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체코민속인형극단의 내한공연 <돈 지오바니>를 봤다. 

http://www.hoamarthall.org/ticket/ticket.aspx?cType=view&cId=267&ltype=month&tY=&tM=

진눈깨비 오는 추운 저녁 남편과 애들은 집에 놔두고 나 혼자서 보고 왔다.  꼭 보고싶은 공연이었는데 남편이 시큰둥하길래 애들이나 봐달라고 부탁하고 한 자리만 예매했었다.

공연은........기대했던것 만큼 만족스러웠다.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 공연은 접해본 일이 없고 전곡을 들어본 일도 없던 터라.....내용도 재미있고, 음악도 아름답고, 인형극 특유의 맛도 특별했다.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세련되고, 완벽하고, 놀랍고, 현란하고, 압도적인.....그런 쇼가 아니라...
정말 오래고 오랜 옛것의 느낌이 배어있는...전통과 정통에 충실한....
썰렁한 유머, 어설픈 동작, 낡은 의상이나 배경 마저도 genuine한 멋으로 느껴지는...
그런 공연이었다. 

지난주, 이 공연에 대한 정보를 어디선가 접하고....꼭 봐야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나에게 무척 매혹적이고...개인적으로 호소해오는 두 가지 키워드가 들어있는 공연이니까. 

그 두 키워드는 바로 "체코"와 "인형극"이다. 

먼저 체코.........
 
쿤데라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나의 20대...쿤데라의 소설들 중 좋아하는 작품들(<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생은 다른 곳에> 등)은 권당 열번에서 스무번씩은 읽었을 것이다.

쿤데라 할아버지가 체코의 전통 인형극을 좋아했는지, 특별한 감정을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아닐지도....그의 많은 작품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으니^^;;;
쿤데라와 체코 인형극은 나와 안동 하회탈 공연만큼이나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사비나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프란츠가.....사실은 사비나와 반목했던 스위스의 체코 망명자들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던 것처럼..........나는 그저 "체코"에서 온 공연단이 쿤데라 할아버지의 한 조각이라도 되듯 반갑고 특별했다.


그 다음 인형극.........

줄을 움직여 조종하는 인형, 마리오네트에 나는 오랜 옛날부터 매혹되었다.

아마 대개....영화에서 본 이미지였을 것이다.

먼저 <사운드 오브 뮤직>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퍼펫을 조종하여 보여준 <The Lonely Goatherd>

사랑스러운 멜로디의 요들송과 더불어 잊을수 없이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 다음............오래고 오랜 기억의 바닥을 박박 긁어 실마리를 찾아내고....구글의 도움을 받아 재구성한 영화 <Lili> 



 

 

 

 

 

 

 

 



이 유명하지도 않은 오래된 영화를 아는 분, 기억하는 분이 있을까???
 

내가 아이적...(초딩? 중딩?) TV 명화극장 류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영화였는데....
멜 파라(오드리 헵번의 남편으로 그나마 기억되는.....)가 우수 쩌는 남자주인공 puppeteer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난..........원숭이 같기도 하고 멸치 같기도 한 좀 못생긴 배우인 Mel Ferrer를 한 동안 무척 사랑했다.  

90%는 까먹은 영화 줄거리를 구글을 통해 확인해보니...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여주인공 릴리가 어찌어찌하여 carnival (곡마단?)과 엮이게 되는데, 그녀가 순수하게 인형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곡마단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puppet show의 일부로 참여하게 된다.....

그녀는 매력적인,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마술사를 짝사랑하며 상처를 입고...

멜 파라는 그런 그녀를 줄곧 말없이 사랑하며 지켜보며 스스로를 괴롭히는.......(원래 유명한 발레리노였는데 전쟁으로 다리를 다쳐 puppeteer로 전락하엿고, 자신이 조종하는 인형들 뒤로 완전히 숨어버린....컴플렉스 덩어리에 메저키즘의 극치를 달리는.........)

으아.........나으 보호본능 완전 자극하는 캐릭터  ㅡ,.ㅡ

그가 조종하는 인형들은 그의 분신이고 그의 몸이고 그의 영혼이고 그가 내밀 수 없는 손, 달릴 수 없는 다리...그의 육신이었다.......

이 영화가 어린 시절 나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을 주었고, 모든걸 다 까먹어버리는 블랙홀 같은 나의 뇌세포 속에서도 survive할 수 있었던 것은................그 지독하게 우수어린 멜 파라의 캐릭터, 그리고.......puppet, marionette의 매력 때문이었으리라.......

 

그 다음....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3편 중 하나에 드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다른 두 편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토토의 천국>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따로 한 바닥을 써도 모자를 판이지만........

