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께 오래오래 끌던 원고를 넘기고....
이 일이 늘어진 바람에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쉼표를 하나 찍어주었다. 나의 소박한 쉼표는 오래 전부터 노려왔던 DVD를 하나 빌려다보는 거였다.
그런데 소박하기는커녕 뜻밖에 멋진 파티에 초대되어 성대한 만찬을 맛본 기분이다.
케빈 클라인과 애슐리 주드 주연의 콜 포터의 전기 영화이자 뮤지컬 영화, “De-lovely".....
콜 포터는 20세기 전반 뮤지컬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전설적인 송 라이터로 그가 만든 주옥같은 노래들은 재즈 뮤지션들이 끊임없이 연주하고 재해석하고, 영화나 광고에 사용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영화는 이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가 남긴 노래들을 가지고 그의 삶을 한편의 멋진 “쇼”로 빚어냈다.
콜 포터는 부유한 출생에 좋은 교육을 받고 그의 문학적, 음악적 재능이 활짝 꽃 피울 수 있는 시대와 환경을 만나서 평생 나름대로 화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여러 남자들과 연애를 즐기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부유하고 착하기까지 한 아내를 곁에 두었다. 영화에서 뉴욕, 베니스, 파리,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펼쳐진 주인공들의 삶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화면에 펼쳐진다. 화려한 파티와 극장, 기품 있고 럭셔리한 의상과 그레잇 갯츠비에 나올법한 20년대 특유의 여성들의 공들인 헤어스타일, 멋진 대저택과 정원들....은 그 시절의 상류층의 삶에 대한 눈요기를 제공한다. 주인공들의 사랑도 나름대로 감동적이고 남편의 남성편력(콜은 동성애자였다.)까지 참아낸 린다의 헌신적 애정은 여러 생각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생각 거리 중 가장 시시껄렁한거 하나. 남편이 여성편력을 벌였어도 그만큼 참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의 노래들이다. 뭐니뭐니해도 De-lovely는 콜 포터의 노래에 대한, 노래를 위한, 노래에 의한 영화이다. 어쩌면 비디오판 콜 포터 songbook, 콜 포터 히트곡 메들리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맨 처음....연출자로 분한 조나단 프라이스가 노인이 된 콜 포터에게 나타나 그의 삶과 사랑을 무대에 올리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브로드웨이 극장처럼 꾸며진 무대에 콜의 인생의 주요 인물들...친구들과 그들의 가족과 아이들, 브로드웨이 제작자, 헐리웃 제작자 등 사업 동반자 등등이 차례로 등장해 흥겨운 <Anything goes>를 부른다. 그 다음 파티에서 콜과 린다가 처음 만나는 장면. 콜은 친구인 제럴드와 피아노로 반주를 넣으면서 일종의 운율 맞춘 즉흥시(?) 짓기 경연을 벌이는데 기발함과 순발력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 다음 콜과 린다의 결혼식 장면, 여기서 로비 윌리엄스가 <De-lovely>를 부른다. 커플은 베니스로 떠나 그 곳에서 한 동안 생활하는데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What is this thing called love>가 깔린다. 어빙 벌린의 소개로 뉴욕에서 뮤지컬 송라이터로 자리를 잡아가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콜 포터. <Let's fall in love>가 앨리너스 모리세티의 목소리로 연주된다. 그 다음 뮤지컬 공연 연습 장면에서 남자 배우가 <Night and Day>가 너무 부르기 어렵다고 투덜대나 콜은 배우를 설득시켜 성공적인 공연으로 이끈다. 그리고.....이 과정에서 그 남자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상처받는 린다....이때부터 둘의 결혼에 조금씩 균열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Begin the Beguine>의 연주....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불행하기 때문이라고...쿤데라가 말했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스위스로 떠나자고 토머스를 종용하는 테레사처럼 뉴욕을 떠나자고 재촉하는 린다의 소원대로 둘은 헐리웃으로 건너간다. 쉽고, 대중적이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원하는 헐리웃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예술세계를 compromise하는 콜의 심정을 <Be a clown>으로 유쾌하게 드러낸다. 헐리웃에서 성공을 거두지만(여기서 <I love you>) 그는 더욱 방탕해지고 동성애 스캔들에 휩싸이고 린다는 점점 불행해진다. 갈등의 시절에 깔린 <One of those things>, <Love for sale>. 린다는 결국 그를 떠나 파리로 가지만 얼마 후 콜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못쓰게 되자 다시 돌아와 헌신적으로 콜을 보살핀다. 린다의 노력에 힘입어 콜은 자신의 불행을 극복해내고 새로운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지만 한편 린다는 폐암으로 죽어간다. 그 때 깔리는 <So in love>......무대에서 배우들이 부르는 듀엣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내를 곁에 앉히고 피아노를 치며 콜이 불러주는 이 노래는 가슴을 파고들만큼 아름답고 절절하다. 린다가 죽고.....그 후 이런저런 장면에서 <I love Paris>, <Everytime we say goodbye>이 깔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온 친구들, 늘그막에 그를 보살펴준 남자 등을 모두 보내면서 <Get out of the town>을 부른다. 조나단 프라이스가 다시 등장해 마지막으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불러모아 흥겨운 노래와 춤을 선보인후....마지막으로 <In the still of the night>이 깔리며 젊은 시절의 콜과 린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물론! 한번 본 영화를 이렇게 세세히 기억하는 건 메모를 했기 때문이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꿈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적어놓듯, 이 영화도 그 장면 장면, 인상과 감동들을 오래 간직하려면....적어두어야할 듯 해서...곡과 장면을 짤막짤막하게 받아적었다. 극적 반전 따위는 전혀 없는 잘 알려진 인물의 실화를 그린 이야기이니만큼 스포일러라고 욕할 사람은 없겠쥐....
그의 노래들은 멜로디와 가사를 모두 음미해야 한다. 그의 가사는 풍부하고, 열정적이고, 기발하고,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고, 신랄하고, 퇴폐적이고, 개성적이고, 굉장히 지적이다(내용이나 운율이나 그 풍부한 어휘나......누가 예일출신 아니랠까봐.....)! 그리고 물론........아름답다.
<Let's do it(Let's fall in love)>라든가 <Love for sale> 같은 노래의 가사는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느낌마저도 든다. 기회가 된다면 번역해서 올려볼 생각...... 하지만 시가 그렇듯 아무리 애써도 허접한 번역이 될게 뻔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감상하는 요령은 고난도 리스닝이 가능한 분이 아니라면 영어자막을 켜놓고 보기를 권한다. (한글자막 절때 비추!)
DVD도 오리지널 사운드트랙도 모두 소장하고 싶다. 전기 영화이지만 (사실 콜 포터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인물이니만큼 노인인 콜에게 보여주는 뮤지컬 역 시 50년은 더 된 시대배경이어야 맞지만.) 곡의 해석은 다분히 현대적이다. 참여한 가수들도 수준급이다.
오늘 가져다주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건만...애들 땜에 가능할지 모르겠다. 특별히 야한 장면은 없지만...남자들끼리 부둥켜안고 뽀뽀하는 장면들이 나오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뻔한데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난감하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