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 동안의 제주도 자전거+도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밤 비행기라 시간은 넉넉하게 남았는데 우산도 없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어디 갈 데 없을까' 하고 폭풍 검색을 해보니 '제주시 기적의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 걸 발견했다. 오래전 MBC <느낌표>에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건 알았지만, 텔레비전에서만 봤을 뿐 실제로 가본 적은 없어서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말하는 건축가>를 보고 고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물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터라 겸사겸사 찾았다.   




지도를 보고 가만가만 따라가보니 제주시청 주변인데도 번화가라는 느낌보다는 평범한 주택가 같았다. 서울에서 흔히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높은 건물이 눈에 띄지 않아 '이쪽이 아닌가' 하며 두리번두리번 걷다 보니 '제주시 기적의 도서관' 현판이 보였다. 고만고만한 단층집과 연립주택이 이어진 곳에 그리 튀지 않게 조성된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도서관보다는 작은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작고 아담해서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밝은 색 페인트가 아이들의 마음을 부르는 공간. 조금씩 비가 흩날리는 날씨였지만 도서관 앞에서 아이들이 익숙한 듯 삼삼오오 뛰놀고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신발 벗는 곳이 보인다. 그 옆에 "기적의 도서관은 이런 곳입니다" 하는 소개가 붙어 있었다. 어린이 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일은 중요하다. 책을 학교에서 과제 때문에 억지로 읽어야 하는 것, 공부 때문에 억지로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로 대해야 자라나서도 책을 놀이 대상으로, 지식을 쌓는 도구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책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지방에 사는 아이들은 서점에서 책을 읽기도, 도서관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 몇몇 지방 도시에 세워진 '기적의 도서관'은 그 접근을 어느 정도나마 가능케 했기에 '작은 기적'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잠시 여담이지만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장갑을 벗고 3시간 남짓 자전거를 탔더니 손등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따가워서 견딜 수 없었는데, 도무지 약국이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에야 겨우 열상화상연고를 살 수 있었다. 인구 분포를 생각하면 약국이나 병원, 도서관 같은 시설이 부족한 것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손을 놓기에는 안타까웠다.



들어서면 보이는 열람실. 비 오늘 주말이었지만 그리 붐비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수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에는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책의 보존, 관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은 어둡고 형광등 불빛이 강하다는 인상이었는데,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시원스레 뚫린 통창으로 자연광이 쏟아졌다. 흐린 날이었는데도 바깥의 초록 풍경과 빛이 어우러져 그리 어둡지 않게 느껴졌다.

탁 트인 열람실뿐 아니라 움푹 패인 공간에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아지트'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도서관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사서데스크. 이 공간은 여느 도서관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자동반납대 같은 전자화 설비도 갖춰져 있었다.



화장실 옆쪽으로는 자그마하게 북까페가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이 도서관이지만 아이들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데려 온 부모님, 동네 어르신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정기간행물이나 신문 역시 이곳에 구비되어 있어 차를 마시며 읽을 수 있는 공간. 이곳 역시 탁 트인 창이 바깥 풍경과 이어졌다. 내려가는 계단은 아이들에게 맞춰져 적당한 높이로 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구연동화 같은 행사도 가능할 듯했다.





서가에 꽂힌 책들. 신간도서는 따로 서가가 마련되어 있었고, 다른 책들은 그림책, 읽기책이 여느 도서관처럼 십진분류로 정리되어 있었다. 꽂힌 책을 보니 손때가 탄 책이 많아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이용하구나 싶었다.
 




어린이 책과 별도로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서가도 있었다. 이쪽도 전체적으로 책이 낡은 느낌. 어린이 도서관이다보니 청소년, 성인용 도서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어린이책 서가는 아이들의 키높이에 맞췄다면 이쪽은 책장도 조금 더 높아 이용자의 성향에 맞춰 서가 배치도 구분되어 있는 듯했다. 베스트셀러, 세계문학전집, 청소년 소설, 실용서 등이 적당히 구색을 갖춰진 듯.