암튼 영화에서 비밀로 가득한 puppeteer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인형극 공연자는 발레리나가 춤을 추다 쓰러진 후.............번데기에서 나비가 태어나듯...껍데기(육신)를 벗어던지고 날아오르는 천사(영혼)의 이야기가 담긴 공연을 선보이고.........그는 이후에도 줄곧 베로니카에게 접근하고, 신호를 보내고, 치고 빠지며(?) 그녀 주위를 맴돈다. 이 남자와 어떻게 되었는지....영화의 결말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DVD를 갖고 있으니 언제 한 번 다시 봐야겠다.)

암튼.........

Puppet과 Puppeteer는........
인간과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는 절대자의 관계에 대한..........진부하리만큼 뻔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 진부함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이 영화에서 하고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을까....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내가 푸펫...마리오네트에 매혹되는 이유도.............어쩌면.............베로니카, 아니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존재론적 욕구와 닿아있는지도 모르겠다.

.....................................

공연이 끝나고 걸려있는 인형들은...........무섭다. 
 

마치 생명과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처럼..............

 
막이 오르면...........죽어있던 인형들에 또 다시 생명과 영혼과 활기를 불어넣는 pupeteer들의 삶은...........멋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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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올해 10살 된 딸내미의 애칭?? 입니다. 유치원과 미국에서 썼던 영어이름이기도 하고..) 

오늘은 아이들 개학날.
무민이 녀석은 예상했던 대로 개학식 끝나고 친구네 집으로 내뺐고 (10시부터 3시까지 장장 5시간을 놀고 왔다.)

앨리스와 둘이서 집 근처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죽치고 앉아 책을 실컷 보고 왔다.

그런데....가는 길에....앨리스가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 나는 가끔...이상한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안보이잖아요. 혹시 그때 잠깐 세상이 사라지는건 아닐까?
어쩌면...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고 다른 모든건 다 그냥...."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는 아이의 말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니까...너만 진짜로 존재하는거고 다른건 다 환상이 아닐까...그런 생각?" 

"네, 맞아요. 그런 느낌이요......"

나는 맘속으로 확~ 놀랐다. 이것이 바로 유아론(唯我論), soliptism의 정수 아닌가???

나도 어린 시절 이런 생각을 한 일이 있고...이 생각에 매혹되고 사로잡혀 혼자서 엄청 곱씹고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으며 그것이 철학사의 한 개념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은근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그 생각을 한건....앨리스보다 훨씬 컸을 때, 중학생? 아님 적어도 고학년이 되어서가 아닐까 싶은데... 

앨리스에게 엄마도 어린시절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이 무척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는 얘기를 해주고...
조금 있다가 샌위치 집에 들어가서....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내가 걸어갈 때....나는...내가 생각을 하고 일부러 다리를 움직여서 걷는거잖아요? 그런데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렇게 걷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움직이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좀비처럼?"

"하핫 꼭 그런건 아니구요."

아...이건 어린시절 내가 생각했던 유아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주관성"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른 것 아닌가???
 

식당 안에서 앨리스는 자기가 가끔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한가지 더 들려주었다.

"엄마, 그리고 나는 가끔...어떤 단어에 대해 집중해서 막 생각하면......아무 뜻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금방 와닿지 않아서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snake가...왜 뱀인가...그런거요."

 "뭐라구?? 글쎄??"

"음...그러니까....... S가 왜 "에스"인지...잘 모르겠다는 거죠."
(아이가 정확히 어떤 글자와 소리의 관계를 의미한건지 모양의 관계를 의미한건지 둘 다인지 그밖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원래 뱀이 snake인것도 아니고 그냥 그걸 뱀이나 snake라고 부르는건 사람들의 약속일 뿐이야. 그러니까 사실 꼭 뱀이거나 snake일 필요는 없는거지. 사람이 만들어낸 거니까...네 느낌이 어떤건지 알 수 있을거 같아......"

암튼....기호나 상징의 "자의성"에 대한 의문도......자못 진지하지 않은가....

그 후 샌드위치를 베어먹으면서 우린 계속 수준높은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 ^__________^

"엄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있어요?"
 

"글쎄, 일란성 쌍동이? 하지만 쌍동이도 완전히 똑같은건 아냐..."(나의 지식의 빈약함으로 말꼬리를 흐리고...) "무엇보다도 자라나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기때문에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지."

"엄마, 사람을 복제할 수도 있어요?"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몰라 ~~~ 복제 동물, 체세포 핵 이식...어쩌구저쩌구(중략)~~~ 하지만 지금 현재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복제하는걸 윤리적으로 금지하고 있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왜 나쁜 일이죠?"
 

