적인 자유를 충족시키고 보장하는 데 얼마나 공헌하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으로 중국과 인도,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검토한다. 이 책은 개인의 자유 속에 정치 참여와 경제 발전 그리고 사회진보의 능력이 어떻게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에 지표를 제시하며, 발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알려진 바이지만, <국부론>의 저자이자 동시에 <도덕감정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으며, 경제학의 두 축은 윤리학과 경제(공)학이다. 센은 거기서 잊혀지거나 간과되고 있는 윤리학의 전통을 경제학에서 다시 되살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 이를 테면 '아담 스미스 구하기'이다. 그리고 그게 '나라 구하기'이다, 경제기술자들아! 

9위는 역시나 도킨스의 경우처럼 나를 놀라게 했는데, 미국의 생물/지리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사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다이아몬드가 대중적인 인기만큼이나 지식인으로서 대우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요컨대,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며, 그의 최신간 <붕괴: 어떻게 한 나라가 망하는가>가 빠른 시일 안에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10위는 인도 출신의 소설가 살만 루시디. 문제작 <악마의 시>로 1989년 이란정부(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더욱 유명해진 작가. 그런 연유로 노벨상을 타기는 힘들겠지만(이번에 터기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파묵이 논란 끝에 수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아마도 루시디는 노벨상 수상작가보다 더 유명한 작가일 것이다(루시디의 문학에 대해서는 언젠가 박노자가 한 칼럼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한바 있다). 그의 작품으론 <악마의 시>(문학세계사, 2001), <무어의 마지막 한숨>(문학세계사, 1996)가 번역돼 있고 <하룬과 이야기바다>(달리, 2005)도 올해 나왔다. 좀 오래된 번역으론 <한밤의 아이들>(하서출판사, 1989)과 <악마의 수치>(청림출판, 1989) 등이 있다.

 

 

 

 

05. 10. 18.

P.S. 이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7위,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19위에 올라 있다고. 울포위츠를 선정 리스트에 올린 시사'잡지'들의 양식이 좀 의심스럽긴 하다(하긴 '은행' 눈치도 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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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미루고 미룬 마감을 코앞에 두고서...

새로 번역할 책 참고 서적 찾으러 들어왔다가 오전 내내 알라딘에서 헤매고 있다.

책 리뷰 읽다가 쓰신 분 서재로 날아가 밀린 글 죽죽 훑어보고..

책 몇권을 보관함에 넣어두고...

보관함 한번 쓰윽 둘러보다 한두권 클릭해서..또 다시 누군가의 서재로 빠져버리고...

느느니 즐찾 목록, 보관함 목록이요..주느니 시간일세...

너무나 멋지고 화려한 리뷰들을 보면서...상대적 박탈감...자괴감마저 느껴진다.

일년가도 맘먹고 책 한권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는 나는 뭔가...

얼마전 오랜 만에 만난 대학친구로부터 동창들 소식을 쫘악 접수하고...강남에 집샀다는 아이들만 벌써 몇명이라는 소식에 ....와...다들 금송아지 하나씩은 장롱속에 감춰두고 사는구나...하고 살짝 배가 아파주었는데...

그와도 비슷한 느낌...(나는야 샘쟁이~)

빨리 일하자....이너넷만 안해도 책 한 권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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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10-1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알라딘 만한 놀이터가 없죠? ^^

이네파벨 2005-10-1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무서운 곳이예요^^

2005-10-21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5-10-2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 그 말이예요. 이너넷만 안해도...흐흑~
번역하시는군요.^^

이네파벨 2005-10-2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인터넷 중독이 너무 심각해서 아예 데탑을 안쓰고 인터넷 접속 안되는 놋북으로 작업하는 적도 있답니다.
지금은 초벌번역하면서 군데군데 남겨두었던 폭탄들 처리하느라...
인터넷 검색하며 자료 찾아봐야하는 단계라..어쩔수 없지요.
막힐때마다 알라딘에 들어와 헤매는데...
거의 하루 종일 붙어있네요.^^
 

2년전 썼던 글을 퍼왔습니다....^^;;

