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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나온걸 신문에서 보자마자 당.장. 주문했다. 아옌데의 전작을 읽은 독자 중 상당수가 그러하겠지만 나는 <운명의 딸>(이하 <딸>)과 <영혼의 집>(이하 <집>)을 연거푸 읽고 나서 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를 간절히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문한 책이 배달된 후에도 섣불리 책을 들지는 못했다. 분명 한번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놓을 수 없을 것이며 나의 모든 일상은 all-stop될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어제, 아니나 다를까 새벽 3시까지 읽고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오늘 아침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기대했던 대로 이 책 역시 재미있었다. 아옌데를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대로 그녀는 정말이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책값이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아옌데는 누구에게든 권하고픈 작가라는 전제하에 쓴소리를 풀어놓아보겠다.


이 책의 경우에도 “전작만한 속편 없다.”는 속설이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딸>은 줄거리가 더욱 극적이고 주인공도 더욱 인상적이다. 특히 엘리사 소머즈는 내가 처음 접한 아옌데의 여주인공이었던 만큼 숨이 막힐 정도로 신선했고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딸>이 한 여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집>은 한 가족, 가문의 이야기이다. 그런 만큼 <집>은 여러 주인공, 여러 에피소드가 가져다주는 풍부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있다. 또 칠레의 현대사의 유명한 정치적 사건이 드리운 광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저자의 이사벨 아옌데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실각한 좌익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뻘 된다고 한다.) 계급간의 갈등과 같은 칠레 사회의 첨예한 문제점들 역시 이야기의 중심에 깊게 뿌리박고 있어 작품에 무게를 더한다.

<초상>은 <딸>과 <집> 사이에 놓인 다리와 같은 작품이다. 시간과 공간의 강을 건너 소머즈가와 델 바예가라는 두 가문을 혈연으로 맺어주고 있다. 애인을 찾아 남장을 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엘리사 소머즈가 지혜롭고 선한 중국인 타오 치엔과 결혼해 낳은 딸이 역시 <딸>의 한 일화에 등장했던 파울리나 델 바예의 아들과 맺어져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우로라가 태어난다. 아우로라의 양아버지이자 파울리나의 조카인 세베로 델 바예가 <집>의 클라라의 아버지가 된다. 파란만장한 운명의 딸이었던 엘리사 소머즈는 <초상>에서 그저 사려깊은 할머니로 뒷전에 물러서고 여장부 파울리나와 손녀딸 아우로라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집>에서 꽤 깊게 다루었던 계급갈등과 같은 사회문제는 배경 소음 정도로 물러나고 (아니면 아우로라가 취미로 찍는 사진의 대상으로 축소되어 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니베아 등을 통해 작가는 여성문제도 계속 끌고 들어오지만 역시 수박 겉?기 정도로 느껴진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할머니덕분에 안락한 삶에서 단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올 여지가 없었던 아우로라는 그녀의 두 할머니나 또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에 비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초라한 캐릭터이다. 탄생의 비밀과 첫 결혼의 상처를 양념으로 쳤지만 여전히 어딘가 싱겁다.


내 머릿속에서 아옌데와 함께 떠오르는 작가가 바로 에이미 탄이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지만 한 7-8년 전 내가 미국에 머물때 나름대로 주목받던 작가라 그녀의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한 눈에 반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여성인 화자가 대륙과 문화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개척해온 어머니(탄의 경우)나 할머니(아옌데의 경우)로부터 자신의 뿌리와 가문의 역사를 듣는다는 플롯이 무척 흡사하다. 섬세하고 여성적인 아기자기한 문체, 영미권 독자들에게는 덤으로 이국적 향취를 듬뿍 얹어준다는 점도......주인공 여성들이 삶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antagonist 격인 가부장적이거나 이기적인 남자들에게 희생될뻔 하다가 결국 사려깊고 부드럽고 지혜로운 남자를 만나 영원하고 완벽한 사랑을 얻는다는 내용까지도......