"왜냐하면....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그리고 사람을 무한정 복제할 수 있다면 이상한 사람들이...자기와 똑같은 사람 또는 자기 가족과 똑같은 사람을 여러명 복제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모두 귀하게 대접을 받을까? 너 스타워즈 클론의 전쟁에 나오는 클론 군대 생각나지? 그 군인들은 기계처럼 싸우기 위해 복제된거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이와 똑같은 존재를 하나 더 spare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지. 자기 아이가 다치거나 장기가 손상되면 그 spare아이에게서 그런걸 얻으려고 할 수도 있고...
그밖에 복제인간을 나쁘게 이용할 방법은 아주 많단다........
 또 다른 이유는...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있는데.......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일은 불경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도 사람이 사람을 만들고 있잖아요?"

(I know what you mean, baby~ ㅡ,.ㅡ)

"그래, 하지만 그건 자연적인 방법인거고....인간의 기술로 만들어내는건 또 다른 문제지."

 
대략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아이들과, 더구나 앨리스와 이런 얘기를 나눈건 처음이었고....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리스는 나름 책도 많이 읽고 또래 중 똘똘한 편이긴 하지만..............뭐랄까........아이가 피상적이고 감각적인걸 좋아하고...(이른바 우뇌형)...말하는건 특히나 언제나 어린아이같고 횡설수설하기 때문에....앨리스가 이런 얘기를 하는건 너무나 뜻밖이었다.

둘째라서 그런지........아무런 사심 없이(우리 아이 영재 났네~ 이런 사심말이다.)
그냥........앨리스와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게 기쁘다.

딸내미와 도란도란 피상적이고 신변잡기적인 얘기들을 나누면서 데이트하는 것만도 행복한데...
때로는 이런..........형이상학적인 얘기, 철학적인 얘기, 사회적인 얘기, 서로의 정신세계도 함께 나눌수 있다면....그 어찌 기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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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1-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은 몰라도 앨리스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로군요.
(저, 앨리스에게 급관심입니다~ ^^)

군자란 2010-02-0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낭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어렸을때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는게 쉬운건 아닌데...부럽습니다.

이네파벨 2010-02-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군자란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앨리스는 둘째라서 그런지...마냥 아기처럼 여겨왔고..또 아이의 생각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도 늘 아기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듯한...(큰애에 대한 마음가짐과 또 아주 다르더라구요.) 그런 느낌인데...
아이의 뜻밖의 말에 놀라게 되네요.

어쩌면 이런저런 관심사로 물들지 않은 아이의 여유롭고 깨끗한 마음이야말로 진정 "철학(이라기보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그릇이 아닐까....싶습니다.
 

조조(9:30)로 가족들과 아바타를 보고 왔다. 

과연.............시각적, 운동감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놀라운 수준의 컴퓨터 그래픽, 우화와 같이 단순하고 얼핏 유치한 설정이지만 억지스럽지 않은 스토리, 공감가는 캐릭터들........만족스러운 영화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영화의 이런저런 설정들, 요소들은 인간 문화(역사와 문학, 영화 등등)의 다른 곳에서 빌려오고 패러디하고 짜깁기했다

나비족 vs. 지구인들은....18~19세기 서구의 침략자들과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구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무슨무슨늄이라는 값비싼 금속을 캐내기 위해 나비족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는 지구인들...
그것은 마치 남아메리카의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금과 은을 캐간 스페인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전체 팀의 보스이자 구체적으로는 "회사"를 대표하는, 오직 이익만을 생각하는 비지니스맨, 증오와 호전성으로 똘똘 뭉친 무슨므슨 대령과 그가 지휘하는 군인들, 그리고 이들과 한 배를 타고 있지만 지적 호기심을 동기로 삼고 있으며 외계인과의 외교적 해결책을 꿈꾸는 과학자들...........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며 서구 문명의 발달을 이끌어온 상징적인 세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나비인들은 서구인들이 꿈꾸어온 이.상.적.인. 미개인 집단을 상징한다. 겸손하게 자연의 일부로서 주변 환경, 동식물들과 교감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사냥감을 죽이고 그 영혼에 사죄하는 주문을 외우고 땅과 공기와 식물 속을 흐르는 에너지(기)를 느끼고 조상의 영혼과 어머니 대자연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

판도라 행성의 자연은...마치 쥐라기의 지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무성하고 풍부하고 생명력 넘치는 곳이다. 거대 식물들이 울창하고 무성한 숲, 철갑을 두른 듯 한 거대한 괴물같은 동물들...(척추동물의 신체구조를 갖고 동시에 외골격(exoskeleton)인 동물이 진화한다는게 가능한가...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한 디스토피아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연과 미개인들의 삶을 동경하는 테마는......

