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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어린 시절 꽤 많이 들어온 제목이라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작품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끔씩 뉴스에서 접하는 소식들. 그러니까 잘나가던 회사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자신의 일을 팽개치고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능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가 이 책 속에는 들어있다. 너무도 평범해서 그에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할 이유조차 없어보였던 증권 중개인인 스트릭랜드. 그는 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팽개치고 떠나버린다. 처음엔 다른 여자가 생겨서 도망간 줄 알았던 아내는 이 책의 화자에게 그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정작 찾아간 그는 '여자들이란 사랑밖에는 몰라'와 같은 표현을 하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자 집을 떠났고 추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얼핏 봤을 때는 평범해보였지만 알고보니 냉소에 가득차고,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곤 전혀 없는 그의 모습. 화자는 그를 역겹게 생각했지만 계속하여 그와 엮여 사람들에게 그에 얽인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표지에도 나왔듯이 이 책은 고갱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꼭 고갱의 삶의 모습을 알아야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고갱의 그림 몇 점과 그가 타이히에서 작품활동을 했다는 점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기때문이다. 물론 고갱의 삶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 속에 등장한 스트릭랜드와 고갱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트릭랜드의 모습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재미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아니 사회 속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다가 아예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어려움에 부딪힌다. 주위의 시선, 주위의 비난, 이런 곱지 않은 시선들을 받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실행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내 좌절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이 책 속에 주인공인 스트릭랜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던 사람이기에 거리낌없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갔고, 아브라함이란 장래가 유망한 의사는 본국에 있었더라면 큰 병원의 최고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우연히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다가 결국 그 곳에서 눌러살게 된다.(이를 두고 본국에서 그의 그늘 뒤에만 머물러 있던 다른 의사는 결국 아브라함의 자리를 꿰차고는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어"라고 말하며 그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렇듯 비교적 자신이 원하는대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있다면 또 한 편에서는 블란치는 스트릭랜드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그를 따라가지만 결국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들도 있다.
책의 제목인 <달과 6펜스>에 대해서는 '달=예술가의 광기, 6펜스=현실적인 문제'로 대비되는 느낌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굳이 이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해도 독자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책 속에서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그림을 팔면 최소한의 먹고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보이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는 남에게 보이는 그림, 남에게 팔 그림이 아닌 자신의 혼이 이끄는 그림을 그리기때문이었다. 겨우겨우 그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사람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려나가고(물론, 그는 그들에게 별로 고마워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하루하루 그냥그냥 먹고 살아갈 뿐이다.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혼을 불살라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달'을 지향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아 부르는 게 값이 되버리자 그가 버렸던 스트릭랜드 부인은 마치 자신과 남편의 관계를 보기좋게 포장하여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을 얻어낸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 '달'만 지향했던 그가 죽고 난 뒤 '6펜스'의 영역에 들어가버리는 것은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어서 묘한 기분을 안겨줬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런 일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고.
스트릭랜드의 관점에서 글을 쓴게 아니라 그의 일화들을 지켜본 제 3자가 글을 썼기에 여러모로 스트릭랜드의 내면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스트릭랜드라는 독특한 인물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봄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와 얽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까지 풀어가고 있기에 어떻게 보면 다소 산만해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스트릭랜드의 삶과 대비되어 있기에 스트릭랜드란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나 싶었다. 읽기에 어려운 책은 아니었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