이러한 간혹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전형적인 “공주” 로망에 호소하는 이야기들이다. 아옌데나 위에 언급한 에이미 탄, 그리고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심지어 박경리의 <토지>까지도...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파란만장한 역사를 배경으로 자의나 타의에 의해 인습이나 전통과 결별하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그 와중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다분히 순정만화적 설정을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통속성”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어떠랴? 공주 로망이든, 순정 만화든...뭐가 나쁘단 말인가?

사실이다. 그 자체로 작품을 혐훼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아옌데의 소설은 (에이미 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 권째 읽으니까 조금 질리는 면이 있다. 하나같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친족들처럼 느껴지는 낙천적이고 열정적이고 무모하며 철부지같은 (그러면서도 행운으로 가득한) 주인공들이 영원한 어린시절의 뜨락과 같은 삶의 무대에서 펼쳐놓는 이야기들은....기묘하게 현실성을 비껴나가고 있다.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는 꽃이고 몸과 영혼을 불살라 연인들을 맺어주는 성(性) 역시 믿을수 없는 광휘를 뿜어댄다. 또한 아옌데의 펜을 거치면 심지어 노화나 병이나 죽음이나 피범벅과 해골조차도 아름답고 정겹게 그려진다. 그야말로 할머니의 입으로 전해듣는 집안의 역사처럼 따뜻하고 나른하면서도 드라마틱하고 눈부시게 윤색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아옌데의 소설은 다 큰 어른 소녀들을 위한 “동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현실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시공간...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감성과 멘탈리티(심리체계) 까지도 조금쯤 다른....그런 이야기를 맛보고 싶다면 아옌데의 이야기들은 더할나위 없이 멋진 경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논리와 현실성의 검열을 거쳐 진지한 공감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짜증스러울 수도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덧붙이건대, 두 전작(딸과 집)은 동화적 한계, 약간의 과장과 비현실성 등등을 감안하더라도 별 다섯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수작들이다. <세피아빛 초상>도 나름대로 훌륭하지만 전작들에 비해 조금 힘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별 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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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몸(원제: Eve's Rib)>의  저자 매리앤 리가토 박사가 이화여대에서 특강을 했다.

번역가로서 번역한 책의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행운일 것이다. 

번역을 하는 동안 저자와  번역가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전적으로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만일 내가 어떤 책을-원서든, 번역서든- 그냥 독서의 대상으로  읽을 때는 그 책과..또 그 책의 저자와 "연애"를 하는 느낌이다. 가볍게 시작하고 즐기고, 만끽하고, 괴로운 부분들은 skip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영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중간에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번역하는 책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 책과...또 저자와...일종의 "결혼" 관계로 묶이는 느낌이다.  번역이 끝날 때까지 싫든 좋든 진하고 끈적끈적한 관계를 이어가야만 한다. 한 패러그래프, 한 문장, 한 단어....도 싫다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겉보기엔 멋지구리한 남자가 알고보니 치약짜는 습관이랑 양말 벗어놓는 습관이 드럽기 짝이 없어 정이 뚝 떨어지듯...너무 고생시키는 사소한 대목때문에 저자에게 증오감(--;;) 마저 느낀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그냥 연애만 했을때는 얻지 못했을 경험......한 문장 한 문장 같이 고민하고 헤쳐나가면서 진정한 그 책과 저자의 진국을 맛보는 행운 역시 번역자의 특권이다....그리고 역시 연애와 달리 결혼처럼....그 무서운 "정"이 들어버리는 것이 덤이라면 덤이겠고...

그런만큼....저자를 만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사실 <이브의 몸>은 정보 전달 위주의 책이니만큼....조금 학술적이고 건조한 분위기이고.....글도 깔끔하고 정확해서 별 고생 없이 번역했던 책이라...저자에게 특별한 호오의 감정은 남지 않는 편이었다.

오늘 강연에서 만난 저자의 모습 역시...지적이고 자신감 넘치고 명확하고...똑 소리가 절로 나는 멋진 여성이었다.

강연 내용은 거의 책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이해가 쏙쏙 되었으나...(으흠~ 나으 리스닝 실력은 녹슬지 않았어!)

뭔가 던지고 픈 질문도 있었고 강연 뒤에 환담도 나누고 싶었으나...정말 입이 안떨어졌다. (스피킹 실력은 녹이 쓴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휘발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도다...)