헉슬리의 "위대한 신세계" 이래로 계속해서 되풀이된 다소 진부한 이야기이다.

잠시...........내가 얼마 전에 번역한 <넌제로>라는 책의 주제가 떠올랐다. 로버트 라이트는 그런 미개인들을 미화하는 인류학자들이 위선자였고 심지어 지적 사기꾼이었음을 지적했다(그는 인류 역사가 발달하면서 도덕과 선이 진보해왔다고 주장하는 편이니만큼).

나 개인적으로는....미개한 문명의 사람들이 발달된 문명의 사람들보다 더 선한지 악한지는 비교하기 어려운 질문이고....다만 역사적으로 발달된 문명이 덜 발달된 문명을 늘 짓밟고 못할짓 하고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고.......악에 대한 잠재력이야 어느 인간 집단이나 비슷할 지언정, 그들이 행한 악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이 사실이니만큼..........악어의 눈물처럼이나마...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미개부족의 모든 것을 미화하고...지금 현재 지구의 온갖 문제 덩어리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너무 안일하고 유치한 퇴행이 아닐까..............생각한다.

예컨대....."나는 과학자야. 그래서 동화를 믿지 않아"라고 말했던 그녀, 그레이스 박사가 나비족의 샤머니즘 의식 속에서 그들의 여신을 대면하면서 신비주의로 빠져버린 것이라든지....

안그래도...올 겨울 코펜하겐 COP15로 새삼 부각된 지구온난화 문제를 비롯해서....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 현대 문명의 이기심과 탐욕,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에 대한 진절머리...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과의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야만상태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유난히 호소력을 갖는게 아닌가.............싶다.

영화에서...........식물들이 마치 인간의 신경망처럼 정보와 에너지의 흐름을 관장하는 network 역할을 한다는 것...그리하여 간접적으로 나비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마지막 순간 판도라 행성의 모든 동물이 동원되어 총공세에 나선다는 이야기...

나름 독창성이 빛나는(어린이 만화영화수준의 독창성이긴 하지만^^) 설정이었다. 

아바타 프로젝트 자체나 또 군인들이 타고다니는 로봇을 조종하는 방식 등등은...요즘 과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모으는 (SF계에서야 이미 진부하달 수 있는) telekinetics 기술을 보여준다. 뇌에 전극을 연결해 뇌파를 통해 멀리 떨어진 기계를 움직이는 기술....이미 몇년 전에 미국의 두 대학에서 한 곳에서 원숭이의 뇌파에 전극을 연결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컴퓨터 장치의 bar를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 일이 기억난다. 한편 미국 국방부 연구기관(DARPA)에서는 사람의 근육의 움직임을 극대화해서(amplify)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입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얘기도 여기저기에서 들은 일이 있다. 

그런데..............지구인들의 무기(전투함, 헬기, 로봇, 군인들 행색 등등)는 광속에 가까운 우주비행을 하는 미래시대와 어울리지 않게........냉전시대를 연상시키는 재래식 삘이 났다. (솔직히...생물의 공격에 무참히 깨지고 박살나는 무기들의 성능 역시 재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

그건 그냥......감독의 의도적 설정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군인"에 대한 stereotype을 (호전적이고 사악한 지휘부, 단순무식한 장병들)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나비족이 그대로 지구상의 미개인들의 문화를 모델로 하듯, 지구인 군대 역시 근현대사 속의 "미군"들을 그대로 따온 듯.........
 

역시 감독은 SF적 미래를 배경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우리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었다.
(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와 상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골고루 필요한 것을 그러모아붙인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아무튼간에~~~ 즐겁고 멋진 시간이었다. 
표가 모두 매진되어 보통 영화로 봤지만..............3D로 다시 한번 보고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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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9-12-3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AVATAR)》를 아직 못 봐서 뭐라고 말하긴 뭐하지만요, 이 영화는 개인동일성(personal identity; ≒ 인격동일성 ≒ 인성동일성 ≒ 자기동일성 ≒ 자기정체성 ≒ 자아정체성)에 관해서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즉, 외계종족인 나비(Na'vi)족의 몸에 지구인(제이크 설리)의 마음/의식을 이식하는 설정이 나온다는데요. 그래서 지구인 제이크 설리가 나비족이 ‘되어’ 나비족의 방식대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삶을 살아간다는 얘기잖아요, 결국은...

그렇다면, 이러한 (제임스 캐머런의) 설정에 대해, 혹은 그 영화적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에 대해, 여러 가지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우선 세 가지만 뽑아서 아래에 적어봅니다.

① 마음 · 의식을 내 몸 · 뇌에서 다른 존재의 몸 · 뇌로 옮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 이 가능성 유무의 문제는 “과학적 가능성”과 “논리적 가능성”과 “상상적 가능성” 따위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겠죠.

