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절판


피아노 연주를 계속한다는 건 글렌보다 더 잘해야 된다는 걸 의미했는데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난 피아노를 포기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4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난 스스로에게 말했다, 피아노는 이제 그만. 그러고는 더 이상 악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12쪽

글렌은 베르트하이머를 친애하는 몰락자라는 말로 맞이했다. 북미인답게 냉정했던 그는 베르트하이머를 늘 몰락하는 자라고 불렀고 나한테는 아주 무미건조하게 철학자라고만 했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베르트하이머는 늘 몰락의 와중에 있었는가 하면, 나는 철학자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글렌의 눈에는 우리가 몰락하는 자와 철학자로 보였을 거야, 난 여관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19쪽

모차르테움은 형편없는 학교지만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점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였어, 여관에 들어서면서 난 생각했다. 대학이란 무조건 나쁜 곳이긴 하지만 우리의 눈을 열어주지 못하는 학교는 가장 나쁜 학교다. 얼마나 형편없는 선생들을 겪어내야 하며 그들은 또 우리 머리를 얼마나 망쳐놓았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예술을 쫓아내는 자들이었고 예술 파괴자이며 정신의 살해자, 대학생들을 파멸시키는 자들이었다. 호로비츠는 예외였고 마르케비치와 베그도 예외였어, 난 생각했다. 하지만 호로비츠 한 사람이 일류 아카데미를 만드는 건 아니다. -20~1쪽

글렌은 몰락하는 자라는 말이나 개념을 아주 좋아했는데, 지그문트 하프너 골목 거리에서 글렌이 그 말을 만들어내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비슷한 것을 여러 번 눈치챘기 때문에 글렌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베르트하이머와 글렌과 나, 우리 모두가 병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 예술주의라니! 이런 생각을 했다. 맙소사, 얼마나 미친 짓이야!-34쪽

베르트하이머처럼 자기 친척을 지독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묘사만으로 깔아뭉갤 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 증오했던 그는 자신이 불행한 건 그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 순전히 가족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책망했으며, 가족이 자신을 이처럼 끔찍한 실존이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넣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기계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저항은 소용없어, 라고 그는 늘 말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실존기계 속으로 던져 넣으면 아버지가 아이를 부지런히 토막 내는 그 기계를 평생 가동시켜온 것이라 했다. 부모들은 자기네가 바로 불행이고 그 불행을 자식에게 대물림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아이를 잔인하게 실존기계 속에 던져 넣지, 라던 베르트하이머의 말을 생각하며 여관 식당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45쪽

자살을 못 한 이유는 끊임없는 내 호기심 때문이야,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부친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친은 우리를 세상 속에 내던졌기 때문에, 그리고 여동생은 우리가 겪는 불행의 산증인이기 때문에 용서 못 하는 거야. 존재한다는 건 돌려 말하면 이런 거잖아, 우리는 절망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이렇게 말했다. 눈을 뜨면 나 자신이 혐오스럽고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자려고 누우면 죽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소원밖에 없는데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된 지 벌써 50년이 됐어, 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했다. 50년 동안 오직 죽기만을 바랐지만 아직도 살아 있고, 그걸 어떻게든 바꿔볼 수 없는 건 순전히 우리에게 철두철미한 일관성이 없어서라고 생각해보면 말이야, 라고 베르트하이머는 말했다. 그건 우리가 비참함과 비열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음악에 재능이 없어서야! 사는 데 소질이 없어서라구!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살 능력조차 없으면서, 살아 있을 능력조차 안 되면서 거만이나 떨면서 음악 공부를 하다니! -49쪽

우리는 누군가를 친구라고 믿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잖아,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어, 사실이 그렇다고, 라고 그는 말했다. -49~50쪽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공부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생각했다. 오로지 생각만 하고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세계를 관조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지, 난 생각했다. -52쪽

흔적을 남기면 안 돼, 베르트하이머가 곧잘 하던 말이다. 친구가 죽으면 우리는 그 친구가 잘 쓰던 표현이나 발언으로 그를 못 박고 친구가 즐겨 사용했던 무기로 그 친구를 죽인다. 살아 있을 때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건넸던 말 속에서 계속 살아남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친구가 한 말로 그 친구를 죽일 수도 있다. 친구가 했던 말이나 기록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친구에 대해서!) 아주 가차 없이 굴지, 그리고 만약 기록이 없다면, 그러니까 친구가 예방 조치로 기록을 미리 없애버려서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친구가 했던 말로 그를 파멸시키지, 난 생각했다. -56쪽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끌렸는데, 그 사람들에게 끌렸다기보다는 그들의 불행에 이끌렸던 셈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행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불행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한테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바로 불행이야,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야, 라고 베르트하이머가 곧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불행한 일이야, 살아 있는 동안 불행은 지속되고 죽음만이 그걸 그치게 할 수 있어,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불행하다는 얘기는 아니야, 행복도 불행을 전제로 하니까, 불행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행복할 수 있잖아, 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65쪽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들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는 언제나 모방자였어, 자기보다 여건이 유리하다 싶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따라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기본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꼭 예술가이길 바랐기 때문에 재앙을 자초한 거야, 난 생각했다. 그의 불안,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걷고 또 걷고, 뛰고 또 뛰었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야, 난 생각했다. -92쪽

글렌은 행복한 사람이야, 나는 불행한 사람이고, 라고 그는 곧잘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불행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글렌이 행복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대꾸했다. 이런저런 사람이 불행하다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행복하다는 건 절대 맞는 말이 아니야, 난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의 눈에는 글렌 굴드가 항상 행복한 인간으로 보였고 나도 그렇게 보였다는 건 그에게서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지, 난 생각했다. 자기를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겼던 베르트하이머는 늘 나보고 행복하겠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불행하기 위해, 자기가 말하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고 난 생각했다. -99쪽

우리는 머리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하며 자기 입장에서만 그들을 대하지, 난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만 그들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 거야, 사람들을 대할 때, 아무런 선입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지, 난 생각했다. -127쪽

사람은 신경 쓰이는 일을 잠깐 피해보겠다고 다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당하게 행동하지, 불편한 대면을 피하겠다고 말이야, 난 생각했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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