구름빵으로 장식(?)된 모유수유방. 이때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불이 꺼져 있었는데, 안에는 별다른 시설 없이 매트가 깔려 있는 정도였다. 12~36개월 아이들을 대상으로 북스타트 베이비 프로그램을 운영중이었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엄마들이 이용하는 듯했다. 12개월이면 나에겐 갓난쟁이 느낌인데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모유수유실 옆에는 그림책방이 위치했는데, 독특하게도 '책 읽어주는 시니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동네 도서관에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서 이 부분은 독특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책 읽어주는 시니어'는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도서관 이용이 어려운 어린이집 및 제주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분교를 찾아가는 '찾아가는 북스타트'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고. 모든 지역에 도서관을 세울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도서관을 거점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가능하구나 싶었다. 할머니께서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할머니는 대기중.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찾는 부모님들과도 교류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도서관에 북적이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책상에서, '아지트'에서 제각각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장서는 5만 권 정도이고, 넓이도 200평 정도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도서관이었지만, 이런 작은 '기적'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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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애거서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을 묶은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의 두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가 자기 자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는 실체와의 대결이라면 <딸은 딸이다>는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미묘한 갈등을 그려낸다. 현실에서도 모녀관계는 미묘하다. '엄마처럼 살기 싫다'는 식의 레퍼토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꾸준히 나오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엄마처럼 사는 딸도 부지기수다. 앙숙처럼 만날 때마다 싸우는 모녀가 있는가 하면, 친구처럼 지내는 모녀도 있다. 부자, 부녀, 모자 관계와 달리 같은 여자이기에 생기는 공감(또는 연대)이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라는 본문 속의 말처럼 말이다.

  남편을 사별하고 딸 세라와 함께 조용히 살아가는 프렌티스. 당찬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딸이 성장함에 따라 혼자 남겨질 자신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십대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던 중, 세라가 3주간 여행을 떠나고 프렌티스는 그 사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리처드와 사랑에 빠져 재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의외로 세라는 리처드와 앙숙처럼 다투고, 프렌티스는 애인과 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하나뿐인 딸을 선택한다. 자신의 사랑을 희생시킨 프렌티스는 그 일을 계기로 전과 달리 향락적인 삶을 살게 되고, 딸 세라에 대해서도 방임에 가까운 태도로 변한다.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모녀 관계. 이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딸은 딸이다>는 서로를 위한다고 한 행동이 어떻게 모녀 관계를 뒤흔드는가를 보여준다. 엄마의 행복을 위한다면 저 사람은 안 된다고 재혼을 반대하는 딸, 딸과 애인 사이에서 결국 자신을 희생해 재혼을 포기하는 엄마. 어디선가 본 듯한 패턴의 이야기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이런 과오를 저지른 것은 자신을 "진짜 자신보다 더 좋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혈연관계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혹은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린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해줬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다. 여러 선택지 중에 자신이 고른 선택지를 '희생'이라고 포장하며 자위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이들 모녀 또한 그렇다. 엄마의 재혼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에 앙금이 생기지만, 이를 화려한 사교생활을 누리는 것으로 가린 채 서로를 존중한다는 미명 하에 방임에 가까운 태도를 취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딸은 딸이다> 또한 <봄에 나는 없었다>처럼 한 개인의 내적 자각과 맥이 닿는다. 화려한 장막이 거둬진 뒤 드러나는 서로를 향한 진심은 <봄에 나는 없었다>의 그녀가 대면한 자신의 민낯처럼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봄에 나는 없었다>가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어갔다면, <딸은 딸이다>에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게끔 이끌어주는 조언자가 있다. 프렌티스와 세라 모녀를 잘 아는 하녀 이디스, 그리고 세라의 대모이자 유명 심리상담사인 로라가 그런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이 하는 말을 모녀가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의 대화를 읽으며 모녀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했지만, 심리학 이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등 기존 작품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요소가 배치된 점이 흥미로웠다. 미스 마플이 냉소적으로 변하면 저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로라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모녀 간의 감정이라는 미묘한 심리를 풀어가는 전개에 큰 사건은 없었지만, 읽는 내내 긴장하게 됐고, 마지막 장을 읽으며 괜시리 엄마로서의 삶, 딸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등 다양한 위치로 존재하는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는 이야기는 결국 깊은 파장만을 남긴 채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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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라가 3주간 여행을 떠나고 세라는 그 사이 사랑에 빠져 재혼을 결심한다.→ 재혼을 결심하는 건 세라가 아니라 프렌티스 인것 같은데 오타가 난 것 같군요! ㅎㅎ

이매지 2014-05-16 15:38   좋아요 0 | URL
엇, 정말 그러네요 ㅎㅎㅎ 얼른 수정해야징. 캄사!