② 내 마음 · 의식을 나비족의 몸에 이식했을 때, 내 마음 · 의식이 찾아들어간 나비족의 몸은 과연 내 몸이 되는 것인가? 나는 나비족이 되는 것인가? 지구인의 마음 + 나비족의 뇌(몸)로 된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는 지구인인가, 나비족인가? 아니면 제3의 신종족인가?

③ 내 마음 · 의식이 기존의 내 몸 · 뇌에서 추출돼 나와, 다른 제3의 몸 · 뇌로 이식/전송되었다면(mind uploading), 기존의 내 몸 · 뇌의 존재론적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 마음 · 의식이 내 몸 · 뇌에서 빠져나와 다른 데로 옮겨갔다면, 기존의 내 몸 · 뇌는 단지 물리적/물질적인 빈 껍데기로 휑뎅그렁 남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빠져나간 내 마음 · 의식과 동일한 ‘분량’의 마음 · 의식이 여전히 그 몸 · 뇌에 남아 있게 될까? 그도 아니면, 마음 · 의식의 여분/자투리/찌꺼기/흔적 따위가 잔해처럼 일부분 남아 있을까? 이 각각의 경우/시나리오가 모두 성립할 수 있다면, 그 각각의 과학적/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마음의 복제와 몸 · 뇌의 복제는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가?

아직 《아바타(AVATAR)》를 보지 않아서, 위 세 가지 물음과 관련된 사유를 더 구체적으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아바타(AVATAR)》의 대략적 줄거리를 놓고 볼 때, “개인동일성(personal identity)”이라든가 마음 · 의식의 복제/전송(mind uploading) 따위와 관련하여 정말 흥미롭고도 심층적인 물음들을 깊이 파고들 기회가 될 듯합니다. 저는 위 생각들을 계속 공글려봐야겠습니다.

이네파벨 님의 《아바타(AVATAR)》 감상 후기, 아주 유익했습니다.^^ 덕분에 제 관심 주제들을 소략하게나마 정리할 기회가 되었네요. 고맙습니다.

군자란 2009-12-30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퀄리아님의 댓글을 보며 생각나는 책이 있는데 데닛과 호태프스테터(?)의 이런 바로 이게 나야에서 언급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네파벨님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하여 2번이상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물론 결론이 있었던 것 아니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죠.결국 의식과 몸,존재에 대한 고민앞에서는 어쩔수 없이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qualia 2009-12-31 16:07   좋아요 0 | URL
군자란 님께서도 관심이 많으시군요.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가 엮고 쓴 책 『이런, 이게 바로 나야!』에 나오는 각종 마음/의식/뇌 관련 사고실험이랑, 영화 《아바타》에서의 의식 전송 내용이랑 관련지어 생각하면 재밌을 것 같네요...

이네파벨 2009-12-3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님, 일단 영화 아바타의 설정에서는요...지구인의 DNA와 나비족의 DNA를 합성(?)해서 인공자궁비슷한 장치에서 혼혈인을 만듭니다. 외모는 DNA공여자인 지구인과 약간 비슷한 느낌은 나지만 신체 자체는 완전 나비족이구요...(이 부분 보면서...옛날 TV 시리즈 V에서 지구인 모습을 하고 있다가 껍데기를 벗으니 파충류가 나오던 그 외계인이 생각났습니다. 그 외계인과 지구인이 사랑에 빠져 혼혈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생각나구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지만...과학의 발달에 따라 상상력은 계속 새로운 옷을 입는 듯...^^)


qualia 2009-12-31 07:28   좋아요 0 | URL
지구인의 DNA와 나비족의 DNA를 합성해서 인공자궁 비슷한 장치에서 혼혈인을 만든다면, (이네파벨 님 얘기에만 근거해서 말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혼혈인도 당연히 그 자신의 마음과 의식을 지닐 텐데요... 의문은 이 정도로 표하고, 문제의 영화 《아바타》를 직접 보고 나서 논의해야 말이 되겠군요.

