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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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조선시대 생활사라는 교양과목에서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 대해서 배우던 중에, 내가 알고 있던 과거시험과 달리 과거시험에는 최종적으로 뽑힌 33명의 인재들이 임금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여 그에 따른 순위를 매기는 책문이라는 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뭐 그렇게 슬쩍 수업시간에 배웠던 책문이 책으로 나왔음을 알고 과연 어떤 질문과 답변들이 오갔을지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혼란의 혼란 속으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늘어나는 실업율과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환율, 그리고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 등등. 이러한 시점에서 이 책은 어떻게 보면 현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면도 없지않아 있다. 책 속에 들어있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에 대한 책문들은 현실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정벌과 화친에 대해서 낸 선조의 책문에 대해서 박광전은 정벌은 힘, 화친은 형세에 달려있다고 하여 그에 따른 방법을 제시해주며, 또,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에 대한 세종의 책문에 대해서 강희맹은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여 쓰는 것을 대책으로 내놓는 등 이 책 속에 있는 내용들은 작게는 한 회사를 다스리는 사람들부터, 크게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조직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봐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물론, 나와같은 정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읽어도 좋지만...

 책을 읽으면서 신기했던 점 중에 하나는 책문에 대한 대책의 형식에는 어느정도 일정한 양식이 갖추어져있었다는 것이다. 임금은 자신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데, 그에 대한 대답을 함에 있어서 "저는 참으로 꽉 막혀 식견이 없습니다. (중략) 제가 비록 그 때문에 분수를 모르는 망령된 자라는 죄를 얻는다 해도 회한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 "제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어찌 모호하게 대답해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사람, "저는 임금님의 위엄을 무릅쓰고 감격을 이기지 못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라고 하는 사람 등등, 제각각 형식은 다르지만 자신의 학문을 낮추며 대답을 하는 것이다. 뭐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자신을 높일까 -_-) 사람마다 제각각 그 양식 속에서 대답하는 게 다른 것은 재미있게 다가왔다.

 책의 구성이 '책문-대책-책문속으로'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우선 임금의 책문을 보고, 신하의 대책을 보고, 작가가 쓴 당시 시대상이라던지 임금이나 신하에 대한 내용을 읽게 되어서 이해가 쉬웠다. 책문 속으로가 가장 앞에 나왔어도 시대와 인물에 대한 이해를 한 뒤에 책문과 대책을 보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간에 책의 내용도 진지한 내용이라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책이었고, 책도 제법 두꺼워서 (주석부분을 뺀다고 해도 411장가량) 읽는데 시간은 제법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 책을 읽고 진지하게 책문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0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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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8-3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거 보셨네요. 전 재밌었어요. 이거 네이버 책 오늘 올라갔어욤.

이매지 2006-08-3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2004년에 본건데 네이버 책에 올라온거 보고 알라딘 리뷰를 찾아보니까 없길래 이제서야 올렸어요^^ 재미있게 봤는데 본 지 오래되서 기억은 가물가물^^;
 
가로세로 세계사 1 : 발칸반도 - 강인한 민족들의 땅 가로세로 세계사 1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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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며 낯선 세계에 대해 호기심과 지식을 쌓았던 지라 이번에 이원복 교수님이 새로 출간하신 <가로세로 세계사>에도 저절로 관심이 갔다. 내가 읽은 <먼나라 이웃나라>는 벌써 나온지 10년도 넘은 책이라 새로나온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를 먼저 읽을까하다가 어차피 연관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미국과 일본이 발칸반도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아 뒤로 미뤄두고 우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부제로 달린 '발칸반도, 강인한 민족들의 땅'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발칸반도에 대해서 쓰고 있다. 하지만 <가로세로 세계사>시리즈의 첫 권이기때문인지 민족이 뭔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개념부터 시작한 뒤, 이후 발칸반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발칸반도라고 하면 어디를 뜻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한다. 이원복 교수님이 지적한바대로 우리는 그동안 강자의 역사를 배워왔기에 상대적으로 약자인 다른 국가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발칸반도가 어디냐고 물으면 모를지라도 코소보사태, 유고전쟁을 뉴스에서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뉴스로 접한 지역이 바로 발칸반도다.

  발칸반도는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 동남쪽으로 튀어나온 삼각형 모양의 반도로 유럽과 아시아대륙이 만나는 곳이고, 러시아와 같은 추운 나라와 무더운 아프리카 대륙의 중간에 위치하여 대륙의 힘센 자들이 동으로, 서로 나아갈 때나 러시아가 지중해에 항구를 얻기 위해 나갈 때, 영국이 중동을 침략하려고 할 때 반드시 거치는 곳이다. 이런 지리적인 특성으로만 봐도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는 곳이나, 외세에 시달리다보니 다른 민족에 대해서 배타적이게 되고 자신의 민족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해 인접한 국가들 간에, 혹은 한 국가안에서도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내세워 전쟁을 하곤 한다. 즉, 이 지역은 종교문제, 영토문제, 자존심문제까지 충돌해 화약고 같은 지역인 것.

