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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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흔한 살이 되자 한 사람의 미래가 통째로 걸린 일이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인생은 사람들이 막연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탄력적이고 유연했다.
전쟁중에 구급요원으로 봉사하면서 앤은 처음으로 인생의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가벼운 시샘과 질투, 소소한 기쁨, 목에 쓸리는 옷깃, 꽉 끼는 구두를 신은 동상 걸린 발, 이 모든 것이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보다 훨씬 즉각적으로 중요했다. 사람들은 엄숙하고 저항하기 힘든 사실에는 아주 빨리 익숙해졌고, 사소한 것들에 연연했다. -16쪽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독특한 모순에 대해서도 얼마쯤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다운 독단에 빠져 사람을 흔히 '착하다' 또는 '나쁘다'로만 평가했지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됐다. -16쪽

진실을 부정하지 마. 요람에서 무덤까지 같이 갈 동반자는 세상에 딱 하나,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지. 그 동반자와 사이좋게 지내야 해. 자신과 사는 법을 배워. 그게 답이야.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21쪽

"다 큰 딸에게 결혼한다는 말을 할 때는 누구나 바보 같다고 느껴요."
"사실 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젊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제 그런 일과는 무관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우린 늙은이예요. 그들은 사랑을-사랑에 빠지는 것을-청춘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요. 중년이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는 건 그들에게 우스꽝스러운 일일 뿐이에요."
"우스꽝스러울 거 하나 없어." 리처드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우리에게야 그렇죠, 우린 중년이니까."-90쪽

케이크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 남에게 어떻게 만들라고 말하기가 언제나 더 쉬운 법이죠. 그 편이 한결 재밌기도 하고. 하지만 인성에는 해로워요. 내가 매일 점점 더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어간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요.-134쪽

일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때 쓰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로라는 말하곤 했다. 또 거짓 없이 겸손과 만족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진정한 조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했다. -172쪽

"희생이 어려운 건 일단 시작되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계속해서……"
앤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로라?"
"아무것도. 잘 있어, 앤. 그리고 이 말 한마디만 명심해, 심리학자로서 하는 말이니까. 생각할 시간이 없을 쩡도로 살지는 마."-211쪽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늙어가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이제 중년이고 미모도 사그라지고, 앞으로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런, 이 친구야!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앤에겐 튼튼한 몸과 괜찮은 머리가 있어. 중년이 될 때까지는 신경쓸 시간조차 없는 일이 정말 많아. 전에도 내가 말했을 거야. 책을 읽고, 꽃을 가꾸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햇볕을 쬐는 일…… 이 모든 것이 패턴으로 복잡하게 얽힌 걸 우린 인생이라고 하지."-250쪽

"희생이라니! 얼어 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보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252쪽

"우리 인생 고민거리의 절반은 자신을 진짜 자신보다 더 좋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생기지."-252쪽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280쪽

"내가 봐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고결한 인간인지 자기가 한 일에 무슨 도덕적인 이유가 있는지 떠들어대는 일, 또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꼐속해서 후회하는 일이야. 양쪽 말 다 사실이겠지, 자기 행동의 진실을 깨닫는 거라는 점에서는. 그래야 하는 거고. 하지만 그랬으면 넘어가야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어. 계속 살아가야지."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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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베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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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이래 내게 진정으로 해를 끼친 것은 역시 인간이었으며 진정으로 내게 공포감을 느끼게 한 것도 역시 인간이었다. -10쪽

애당초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대로 "이 세상에 들짐승이나 귀신, 요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단순히 알아들었으나, 지금에 와서야 나는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제아무리 사나운 맹수나 귀신, 요괴라 하더라도 이성과 지혜를 상실하고 양심을 저버린 인간보다는 더 무섭지 않으리라고. 이 세상에는 호랑이, 늑대, 이리 같은 맹수에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분명 있고, 또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이나 요괴에 대한 전설도 분명 있기는 있다. 그러나 수천수만의 인간을 비명에 죽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며, 수천수만의 인간을 학대받게 만드는 것도 역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잔혹한 행위를 합법화시키는 것이 암흑 정치요, 이런 잔혹한 행위를 포상하고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병든 사회다. -11~2쪽

