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타파스 사파리 - 스페인 한입 음식 타파스를 타고 떠나는 여행
유혜영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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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0년 전 스페인어과 전공 수업을 기웃거리면서 스페인 문학과 문화, 라틴아메리카 역사 등에 빠져 지냈던 적이 있었다. 스페인어과 전공 수업을 무슨 교양 수업 삼아 신나게 듣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두 과목만 더 들으면 부전공이 될 뻔했었다. 제대로 읽고 말할 줄도 모르는데 부전공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렇게 맺은 스페인과의 인연(?)은 올해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면서 다시 깨어났다. 

 

  태양의 나라, 정열의 나라 등 스페인을 수식하는 말도 많고,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같은 축구 팀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에게 스페인은 '맛의 나라'였다. 10년 전만 해도 외국 음식이 그렇게 많이 들어오지 않았던 터라 수업 시간에 풍문으로 들은, 돼지 넓적다리를 말려 만든다는 하몽은 어떤 음식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보다 지갑이 가벼웠던 대학생에게는 설사 어딘가에서 팔았다손 쳐도 빠에야도, 샹그리아도, 그리고 타파스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뭐 발렌시아 오렌지로 만들었다는 오렌지 주스 정도가 내가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스페인 음식이었겠지 싶다. 이제는 그때보다 다양한 음식을 손쉽게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본토'의 맛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름간의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여행 루트를 짜기에 앞서 스페인 문화, 그 중에서도 음식 문화에 대해 살펴보고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고, 맛볼 수 있는 것이 여행이기에. <스페인 타파스 사파리>는, 알폰스 10세가 음식을 곁들이지 않고는 술을 마실 수 없도록 법을 제정해 생겨났다는 타파스를 비롯해, 다양한 엠부티도(돼지의 다양한 부위를 이용한 저장 음식으로 보존, 가공해 숙성시킨 것과 익힌 것 크게 두 종류다), 하몽, 파에야 같은 스페인의 음식에 대해서뿐 아니라 보케리아 시장과 산타 카레리나 시장처럼 바르셀로나에서 신선한 식재료를 만날 수 있는 공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그리고 <귀향> <하몽하몽> 같은 영화, 달리,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로 스페인 음식에 대해 풀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0년 넘게 스페인에서 생활한 자신의 경험을 전함으로써 단편적인 맛집 기행 혹은 미식 여행이 아닌 스페인에서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유학 시절, 한밤중에 타파스 집을 순례했다는 이야기나 스페인인 남편과의 일화 같은 소소한 이야기는 간단히 먹는 타파스 같은 느낌이었다. 

 

  각 장의 말미에는 'OO구역 현지인처럼 즐기기'를 붙여놓아 저자가 추천하는 타파스 가게, 스페인 음식점, 구경(혹은 쇼핑)할 만한 가게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르셀로나에 한정된 정보라 더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는 내게는 조금 아쉬웠지만, 맛, 디자인에 별점을 매기고 대략적인 가격대도 제시해줘 주머니 사정에 맞게 골라갈 수 있게끔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맛깔나는 에세이에 싱싱한 요리 사진과 일러스트, 여기에 간단한 레시피까지. 다양한 재료가 조화를 이루는 요리처럼 읽고 나면 한 끼 맛있게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른 책.

 