이네파벨 2009-12-3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두 개의 신체에 하나의 의식...이라는 문제는 주인공이 캡슐에 들어가 머리에 전극을 부착하고 아바타를 조종하고, 또 잠시 지구인으로 돌아올 때에는 아바타는 의식을 잃습니다.(코마상태) 그러니까...두개의 육신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이리저리 바꿔 타는 상황이죠. 물론...주인공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낍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바타의 삶을 선택하게 되구요......(이런이런...완전 스포네요. 나중에 영화보실 즐거움을 빼앗게 되는게 아닌지 두려워요)

qualia 2009-12-31 08:27   좋아요 0 | URL
두 개의 “몸”을 “마음”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땐 지구인이 되었다가, 어떤 땐 나비족이 되었다가 한다는 얘기죠??? 흠, 이런 시나리오는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상상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군요.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부대조건에서 적지 않은 허점을 노출했을 듯한데요... 이것도 문제의 영화 《아바타》를 직접 보고 나서야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겠죠. 아무튼 영화 《아바타》가 던져주는 가장 큰 흥미거리는, 제게는, 개인동일성(personal identity) 문제와 마음 전송(mind uploading) 문제일 듯하군요.

우리나라 영화감독들도 에스에프(SF)적 상상력을 현란하게 보여주는 영화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요... 이웃나라 일본 사람들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열광적인 SF 팬들이 아닐까요? 아마도 세계 SF 영화의 흐름(트렌드)을 가장 맨 앞에서 이끌어나가는 나라가 일본일 것입니다. 일본의 망가(まんが, Manga), 아니메(アニメ, Anime)에서 보여주는 SF적 상상력과 “SF 철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듯하죠? 수많은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가 일본의 망가나 아니메에 기원을 두고 있으니까요.

저는 일본 사람들의 그 유별난 SF적 상상력(공상력), 미래 세계에 대한 무한한 동경의 심성, 그 우주적 상상력, 새것(최신, 최초, 최고)에 대한 탐욕과 집착력, 극도의 섬세함과 치밀함, 논리적 구성력 등등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굉장히 부럽구요. 결국 우리가 앞으로 일본과 대결할 궁극적 분야도 여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계 최선두권으로 나서려면 결국 일본부터 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네파벨 2009-12-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란님, "이런 이게 바로 나야(Mind's I)" 정말 재미있죠? 저도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은 책이지만...양파처럼...벗겨도 벗겨도 새롭게 느껴지는 책입니다.

최근 나온 대니얼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를 조금 읽었는데.....흠...데닛의 글은 너무 어렵더군요. 확 와닿지 않는 논리전개도 있구요...전 철학자들이 쓴 글이...독해가 잘 안되어요..ㅠ.ㅠ /오히려 역시 어렵다는 얘기를 듣는 호프스태터의 글(<괴델, 에셔, 바흐> 그리고 는 약간의 참을성과 노력을 기울이면....즐겁게..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더군요. 호프스태터............제가 정말 사랑하는 천재입니다.

qualia 2009-12-3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네파벨 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 Hofstadter)의 신작 저서가 내년 05월달에 출간된다는군요. 제목은 『The Essence of Thought』(Basic Books, May 2010)이고요. 프랑스 파리 대학교 인지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마뉘엘 상데르(Emmanuel Sander) 교수와 공저라고 합니다. 아마존 서지사항에 무려 512쪽이나 된다고 나와 있구요.

소개에 따르면, 이번 신작 저서는 유추(analogy)가 생각/사유활동(thinking)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이 유추라는 개념에 기반해서 마음의 작동 원리를 파헤치는 책이라는군요. 말하자면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Mind Works)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판본쯤 되겠죠, 아마...

호프스태터가 최근작 『I Am a Stange Loop』에서는 그다지 호평을 못 받았는데요. 과연 『The Essence of Thought』에서 명예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그리고 이네파벨 님, 한번 『The Essence of Thought』 번역 · 출간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아마존에는 얼추 한 달 전에 서지 사항이 떴는데, 정작 베이식 북스(Basic Books) 홈페이지에는 책 소개가 아직 뜨지 않았더군요. 대신에 피디에프(pdf) 문서로 된 책 소개가 있더군요. 아래 주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SOURCE: http://basicbooks.com/documents/rights/PBGRightsGuide.pdf (3쪽)

이네파벨 2009-12-3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님, 정보 고맙습니다. 사실 I am a strange loop도 사놓고 한 챕터인가 보고 안보고 있어요, 아직...^^ 그리 딱딱하거나 거부감 들거나 재미없지 않았구요...GEB와 비슷한 느낌...비슷한 테마...(제가 읽은데 까지는)..제게는 즐겁게 읽히더군요. 그런데 그냥 딱 거기까지 읽다가 정신이 딴데로 팔려서....지금도 다시 잡아들고 싶지만...뭐랄까...이런 책은 좀 더 심기일전하고 방해요소(번역일이든 애들방학이든) 없을때 딱 마음 가다듬고 정좌하고 읽어야 할거 같아서...ㅎㅎㅎ 그런 핑계로 밀쳐내고 있어요^^ 왠지 이 새 책은 I am a strange loop보다 좀 더 어렵고 딱딱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

기억의집 2009-12-3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헉슬리의 이후의 sf 소설은 신세계 이후의 변주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분이 계셔서 반갑네요. 모든 아동 모험소설은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의 모험>의 변주고 sf 소설은 헉슬리의 <신세계에서> 변주라고 생각했거든요. sf소설가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현실과 다른, 기존의 세계와 다른 작가들이 창조한 세계더라구요. // 저도 도킨스파라서 약간 샤머니즘에 당황했어요.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애매했고요. 방금 리뷰보니 진화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저도 그런데.....전 지금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 끝나면 핑거의 언어본능 읽으려고 하고 있는데...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영환 3d로 다시 보고 싶어요. 이야기는 별거 없어도 비쥬얼은 끝내주죠!
 

