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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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13쪽

곰곰이 생각해 봐도 신기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는 심오한 비밀을 간직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 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두려운 어떤 것, 심지어 죽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나는 애지중지하는 책을 펼칠 수도 없고 끝까지 읽겠다는 희망도 품지 않는다. -25쪽

내 친구도 죽고, 내 이웃도 죽고,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도 죽는다. 죽음은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변함없이 공고화하고 영속화한다. 나 역시 내 비밀을 죽는 날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내가 지나가는 이 도시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나 자신도 이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25~6쪽

때가 오고 있었다. 또다시 포도주가 거리의 자갈 틈으로 쏟아지고, 그 흔적이 그곳의 많은 사람을 붉게 물들일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탕투안, 그 성스러운 얼굴 뒤로 어슴푸레한 빛은 자취를 감추고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그 성스러운 존재를 시중드는 추위와 더러움과 무지와 빈곤은 마치 대단한 권세를 지닌 귀족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는데 그중에서 빈곤이 가장 그러했다. 늙은이를 젊은이로 바꿔주는 마법의 맷돌은 분명히 아닌 맷돌 속에서 끔찍하게 갈리고 또 갈린 적이 있는 몇몇은 모퉁이에서 떨었다. 그들은 모든 집을 들락날락했고, 창문으로 낡은 옷자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을 갈았던 맷돌은 젊은이를 늙은이로 만들어주는 맷돌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찌들었고 목소리에는 근심이 배었으며 그들의 얼굴에나 어른들의 얼굴에나 세월의 고랑이 파였고, 새로 생긴 고랑은 굶주림의 표시였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49쪽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별들의 아치 아래-학자들이 말하기를 어떤 별은 이 작은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고통받고 죽어가는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우리를 비추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밤 그림자는 커다랗고 시커멨다. 새벽이 오기 전 춥고 불안한 시간 동안 유령들은 또다시 자르비스 로리의 귀에 대고 예전 질문을 속삭였다. 로리는 묻혀 있다가 파내어진 지 얼마 안 된 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서 섬세한 감각이 사라졌는지, 회복될 수는 있을지 궁금해하던 터였다.
"되살아나고 싶은가?"
대답은 그때와 같았다.
"잘 모르겠소."-74~5쪽

"나는 말이오, 무엇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을 잊고 싶다오. 이렇게술을 마실 때가 아니면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거든. 하긴 세상도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겠지. 우리는 특히 그 점에서 아주 다르오. 솔직히 난, 당신과 나, 우리가 어떤 점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오."-121쪽

기력은 모두 소진되었고 사방은 황량했다. 남자는 조용한 언덕을 가로질러 가만히 멈춰 서 있다 문득 앞에 펼쳐진 황무지에서 명예에 대한 야망과 자기부정, 불굴의 의지 같은 신기루를 보았다. 그 공평한 도시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중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는 상상 속의 화랑이 있고, 탐스럽게 익은 삶의 열매가 열린 밭이 있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희망의 샘이 잇었다. 하지만 그 순간뿐, 환상은 사라져버렸다. (중략) 슬프고 슬프게도 태양은 떠올랐다. 햇빛이 비친 광경에서 무엇이 그 남자의 일생보다 더 슬프겠는가.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132~3쪽

나리에게는 일반 국사에 관해 참으로 고결한 생각이 한 가지 있었으니 모든 것이 저절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수한 공무에 관해서도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반드시그에게, 이를테면 그의 권력과 주머니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이든 특수하든 자신의 만족에 대해 또하나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온 세상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계급의 성스러운 경전은 (많이도 아니고 원본에서 대명사만 살짝 바꿨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리께서 이르시되, 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라."-152쪽

"오래 걸리지요." 아내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 있나요? 특히 복수와 응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자연법칙이에요."
"번개가 사람을 내려칠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그 번개가 만들어져 저장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죠? 말해 봐요."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드파르주는 아내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진이 도시를 집어삼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부인이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지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죠?"
"아마도 오래 걸리겠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하짐나 준비가 끝나고 실행에 옮겨지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리죠.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을 편히 가져요. 흔들리지 말고."-255~6쪽