언어는 소통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지만, 음식을 체험하고 나누는 데는 어떤 준비나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기꺼이 새로운 향과 맛을 받아들일 자세만 있으면 충분하다.거기에 약간의 배고픔을 남겨둔다면 최상의 준비를 마친 셈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도대체 이 요리는 어떤 재료와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해진다. 더욱이 그 요리 뒤에서 피카소나 달리가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면 어떻겠는가? 요리와 사람, 공간, 거리,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고 역사의 일부가 되어 후세에 전해질지 궁금하다. 의식주의 형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하게 변하지만, 음식만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고유한 민족성과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음식에 담긴 철학, 문화, 생각과 자세만 잘 살펴봐도 한 민족의 지난 시간과 미래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 자신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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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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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덕후들에게 서점은 그저 책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칙칙한 책장에 책이 '꽂혀만'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책이라는 각각의 사물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인 서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책과 공간이 어떻게 어우러지느냐가 서점의 분위기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했다. 책을 그저 상품으로만 대하는 서점도 있었고, 한 권 한 권에 애정을 품은 서점도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은 대체 어떤 서점인 걸까. 저자가 어떤 기준으로 '아름다운 서점'을 선정했는지 궁금해 (암만 밑진다 해도 최소한 예쁜 서점 사진이라도 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는 정말 다양한 서점을 소개했다. 저명한 건축가나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은 서점처럼 건축물 자체로 아름다운 서점을 비롯해서 역이자 광장으로 기능하는 서점 등 전 세계에 흩어진 서점 스무 곳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서점이라는 공간만 소개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짧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작가 지망생들의 여름학교 격인 그리스의 아틀란티스 서점을 시작으로 역 건물의 일부를 서점으로 꾸민 바터 북스, 온실처럼 꾸민 공간에서 커피와 수다 그리고 책을 즐길 수 있는 카페브레리라 엘 펜두르, 해가 지면 문을 닫는 야외 서점인 바츠 북스, 놀이터처럼 놀며 즐기며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키즈 리퍼블릭, 성당에서 서점으로 거듭난 셀레시즈 도미니카넨,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오프라인 서점으로 옮겨진 더 라스트 북스토어 등 저자의 안내에 이끌려 각양각색의 서점을 만나는 것만으로 그곳의 따스함이 전해지는 듯했다. 종이 너머, 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서점의 역사와 책에 대한 애정에 나도 괜히 설레기도 했다.  

  특색 있는 스무 곳의 서점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간간이 들어간 책과 얽힌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어떤 이는 "도서관은 장대한 우주체계를 연상하게 하지만 서점은 우주이자 동시에 속세다. 사고파는 사람들의 마음과 취향과 욕망이 공명하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더 나아가 책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갖는 지극히 인간적인 맛이 그래서이다"(77쪽)라고 서점의 매력에 대해서 소개하는가 하면, 또다른 이는 "훌륭한 북디자인이란 레이아웃이나 이미지,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판형과 구성, 그리고 인쇄 품질까지 다양한 요소를 통해 콘텐츠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는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렇게 완성된 책은 서점 같은 공적인 공간에서도 그 책을 손에 쥔 사람의 모든 신경을 매혹하는 힘을 가진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입니다"(125쪽)라고 북디자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름다운 서점은 단순히 외관이 아름다운 곳이 아닌 "전문 지식을 갖춘 북러버"가 일하는, "세심한 배려, 사람과 책을 위한 공간 구성"을 갖춘, "전 세계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장소"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책과 독자와의 만남을 돕는,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곳"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서점을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을 수 있을까 싶었다. 번쩍이는 공간에서 독자를 유혹하는 대형 서점보다는 땡스북스, 책방피노키오, 유어마인드, 더북소사이어티 등의 작은 서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서촌에서 오랫동안 터줏대감처럼 있는 대오서점 같은 곳은 어떨까. 전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을 보면서 그저 부러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왜 그런 서점이 없는지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우리의 '아름다운 서점'을 발견하고 그만큼의 애정을 쏟아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쁜 서점 사진 이상으로 책이 가진 물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 좋은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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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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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때 연극배우였지만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선 무라타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내연녀를 위해 사체유기를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자백하지만 그 외 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인한다. 하지만 과거 공금을 유용하고, 친구에게 사기를 치는 등 '정직'과는 거리가 먼, 어두운 삶을 살아온 무라타에게 상황은 불리하게 흘러간다. 모두가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하는 가운데, 그의 담당 변호사 햐쿠타니만은 그를 믿고 거침없는 변론을 시작한다. 과연 무라타는 자신의 주장처럼 살인자가 아닌 것일까?