다락방 2014-05-16 16:00   좋아요 0 | URL
여튼 제 땡투 받으시고 저에게 맥주 쏘시라능!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매지 2014-05-19 16:44   좋아요 0 | URL
멸치똥을 빼는 영광과 함께. ㅋㅋㅋ
 
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구판절판


하지만 마흔한 살이 되자 한 사람의 미래가 통째로 걸린 일이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인생은 사람들이 막연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탄력적이고 유연했다.
전쟁중에 구급요원으로 봉사하면서 앤은 처음으로 인생의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가벼운 시샘과 질투, 소소한 기쁨, 목에 쓸리는 옷깃, 꽉 끼는 구두를 신은 동상 걸린 발, 이 모든 것이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보다 훨씬 즉각적으로 중요했다. 사람들은 엄숙하고 저항하기 힘든 사실에는 아주 빨리 익숙해졌고, 사소한 것들에 연연했다. -16쪽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독특한 모순에 대해서도 얼마쯤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다운 독단에 빠져 사람을 흔히 '착하다' 또는 '나쁘다'로만 평가했지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됐다. -16쪽

진실을 부정하지 마. 요람에서 무덤까지 같이 갈 동반자는 세상에 딱 하나,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지. 그 동반자와 사이좋게 지내야 해. 자신과 사는 법을 배워. 그게 답이야.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21쪽

"다 큰 딸에게 결혼한다는 말을 할 때는 누구나 바보 같다고 느껴요."
"사실 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젊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제 그런 일과는 무관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우린 늙은이예요. 그들은 사랑을-사랑에 빠지는 것을-청춘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요. 중년이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는 건 그들에게 우스꽝스러운 일일 뿐이에요."
"우스꽝스러울 거 하나 없어." 리처드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우리에게야 그렇죠, 우린 중년이니까."-90쪽

케이크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 남에게 어떻게 만들라고 말하기가 언제나 더 쉬운 법이죠. 그 편이 한결 재밌기도 하고. 하지만 인성에는 해로워요. 내가 매일 점점 더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어간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요.-134쪽

일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때 쓰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로라는 말하곤 했다. 또 거짓 없이 겸손과 만족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진정한 조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했다. -172쪽

"희생이 어려운 건 일단 시작되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계속해서……"
앤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로라?"
"아무것도. 잘 있어, 앤. 그리고 이 말 한마디만 명심해, 심리학자로서 하는 말이니까. 생각할 시간이 없을 쩡도로 살지는 마."-211쪽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늙어가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이제 중년이고 미모도 사그라지고, 앞으로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런, 이 친구야!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앤에겐 튼튼한 몸과 괜찮은 머리가 있어. 중년이 될 때까지는 신경쓸 시간조차 없는 일이 정말 많아. 전에도 내가 말했을 거야. 책을 읽고, 꽃을 가꾸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햇볕을 쬐는 일…… 이 모든 것이 패턴으로 복잡하게 얽힌 걸 우린 인생이라고 하지."-250쪽

"희생이라니! 얼어 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보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252쪽

"우리 인생 고민거리의 절반은 자신을 진짜 자신보다 더 좋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생기지."-252쪽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280쪽

"내가 봐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고결한 인간인지 자기가 한 일에 무슨 도덕적인 이유가 있는지 떠들어대는 일, 또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꼐속해서 후회하는 일이야. 양쪽 말 다 사실이겠지, 자기 행동의 진실을 깨닫는 거라는 점에서는. 그래야 하는 거고. 하지만 그랬으면 넘어가야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어. 계속 살아가야지."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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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베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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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이래 내게 진정으로 해를 끼친 것은 역시 인간이었으며 진정으로 내게 공포감을 느끼게 한 것도 역시 인간이었다. -10쪽

애당초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대로 "이 세상에 들짐승이나 귀신, 요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단순히 알아들었으나, 지금에 와서야 나는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제아무리 사나운 맹수나 귀신, 요괴라 하더라도 이성과 지혜를 상실하고 양심을 저버린 인간보다는 더 무섭지 않으리라고. 이 세상에는 호랑이, 늑대, 이리 같은 맹수에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분명 있고, 또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이나 요괴에 대한 전설도 분명 있기는 있다. 그러나 수천수만의 인간을 비명에 죽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며, 수천수만의 인간을 학대받게 만드는 것도 역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잔혹한 행위를 합법화시키는 것이 암흑 정치요, 이런 잔혹한 행위를 포상하고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병든 사회다. -11~2쪽

우리는 눈짓을 교환했다. 도무지 구제할 약이 없는 이 위대한 시인에게 감탄해마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들 이렇게 치정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 치정에 얽매일 줄 모른다면, 위대한 예술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86쪽

자전거 살 돈이 없는 터라, 우선 대대본부에서 차용했다. 국가에서 경영하는 공급판매합작사에서 면포를 살 수 있는 배급표 두 장을 나눠주었을 때, 아버지는 내 어머니에게 한 장을 남겨주어 모슬린 천 바지 한 벌을 지어 입혔다. 돈이 없으니까 또 우선 대대본부에서 빌려 썼다. 내 어머니는 그래도 이 점이 걱정스러워 내 아버지한테 말했다. "이러다가는 인민 군중들이 반발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내 아버지가 말했다. "혁명이란 누가 뭐래도 좋은 점이 있어야지. 좋은 점이 없다면 누가 혁명 따위를 하겠어? 마오 주석께서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지. 절대평등주의에 반대하려면 장교가 말을 탈 때 사병도 말을 타야 하는데, 타고 다닐 마필이 어디 그렇게나 많겠는가? 누구나 평등하게 말 한 필을 탄다 하더라도 역시 장교가 타는 게 좋을 것이다……"-144~5쪽