그냥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책(원서)에 사인을 받고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와버렸다...ㅠ.ㅠ

어찌되었든...

기쁘고 보람있는 하루였다. (<-초딩일기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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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09-10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내가 한국어판 번역자다' 이런 말씀도 안하셨어요?

이네파벨 2005-09-1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것도 옆에 계시던 주최하신 교수님이 소개해주셔서...리가토 박사가 "Oh, really? Did you translate this book?" 하고 묻자. "yes" 라고 말하고 배시시~

7년쯤 전 미국에서 1년 반 정도 지낸 일이 있었는데요...6개월쯤 되니까 어느 정도 들리고 1년쯤 되니까 "말"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게 되더라구요. 그 때는 하고픈 말도 어느 정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는데...지금은 미국땅에 발을 처음 딛던 그 수준으로 돌아간거 같아요. 완전히....ㅠ.ㅠ

nemuko 2005-10-1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책 하나 발견^^
부럽습니다. 저도 말 한마디 못 해도 좋으니 듣기라도 잘 하고 싶어요......
 

꿈의 넝마시장

나는 오늘 세상의 끝에 있는 꿈의 넝마시장에 갔다.

거기엔 모든 것이 있었다. 장물, 쓰다버린 물건, 망가진 물건,

중고품과 고물이 된 꿈의 도구들..........

좀구멍투성이의 양탄자, 때려부순 성상, 별, 변발들,

열쇠가 없는 녹슬고 썩은 공중누각들, 한때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는 머리가 떨어져나간 인형들............

 

이 모든 잡동사니 속에서 뜻밖에 나는 우리들의 사랑인

아름다운 꿈을 발견했다.

그 황금빛은 흐려지고 그 모습은 훼손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되돌려주고 싶어서 창백한 얼굴의 사내에게  값을 물었다.

그는 이빠진 웃음에 헛기침을 하며 턱도 없이 높은 값을 불렀다.

 

그 꿈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지만 나는 계속 값을 깎았다.

그러나 사내는 완강하게 깎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꿈을 되살 수 없었다.

그후, 나는 잘 지내지 못하며 더 이상 부자도 못되고 있다.

이렇게 마음이 공허한 적은 나에게 일찍이 없었다.

그 꿈은 팔린 것일까? 그 꿈이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

......................................................................................................
소녀시절....
첫 눈에 반했던 시.......

미카엘 엔데(요즘 다시 뜨는 "모모"의 작가)가 독일에서 구전되던 노래 가사를 채록해서 재구성한 일종의 시집에 들어있던 시입니다.

넝마시장, 꿈, 부서진 성상, 열쇠를 잃어버린 공중누각...

낱말 하나 하나가
제 심금(heart string)을 살며시....건드리고 지나갑니다.
잊을 수 없이 아름다운 울림을 남기고.....

잡힐듯 잡히지 않는 꿈...
망각의 강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 기억들.....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단 한번이라도 손아귀에 잡을 수 있다면...

무슨 값인들 못 치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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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6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26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9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파벨 2005-09-1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eypop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어제 가족들과 에버랜드에 갔다.

찜통 더위에 많은 사람들......놀러 온건지 고행 내지는 극기훈련하러 온건지 모를 하루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정문 쪽으로 나가는 순간 남편이 "우리 저거 보고 가자!" 하고 가리킨 것...

"인체의 신비전"이었다.

얼마전 코엑스에서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돌다돌다 에버랜드까지 왔나보다.

길 여기저기에 깝데기 벗겨놓은 사람의 뛰어가는 모습이 담긴 포스터가 나붙었을때부터 혐오스러워서 시선을 피했건만....나로서는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고 볼 일도 없을거라 생각했던 전시회였다.

남편은 해부학 실습의 추억이 그리워서인지....애들 앞에서 멋지게 자신의 전문 지식을 늘어놓을 기회라고 생각해서인지...그 전시회를 보고 가자고 종용했다.  "애들에게도 유익한 전시회일 것"이라며....(세상에...7살 5살난 아이들이다...)

결국 "에버랜드"에 전시된 내용이니 뭐 심하기야 하겠어?.......하는 믿음으로 따라나섰다.