어제 벼르고 벼르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을 보고왔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16-17세기 네덜란드 플랑드르 회화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꼭 보아야 할 전시였지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7세기 북부 지방은 네덜란드로 독립하고 남부 플랑드르 지방은 그대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나중에 벨기에가 되었다고 하네요. "플란더스의 개"의 플란더스가 바로 플랑드르이구요...네로가 늘 동경하던 성당의 그림이 바로 루벤스의 그림입니다. ㅠ.ㅠ)

나의 마음속에 있는 사적인 갤러리에 소장하고 숭배하는 화가들 중 일부의 계보는....16세기의 플랑드르 화가 히에르니무스 보쉬, 피터 브뤼겔, 16세기말~17세기 네덜란드의 베르메르, 18세기 스페인의 고야, 그리고 19세기 달리로 이어집니다. 이 화가들은 나름대로 서로서로 친족관계를 이루고 있죠. 예를 들어서 보쉬와 고야와 달리는 (또한 많은 면에서 피터 브뤼겔 역시) "그로테스크(엽기)"라는 코드로 서로 통하지요. 또한 달리는 베르메르를 극찬하고 그 화풍을 이어받기도 했습니다. (달리의 그림에 베르메르가 등장하기도 하고 베르메르의 유명한 작품의 구도를 염두에 두어 그와 비슷한 구도로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또한 색채 역시 통합니다. 아, 베르메르와 달리의 노란색.......)

저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백과사전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베르메르라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화가의 그림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가...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달리를 통해서 그를 재발견하고 마음의 신전에 모셔다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르메르가........나만의 조용한 신전에 모셔두었던 베르메르가....
요즘 엄청난 유명세를 탈 조짐을 보이고 있더군요.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 미술관에서 대여한 이번 전시회에서 막상 오지도 않은 (그 작품을 대여하려면 대통령이 나서야 할 것이라고 했다네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거리를 한 소녀"라는 작품은 렘브란트, 루벤스 못지 않게 전시회의 얼굴 마담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누군가가 얼마전 이 작품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네요. 진주 귀걸이 소녀의 모델에 상상력을 덧붙여 베르메르의 일생을 재구성한 영화이지요......허준이나 대장금처럼 말입니다.......

이 소설이나 영화에 대해 호기심은 느껴지지만.....뭐랄까.......저로서는......"나만의"...는 아니겠지만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이 화가에게 대중의 손때가 묻는 것이........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어버리는 냄비와 같은.......한번 걸려들면 뼈도 안 남기고 샅샅이 먹어치워버리고 유유히 흩어져버리는 피라냐(식인물고기임돠!)같은 대중들 속에 던져지는 것이..........그것도 2%의 진실에 98%의 허구의 튀김옷을 입혀 뻥~ 튀겨낸 형태로 선보인다는 것이.......썩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아무튼, 전시회 자체는 대만족이었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화가의 작품은 렘브란트 세 점, 루벤스 한 점 걸려있었을 뿐이지만 그보다 덜 유명한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들 역시 너무나 흥미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바로크 미술이 교회와 왕궁의 후원으로 발달했던 데에 비해서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은 "위대한 시민의 미술"로 특징 지워진다고 합니다. 17세기 암스텔담은 지금의 뉴욕과 같은 곳으로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도시로 교회의 탄압을 두려워한 철학자,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도 해요. 미술품의 의뢰자, 수요층도 귀족, 부유한 중산층 등 다양해졌고 따라서 그림의 내용도 신화니 성서에서 벗어나 삶의 장면들을 포착한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마음을 끌었던 그림들은............아주 우연한 소재를 엄청나게 정교한 기교를 통해서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들........그저 마음가는 대로, 되는대로 포착한 일상의 한 장면을 영원 속에 고정시켜놓은 듯한 그런 그림입니다. 마치 일부러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냥 피사체가 알지 못하는 순간 찰칵 찍어내는 스냅사진처럼요.

