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드랴프카의 차례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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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키가 착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준비나 사전 조사가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은 논외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준비했는데도 실패하는 일은 물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타인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내가 실패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타인을 용서하듯 나 자신도 어느 지점에선가 용서해야 한다. -27쪽

충분히 즐긴다. 말은 간단해도 실제로는 제법 쉽지 않은 작업이다. 개인의 이해력의 차만 해도 도저히 무시할수 있는 요소가 아닌데, 기호의 차는 더더욱 큰 요인이다. 같은 마술을 봐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마술인지 100분의 1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마술을 보려면 마술사의 눈이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제아무리 풍요로운 오락에 접한들 '마음껏' 즐기는 것은 가능해도 '충분히' 즐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33쪽

나는 아닌 게 아니라 온갖 것을 즐긴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재미있어서 호타로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만큼.-115쪽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 체험이라는 부분을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 왔다. 즐긴다는 행위를 순수하게 제공자와 수령자의 관계로 환원하는 게 내 취향이다. 그렇기에 나는 셜록 홈스 취미건 본초학 취미건 가장 친한 친구(어우, 이렇게 쓰니 엄청 창피한걸. 하지만 실제로 맨 먼저 나오는 이름이니 어쩔 수 없다)인 호타로와도, 저 멋진 마야카와도 같이 즐기려 하지 않는다.
좋아한다든지, 재미있다든지, 즐겁다든지. 그런 것은 꽤 나이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빙를 들자면 마음에 드는 책꽂이 같은 것이다. 참고서면 심심풀이용 소설 등을 꽂아 놓은 대외용 책꽂이라면 또 몰라도 내 방 구석에 있는 책꽂이를 타인에게 보여줄 마음은 없다(마야카가 꼭 봐야겠다면 혹시. 마야카는 그런 소리 안 하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제공자와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조용히 높여 가며 유유히 즐기고 싶다. -115쪽

하지만 명작은 있을 수 있거든.
긴 세월, 많은 감상자. 그런 것에 계속 씻기고 체로 걸러져서 점점 최대 공약수만 남게 돼. 그걸 편의적으로 '명작'이라고 부르는 거야. 안 그래? 최대 공약수란 표현이 마음에 안 들면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라고 바꿔 말해도 돼.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니까. -125쪽

저는 모르는 것을 조사하는 일을 가능합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발견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게 곧 해결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제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가 이상하게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가 이상하게 생가하는 일의 절반도 체험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흙과 물, 볏모를 준비한다고 쌀이 생기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모를 심어 훌륭하게 길러 내는 게 저희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입니다. 오레키 씨는 지금까지 여러 번, 저는 그게 열쇠라는 것조차 알 수 없었던 사실에서 제가 생각지도 못한 답을 이끌어 냈습니다. 후쿠베 씨가 말하는 '빙과' 사건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신세를 졌고, '여제' 사건에서도 멋진 발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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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4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시미즈 레이나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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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배경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교류를 나눈 후에 돌아가거나 혹은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는 역처럼 서점은 책이 마지막으로 당도하는 종착역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시발역이기도 했다. -6쪽

클릭 한 번으로 책은 살 수 있겠지만 그곳에 이야기는 없다. 서점으로 향하는 길목의 풍경, 서점을 가득 채운 공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배려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사소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탐욕스럽게 추구하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점을 찾는지 모른다. -7쪽

책은 물체로서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물리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한계는 있지만, 다시 책을 펼쳐 들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는 특성에 사람들은 매혹되고 만다. 그 한 권에 실려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구체적인 기대감 때문에 사람들은 책을 찾는다. 시간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자.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사는 독자는 책 안에 흐르는 무한한 시간 속으로 자신이 해방되는 감동을 맛볼 것이다. 실제로 책장을 펼쳐 읽다 보면 자신의 인생이 정말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농밀한 시간이 그 속에 흐르고 있다. 그 간극, 유한과 무한이 양립하는 그 부분이 바로 책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후지모토 소우-42쪽

도서관은 장대한 우주체계를 연상하게 하지만 서점은 우주이자 동시에 속세다. 사고파는 사람들의 마음과 취향과 욕망이 공명하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더 나아가 책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갖는 지극히 인간적인 맛이 그래서이다. -히라마츠 요코-77쪽