미국에 다녀온 지도 어언 6개월이 지났다.  

1년의 기간.........일장춘몽 같다.  

처음 6개월은 미국생활 적응하고 환율걱정하느라...또 마무리 못하고 가져간 번역원고 두 개 마감하느라 맘의 여유가 없어 책을 못읽었고,  

후반 6개월은 평생 또 언제 이렇게 놀아보리~ 하고 정신줄 놓고 여행다니고 노느라(남편의 주도하에) 책을 몇 권 못봤지만... 

그래도 그때 읽은 책들이 그때의 즐거운 추억과 함께 새록새록 떠오른다.  

미국에 처음 가서는......번역할만한 과학책을 열심히 찾아봐야지, 결심했는데....번역원고 넘기고 나니 한동안 그쪽으로 쳐다보기도 싫어졌고 과학과 관련 없는 책들을 주로 읽었다. 소설 등등... 

대략 순서대로 적자면... 

 

 

 

 

 

 

그렇다..........이 책을 읽고 말았다.  이 쓰레기같은 책을.

정말이지 반즈앤노블, 보더스, 하다못해 코스트코, 랠프니 반즈같은 슈퍼마켓 등등....이 시리즈가 안깔려있는 데가 없고, 안 걸려있는 데가 없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예전이나 지금이나....초대형 베스트셀러에는 천박함과 질낮음이 필요조건으로 따라붙는 듯.)

확실히 중독성은 있다. 한번 잡으면 새벽 2-3시는 기본이었다.  

어느 비평가가 이 책을 'brain porno'라고 표현했다는데....공감...공감... 

노골적인 신체접촉 묘사는 거의 없는데도....닿을 듯 말 듯, 간질간질한 성적 긴장감이 책 한 권을 가득 채우고 있다. Literally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책.  

4권쯤 되면 진짜 야해진다는데...1권도 충분히 야하다. 영어공부를 핑계로 요즘엔 초등학생들도 이 책을 즐겨읽는다는데..........절대로 부모가 아이에게 권할 책은 못 된다.  

걍...더도 덜도 아닌 하이틴 로맨스.  

굳이 미워할 이유는 없건만 단지, 그렇게 히트치고 큰 돈을 벌고 서점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어서 짜증날 뿐.  

2권부터는 읽지 않았고 이 책은 미국서 짐 쌀때 동네 도서관에 주고 왔다.

그 다음....  이 책들은 가능하면 리뷰로 따로 다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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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509쪽에서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라고 쓴 샌드위치 광고판을 둘러쓰고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종말이 임박했다”라든지 “심판의 날이 온다” 따위의 말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종교를 전파하는 광신도의 모습을 패러디한 것이리라. 인공지능 분야의  선도적 연구가, ‘커즈와일 신시사이저’를  비롯하여 걸출한 발명품을 여럿 내놓은 발명가, 수많은 기업을 일으킨 성공한 사업가, 지적 깊이와 폭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상가인 레이 커즈와일은 과연 과대망상에 빠진  기술낙관주의의 광신도일까? 아니면 어수룩한 사람들의 눈앞에 첨단과학이라는 마법 모자에서 가짜 토끼를 꺼내는 일종의 지적 사기꾼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 진짜로 선견지명을 지닌 현인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이 두꺼운 책을 펴들었다.

 

그가 임박했다고 말하는 ‘특이점’은 무엇일까? 원래 특이점은 수학에서 어떤 수를 0으로 나눈 값이라든지, 물리학에서 블랙홀 내의 밀도와 중력이 무한대인 지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커즈와일이 말하는 특이점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이다. 그러니까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가는 기술 발전의 그래프에서 기울기가 무한대에  가깝게 뻗어나가는 지점이 되겠다.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도래한다는 근거로 단기적으로는 무어의 법칙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의 발전 추이를 제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지구와 인간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진화의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우주 만물은  질서와  정보가 축적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과거에는 DNA와 뇌의 신경패턴이 정보 저장과 질서 창조의 주역이었으나, 이제 그 주도권이 기계와 기술로 서서히 넘어가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인간 지능과  기계 지능이 융합되는 시기를 거쳐 궁극적으로 둘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온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패턴이  지적 과정과 지식으로 포화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본다.