1층에서는 과연 나의 기대대로였다. 거대한 풍선으로 만든 입이나 소화기간의 모형에 아가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해볼 수 있고...어린이 백과사전의 인체 부분을 크게 확대시킨 포스터들...물론 시시했지만...그냥 시시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진짜 본격적인 전시물은 2층에 놓여 있었다.

설명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고 휙휙 지나가긴 했지만 암튼 맨 처음 설명을 얼핏 보니 세포액 대신 무슨 플라스틱 용액을 주입했다나 어쨌다나 하는 구절이 있었다. 그러니까....진짜 인체 표본이 맞기는 맞다는 얘기다.

표본들은....훌륭했다. 

각 부위별로...각 계통별로...신체 조직들을 그대로 되살려놓았다. 이를테면 순환계에는 사람 몸의 혈관만 사람 형체 그대로 복원해놓은 표본이 있다.  자잘한 미세혈관까지 모두 그대로 살려냈다.  신경도 마찬가지이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무척 공들여 제대로 만든 표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살난 딸내미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호기심을 보이며 아빠손을 잡고 잘 따라다니는데..

7살난 아들녀석은 내내 경악과 혐오의 도가니였다. 처음부터 아들내미랑 나는 전시회 보고싶지 않다고 했건만 남편이 "사내녀석이" 운운하며 데리고 들어간 거였다. 난 사실 혼자 빠지고도 싶었지만 아들녀석 때문에 들어간 면도 없지 않다.

수형이는 무슨무슨 전집 중에서 징그러운 해부도가 표지에 달린 "인체" 관련 부분 책들을 따로 빼서 안방에 가져다놓는 (자기가 자는 방에 놔두면 무섭다고) 아이이다. 굉장히 외향적이고 밝고 호기심많고 씩씩하지만 이런 쪽에는 약하다.....아...또...벌레도 무서워한다...

nature vs nurture(유전자 vs 환경, 선천 vs 후천)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 중에서 새끼 원숭이가 뱀을 무서워하는건 의식적인 학습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거의 본능적인(유전자에, 뇌에 각인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본능이 발현하기 위해서는 어미 원숭이(양육자)의 cue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미 원숭이가 뱀을 보고 놀라거나 도망치는 모습을 단 한번이라도 보아야 새끼 윈숭이도 뱀을 무서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번역한 책에서 나왔던 사례이다.)

그런 의미에서...내가 벌레라든가 피부속에 감취진 세계 (그것이 인간이든 닭이든 생선이든 ㅡ,.ㅡ)에 대한 유난한 혐오감을 너무 자주, 너무 심하게 아이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형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하지만 소민이는 이상할 정도로 겁도 내지 않고 혐오감도 보이지 않는다. 욘석은 할머니 MRI 찍으시러 방사선과 병원에 따라갔을때 바로 옆에 놓은 TV 스크린 대신 컴퓨터 모니터에 떠오르는 뼈사진만 두어시간 내내 바라보던 녀석이다. 남편은 소민인 아마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될 거라며 좋아서 난리다....

다시 인체의 신비전으로 되돌아가서.

모든 표본들은 끔찍했다.

손과 발만 잘라놓은 뼈 모형을 보면 나는 왜...토막살인사건이 생각날까...

사람의 토르소 부분을 딱 중앙에서 반으로 갈라 두개골에서 엉치뼈까지 둘로 갈라놓은 뼈 덩어리를 보고는...왜 예전 푸줏간에 걸려있는 돼지의 사체가 생각날까...

머리부터 발끝까지...모든 뼈들을 4-5cm 간격으로 토막토막 잘라서 몸 그대로 늘어놓은 표본을 보고서...김수형이 말하길..."엄마, 이거 꼭 국에 들어있는 뼈 같아요."  아....역시 이심전심!!! 바로 그 순간 나도 사골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기억이 바랠때까지 사골 곰국은 못끓여먹을거 같다...

소화기의 내장 역시...음식점 문앞에 진열해놓은 플라스틱 모형의 곱창과 똑같이 생겼다. 곱창전골도 당분간 빠이빠이...