아름다운 서점에 대해 묻자, 린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볼 테니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세심한 배려, 사람과 책을 위한 공간 구성, 유연한 경영, 세계정세와 지역의 영향에 대한 견해를 갖춘 서점 만들기"라고 했고, 레이머는 "단순한 판매원이 아닌 전문 지식을 갖춘 북러버가 일하는 곳"이라고 했다. 캐린은 "다방면의 책이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어서, 전 세계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린이 자신의 철학을 말했다.
"아름다운 서점이란 독자가 그 책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싶을 만큼 엄선한 책을 진열해야 해요. 열정과 지식을 겸비한 안내원들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책과 독자와의 만남을 돕는,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서점이죠"라고 했다. -108쪽

"저희 북디자이너의 일이란 그런 외견상 아무런 특색 없고 밋밋한 스토리에 형상을 입하는 것입니다. 서점에서 책을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또렷한 첫인상을 새길 수 있게끔 '얼굴'을 디자인해 주는 셈이죠"라고 칩 키드는 설명했다. 뉴욕에서 25년 이상 서적 디자인 작업을 해온 그. "중요한 것은 책 그 자체의 '특별함'을 살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잠재적인 독자, 다시 말해 서점에 발걸음을 한 사람이 읽고 싶은 마음에 손을 저절로 뻗을 수 있게끔 인상적인 표지를 디자인하는 일이죠. 흔한 일반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속임수나 마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123쪽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스토리에 형상을 만드는 것일까? "디자인의 영감은 텍스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단순해 보여도 이것이 제 일의 가장 복잡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원고를 읽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어떤 얼굴을 원하는지 그 대답이 있는 곳으로 텍스트가 저를 이끌어줍니다. 뛰어난 북디자이너는 텍스트 안에 숨겨진 목소리를 충실하게 찾아 듣는 통역사이자, 그 목소리를 디자인이라는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여야 합니다." -123쪽

확실히 그(테세우스 찬)가 디자인한 책은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여행'이 되어, 기억에 남는 '경탄'과 '발견'을 제공하는 장치가 되는 일도 적지 않다.
"훌륭한 북디자인이란 레이아웃이나 이미지,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판형과 구성, 그리고 인쇄 품질까지 다양한 요소를 통해 콘텐츠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는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예기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영감을 얻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중장비, 화학실험, 재봉처럼 언뜻 보기에 서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고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책은 서점 같은 공적인 공간에서도 그 책을 손에 쥔 사람의 모든 신경을 매혹하는 힘을 가진 작품으로 승화하는 겁니다." -125쪽

서점은 여행하는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이다. 출발하기 전에도 그렇고 여행지에서,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그렇다. 떠나기 전에는 지도나 여행안내 책자만 눈에 들어오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소설과 평론까지 읽고 싶어진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독서로 정리하고 싶고, 그 독서를 통해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된다. 이 두 가지의 경험은 실제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눌 수가 없다. 시작은 끝의 일부이며 끝은 시작에 포함되어 있다.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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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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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24쪽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헤매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그런데 그렇지가 않지-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25쪽

지난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녀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만해. 그래봤자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뭔가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뜻이다.
사실일 리 없었다. 그녀가 단순하게 내린 판단이 사실일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로드니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반겼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사실일 리 없었다! -76쪽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현상이라고 자위하기는 쉽지만, 마치 구멍에서 도마뱀이 나오듯 머리에서 기어나오는 수상하고 잡다한 생각들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았다.
조앤은 머나 랜돌프 생각은 뱀 같고, 다른 생각들은 도마뱀 같다고 생각했다.
열린 공간-그리고 상자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전 인생. 허수아비 자식들과 허수아비 하인들과 허수아비 남편.
아니, 조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내 자식들은 분명한 현실이라고.
아이들도 요리사도 아그네스도, 그리고 로드니 역시 현실의 인간이야. 그러면 내가 현실이 아닌 거지. 허수아비 아내. 허수아비 엄마. 조앤은 생각했다.
맙소사. 이것이 더 끔찍했다. 그녀는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고 있었다. 시나 더 외워볼까…… 뭔가 기억해내야만 했다. -103쪽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 아니, 조종하지 못하나? 상황에 따라서는 생각이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나? 도마뱀처럼 구멍에서 밀고나오거나 초록 뱀처럼 마음속을 슥 지나갈 수 있을까.
어디선가 슥 다가와서……
-111쪽

