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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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13쪽

곰곰이 생각해 봐도 신기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는 심오한 비밀을 간직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 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두려운 어떤 것, 심지어 죽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나는 애지중지하는 책을 펼칠 수도 없고 끝까지 읽겠다는 희망도 품지 않는다. -25쪽

내 친구도 죽고, 내 이웃도 죽고,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도 죽는다. 죽음은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변함없이 공고화하고 영속화한다. 나 역시 내 비밀을 죽는 날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내가 지나가는 이 도시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나 자신도 이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25~6쪽

때가 오고 있었다. 또다시 포도주가 거리의 자갈 틈으로 쏟아지고, 그 흔적이 그곳의 많은 사람을 붉게 물들일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탕투안, 그 성스러운 얼굴 뒤로 어슴푸레한 빛은 자취를 감추고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그 성스러운 존재를 시중드는 추위와 더러움과 무지와 빈곤은 마치 대단한 권세를 지닌 귀족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는데 그중에서 빈곤이 가장 그러했다. 늙은이를 젊은이로 바꿔주는 마법의 맷돌은 분명히 아닌 맷돌 속에서 끔찍하게 갈리고 또 갈린 적이 있는 몇몇은 모퉁이에서 떨었다. 그들은 모든 집을 들락날락했고, 창문으로 낡은 옷자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을 갈았던 맷돌은 젊은이를 늙은이로 만들어주는 맷돌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찌들었고 목소리에는 근심이 배었으며 그들의 얼굴에나 어른들의 얼굴에나 세월의 고랑이 파였고, 새로 생긴 고랑은 굶주림의 표시였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49쪽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별들의 아치 아래-학자들이 말하기를 어떤 별은 이 작은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고통받고 죽어가는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우리를 비추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밤 그림자는 커다랗고 시커멨다. 새벽이 오기 전 춥고 불안한 시간 동안 유령들은 또다시 자르비스 로리의 귀에 대고 예전 질문을 속삭였다. 로리는 묻혀 있다가 파내어진 지 얼마 안 된 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서 섬세한 감각이 사라졌는지, 회복될 수는 있을지 궁금해하던 터였다.
"되살아나고 싶은가?"
대답은 그때와 같았다.
"잘 모르겠소."-74~5쪽

"나는 말이오, 무엇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을 잊고 싶다오. 이렇게술을 마실 때가 아니면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거든. 하긴 세상도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겠지. 우리는 특히 그 점에서 아주 다르오. 솔직히 난, 당신과 나, 우리가 어떤 점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오."-121쪽

기력은 모두 소진되었고 사방은 황량했다. 남자는 조용한 언덕을 가로질러 가만히 멈춰 서 있다 문득 앞에 펼쳐진 황무지에서 명예에 대한 야망과 자기부정, 불굴의 의지 같은 신기루를 보았다. 그 공평한 도시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중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는 상상 속의 화랑이 있고, 탐스럽게 익은 삶의 열매가 열린 밭이 있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희망의 샘이 잇었다. 하지만 그 순간뿐, 환상은 사라져버렸다. (중략) 슬프고 슬프게도 태양은 떠올랐다. 햇빛이 비친 광경에서 무엇이 그 남자의 일생보다 더 슬프겠는가.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132~3쪽

나리에게는 일반 국사에 관해 참으로 고결한 생각이 한 가지 있었으니 모든 것이 저절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수한 공무에 관해서도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반드시그에게, 이를테면 그의 권력과 주머니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이든 특수하든 자신의 만족에 대해 또하나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온 세상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계급의 성스러운 경전은 (많이도 아니고 원본에서 대명사만 살짝 바꿨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리께서 이르시되, 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라."-152쪽

"오래 걸리지요." 아내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 있나요? 특히 복수와 응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자연법칙이에요."
"번개가 사람을 내려칠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그 번개가 만들어져 저장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죠? 말해 봐요."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드파르주는 아내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진이 도시를 집어삼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부인이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지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죠?"
"아마도 오래 걸리겠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하짐나 준비가 끝나고 실행에 옮겨지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리죠.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을 편히 가져요. 흔들리지 말고."-255~6쪽

죄수라고 하면 치욕스러운 범죄나 부정을 연상했던 신참 죄수는 감옥의 사람들을 보고 놀라서 멈칫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내내 느꼈던 비현실감은 온갖 세련된 매너와, 몸에 밴 예절과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을 맞는 수감자들을 보는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의 세련된 태도는 음침한 감옥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유령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찰스 다네이가 죽음의 무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유령, 위엄 넘치는 유령, 우아한 유령, 자부심 넘치는 유령, 천박한 유령, 위트 있는 유령, 젊은 유령, 늙은 유령할 것 없이 모두 황량한 해안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왔다 죽어 나간 사람들을 목격한 다음 바뀐 눈빛으로 멍하니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샤를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옆에 서 있는 간수라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간수들의 모습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들, 활짝 핀 젊고 고혹적인 딸들, 젊은 미인, 점잖고 성숙한 여인과 너무도 터무니없이 대비되어 보였다. 이런 환영은 모든 경험과 가능성이 전도된 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365~6쪽

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 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 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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