그 같은 미래 예측의 거시적 틀 안에서 구체적인 뼈와 살을 붙여나갈 증거들은 GNR, 즉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의 연구 성과에서 찾는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유전학 또는 생명공학의 발달로 질병과 노화가 정복되어 인간의 수명이 놀라울  정도로 연장될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에 기초한 수명 연장과 삶의 질 향상은 나노기술의 혜택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정도에 불과하다. 분자수준에서 활동하는 나노봇이 탄생하면 우리 몸속을 돌아다니며 손상된 기관과 조직을 복구하고, 신경계에 작용하여  가상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한편  포글릿이라는 나노봇의 무리가 자유자재로 온갖  사물을 창조하고 변화시키게 되어,  사실상 모든 물리적 현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나노봇은 환경문제와  에너지문제를 해결하고 굶주림과 빈곤을 퇴치하며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로봇공학은? 로봇공학은 인공지능, 생물학적 지능의 한계를 넘어선 초지능, 궁극의 지능을 의미한다. 엄청난 혜택과 위험을 지닌 양날의 검 같은 나노기술을 비롯한 미래의 첨단 기술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기계지능의 도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커즈와일의 이런 주장은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까? 나는 그의 주장의 학문적, 기술적 측면을 분석할만한 입장은 못 된다. 나노기술이나 로보틱스 쪽은 문외한이고, 생명공학 기술에 대해서도 비전문가이다. 다만, 몇 년 전에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의학, 생물학 관련 기사를 번역한 일이 있는데 그때 접했던 수많은 연구가 이 책에서 낙관적 기술진보 사례로 인용되었음을 목격했다. 그 연구들의 상당수는 임상시험 승인조차 나지 않은 갓 돋아난 새싹 같은 단계일 뿐인데 전도 유망하고 현실적인  대안인 양 부풀려 포장한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사실 나노기술에 대한 커즈와일의 전망은 1986년 에릭 드렉슬러가 『창조의 엔진』에서  내놓은 주장에 그대로 기댄다. 그런데 드렉슬러의 주장은 1986년에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 나노미터 수준의 미세한 구조를 다루는 현실적인 나노기술과 분자제조니 나노봇이니 하는 궁극적 나노기술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마치 오늘날 커즈와일이 만든 여러 기계들에 적용되는 ‘약한  인공지능’과 인간 이상의 사고하는 능력을  지닌 기계를 일컫는 ‘강한 인공지능’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버티고  있듯이. 그가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을 지지하는 근거는 나노튜브, 3차원 분자 연산, 양자 연산 등 새로운 연산 패러다임이 도래해 하드웨어의 연산 용량이 인간의 뇌 수준을 뛰어넘게  될 것이고, 또한 인간 뇌의 역분석을 통해 자기조직적이고 카오스적인 뇌의 특성을 구현하는 소프트웨어가 기존  소프트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이론적  기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 같은 세계는 적어도 아직은 이론과 몽상에 속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커즈와일은 기하급수적 발전에 의한 ‘수확 가속의  법칙’이 마치 마법의 양탄자 같이  이런 몽상과 현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를 테크노유토피아 세계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 예측은 그 미래가 오기 전에는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커즈와일은 자신만만하게도 구체적인 시기까지 못 박는다. 나는 그가 틀릴 것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겠다. 설사 기술 발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뻗어나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사회, 제도, 관습, 심리적 장벽 등은 같은 속도로 발맞추어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공정하게 주의를 기울였다고 보기 힘든, 첨단 기술의 비관적이고 위험한  측면들 역시 발전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한편 마음 깊숙이에서 나는 그의 예언이 맞기를 바란다.  그가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해리 포터의 세계, 어린 과학자 톰 스위프트의 세계, ‘충분히 발달한 기술이 마술과 구분되지 않는’ 모험과 낙관주의로 충만한 세계야말로 너무나 되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의 꿈이 아니던가! 내가 ‘성장’이라는 관문을 거치며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추방당한 그 세계를 커즈와일은 바위 같은 의지력과 마법사 같은 능력으로 꽉 붙들고 지켜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커즈와일이 괴짜라고 하더라도 외톨박이는 아니다. 과학기술계의 엘리트들, 세계에서 가장 명석하다고 할 사람들이 이 해괴한 신념을 종교처럼 믿고 있다. 누가 알랴? 그들이 우리보다 한 발짝 먼저 미래를 살고 있는지….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기획회의 11월호, 전문가리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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