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올해 10살 된 딸내미의 애칭?? 입니다. 유치원과 미국에서 썼던 영어이름이기도 하고..) 

오늘은 아이들 개학날.
무민이 녀석은 예상했던 대로 개학식 끝나고 친구네 집으로 내뺐고 (10시부터 3시까지 장장 5시간을 놀고 왔다.)

앨리스와 둘이서 집 근처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죽치고 앉아 책을 실컷 보고 왔다.

그런데....가는 길에....앨리스가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 나는 가끔...이상한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안보이잖아요. 혹시 그때 잠깐 세상이 사라지는건 아닐까?
어쩌면...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고 다른 모든건 다 그냥...."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는 아이의 말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니까...너만 진짜로 존재하는거고 다른건 다 환상이 아닐까...그런 생각?" 

"네, 맞아요. 그런 느낌이요......"

나는 맘속으로 확~ 놀랐다. 이것이 바로 유아론(唯我論), soliptism의 정수 아닌가???

나도 어린 시절 이런 생각을 한 일이 있고...이 생각에 매혹되고 사로잡혀 혼자서 엄청 곱씹고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으며 그것이 철학사의 한 개념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은근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그 생각을 한건....앨리스보다 훨씬 컸을 때, 중학생? 아님 적어도 고학년이 되어서가 아닐까 싶은데... 

앨리스에게 엄마도 어린시절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이 무척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는 얘기를 해주고...
조금 있다가 샌위치 집에 들어가서....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내가 걸어갈 때....나는...내가 생각을 하고 일부러 다리를 움직여서 걷는거잖아요? 그런데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렇게 걷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움직이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좀비처럼?"

"하핫 꼭 그런건 아니구요."

아...이건 어린시절 내가 생각했던 유아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주관성"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른 것 아닌가???
 

식당 안에서 앨리스는 자기가 가끔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한가지 더 들려주었다.

"엄마, 그리고 나는 가끔...어떤 단어에 대해 집중해서 막 생각하면......아무 뜻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금방 와닿지 않아서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snake가...왜 뱀인가...그런거요."

 "뭐라구?? 글쎄??"

"음...그러니까....... S가 왜 "에스"인지...잘 모르겠다는 거죠."
(아이가 정확히 어떤 글자와 소리의 관계를 의미한건지 모양의 관계를 의미한건지 둘 다인지 그밖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원래 뱀이 snake인것도 아니고 그냥 그걸 뱀이나 snake라고 부르는건 사람들의 약속일 뿐이야. 그러니까 사실 꼭 뱀이거나 snake일 필요는 없는거지. 사람이 만들어낸 거니까...네 느낌이 어떤건지 알 수 있을거 같아......"

암튼....기호나 상징의 "자의성"에 대한 의문도......자못 진지하지 않은가....

그 후 샌드위치를 베어먹으면서 우린 계속 수준높은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 ^__________^

"엄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있어요?"
 

"글쎄, 일란성 쌍동이? 하지만 쌍동이도 완전히 똑같은건 아냐..."(나의 지식의 빈약함으로 말꼬리를 흐리고...) "무엇보다도 자라나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기때문에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지."

"엄마, 사람을 복제할 수도 있어요?"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몰라 ~~~ 복제 동물, 체세포 핵 이식...어쩌구저쩌구(중략)~~~ 하지만 지금 현재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복제하는걸 윤리적으로 금지하고 있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왜 나쁜 일이죠?"
 

"왜냐하면....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그리고 사람을 무한정 복제할 수 있다면 이상한 사람들이...자기와 똑같은 사람 또는 자기 가족과 똑같은 사람을 여러명 복제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모두 귀하게 대접을 받을까? 너 스타워즈 클론의 전쟁에 나오는 클론 군대 생각나지? 그 군인들은 기계처럼 싸우기 위해 복제된거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이와 똑같은 존재를 하나 더 spare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지. 자기 아이가 다치거나 장기가 손상되면 그 spare아이에게서 그런걸 얻으려고 할 수도 있고...
그밖에 복제인간을 나쁘게 이용할 방법은 아주 많단다........
 또 다른 이유는...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있는데.......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일은 불경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도 사람이 사람을 만들고 있잖아요?"

(I know what you mean, baby~ ㅡ,.ㅡ)

"그래, 하지만 그건 자연적인 방법인거고....인간의 기술로 만들어내는건 또 다른 문제지."

 
대략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아이들과, 더구나 앨리스와 이런 얘기를 나눈건 처음이었고....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리스는 나름 책도 많이 읽고 또래 중 똘똘한 편이긴 하지만..............뭐랄까........아이가 피상적이고 감각적인걸 좋아하고...(이른바 우뇌형)...말하는건 특히나 언제나 어린아이같고 횡설수설하기 때문에....앨리스가 이런 얘기를 하는건 너무나 뜻밖이었다.

둘째라서 그런지........아무런 사심 없이(우리 아이 영재 났네~ 이런 사심말이다.)
그냥........앨리스와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게 기쁘다.

딸내미와 도란도란 피상적이고 신변잡기적인 얘기들을 나누면서 데이트하는 것만도 행복한데...
때로는 이런..........형이상학적인 얘기, 철학적인 얘기, 사회적인 얘기, 서로의 정신세계도 함께 나눌수 있다면....그 어찌 기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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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1-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은 몰라도 앨리스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로군요.
(저, 앨리스에게 급관심입니다~ ^^)

군자란 2010-02-0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낭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어렸을때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는게 쉬운건 아닌데...부럽습니다.

이네파벨 2010-02-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군자란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앨리스는 둘째라서 그런지...마냥 아기처럼 여겨왔고..또 아이의 생각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도 늘 아기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듯한...(큰애에 대한 마음가짐과 또 아주 다르더라구요.) 그런 느낌인데...
아이의 뜻밖의 말에 놀라게 되네요.

어쩌면 이런저런 관심사로 물들지 않은 아이의 여유롭고 깨끗한 마음이야말로 진정 "철학(이라기보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그릇이 아닐까....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