생각해보세요. 사진이라는 독특한 기술이 가져다준 스냅사진의 미학을....사진이 발명되기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미 실험했다는 사실을요!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작품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얼마나 창의적이고 얼마나 전위적인 실험이었을까요! 저에겐 아직도 그것은 엄청난 신비이고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저 그림을 그리게 된 상황과 동기....subject와 화가의 의식과 심리적 상태 그런 것들이요.

그리고 한편으로 회화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회화와 오늘날의 회화......회화의 진화......그런 것이요.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의 세계에서 회화는 순수하게 표현의 수단이 되었지만 그 이전의 세계에서는 표현 이전에 기록의 수단이라는 것이 회화의 레종데트르였겠지요. 오히려 기록이라는 틀 안에서 표현이 양념을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그 '기록'이라는 기능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순간 순간 무화되어가는 덧없는 삶, 덧없는 젊음, 덧없는 사랑, 덧없는 고통......그 단 한 조각이나마 이차원의 평면에 고정시켜 영원성을 부여하고싶었을 사람들의 욕구.......
그 한 조각을 위해서....그림의 모델이나 화가나 아마도 적게는 며칠에서 수개월의 시간을 바쳤겠지요. 아무나 그림 속에 간직될 수도 없었고, 그 한 조각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그려낼 재능과 기술을 가진 화가 역시 역사를 통 털어 손꼽을 정도였겠구요.

수동 카메라에서 자동카메라, 캠코더에 디카까지.........누구나 손쉽게 값싸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대에 앉아서 바라볼 때 그 시절의 그림들은 정말이지 놀랄 만큼 time-consuming하고 costly한 기록이지요? 음식으로 치자면 패스트푸드와 대비되는 슬로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우 푸드인 셈이죠.

그러면서 또 하나의 슬픈 통찰이 떠올랐습니다. "위대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 영원히." 그것이죠. 덕수궁 미술관에 걸려있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마치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룡의 뼈를 바라보면서 느꼈음직한 놀라움과 경탄, 그리고................그리움과 슬픔 같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플랑드르, 로코코, 인상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어쩌구저쩌구, 각 유파들이 모두 생물의 진화과정처럼 꼬리를 이으며 등장해 자신의 전성기를 누리고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갔죠. 회화라는 장르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지만 뭐랄까........... 도마뱀이 티라노사우르스의 후손이라고 우기는 꼴이랄까요?

제가 현대미술에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로 하여금 회화라는 분야에 처음 눈을 뜨게 해준 것도 현대미술, 19세기초의 미술이었고 여전히 가장 사랑하고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술 사조도 그 시대의 미술, 초현실주의 미술입니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팝아트니 동시대 작가들의 그림에도 상당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아, 비구상에는 전~혀 취미가 없습니다. 저는 입체파로 추상, 나아가 비구상의 문을 열어준 피카소마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위대한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 영원히'라는 명제는 아무래도 참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존재의미의 상당 부분을 다른 수단, 다른 장르에 뺏기게 된 이상(어디 사진뿐입니까? 영화, 컴퓨터 등 막강한 시각예술매체들....) 회화는 필연적으로 왜소해질 수밖에 없겠지요........시간, 돈, 재능, 관객 그 모든 것을 뺏기고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이를테면 렘브란트가 오늘날 태어났어도 그림을 그렸을까? 뭐 그런....얘기요.

여기에서 문득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불멸의 6부 "문자반"에 나오는....

제가 번역하는 책에 "Always trust Shakespeare to have been there before."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저에게는 셰익스피어를 밀란 쿤데라로 바꾸면 말이 됩니다. 아마도 그의 책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너무나 많이 되풀이해서 읽어서, 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살아가면서 그의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감정, 같은 생각에 도달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가사마냥.....정말이지 "I've got him under my skin."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지요? 회화에 대한 쿤데라의 견해는 다음 편에 올릴께요. 그럼 어제의 감동을 누르고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까봐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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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10-0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만 잘 하시는줄 알았더니.... ^^ 잘 읽고갑니다.
 

웬 뒤늦은, 때맞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적절치도 타당치도 않은....학구열이람....

결코 내세울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 짧지도 않은 가방끈을 가졌지만......그렇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이대로 죽으면 "못배운 한"으로 구천을 떠돌것 같다.