죄수라고 하면 치욕스러운 범죄나 부정을 연상했던 신참 죄수는 감옥의 사람들을 보고 놀라서 멈칫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내내 느꼈던 비현실감은 온갖 세련된 매너와, 몸에 밴 예절과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을 맞는 수감자들을 보는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의 세련된 태도는 음침한 감옥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유령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찰스 다네이가 죽음의 무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유령, 위엄 넘치는 유령, 우아한 유령, 자부심 넘치는 유령, 천박한 유령, 위트 있는 유령, 젊은 유령, 늙은 유령할 것 없이 모두 황량한 해안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왔다 죽어 나간 사람들을 목격한 다음 바뀐 눈빛으로 멍하니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샤를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옆에 서 있는 간수라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간수들의 모습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들, 활짝 핀 젊고 고혹적인 딸들, 젊은 미인, 점잖고 성숙한 여인과 너무도 터무니없이 대비되어 보였다. 이런 환영은 모든 경험과 가능성이 전도된 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365~6쪽

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 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 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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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아가씨 - 근현대 여성 공간의 탄생
김미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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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 우연찮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된 '명동 이야기'를 관람하면서 새삼 한동안 빠져 지냈던 <명동백작>이 떠올랐다. 2004년 EBS에서 방영된 <명동백작>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를 비롯해 박인환, 김수영, 전혜린 등등 당시 명동에서 교류하던 문인들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꼬꼬마 국문학도였던 나는 <명동백작> 덕분에 한국현대문학에 관심이 생겨 이 책 저 책 뒤적여보기도 했었다. 전시회를 본 뒤 <명동백작>이나 다시보기로 볼까 하다가 여느 때처럼 밍기적거리다가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명동에 대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바로 <명동 아가씨>. '명동'이라는 키워드에 쇼윈도를 바라보는 아가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라는 서두처럼 이 책은 <명동백작>과는 다른 관점에서 명동을 바라본다. <명동백작>에서의 명동은 다방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공간이었다면 <명동 아가씨>에서의 명동은 양장점, 미장원 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소비공간이었다. 저자는 당시 명동을 기반으로 생활한 이들의 구술 채록과 신문, 잡지 자료 등을 통해 명동이 "여성들에게 소비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공간이자 문화의 공간"이었음을 드러내고 나아가 명동을 매개로 "한국의 소비문화사를 이해하는 단초"(14쪽)를 제공한다. 


  명동이 소비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남산골 진고개에 공사관을 세우고 이 일대를 독점적인 거류지로 정한다. 이후 이곳에 통감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며 이 일대는 "일본과 서양에서 들어온 낯설고 신기한 외래문화의 집합지"이자 "일종의 기호품이자 취미와 유행이 반영된 소비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환락과 허영의 거리"로 거듭난다. 심지어 신문기사에서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라고 소개할 만큼 명동은 일제시대 이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이 유행의 공간 명동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생활한 것일까? 백화점을 비롯해, 100곳이 넘는 양장점과 미용실이 명동에 있었다. 하지만 명동은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양장과 미용을 비롯해 타이핑, 편물, 기계자수 등 여성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고등기술학교가 자리해 "전후 여성들이 기술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거나 교육 시설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다방, 제과점, 식당 등에서는 친구나 애인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되었고, 극장 등에서 문화도 향유했다. 요컨대 명동은 점차적으로 여성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공간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장소이자 자신의 세계를 정립해가고 자립할 수 있는 장소로 변화해갔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근대 여성의 이미지가 정립되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역시 그 당시의 기록이다. 특히 여성들의 거리 패션을 지적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여학생의 모습으로 걸음걸이가 낙제"라는 둥, "완전히 품위를 잊어버린 옷이다. 지나칠 정도의 노출도 자기의 체격을 봐서 해야 할 텐데, 이 옷의 노출은 체격의 결점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식으로 거침없이 날리는 독설에 나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이런 기사 외에도 당시 명동을 경험한 이들의 녹취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한국전쟁 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선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급변해버린 명동의 과거 모습을 살피는 것도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어도 새삼스러웠다. 다만 논문을 토대로 단행본 체제에 맞게 새롭게 작업한 책이라 그런지 조금 쉽게 풀어 쓴 논문을 읽는 듯 딱딱한 부분이 있었고, 수록된 몇몇 사진의 망점이 심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다소간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 나아가 한국이라는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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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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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선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스터리로 꼽히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그런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기껏 해야 일본어 중역판이나 요약본 정도가 나왔던 터라 '유명한 작품이라니 읽기는 읽는데 이거 어쩐지 손에 안 붙는데…' 하며 내가 작품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것인지 원래 그냥 그런 작품인 건지 영 헷갈렸었다. 그러던 차에 엘릭시르에서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를 론칭하면서 『환상의 여인』을 새롭게 번역해 선보여 이번에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구나 기대를 안고 다시 읽었다. 엘릭시르판 『환상의 여인』을 읽기 전만 해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환상의 여인』 하면 '오렌지색 모자'만 떠올랐을 뿐 딱히 어떤 인상이 남지 않았고, 수작이라는데 왜 그런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새 옷을 입고 나온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샌가 점점 이야기에 몰입해 '그 여자'를 찾기 위한 피 말리는 조사에 합류하게 됐다.  


