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기계의 진화 - 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
로돌포 R. 이나스 지음, 김미선 옮김 / 북센스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의식의 정체 내지는 심신문제는 오늘날 과학계의 가장 뜨겁고 흥미로운 논쟁거리 중 하나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데카르트가 인간의 마음은 물리적인 몸과 다른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 시대의 관점을 통합한 이래로 모든 것이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물리적 실체로 환원될 수 있다는 현대 과학은 그 "다른" 실체의 영역을 침범하고 정복해 들어갔다.

하지만 이원론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과학적 탐침으로 조사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 이외에 "뭔가"가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계에도 널리 퍼져있다. 이원론자들의 마지막 보루, 물리주의자들이 채 탈환하지 못한 마지막 영토가 바로 "감각질(qualia)", "주관성(subjectivity)", "지각력(sentience)" 등이 아닐까 싶다.

내가 오래 전에 번역한 책 <꿈>의 저자, 철저한 물리주의자인 하버드의 꿈 연구가 앨런 홉슨은 그 감각질이니 뭐니 하는 유령을 몰아낼 신경과학적 연구성과와 저작으로 바로 이 책, 로돌포 이나스의 <I of Voltex>를 추천했다. 그때도 원서를 구해서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니 반갑고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책은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물론 이 책이 감각질 논쟁을 한방에 해결해버렸다고 판정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의미 심장한 것은 '의식'이나 '감각질'이 진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갑자기 출현 내지는 '창발'한 것이 아니라 액체 속에서 헤엄치며 "운동"하는 단세포의 수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세포 생물도 원시적인 감각력, 자아감, 감각질을 갖고 있다는 주장 역시 도발적이라고 할만큼 과감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데카르트의 유령을 쫓아버렸다고 하면서도 의식은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나 수학자, 물리학자, 컴퓨터과학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경학자 라마챈드란같은 "생물"학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의식(감각질, 주관성)이 단세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 동물에게 의식이 없다고 결론 내리려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는 말.....이런 대목을 마주하고 나는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친 소년의 말을 들은 것만큼 후련했다.....그것은 바로 내 맘속에 있던 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나스 외에 오직 에른스트 마이어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진화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마이어는 "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의식으로부터 진화했다. 의식이 인간 고유의 속성이라는 생각은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 그 정당함을 입증할 길이 없다.....(중략)....그와 같은 의식의 징후를 동물계에서 얼마나 “아래로” 추적해 내려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 징후는 일부 무척추동물, 심지어 원생동물들이 보이는 회피 반응으로 거슬러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이나스와 정확히 동일한 통찰이다. 단세포 생물의 회피반응이 인간의 의식으로 진화되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은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론이나 "생물철학"에 관련된 글들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나스는 10장 "감각질, 감각의 결합이 만든 보고"라는 한 장을 할애해서 이 철학적 논쟁을 본격적으로 펼쳐놓는다. 이 장에서는 마치 물리주의자들에게 넘지 못할 금을 그어놓은 듯한 그 유명한 차머스의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주장이 인용되어 있다. 사실상 이 장에 펼쳐진 이나스의 논리전개는 아....주....인상적인 편은 아니었다. 이 장에서 효과적으로, 명명백백, 논리정연하게 차머스를 논박했다기 보다.....이나스는 자신의 주장을 약간은 조심스럽게 여기 저기에 불쑥불쑥 간접적으로 개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이 책을 전반적으로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심신논쟁에 대한 물리주의적인 관점에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책은 하나의 세포 수준에서 시작해서 진화론적으로, 생리학적으로, 발생학적으로 의식과 그것의 기반이 되는 신경계가 진화 및 발달해온 과정을 고찰해나가고 그것은 감정, 언어, 추상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이나스는 "진화적으로 사고는 내면화된 운동"이라고 말한다.

운동하는 생물에게는 외부를 감지하고 예측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예측의 중심이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다세포 생물이 출현하면서 세포간 소통이 필요하게 되어 신경계가 발달하게 되었다. 신경계(뇌)가 만들어내는 내면세계(사고, 의식, 추상)는 외부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동일한 조직원리에 따라 창조된다. 따라서 운동 실행의 메커니즘, 그러니까 운동 조절에 따르는 연산 부하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운동의 불연속성, 동기화, 과잉완성, 고정행위패턴(FAP) 등의 원리는 의식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나스는 닫힌계로 작용하는 우리의 뇌는 외부의 자극을 재료 삼아 가상현실(꿈)을 엮어내는"실제묘사기"라고 주장한다.

책의 전반부가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생리학적 증거들을 종합하고 자세히 설명했다면 후반부는 인간의 마음을 둘러싼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쟁들을 다룬다. 예컨대 웹의 발달로 "집단마음"이 형성될 수 있을까? 생물이 아닌 존재(예컨대 컴퓨터나 기계)도 의식을 가질수 있을까? 따위의 질문들에 대한 그의 견해를 내보인다. 이 부분은 사실 앞부분에 비해 약....간....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지만 그래도 보석같은 통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각론에 있어서는 "?"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있어도 총론에 있어서는 100% 공감한다. 그는 "집단 의식"이나 "비생물 의식"에 대해 원리적으로, 잠재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본다. 단지 지금 현재의 "웹"이나 "디지털" 방식의 한계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지적한다. (재미있는 점은 기계의식의 기반이 꼭 우리의 뇌와 아주 비슷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무척추동물인 두족류의 뛰어난 지능을 예로 들면서...하지만 "운동성"은 근본적인 필요조건이기때문에 컴퓨터만으로는 안된다..로봇과 같은 형태여야 한다.....는 견해를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연구테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학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음이 났지만.....사실 '운동성'이 의식의 기원이라는 그의 논리에 충실한 결론인 셈이다. )

아무튼 이 책에 제시된 그의 모든 주장과 결론은 내게는 완전히 현실적이고, 성숙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공감만땅이다.

그리고 이 책의 큰 장점 중 하나는....어찌보면 전공 교과서처럼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생리학적, 물리학적 설명들을 친절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요점을 다시 강조해주고, 군데군데 우아한 유머와 시적인 표현을 곁들여 강의에 흥미를 유발하는 매우 효과적인 선생님이다. 심신문제라는 철학적 주제에 이끌려 이 책을 손에 들었지만 이 책은 그 토대가 되는 과학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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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0-02-0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다 그 때썼던 리뷰를 부끄러워 지워 버렸네요. 지난 주 토요일부터 읽었었나(?) 오늘 아침에야 다 읽고 여기에 들어와 다시 님의 리뷰를 보니 부럽기도 합니다. 책에 대한 여운이 진하게 내마음속에 남는데 혹시 다시 또 좋은 책있으면 소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