우리는 눈짓을 교환했다. 도무지 구제할 약이 없는 이 위대한 시인에게 감탄해마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들 이렇게 치정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 치정에 얽매일 줄 모른다면, 위대한 예술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86쪽

자전거 살 돈이 없는 터라, 우선 대대본부에서 차용했다. 국가에서 경영하는 공급판매합작사에서 면포를 살 수 있는 배급표 두 장을 나눠주었을 때, 아버지는 내 어머니에게 한 장을 남겨주어 모슬린 천 바지 한 벌을 지어 입혔다. 돈이 없으니까 또 우선 대대본부에서 빌려 썼다. 내 어머니는 그래도 이 점이 걱정스러워 내 아버지한테 말했다. "이러다가는 인민 군중들이 반발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내 아버지가 말했다. "혁명이란 누가 뭐래도 좋은 점이 있어야지. 좋은 점이 없다면 누가 혁명 따위를 하겠어? 마오 주석께서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지. 절대평등주의에 반대하려면 장교가 말을 탈 때 사병도 말을 타야 하는데, 타고 다닐 마필이 어디 그렇게나 많겠는가? 누구나 평등하게 말 한 필을 탄다 하더라도 역시 장교가 타는 게 좋을 것이다……"-144~5쪽

"너희들 바깥에 나가서 해야 할 말은 하고 웃고 싶으면 마음대로 웃어도 좋아. 하지만 가슴속에 묻어둔 일일랑 남한테 드러내 보이면 안 되는 거야. 사람이란, 아무 일도 엇었을 때에는 담보가 커선 안 되지만, 일단 무슨 일이 눈앞에 닥쳤을 때에는 겁쟁이가 되어서도 안 돼. 남들이 아직 널더러 뭐라고 하지 않는데 자기부터 지레짐작으로 먼저 오그라들고 맥이 빠져서야 되겠니. 너희들, 모두 허리 쭉 펴고 떳떳이 다녀야 해. 속담에 '적이 쳐들어오면 장수를 내보내 막고, 홍수가 나면 흙더미로 막아야 한다'고 했어. 이런 세상에서는 넘어가지 못할 산도 있고 건너지 못할 강물도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지 못할 세월은 없는 법이야!" -195쪽

이 세상에서 남자의 인성을 검증할 가장 좋은 사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색, 두번째가 바로 미식입니다. 미색에는 그래도 저항할 사람이 있겠지만 미식에만큼은 저항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사람은 몇 해 동안 여인을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를 사흘 남짓 굶긴 다음, 그 눈앞에 맛있는 과자를 두어 개쯤, 그리고 고깃국 한 대접을 놓고, 그더러 개 짖는 소리를 한 번 흉내 내야만 먹을 수 있다. 개 소리를 내지 않겠다면 못 먹는다고 조건을 달았을 때, 내가 보기에 배겨날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233~4쪽

하긴 세상만사 어느 것이든 곰곰이 따져보면 이상야릇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철두철미하게 따져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생각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245~6쪽

우리 같은 세대에 살아온 사람들은 눈물을 너무나 많이 봐왔어! 눈물 짜낸 얼굴 뒤편에 거짓과 위선이 있고 진정과 성실도 있긴 하지만, 역시 더 많은 것이 위선과 거짓이야! 모스크바는 애당초 눈물 따위 믿지 않으니까, 솔직히 네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라!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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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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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셜록 홈스로 추리소설에 입문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접한 소설가는 코넌 도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넌 도일의 작품은 셜록 홈스 시리즈 외에 출간된 게 없다시피 했고, 셜록 홈스 시리즈마저도 몇 번 읽다보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셜록 홈스에게서 시작된 실타래는 이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나를 길고 긴 미스터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렇게 닿은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였다. 거의 20년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은 아직도 완독을 못 했지만, 애거사 크리스티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처럼 늘 든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봄에 나는 없었다>가 뒤늦게 깜짝 선물처럼 찾아왔다. 처음에는 왜 필명으로 발표를 한 걸까 의아했지만 책을 읽으며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봄에 나는 없었다>에는 지금까지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조앤 스쿠다모어라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막내딸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바그다드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조앤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블란치와 마주친다. 천박하고 끔찍하게 늙어버린 블란치는 조앤에게 그녀의 가족에 대한 갸우뚱한 몇 마디를 던지고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남긴다. 블란치의 말처럼 며칠 뒤 조앤은 날씨 때문에 사막의 기차역 숙소에 발이 묶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진다.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기억이 파편이 떠올라 조앤을 할퀴고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 살인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기발한 트릭들이 등장한다. 독자를 속이고, 독자를 즐겁게 하는 그녀의 '기술'은 언제 어떤 작품을 읽어도 평타 이상의 솜씨를 뽐낸다. 하지만 내가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매료됐던 것은 그런 '기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기교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면서도 냉소가 아닌 따뜻한(때로는 담담한) 시선을 보내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이상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여느 추리소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지만 이런 통찰만큼은 여전했다. 