"너희들 바깥에 나가서 해야 할 말은 하고 웃고 싶으면 마음대로 웃어도 좋아. 하지만 가슴속에 묻어둔 일일랑 남한테 드러내 보이면 안 되는 거야. 사람이란, 아무 일도 엇었을 때에는 담보가 커선 안 되지만, 일단 무슨 일이 눈앞에 닥쳤을 때에는 겁쟁이가 되어서도 안 돼. 남들이 아직 널더러 뭐라고 하지 않는데 자기부터 지레짐작으로 먼저 오그라들고 맥이 빠져서야 되겠니. 너희들, 모두 허리 쭉 펴고 떳떳이 다녀야 해. 속담에 '적이 쳐들어오면 장수를 내보내 막고, 홍수가 나면 흙더미로 막아야 한다'고 했어. 이런 세상에서는 넘어가지 못할 산도 있고 건너지 못할 강물도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지 못할 세월은 없는 법이야!" -195쪽

이 세상에서 남자의 인성을 검증할 가장 좋은 사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색, 두번째가 바로 미식입니다. 미색에는 그래도 저항할 사람이 있겠지만 미식에만큼은 저항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사람은 몇 해 동안 여인을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를 사흘 남짓 굶긴 다음, 그 눈앞에 맛있는 과자를 두어 개쯤, 그리고 고깃국 한 대접을 놓고, 그더러 개 짖는 소리를 한 번 흉내 내야만 먹을 수 있다. 개 소리를 내지 않겠다면 못 먹는다고 조건을 달았을 때, 내가 보기에 배겨날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233~4쪽

하긴 세상만사 어느 것이든 곰곰이 따져보면 이상야릇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철두철미하게 따져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생각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245~6쪽

우리 같은 세대에 살아온 사람들은 눈물을 너무나 많이 봐왔어! 눈물 짜낸 얼굴 뒤편에 거짓과 위선이 있고 진정과 성실도 있긴 하지만, 역시 더 많은 것이 위선과 거짓이야! 모스크바는 애당초 눈물 따위 믿지 않으니까, 솔직히 네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라!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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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셜록 홈스로 추리소설에 입문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접한 소설가는 코넌 도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넌 도일의 작품은 셜록 홈스 시리즈 외에 출간된 게 없다시피 했고, 셜록 홈스 시리즈마저도 몇 번 읽다보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셜록 홈스에게서 시작된 실타래는 이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나를 길고 긴 미스터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렇게 닿은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였다. 거의 20년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은 아직도 완독을 못 했지만, 애거사 크리스티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처럼 늘 든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봄에 나는 없었다>가 뒤늦게 깜짝 선물처럼 찾아왔다. 처음에는 왜 필명으로 발표를 한 걸까 의아했지만 책을 읽으며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봄에 나는 없었다>에는 지금까지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조앤 스쿠다모어라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막내딸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바그다드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조앤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블란치와 마주친다. 천박하고 끔찍하게 늙어버린 블란치는 조앤에게 그녀의 가족에 대한 갸우뚱한 몇 마디를 던지고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남긴다. 블란치의 말처럼 며칠 뒤 조앤은 날씨 때문에 사막의 기차역 숙소에 발이 묶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진다.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기억이 파편이 떠올라 조앤을 할퀴고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 살인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기발한 트릭들이 등장한다. 독자를 속이고, 독자를 즐겁게 하는 그녀의 '기술'은 언제 어떤 작품을 읽어도 평타 이상의 솜씨를 뽐낸다. 하지만 내가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매료됐던 것은 그런 '기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기교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면서도 냉소가 아닌 따뜻한(때로는 담담한) 시선을 보내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이상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여느 추리소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지만 이런 통찰만큼은 여전했다. 

  <봄에 나는 없었다>에는 어떤 잔혹한(또는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는 실체와의 대결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인 고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한 여자가 등장할 뿐이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에 도망치고 싶고, 외면해버리고 싶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기에 <봄에 나는 없었다>는 더 오싹하다. 상대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만 신경쓰지 않았는가? 새로운 나로 다시 한번 시작해보고 싶지 않은가? 어쩌면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런 식의 숱한 자문 끝에 내린 결론을 <봄에 나는 없었다>로 담아낸 것이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조앤이 그러했듯이 마음속 가장 여린 부분을 찔러대는 조각난 상처를 그러모아 애써 살아가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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