생식기는 아예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가장 충격적이었던 표본은 5살 아이의 신경계 모형......그 유난히 작은 size는....충격을 배가시켰다. 그리고 어디선가 슬픔이 밀려왔다....

유리 안에 들어있는 이 모든 조각들이...누군가의 사랑받았던 "몸뚱아리"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던 곳도 이 곳이었을 것이다.

슬픔은 욕지기로...욕지기는 분노로 변해갔던 것도 이 곳이었을 것이다.

전시회 출구에는 "이 모든 어쩌구저쩌구를 가능하게 해주신 시신을 기증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였다.

말로 천냥빛을 값는다지만...그건 옛날얘기...감사하다는 말...죄송하다는 말...유감스럽다는 말....그 말이 한 줌 공기보다, 담배연기보다 가벼운 것이 되었다는 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누구나 아는 얘기다.

"감사하다고 말하면 다냐구" 남편에게 따져물었다. 나는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 허락한 사람, 유치한 사람, "에듀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부추기고 즐기고 나누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화가났지만, 심지어 시신을 이런 용도로 사용할 것을 허락한 시신의 가족 내지는  그 누군가에게 조차 화가났지만 그냥 이 전시회를 보자고 한 남편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장기기증, 시신기증, 의과대학의 해부나 실습용으로 사용하는 시신 기증은 100% 찬성하고 숭고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사람의 몸은, 시신은 신성한 것이기에...마치 예전 사회에서 성직자가 가졌던 "특권"과 "의무"처럼 꼭 필요한 전문가 집단(이를테면 의사들)만이 입회해서 비밀스럽고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꼭 필요한 행위를 하는게 옳지 않을까?"

"사람의 시신을.....이렇게  곤충 표본이나 야생화 전시하듯...어린이들이 드글거리고 누구나 "놀러"오는 장소에서 아무런 경고의 말 없이 -적어도 임산부나 심장 약한 사람은 보지 말라는 경고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casual하게 전시해놓느다는게.....말이 되냐고."

"무슨 득이 있는데? 모든 아이들이 의대에 들어가  해부실습때 받을 충격을 미리 완화시켜주자는 건가? 우주의 신비처럼 인체의 신비는 자연계의 가장 경이롭고 아름다운 현상이기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음미하고, 즐겨야 마땅하다는 건가?"

"진짜로 궁금한데....시신을 기증한 사람들이...이런 용도라는걸 정말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동의했을까? 아니면 심청이가 제 아버지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제 몸을 팔 듯...남겨진 가족을 위해 거금을 받고 자신의 시신을 팔았을까? 젊은 여배우들 누드 화보집 팔아 평생 먹을 양식 장만하듯...자...내 몸 보시오~~ 돈만 내신다면 못 보여드릴게 무엇 있으오리까?.......뭐 그런 식이었을까?"

남편에게 다다다다 쏟아부은 말들이다.

어쩌면 전시회의 좋은 의도대로 순수하게 인체의 신비에 감탄하고 많은걸 배우고 인체의 정교함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마지막 "감사합니다." 부분에서 역시 머리숙에 우리의 "에듀테인먼트"를 위해 희생하시고 노력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느끼며 발걸음 가볍게 나와서 집에가는 사람들보다 혼자서 이상한 의혹과 상상과 답도없는 문제들을 끄집어내며 이리 꼬고 저리 비트는 나같은 인간이야말로 악랄한-적어도 재수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맞다. 인정한다. 솔직히 전시회에서 긍정적, 유쾌한 정서(지적 고양감, 호기심의 충족, 감탄, 경이...기타등등 기타등등)보다 부정적 불쾌한 정서(혐오감, 욕지기, 징그러움 기타등등 기타등등)을 더 많이 얻었기에.....그냥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었고...그러다보니 그 "화"가 꼬리를 물고 가지를 쳐서 뭔가 대단한 도덕적 분개 비슷한걸로 진화되어간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상하게 쿤데라에 가서 닿는다.

