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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아가씨 - 근현대 여성 공간의 탄생
김미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8월
평점 :
올해 초 우연찮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된 '명동 이야기'를 관람하면서 새삼 한동안 빠져 지냈던 <명동백작>이 떠올랐다. 2004년 EBS에서 방영된 <명동백작>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를 비롯해 박인환, 김수영, 전혜린 등등 당시 명동에서 교류하던 문인들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꼬꼬마 국문학도였던 나는 <명동백작> 덕분에 한국현대문학에 관심이 생겨 이 책 저 책 뒤적여보기도 했었다. 전시회를 본 뒤 <명동백작>이나 다시보기로 볼까 하다가 여느 때처럼 밍기적거리다가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명동에 대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바로 <명동 아가씨>. '명동'이라는 키워드에 쇼윈도를 바라보는 아가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라는 서두처럼 이 책은 <명동백작>과는 다른 관점에서 명동을 바라본다. <명동백작>에서의 명동은 다방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공간이었다면 <명동 아가씨>에서의 명동은 양장점, 미장원 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소비공간이었다. 저자는 당시 명동을 기반으로 생활한 이들의 구술 채록과 신문, 잡지 자료 등을 통해 명동이 "여성들에게 소비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공간이자 문화의 공간"이었음을 드러내고 나아가 명동을 매개로 "한국의 소비문화사를 이해하는 단초"(14쪽)를 제공한다.
명동이 소비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남산골 진고개에 공사관을 세우고 이 일대를 독점적인 거류지로 정한다. 이후 이곳에 통감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며 이 일대는 "일본과 서양에서 들어온 낯설고 신기한 외래문화의 집합지"이자 "일종의 기호품이자 취미와 유행이 반영된 소비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환락과 허영의 거리"로 거듭난다. 심지어 신문기사에서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라고 소개할 만큼 명동은 일제시대 이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이 유행의 공간 명동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생활한 것일까? 백화점을 비롯해, 100곳이 넘는 양장점과 미용실이 명동에 있었다. 하지만 명동은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양장과 미용을 비롯해 타이핑, 편물, 기계자수 등 여성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고등기술학교가 자리해 "전후 여성들이 기술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거나 교육 시설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다방, 제과점, 식당 등에서는 친구나 애인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되었고, 극장 등에서 문화도 향유했다. 요컨대 명동은 점차적으로 여성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공간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장소이자 자신의 세계를 정립해가고 자립할 수 있는 장소로 변화해갔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근대 여성의 이미지가 정립되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역시 그 당시의 기록이다. 특히 여성들의 거리 패션을 지적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여학생의 모습으로 걸음걸이가 낙제"라는 둥, "완전히 품위를 잊어버린 옷이다. 지나칠 정도의 노출도 자기의 체격을 봐서 해야 할 텐데, 이 옷의 노출은 체격의 결점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식으로 거침없이 날리는 독설에 나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이런 기사 외에도 당시 명동을 경험한 이들의 녹취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한국전쟁 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선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급변해버린 명동의 과거 모습을 살피는 것도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어도 새삼스러웠다. 다만 논문을 토대로 단행본 체제에 맞게 새롭게 작업한 책이라 그런지 조금 쉽게 풀어 쓴 논문을 읽는 듯 딱딱한 부분이 있었고, 수록된 몇몇 사진의 망점이 심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다소간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 나아가 한국이라는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