사실 난 학위니 학교에 대한 욕심같은건 별로 없다. 어차피 이 나이에 졸업장 받아 직업을 구할 것도 돈을 벌 것도 아니고...그저 하고파서 하는 공부.....자기만족만을 위해 무슨 코스를 다시 밟는건 pros & cons를 잘 따져봐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집약된 강의를 듣고, 무엇보다 강제성이 부여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 누군가가 디자인해놓은 커리큘럼과 코스를 따라가면서 내 적성에 안맞아 투덜대고 시간 낭비하게 되는 단점도 있을 것이다. (여우와 신포도 우화가 생각난다....쩝)

어쨌든, 하고 싶은 공부, 듣고 싶은 course가 있음에도 현실적인 이유로 맘 한 구석에 고이 접어놓고...방향과 발상을 바꿔서....혼자서 독학으로 내가 관심 가진 분야들의 책을 폭넓게, 깊이 있게 읽고 공부하리라....다짐을 해 보았지만....이 역시 쉬운 노릇이 아니다.

엄마 노릇, 아내 노릇, 딸 노릇, 며느리 노릇 해가면서...거기에 번역이라는 "일"까지 하면서..."공부".....아니...그냥 "독서"나마 짬짬이 하기가 보통 힘든게 아니다. 아니...거의 불가능한게 아닌가 싶다.

이번 주는 유난히 바쁘고 산만한 한 주였다. 월요일은 공포의 휴일...(토요일도 휴일도 명절도 빨간날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돌맞을 소리지만....) 화요일은 남편 관련 부인들 모임으로 지방까지 다녀오느라 하루를 잡아먹고 수요일은 시어머니 모시고 병원갔다오느라 역시 하루 종일...오늘도 오후에 아이 운동하는데 가보아야 한다.....아주머니가 오시는 화수목 동안 어디 안나가고 오롯이 일할 수 있는 주는 정말 축복받은 주이다.

"공부"나 "독서"를 실컷 하고 싶으면 "일"을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라고 사람들(...주로...남편...ㅡ,.ㅡ)은 말한다. 

"공부"가 나의 가장 사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고 잡히지 않는 꿈이라면...

"일"은 나와 사회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고리이고 가까이 있고 손에 잡히는 현실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나를 부추긴다. 너는....엄마, 딸, 아내, 며느리 이상의 존재라고...

설사 일을 놓는다 하더라도.....그 공백을 엄마......노릇이 냉큼 차지하게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엄마............노릇"을 포기할 수도 없거니와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어쩌면 사실은 그게 내 raison
d'tre일지도 모른다...아마도...그렇겠지...

얘기가 옆으로 샜다....아무튼 나날이 여러개의 공을 가지고 저글링하는 것 같다. 지금 여기에 뭔가를 덧붙이는건 아예 불가능하고 현상유지마저 허덕일 판이다....공부는...확실히...사치이다...내게는..

나아중에 애들 다 공부시켜놓고...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면 그 때는...학교도 등록하고 강의도 듣고 논문도 쓰고 그러면서....제대로 공부란걸 해볼 수 있을까?

아니면 안식년처럼...내년까지 잡힌 일들 마무리되면....한 1년쯤 일을 쉬면서 혼자 공부하고 책읽고...그렇게 살아볼까?

생각만 많다.....

이 불타는 학구열도 어느날 봄눈녹듯 말끔히 휘발해버리는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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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10-0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군대있을 때 너무너무 책 보고 싶고 공부 하고 싶었는데... ...뭐든 하기 힘든 상황에서 하고 싶은 욕구는 더 심해지죠. 열병처럼 곧 사그러들기도 하지만.
 

얼마전 방에 들어가 앉아서 먹는 좌식 냉면집에 갔는데 대여섯개 테이블에....가족과 함께 온 젊은 엄마들이 "죄다" 등짝의 아랫부분(거의 꼬리뼈까지)을 드러내고 앉아서 냉면을 먹고 있었다.  섹시하다기보다는 추해 보였다. 아니 안쓰러웠다.