 

  <파계 재판>은 전체 이야기가 법정에서 진행되는 독특한 소설이다.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제3자인 법정 기자의 관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 또한 유지한다. 당사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지만 외부인 가운데 누구보다 사건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화자를 앞세움으로써 작가는 독자를 순식간에 법정의 방청석으로 불러들인다. 마치 신문에 실린 재판 관련 기사를 읽듯 구경하듯 들여다봤다가 팽팽하게 진행되는 공방에 이내 자리를 뜰 수 없게 된다. 겉으로는 너무나 빤해 보여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는 사건.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사건은 더이상 흔히 일어나는 치정 사건을 넘어서 사회와 사투를 벌인 한 인간의 드라마로 나아간다.

 

  "재판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각본도, 연습도 없는 즉흥극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다. 나 역시 하나의 사건을 심리하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조명의 방향이 바뀌어 때로는 핵심과는 별 상관없는, 하지만 인간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실로 흥미로운 문제를 부각시키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 바 있다"라는 말처럼, 본질적으로 <파계 재판>은 '인간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흥미로운 작품이다. 사실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법정 서술이 1차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왔던 비밀이 드러날 때 이야기는 (기존의 흐름과는 방향이 틀어질지는 몰라도)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기 때문이다. 무라타라는 인물뿐만이 아니라 그에 대해 증언하는 주변인들, 그를 변호하는 햐쿠타니 등 법정에 서는 다양한 인물들의 내면이 제3자의 시선에서 꼼꼼히 그려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계 재판>은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와 연관성이 있다. 겉으로 볼 때는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사인 우시마쓰. 그는 "설령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가슴에 새기고 자신이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또 숨기려 한다. 자신이 신평민이라는 것을 망각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고뇌에 휩싸이는 <파계>의 주인공 우시마쓰와 <파계 재판>의 무라타는 걸어온 삶의 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에는 같은 선상에 놓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만 하는 삶. 이렇게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닐 것이다. 보이지 않는 편견이라는 시선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 더이상의 신분제가 없다는 사회지만 과연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일까.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치르는 심정으로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공부하고, 매일 재판을 방청하러 다녔다는 작가의 열정 때문일까. <파계 재판>은 비전문가가 쓴 법정물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법정을 체화했기 때문인지 전혀 겉도는 느낌이 없이 서술된다. 이후 작가가 특별 변호사로 선임되어 실제 법정에도 섰다는 <파계 재판> 이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전문성을 지녔다는 의미이리라. 50년도 지난 작품이지만 세월을 뛰어넘는 메시지를 지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책. 법정물이라는 형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편견'에 대한 고찰 또한 인상적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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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 동안의 제주도 자전거+도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밤 비행기라 시간은 넉넉하게 남았는데 우산도 없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어디 갈 데 없을까' 하고 폭풍 검색을 해보니 '제주시 기적의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 걸 발견했다. 오래전 MBC <느낌표>에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건 알았지만, 텔레비전에서만 봤을 뿐 실제로 가본 적은 없어서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말하는 건축가>를 보고 고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물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터라 겸사겸사 찾았다.   