  『환상의 여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내와 다툰 스콧 헨더슨이란 남자가 무작정 거리로 나와 아내에게 홧김에 얘기한 것처럼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아내와 예약해둔 데이트 코스를 즐긴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고, 그는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 여자뿐. 하지만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심지어는 신체적 특징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녀가 쓴 오렌지색 모자만이 떠오를 뿐이다. 경찰과 변호사 등은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나 그를 봤다는 사람들은 있으나 그와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증언은 나오지 않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무고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을 선도받은 스콧 헨더슨. 그는 담당 형사의 조언을 듣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절친에게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생사가 오직 한 여자의 손에 걸려 있는 상황. 하지만 헨더슨의 절친 존 롬바드와 헨더슨의 애인 캐럴 리치먼이 '환상의 여인'의 흔적을 더듬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결정적 증언을 해줄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은 살인일까 단순한 사고일까? 사형 집행 전까지 과연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환상의 여인』은 본격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허술하다. 그래도 몇 시간이나 함께 있었던 여자에 대해 오렌지색 모자를 썼다는 사실 말고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야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주요 증인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것이나 사형선고 받아놓고 한참 손놓고 있다가 날짜가 임박해져서야 해외에 파견근무 나간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도 '읭?!'스럽다. 하지만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여인』은 매력적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허점 때문에 매력적인 건지도 모른다. '환상'의 여인이라는 제목답게 어딘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존재도 그렇지만 주인공 헨더슨도 도무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 사랑에 대한 환영을 쫓을 뿐 도무지 현실감각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답답한 인물인데, 그 점이 이 책에서는 되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현실감이 있는 것은 헨더슨의 죽은 아내의 웃음 소리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건 자체도,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도 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긴가 싶지만 그러면서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어느샌가 이야기에 빠져버린다. "초심자를 위한 추리소설 No.1"이라는 띠지문구처럼 『환상의 여인』은 단순한 '누가 범인인가'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소설이 아니라 사랑, 질투, 배신 같은 통속드라마 같은 내용에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는 작품이라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반전이 주는 충격은 없지만 그 분위기와 매력만큼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한 책. 세계3대 미스터리라는 과장된 수식어가 아니어도 한번쯤 읽어봄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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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절판


피아노 연주를 계속한다는 건 글렌보다 더 잘해야 된다는 걸 의미했는데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난 피아노를 포기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4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난 스스로에게 말했다, 피아노는 이제 그만. 그러고는 더 이상 악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12쪽

글렌은 베르트하이머를 친애하는 몰락자라는 말로 맞이했다. 북미인답게 냉정했던 그는 베르트하이머를 늘 몰락하는 자라고 불렀고 나한테는 아주 무미건조하게 철학자라고만 했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베르트하이머는 늘 몰락의 와중에 있었는가 하면, 나는 철학자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글렌의 눈에는 우리가 몰락하는 자와 철학자로 보였을 거야, 난 여관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19쪽

모차르테움은 형편없는 학교지만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점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였어, 여관에 들어서면서 난 생각했다. 대학이란 무조건 나쁜 곳이긴 하지만 우리의 눈을 열어주지 못하는 학교는 가장 나쁜 학교다. 얼마나 형편없는 선생들을 겪어내야 하며 그들은 또 우리 머리를 얼마나 망쳐놓았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예술을 쫓아내는 자들이었고 예술 파괴자이며 정신의 살해자, 대학생들을 파멸시키는 자들이었다. 호로비츠는 예외였고 마르케비치와 베그도 예외였어, 난 생각했다. 하지만 호로비츠 한 사람이 일류 아카데미를 만드는 건 아니다. -20~1쪽

글렌은 몰락하는 자라는 말이나 개념을 아주 좋아했는데, 지그문트 하프너 골목 거리에서 글렌이 그 말을 만들어내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비슷한 것을 여러 번 눈치챘기 때문에 글렌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베르트하이머와 글렌과 나, 우리 모두가 병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 예술주의라니! 이런 생각을 했다. 맙소사, 얼마나 미친 짓이야!-34쪽