오늘 아침 아이 유치원 버스 태우러 나갔는데 멋진 츄리닝을 입고 나온 아이 엄마...운동화를 덮는 길이의 야들야들한 바짓단으로 온 아파트 마당을 다 쓸고 다녔다. 울 아파트는 유난히 개키우는 집이 많아 아파트 곳곳에 개의 대소변이 디글디글한데...(따끈따끈 갓 생산된 신선한 것부터 먼지로 화한 것까지...) 역시 스타일리쉬하다기보다는 드러워 보였다. 아니 안쓰러웟다.

하지만 어찌 입는 사람의 죄랴? 나오는 옷들이 죄다 그러한걸...바지의 밑위는 어디까지 내려가나 두고보자.... 할 정도로 짧아지고 있고 바지 밑단은 위에서 밀고 내려오니 나도 내려갈수밖에...하면서 길어지고 또 상의는 짧아지고 있다.  나는 비교적 덜 내려가고 덜 올라간 옷들을 찾아서 입는 편이지만...그래도 유행의 도도한 흐름에 완전히 거역할 용기는 없다. 극단적으로 내려가고 극단적으로 올라간 옷들은...사실 머...몸매가 안 받쳐줘서 못입는거쥐...

암튼...입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지만...편리나 편안함, 위생, 실용 다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지들 맘 가는대로 유행을 창조해내는 패션 비지니스계의 거장들에게는 다소 욕을 해주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욕을 하면서도...사회적으로 강요된 심미안이란건 실로 무서운 것임을 실감한다.

아....주...오래된 영화..이를테면 20세기 초중반의 영화들을 보면 그 괴상망칙한 의상때문에 주인공들의 로맨스에 몰입이 안되기도 한다. 대표적 예가 진 캘리(짐 캐리 말고....Gene Kelly) 가 나온 뮤지컬 영화 <Singing in the Rain>이나 <American in Paris> 같은 영화를 보면.....

바지의 허리선이 배꼽을 덮고 거의 명치까지 올라오고(켁!) 바짓단은 복숭아뼈가 보일 정도로 짧다. 지금의 유행과 정 반대인 셈이다. 이런 옷을 입고 펄쩍펄쩍 뛰며 춤추는 모습 역쉬......아무리 시대를 초월한 심미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도...섹쉬해보이지 않는다. 어떤 편인가 하면......안쓰럽다.

진 캘리와 거의 동시대인이신 울 시아버님은 스웨터를 바지 속에 집어넣어 입으신다. 그런데 영화에서 진 켈리도 딱 그렇게 입는걸 발견했다! 아마....아버님 젋었을때 유행을 평생 고수하시는 듯.....^^

결론은...패션 비지니스업계의 거장들에 대한 울화통이다.

한번 사면 수십년 입어도 뽕을 못뺄 비싼 옷들을 팔면서...3-4년 지나면 도저히 못입도록...밑위를 올렸다 내렸다 바짓단을 넓혔다 좁혔다 요변덕을 떨어대니 말이다. 되도록 천과 바느질이 좋은 옷을 사서 오래 입자 주의였는데...아무래도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 같다. 그나마 유행을 덜 타는 옷을 골라 사기 때문에 아직도 처녀적 옷을 요긴하게 입고 있긴 하지만......남들이 이런 나를 보면 말하겠지..."안쓰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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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ticket 2005-10-2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쓰럽다.."란 말, 압권이네요^^

딸기야놀러가자 2007-10-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웨터를 바지 안에 집어넣어 입으신다고요... 진캘리는 잘 모르지만 (짐캐리는 아는데...) 상상이... 되네요. 웃겨요 ^^
저는 호박바지가 유행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정말 편하면서 몸매 걱정 없으면서... 좋을텐데.

이네파벨 2007-10-0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혹시 딸기님도 하체튼실꽈?
그그그그그렇다면..반가와서 얼싸~ 안아드려요...ㅋㅋㅋ

딸기야놀러가자 2007-10-04 13:16   좋아요 0 | URL
저는 하체가 튼실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체가 너무 빈약한 것이 문제인(결과적으론 똑같지만) 체형이랍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