지도를 보고 가만가만 따라가보니 제주시청 주변인데도 번화가라는 느낌보다는 평범한 주택가 같았다. 서울에서 흔히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높은 건물이 눈에 띄지 않아 '이쪽이 아닌가' 하며 두리번두리번 걷다 보니 '제주시 기적의 도서관' 현판이 보였다. 고만고만한 단층집과 연립주택이 이어진 곳에 그리 튀지 않게 조성된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도서관보다는 작은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작고 아담해서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밝은 색 페인트가 아이들의 마음을 부르는 공간. 조금씩 비가 흩날리는 날씨였지만 도서관 앞에서 아이들이 익숙한 듯 삼삼오오 뛰놀고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신발 벗는 곳이 보인다. 그 옆에 "기적의 도서관은 이런 곳입니다" 하는 소개가 붙어 있었다. 어린이 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일은 중요하다. 책을 학교에서 과제 때문에 억지로 읽어야 하는 것, 공부 때문에 억지로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로 대해야 자라나서도 책을 놀이 대상으로, 지식을 쌓는 도구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책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지방에 사는 아이들은 서점에서 책을 읽기도, 도서관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 몇몇 지방 도시에 세워진 '기적의 도서관'은 그 접근을 어느 정도나마 가능케 했기에 '작은 기적'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잠시 여담이지만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장갑을 벗고 3시간 남짓 자전거를 탔더니 손등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따가워서 견딜 수 없었는데, 도무지 약국이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에야 겨우 열상화상연고를 살 수 있었다. 인구 분포를 생각하면 약국이나 병원, 도서관 같은 시설이 부족한 것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손을 놓기에는 안타까웠다.



들어서면 보이는 열람실. 비 오늘 주말이었지만 그리 붐비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수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에는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책의 보존, 관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은 어둡고 형광등 불빛이 강하다는 인상이었는데,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시원스레 뚫린 통창으로 자연광이 쏟아졌다. 흐린 날이었는데도 바깥의 초록 풍경과 빛이 어우러져 그리 어둡지 않게 느껴졌다.

탁 트인 열람실뿐 아니라 움푹 패인 공간에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아지트'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도서관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사서데스크. 이 공간은 여느 도서관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자동반납대 같은 전자화 설비도 갖춰져 있었다.



화장실 옆쪽으로는 자그마하게 북까페가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이 도서관이지만 아이들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데려 온 부모님, 동네 어르신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정기간행물이나 신문 역시 이곳에 구비되어 있어 차를 마시며 읽을 수 있는 공간. 이곳 역시 탁 트인 창이 바깥 풍경과 이어졌다. 내려가는 계단은 아이들에게 맞춰져 적당한 높이로 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구연동화 같은 행사도 가능할 듯했다.





서가에 꽂힌 책들. 신간도서는 따로 서가가 마련되어 있었고, 다른 책들은 그림책, 읽기책이 여느 도서관처럼 십진분류로 정리되어 있었다. 꽂힌 책을 보니 손때가 탄 책이 많아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이용하구나 싶었다.
 




어린이 책과 별도로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서가도 있었다. 이쪽도 전체적으로 책이 낡은 느낌. 어린이 도서관이다보니 청소년, 성인용 도서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어린이책 서가는 아이들의 키높이에 맞췄다면 이쪽은 책장도 조금 더 높아 이용자의 성향에 맞춰 서가 배치도 구분되어 있는 듯했다. 베스트셀러, 세계문학전집, 청소년 소설, 실용서 등이 적당히 구색을 갖춰진 듯.




구름빵으로 장식(?)된 모유수유방. 이때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불이 꺼져 있었는데, 안에는 별다른 시설 없이 매트가 깔려 있는 정도였다. 12~36개월 아이들을 대상으로 북스타트 베이비 프로그램을 운영중이었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엄마들이 이용하는 듯했다. 12개월이면 나에겐 갓난쟁이 느낌인데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모유수유실 옆에는 그림책방이 위치했는데, 독특하게도 '책 읽어주는 시니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동네 도서관에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서 이 부분은 독특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책 읽어주는 시니어'는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도서관 이용이 어려운 어린이집 및 제주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분교를 찾아가는 '찾아가는 북스타트'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고. 모든 지역에 도서관을 세울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도서관을 거점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가능하구나 싶었다. 할머니께서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할머니는 대기중.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찾는 부모님들과도 교류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도서관에 북적이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책상에서, '아지트'에서 제각각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장서는 5만 권 정도이고, 넓이도 200평 정도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도서관이었지만, 이런 작은 '기적'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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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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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서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을 묶은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의 두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가 자기 자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는 실체와의 대결이라면 <딸은 딸이다>는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미묘한 갈등을 그려낸다. 현실에서도 모녀관계는 미묘하다. '엄마처럼 살기 싫다'는 식의 레퍼토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꾸준히 나오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엄마처럼 사는 딸도 부지기수다. 앙숙처럼 만날 때마다 싸우는 모녀가 있는가 하면, 친구처럼 지내는 모녀도 있다. 부자, 부녀, 모자 관계와 달리 같은 여자이기에 생기는 공감(또는 연대)이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라는 본문 속의 말처럼 말이다.