  <봄에 나는 없었다>에는 어떤 잔혹한(또는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는 실체와의 대결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인 고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한 여자가 등장할 뿐이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에 도망치고 싶고, 외면해버리고 싶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기에 <봄에 나는 없었다>는 더 오싹하다. 상대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만 신경쓰지 않았는가? 새로운 나로 다시 한번 시작해보고 싶지 않은가? 어쩌면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런 식의 숱한 자문 끝에 내린 결론을 <봄에 나는 없었다>로 담아낸 것이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조앤이 그러했듯이 마음속 가장 여린 부분을 찔러대는 조각난 상처를 그러모아 애써 살아가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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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부르는 향기 - 과학으로 풀어보는 후각의 비밀
레이첼 허즈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3년 6월
품절


후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위해 후각 없는 삶이 어떠할지 한번 상상해보자. 후각을 잃어버린 후각상실증 환자에게는 모든 것이 바뀐다. 후각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후각을 잃으면 자신과 남들을 알아보는 능력에 장애가 생기고, 우리의 정서적 삶이 교란되며, 음식을 즐기지도 못하고 건강이 나빠질뿐더러 성욕마저 잃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갖기에 최적인 짝을 알아보는 능력도 심각하게 손상된다. 그런데 냄새 맡는 능력을 잃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후각을 잃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여깅 대해 의사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드물게 보일 뿐이다. -15쪽

냄새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감정 자체가 될 수도 있다. 내 연구에 따르면, 기억은 연상 작용을 통해 감정 자체로 변용되어 감정의 대리인이 되며,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는 이를 냄새-감정 조건화라 부른다. 실험실에서 우리는 좌절의 감정과 낯선 냄새를 결부시키면 나중에 그 냄새를 통해 좌절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29~30쪽

냄새를 접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좋다 또는 나쁘다 하는 평가다. 좋은 냄새가 나면 가까이 접근하고 나쁜 냄새가 나면 피한다. 감정도 이와 비슷한 단순한 메시지를 전한다. 기쁨과 관심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감정은 다가가서 손으 내밀고 증식하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그래서 우리가 성공적으로 후손을 만들고 살아남게 한다. 분노나 두려움, 역겨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도망치건 싸우라는 메시지를 전해 우리의 생존을 돕는다. 결국 우리의 감정이 나타내는 접근과 회피의 규약은 냄새가 동물들에게 전하는 것과 같다. -32쪽

아이들이 같은 문화권에 사는 어른과 비슷한 냄새 선호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은 대략 여덟 살부터다. 유아들이 냄새에 대해 선천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자료는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신 유아나 아이가 어떤 냄새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경험 때문이라는 증거가 많다. 다시 말해서 학습이 냄새 선호를 만들며, 이런 학습은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51쪽

냄새에 대해 우리가 원래부터 타고나는 반응이 있다면 그것은 신중함이다. 유아와 어린아이들은 주위의 어른들이 냄새를 좋다고 판단하든 혐오스럽다고 여기든 상관없이 낯선 냄새를 맡으면 하나같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불확실한 것을 만날 때 불편해하는 것은 적응적인 가치가 있다. 이런 조심스러운 성향이 없었다면 선조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의 냄새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은 냄새에 대한 특정한 개인의 사연과 문화적 역사,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거기에 부여하는 성격과 의미 때문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없다. 생각이 그런 냄새를 만드는 것이다. -70쪽