<불멸>의 주인공 중 한 하나인 루벤스가 나체해변에서 벌거벗은 여자들을 보고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인다. 젖가슴을 덜렁대며 당당하게 그와 마주하는 여자들(이를테면 친구의 부인)을 대면하고 시선을 어찌둘지 몰라 주저하는 자신이 오히려 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챘다. 유럽의 문자반 위에서 시간이 울렸고 "수줍음"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사라져도 그냥 사라져버린게 아니라 너무나 쉽게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려 그런게 언제 존재하기라도 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루벤스는 수줍음이 여자에 대해 남자들이 꾸며낸 것에 불과한게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들의 신기루...성적 꿈...말이다.

인체의 신비전에 선 나는 나체 해변에 선 루벤스와 같은 번개에 맞은 기분이다.

인체에 대한 금기와 두려움...그런게 과연 존재하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너무....늙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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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마다 찾아오는 일간지 서평란을 들춰보다가 눈이 띠용...@.@

예전에 간절히 찾아다니고 기다렸던 책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

같은 저자의 "운명의 딸"과 "영혼의 집" 사이의 중간 고리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세피아빛 초상"이다.

운명의 딸과 영혼의 집을 너무나 재미있고 인상깊게 읽고 나서 잃어버린 고리에 해당되는 이 책을 무척이나 읽고싶어 영어판을 사서 볼까도 생각하다가..........그냥 바쁜 일상에 잊고 말았는데....

번역본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운명>과 <영혼>도 도서관에서 빌려 딱 한번 읽고 돌려준 터라...다시 읽어보고 싶다. 지금 확인해보니..오래전 나온 책들이라 30% 할인이 되어 책값도 꽤 저렴하다.  당장 주문!

아울러 제레미 아이언스(내가 홀딱 반했던 남자들 랭킹 10위 안에 드는 할아부지)와 메릴 스트립 주연으로 만들어진 영화 <영혼의 집>도 찾아서 보고 싶다. 너무 오래된 영화라 인터넷에도 별 정보가 없고...아마 비됴/DVD 대여점에서도 구하기 힘들 것 같지만....

이런 류의 소설...뭐라고 딱히 공식적인 쟝르가 있지는 않겠지만...

나의 개인적 "북 리스트"에서

(1)뛰어난 감수성과 탁월한 표현력을 지닌 여성 작가가 (2)질곡이 가득한 역사를 배경으로 (3)용감하고 매혹적인 여자 주인공의 (4)드라마틱한 삶을 그려낸 소설......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책들을 몇권 소개하자면...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설명이 필요없겠지...

-에이미 탄의 <Kitchen God's Wife>와 <Joy Luck Club>...

어느덧 조금...유행이 지난(?) 작가 취급을 받는 인상조차 들지만...Amy Tan의 소설은 나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고...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던 책들이다. 위의 <Gone with the Wind>와 더불어 원서의 벽을 단숨에 뛰어넘게 해주었던....손에서 놓을 수 없이 재.미.있.는. 그리고 문체가 아름다운 소설들이다.  일부는 번역서가 나와있을지도 모르지만 원서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One Hundred Secret Senses>도 읽었지만 이건 조금....별로였고...<Bonesetter's Daughter>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박경리의 <토지>

1부...그러니까 서희와 길상이의 혼인 무렵...까지밖에 못보았다. 언젠가 전작을 다 읽어봐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딸>과 <운명의 집>

매혹적이고 신비스럽고 정말정말 재미있는 책들..."문화"라는 상품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이 책들도 바로 그 증거이다. 솔직히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칠레"라는 나라.......아옌데는 그 칠레의 현대사...자연...지명들마저 친근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쿤데라가 체코와 프라하를 가장 그립고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주었듯이.......나에게 칠레는 포도와 FTA 보다 "아옌데"로 먼저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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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5-08-1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제목 보고 반가와 인사드립니다.
저도 아옌데의 '운명의 딸'과 '영혼의 집'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었거든요~
그 책들을 읽으며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관심이 있었었는데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네파벨 2005-08-1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님, 반갑습니다!!! 제 서재의 첫번째 댓글님으로 당첨! 되셨습니다.
아옌데를 좋아하신다니 너무 반가와요.
그런데 "운명의 딸"은 품절이더라구요....세피아빛 초상의 선전에 힘입어 재판을 곧 찍었으면 하는 바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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