  이런 복잡하고 자존심강한 지역에 대해 이어가는 설명을 읽다보니 물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알게되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기껏 강대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신들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지만 독재정권이 이어지는 것이나 같은 민족끼리도 종교때문에 영토때문에 피를 흘리는 모습때문에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이런 점들을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함도 있겠지만 그런 교훈을 얻느라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것 같아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기존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약자의 관점에서의 역사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좋은 안내서가 되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들이 보면 나름의 세계사에 대해 공정한 시각을 갖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대학생 이상의 성인들이 보기에도 알찬 내용인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지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중국, 몽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동아시아의 역사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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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0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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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여자아이라면 한 번쯤 읽어봤음직한 고전. <제인에어> 어린 시절,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읽어서인지 아니면 자매가 쓴 작품이기때문인지 내용적인 면에서는 늘 <폭풍의 언덕>과 헷갈려왔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제인 에어>를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 뒷표지에 쓰여진 로맨스 소설의 고전이라는 이름답게 이 책은 '제인 에어'라는 한 여자가 풀어놓는 자신의 삶,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회상해서 그 당시의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에 '제인 에어'라는 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꽤 긴 분량의 압박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모가 죽고, 자신을 맡아준 외삼촌까지 죽자 제인에어는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외숙모의 손에 길러진다. 하지만 가족도 그렇다고 하녀도 아닌 제인에어의 위치, 제인에어의 성격때문에 외숙모는 그녀를 싫어하고 우연찮은 기회에 그녀를 자선학교로 쫓아버린다. 외숙모에게서 벗어난다는 기쁨도 잠시. 제인 에어가 도착한 자선학교는 말만 학교지 시설은 너무도 열악한 곳이었다(이후 학교의 이런 모습이 알려지면서 개선은 되지만). 그 곳에서 6년 간 학생으로, 2년간 선생으로 있었던 제인 에어는 평온함이 주는 불편함을 느끼고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정교사의 자리를 구하고 로체스터의 집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고 그녀의 인생에도 봄날이 찾아오는가 싶었는데...

  책을 읽기 전에는 <폭풍의 언덕>과 겹쳐졌던 책은 정작 손에 잡고 읽으면서는 <오만과 편견>을 떠오르게 했다. 이름은 있지만 알고보면 별 볼일없는 베넷가의 엘리자베스와 그럴싸한 집안은 커녕 부모도, 친척도 없는 제인은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첫째로, 둘 다 그 시대 여성으로는 보기드물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게 그의 오만함을 지적했다면,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대놓고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어찌보면 결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녀들은 오히려 그 점이 매력으로 자리한다. 둘째로, 둘 다 사랑을 중요시 여긴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도 제인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아도 조건만 보고 결혼하는 모습을 그들은 씁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이 외에 두 여성 모두 지적이라는 점 등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지만 제인 에어가 갖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활용되는 것 같다. 사랑은 역시 시대를 초대한 소재랄까. 나이가 들면서, 혹은 시대가 바뀌면서 점점 순수한 사랑을 하기는 힘들어지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제인에어처럼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하고싶어하는 욕구가 숨어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2권으로되서 길기는 하지만 어렵지 않고 고전치고는 말랑말랑한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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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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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꽤 많이 들어온 제목이라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작품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끔씩 뉴스에서 접하는 소식들. 그러니까 잘나가던 회사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자신의 일을 팽개치고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능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가 이 책 속에는 들어있다. 너무도 평범해서 그에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할 이유조차 없어보였던 증권 중개인인 스트릭랜드. 그는 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팽개치고 떠나버린다. 처음엔 다른 여자가 생겨서 도망간 줄 알았던 아내는 이 책의 화자에게 그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정작 찾아간 그는 '여자들이란 사랑밖에는 몰라'와 같은 표현을 하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자 집을 떠났고 추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얼핏 봤을 때는 평범해보였지만 알고보니 냉소에 가득차고,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곤 전혀 없는 그의 모습. 화자는 그를 역겹게 생각했지만 계속하여 그와 엮여 사람들에게 그에 얽인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표지에도 나왔듯이 이 책은 고갱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꼭 고갱의 삶의 모습을 알아야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고갱의 그림 몇 점과 그가 타이히에서 작품활동을 했다는 점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기때문이다. 물론 고갱의 삶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 속에 등장한 스트릭랜드와 고갱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트릭랜드의 모습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재미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아니 사회 속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다가 아예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어려움에 부딪힌다. 주위의 시선, 주위의 비난, 이런 곱지 않은 시선들을 받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실행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내 좌절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이 책 속에 주인공인 스트릭랜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던 사람이기에 거리낌없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갔고, 아브라함이란 장래가 유망한 의사는 본국에 있었더라면 큰 병원의 최고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우연히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다가 결국 그 곳에서 눌러살게 된다.(이를 두고 본국에서 그의 그늘 뒤에만 머물러 있던 다른 의사는 결국 아브라함의 자리를 꿰차고는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어"라고 말하며 그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렇듯 비교적 자신이 원하는대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있다면 또 한 편에서는 블란치는 스트릭랜드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그를 따라가지만 결국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들도 있다.