베르트하이머처럼 자기 친척을 지독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묘사만으로 깔아뭉갤 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 증오했던 그는 자신이 불행한 건 그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 순전히 가족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책망했으며, 가족이 자신을 이처럼 끔찍한 실존이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넣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기계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저항은 소용없어, 라고 그는 늘 말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실존기계 속으로 던져 넣으면 아버지가 아이를 부지런히 토막 내는 그 기계를 평생 가동시켜온 것이라 했다. 부모들은 자기네가 바로 불행이고 그 불행을 자식에게 대물림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아이를 잔인하게 실존기계 속에 던져 넣지, 라던 베르트하이머의 말을 생각하며 여관 식당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45쪽

자살을 못 한 이유는 끊임없는 내 호기심 때문이야,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부친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친은 우리를 세상 속에 내던졌기 때문에, 그리고 여동생은 우리가 겪는 불행의 산증인이기 때문에 용서 못 하는 거야. 존재한다는 건 돌려 말하면 이런 거잖아, 우리는 절망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이렇게 말했다. 눈을 뜨면 나 자신이 혐오스럽고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자려고 누우면 죽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소원밖에 없는데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된 지 벌써 50년이 됐어, 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했다. 50년 동안 오직 죽기만을 바랐지만 아직도 살아 있고, 그걸 어떻게든 바꿔볼 수 없는 건 순전히 우리에게 철두철미한 일관성이 없어서라고 생각해보면 말이야, 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했다. 그건 우리가 비참함과 비열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음악에 재능이 없어서야! 사는 데 소질이 없어서라구!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살 능력조차 없으면서, 살아 있을 능력조차 안 되면서 거만이나 떨면서 음악 공부를 하다니! -49쪽

우리는 누군가를 친구라고 믿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잖아,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어, 사실이 그렇다고, 라고 그는 말했다. -49~50쪽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공부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생각했다. 오로지 생각만 하고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세계를 관조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지, 난 생각했다. -52쪽

흔적을 남기면 안 돼, 베르트하이머가 곧잘 하던 말이다. 친구가 죽으면 우리는 그 친구가 잘 쓰던 표현이나 발언으로 그를 못 박고 친구가 즐겨 사용했던 무기로 그 친구를 죽인다. 살아 있을 때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건넸던 말 속에서 계속 살아남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친구가 한 말로 그 친구를 죽일 수도 있다. 친구가 했던 말이나 기록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친구에 대해서!) 아주 가차 없이 굴지, 그리고 만약 기록이 없다면, 그러니까 친구가 예방 조치로 기록을 미리 없애버려서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친구가 했던 말로 그를 파멸시키지, 난 생각했다. -56쪽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끌렸는데, 그 사람들에게 끌렸다기보다는 그들의 불행에 이끌렸던 셈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한테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바로 불행이야,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야, 라고 베르트하이머가 곧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불행한 일이야, 살아 있는 동안 불행은 지속되고 죽음만이 그걸 그치게 할 수 있어,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불행하다는 얘기는 아니야, 행복도 불행을 전제로 하니까, 불행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행복할 수 있잖아,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65쪽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들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언제나 모방자였어, 자기보다 여건이 유리하다 싶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따라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기본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꼭 예술가이길 바랐기 때문에 재앙을 자초한 거야, 난 생각했다. 그의 불안,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걷고 또 걷고, 뛰고 또 뛰었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야, 난 생각했다. -92쪽

글렌은 행복한 사람이야, 나는 불행한 사람이고, 라고 그는 곧잘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불행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글렌이 행복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대꾸했다. 이런저런 사람이 불행하다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행복하다는 건 절대 맞는 말이 아니야, 난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의 눈에는 글렌 굴드가 항상 행복한 인간으로 보였고 나도 그렇게 보였다는 건 그에게서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지, 난 생각했다. 자기를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겼던 베르트하이머는 늘 나보고 행복하겠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불행하기 위해, 자기가 말하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고 난 생각했다. -99쪽

우리는 머리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하며 자기 입장에서만 그들을 대하지, 난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만 그들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 거야, 사람들을 대할 때, 아무런 선입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지, 난 생각했다. -127쪽

사람은 신경 쓰이는 일을 잠깐 피해보겠다고 다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당하게 행동하지, 불편한 대면을 피하겠다고 말이야, 난 생각했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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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탕 선녀님 그림책이 참 좋아 7
백희나 지음 / 책읽는곰 / 201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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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지와 함께 한 장수탕 나들이. 선녀 할머니도, 덕지도 너무 귀여워요.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 깔깔대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라 아쉬웠어요. 언제 만나도 좋은 백희나표 그림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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