  남편을 사별하고 딸 세라와 함께 조용히 살아가는 프렌티스. 당찬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딸이 성장함에 따라 혼자 남겨질 자신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십대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던 중, 세라가 3주간 여행을 떠나고 프렌티스는 그 사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리처드와 사랑에 빠져 재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의외로 세라는 리처드와 앙숙처럼 다투고, 프렌티스는 애인과 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하나뿐인 딸을 선택한다. 자신의 사랑을 희생시킨 프렌티스는 그 일을 계기로 전과 달리 향락적인 삶을 살게 되고, 딸 세라에 대해서도 방임에 가까운 태도로 변한다.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모녀 관계. 이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딸은 딸이다>는 서로를 위한다고 한 행동이 어떻게 모녀 관계를 뒤흔드는가를 보여준다. 엄마의 행복을 위한다면 저 사람은 안 된다고 재혼을 반대하는 딸, 딸과 애인 사이에서 결국 자신을 희생해 재혼을 포기하는 엄마. 어디선가 본 듯한 패턴의 이야기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이런 과오를 저지른 것은 자신을 "진짜 자신보다 더 좋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혈연관계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혹은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린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해줬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다. 여러 선택지 중에 자신이 고른 선택지를 '희생'이라고 포장하며 자위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이들 모녀 또한 그렇다. 엄마의 재혼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에 앙금이 생기지만, 이를 화려한 사교생활을 누리는 것으로 가린 채 서로를 존중한다는 미명 하에 방임에 가까운 태도를 취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딸은 딸이다> 또한 <봄에 나는 없었다>처럼 한 개인의 내적 자각과 맥이 닿는다. 화려한 장막이 거둬진 뒤 드러나는 서로를 향한 진심은 <봄에 나는 없었다>의 그녀가 대면한 자신의 민낯처럼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봄에 나는 없었다>가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어갔다면, <딸은 딸이다>에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게끔 이끌어주는 조언자가 있다. 프렌티스와 세라 모녀를 잘 아는 하녀 이디스, 그리고 세라의 대모이자 유명 심리상담사인 로라가 그런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이 하는 말을 모녀가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의 대화를 읽으며 모녀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했지만, 심리학 이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등 기존 작품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요소가 배치된 점이 흥미로웠다. 미스 마플이 냉소적으로 변하면 저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로라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모녀 간의 감정이라는 미묘한 심리를 풀어가는 전개에 큰 사건은 없었지만, 읽는 내내 긴장하게 됐고, 마지막 장을 읽으며 괜시리 엄마로서의 삶, 딸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등 다양한 위치로 존재하는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는 이야기는 결국 깊은 파장만을 남긴 채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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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라가 3주간 여행을 떠나고 세라는 그 사이 사랑에 빠져 재혼을 결심한다.→ 재혼을 결심하는 건 세라가 아니라 프렌티스 인것 같은데 오타가 난 것 같군요! ㅎㅎ

이매지 2014-05-16 15:38   좋아요 0 | URL
엇, 정말 그러네요 ㅎㅎㅎ 얼른 수정해야징. 캄사!

다락방 2014-05-16 16:00   좋아요 0 | URL
여튼 제 땡투 받으시고 저에게 맥주 쏘시라능!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매지 2014-05-19 16:44   좋아요 0 | URL
멸치똥을 빼는 영광과 함께.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