  책의 제목인 <달과 6펜스>에 대해서는 '달=예술가의 광기, 6펜스=현실적인 문제'로 대비되는 느낌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굳이 이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해도 독자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책 속에서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그림을 팔면 최소한의 먹고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보이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는 남에게 보이는 그림, 남에게 팔 그림이 아닌 자신의 혼이 이끄는 그림을 그리기때문이었다. 겨우겨우 그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사람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려나가고(물론, 그는 그들에게 별로 고마워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하루하루 그냥그냥 먹고 살아갈 뿐이다.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혼을 불살라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달'을 지향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아 부르는 게 값이 되버리자 그가 버렸던 스트릭랜드 부인은 마치 자신과 남편의 관계를 보기좋게 포장하여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을 얻어낸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 '달'만 지향했던 그가 죽고 난 뒤 '6펜스'의 영역에 들어가버리는 것은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어서 묘한 기분을 안겨줬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런 일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고.

  스트릭랜드의 관점에서 글을 쓴게 아니라 그의 일화들을 지켜본 제 3자가 글을 썼기에 여러모로 스트릭랜드의 내면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스트릭랜드라는 독특한 인물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봄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와 얽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까지 풀어가고 있기에 어떻게 보면 다소 산만해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스트릭랜드의 삶과 대비되어 있기에 스트릭랜드란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나 싶었다. 읽기에 어려운 책은 아니었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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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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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릭랜드 부인이 왜 남편을 두고 난처하게 여기는지 알 만했다. 예술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여자에게 그는 분명 자랑거리는 되지 못했다. 사교에는 재능이 없음이 분명했다. 하기야 남자는 그런 재능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남자에게 보통 사람들과 구별될 만한 어떤 괴팍함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선량하고 따분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높은 인품을 존경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무도 그를 사귀려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중개인일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34쪽

그들은 서서히 늙어갈 것이며, 아들과 딸은 성년이 되어 때가 되면 결혼하게 될 것이다. 한쪽은 예쁜 아가씨로 자라 장차 건강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고, 한쪽은 잘생기고 사내다운 남자로 자라 틀림없이 군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풍족한 가운데 품위 있게 은퇴하여 자식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생활을 마음껏 누리다가 무덤에 묻힐 것이다.
하기야 수많은 부부들이 다 이런 식으로 산다. 이런 유형의 삶의 방식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삶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이윽고 드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36쪽

특이한 말투나 기이한 버릇을 강조하면 그들의 특색을 잘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낡은 융단 벽걸이의 무늬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이 배경과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은 탓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니 무늬가 어슴푸레해져 그저 하나의 멋진 색깔로만 보이는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런 정도였다고나 할까.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로서 그 안에서 그것에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이게 마련인데 그들 역시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마치 몸 안의 세포들 같았다. 필수적인 요소이면서 건강한 상태에서는 더 중요한 전체 유기체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37쪽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56쪽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폭하게 왔다고나 할까. -75쪽

나는 남들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허세이다. 그것은 남들이 자신의 조그만 잘못들을 비난할 때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들은 아무도 그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76쪽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77쪽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네. 나야 어릿광대 아닌가. 여자의 사랑을 받을 만한 위인은 못 되네. 나도 그걸 알고 있어. 그러니 스트릭랜드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탓할 수야 없지. -151쪽

난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네.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 -152쪽

사랑의 감정에는 다정함이란 요소가 있게 마련 아닌가. 하지만 스트릭랜드에게는 자신이든 남이든, 도대체 다정하게 대한다는 게 없었다. 사랑에는 또한 약한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 잘해 주고 싶고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이기심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걸 몹시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겸양이 존재한다. 스트릭랜드에게서는 그런 성향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리게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 머리로는 알지 모르나-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159쪽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 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 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 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191~2쪽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 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욋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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