나는 정확성과 세밀함, 생생함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냄새로 인한 기억이 보거나 듣거나 만지는 경험을 통해 유도된 기억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지만 그보다 낫지도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냄새가 자극한 기억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독보적이엇다. 감정 면에서 탁월했던 것이다. 감각 자극 중에서 냄새가 기억을 유도할 때 우리는 가장 많은 감정을 열거했고, 감정이 가장 강렬하다고 보고했으며, 마치 그 옛날 그 장소에 다시 돌아간 것만 같다고 했다. 또한 나는 향수 냄새로 기억이 자극될 때, 그저 향수 병을 만지거나 보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는 향수 냄새를 맡을 때보다 우리 뇌에서 감정을 관장하는 부위인 편도체가 한층 더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감정이 유도하는 기억은 다른 유형의 기억 경험과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마음과 뇌에 독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85쪽

향기가 날조될 수 있고 그 향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냄새가 없는데도 누군가가 냄새에 대해 하는 말을 우리가 믿는다는 사실은 놀랍게 보인다. 다른 감각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금 방 안에 흰 코끼리가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갑자기 그것이 여러분 눈에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거짓 향기에는 놀라울 만큼 쉽게 속아 넘어간다. -115~6쪽

유전자와 체취, 매력의 관계는 왕성한 생산력과 건강한 아이라는 생물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지며, 현대 사회에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뒤엉켜 있다. 먼저, 남자들은 향수를 뿌림으로써 '거짓 광고'를 할 수 있다. 그리고 피임약을 복용한 여자들은 자신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그래서 물학적으로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냄새를 선호한다. -154쪽

자연과 인공의 구별이 얼마나 허구인지 보여주기 위해 나는 모종의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에게 다양한 냄새를 맡게 한 다음 자연 향인지 인공 향인지 추측하게 하거나, 아니면 실제가 어떻든 간에 자연 향이라고 또는 인공 향이라고 말해주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거나 그렇게 들었거나 상관없이, 자연 향이라고 믿은 사람은 같은 향을 인공 향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더 좋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어떤 향기를 두고 인공 향인지 자연 향인지 추측하게 하자 이들이 알아맞힐 확률은 동전던지기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렇듯 자연과 인공의 구별은 우리의 마음속, 우리의 미적 판단에 달린 문제다. -214쪽

후각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그 소중함을 미처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다. 나는 사라들이 후각을 잃어 벼저린 교훈을 얻지 않고도 이 책을 통해 후각의 소중함을 깨닫고 여기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후각이 위의 인간다움에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냄새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이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풍부해짐을 알게 된다면 삶의 의미도 그만큼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냄새를 통해 스스로를 알고 남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나눈다. 후각은 학습과 기억력의 증진에 도움을 주며 우리의 행동을 바꾼다. 우리는 후각을 통해 강렬한 정서적 삶을 영위하고, 기억을 되새기며, 정신 건강을 누리고, 열정을 불사른다. 후각은 심지어 우리가 누구와 함께 아이를 갖는 것이 좋은가 하는 생물학적 조언도 해준다. 멋진 용모의 사람이 냄새 때문에 매력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반대로 평범한 사람이 냄새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후각은 실로 욕망의 감각이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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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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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는, 선장이 그렇게 겁에 질려 버리면서부터 내 인생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우연히 경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17~8쪽

내가 왜 나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왜 이것들을 택해 썼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며 잃어버린 그 아름다운 날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78쪽

어쩌면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이러한 사고방식과 그의 인생을 나의 것으로 만들 거라는 사실을 내가 미리 감지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쓰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가 글을 쓰는 스타일과 모습에는 내가 좋아하고 또 배우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훗날 온전히 받아들인 만큼 좋아해야 한다. 물론 나는 지금 이 인생을 좋아한다. -81쪽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듯,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본질을 볼 수 있다고. -84쪽

우리는 성을 바라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빛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 색이었다. 새하앟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는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어두운 숲 속의 구불거리는 길로, 언덕 위에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 황급히 뛰어가면 그곳에 참가하고 싶은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길은 도저히 끝이 나지 않는다. 어두운 숲과 산자락 사이에 있는 평지에는 늘 넘쳐나곤 하는 시냇물이 만들어 놓은 더러운 늪이 있다는 것을, 그 늪을 넘은 보병과 포병의 엄호에도 불구하고 비탈길을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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