"시골의 변호사는 인간관계의 약한 면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는 사람이야-의사를 제외하면 말이지. 그래서 이 일을 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는 것 같아. 인간이란 원래 나약하고, 두려움과 의심과 탐욕에 약한 존재지. 그런데 가끔은 예기치 않게 이타적이고 용감한 인간을 보게 돼. 어쩌면 변호사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은 폭넓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몰라."-136쪽

"세상에, 로드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에이버릴은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난 그 아이의 엄마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아이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지."-146쪽

"결혼은 두 사람이 맺는 계약이지. 두 사람은 온전한 능력을 갖춘 성인이어야 해. 또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고. 결혼은 동반자 간의 계약 같은 거고. 두 배우자가 그 계약의 조항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곁을 지키겠다고.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좋은 일이 있을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교회에서 말로 약속하고 사제가 승인과 축도를 하짐나 그럼에도 그건 계약이야. 신앙심이 깊은두 사람이 맺는, 여느 합의처럼 계약이라고. 일부 의무 조항들은 법적 강제력이 없지만, 책임을 맡은 두 사람에게는 구속력이 있지. 난 네가 이에 대해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만."-153쪽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참된 진실보다는 유쾌하고 편안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야 자신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몰랐다. -202쪽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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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도 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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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임팩트
에스테반 마르틴.안드레우 카란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예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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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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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1-0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벌써 책을 세권이나 읽으셨다니 대단하시네요.
그나저나 늦었지만 이매지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용^O^

이매지 2014-01-08 09:44   좋아요 0 | URL
세 권 모두 술술 읽히는 책이라서요. ㅎㅎㅎ
올해는 리뷰도 좀 쓰고 그러려고 했는데 벌써 밀리는 분위기.. ㅠㅠ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품절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신기술과 디자인의 혁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상품에 열광할 때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촉촉하게 해주고 즐거운 울림을 일으키는 사물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우리네 일상에 가려진 사물들, 그것들이 오랜 시간 존재하는 이유는 기능이 탁월하다거나 외형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환경과 사물이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마법과도 같은 추억 때문이다. -20쪽

삶의 질이라는 건 조금 더 좋은 공기와 신선하고 풍족한 음식, 깨끗한 잠자리와 같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별것 아닌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도시 한복판에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할 만한 많은 공원은 영국 사회의 큰 장점이다. 건물을 지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넓은 녹지를 조상과 후손 모두가 함께 공유할 자산으로 여긴다. -62쪽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길들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찾고 실천하려는 것이 정원 문화에 담긴 기본 정신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을 위해 수없이 많은 디자인을 생산한 과거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소비되지 않는 디자인을 진정한 디자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가꾸어온 정원처럼 장기간 꾸준한 소비를 이끌 수 있는 디자인이다. 논에 보이는 것만이 디자인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환경을 지속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곧 내가 만들고 사용한 디자인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한 것처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69쪽

옛것의 가치를 재탐색하고 확장 가능성을 연구해 쓸모를 생산하는 것은 런던 디자인 특유의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과거의 유산이 투영되지 않은 미래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77쪽

테이트 모던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업체 헤르조그 앤 드 메롱은 기존 건물의 외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내부 공간을 미술관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당시에는 수많은 혹평이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유물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해석하고 대중 문화와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테이트 모던을 이루는 특화된 콘텐츠는 그 가치를 배가시킨다. 전체 일곱 개 층 중에서 네 개 층이 전시관으로, 1층의 넓은 터빈 홀은 매 시즌마다 미술을 통해 직접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 공간으로 활용된다. 애니시캐푸어나 미로슬라브 발카와 같은 설치 미술 대가들의 작품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미술은 어렵다거나 조용히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86쪽

사실 박물관에 가면 전시된 것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꼭 봐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이런 생각이 작품을 향한 개인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박물관을 멀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왠지 관람 시간 종료 전까지 머릿속에 꾹꾹 채워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브이앤에이가 행한 프로젝트처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박물관의 체제를 개선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변화를 모색하는 데 디자인을 활용하려는 생각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학술적이고 엄숙하던 박물관이 문화 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향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참여는 박물관의 진화를 시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약간의 여지만을 만들 뿐이다. 누군가가 과거를 되짚어볼 수 있는 여지,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여지, 편히 생각할 수 있는 여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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