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부터 부모님께서 주말마다 등산을 시작하셨고, 지금은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까지 배우실 정도로 열정적인 산행을 하신다. 부모님의 다소 광적인(?) 산행에 시큰둥한 나는 그저 '어차피 올라가면 내려와야할 거 뭣할라고 죽어라 올라가나'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별로 보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산에 대한 자료를 접하면서 가장 많이 본 문구는 '백두대간 00구간'이 아닐까 싶다. 산행 좀 한다는 사람들은 도전한다는 백두대간 종주. 약 1600km에 달하는 구간을 종주한다고 하는데, 이 정도 거리도 대체 나로써는 왜 그렇게 고생을 해서 가나 싶었는데, 이 책을 쓴 빌 브라이슨은 다소 엉뚱한 계기로 백두대간의 2배쯤되는 애팔래치아 산맥 종주를 시작한다. 
 
  애초부터 등산이 취미였다라면 모를까, 어느 날 새로 이사한 마을에서 애팔래치아 트레킹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극을 받아 등산을 시작하게 된다는 계기에서부터 종주를 위해 장비를 하나씩 구입해가고, 종주의 위험성(예를 들어 곰)에 대한 글을 읽고 겁에 질려 같이 산행을 할 사람을 구하다가 원수인지 친구인지 알 수 없을 카츠와 함께 드디어 산행을 시작한다. 둘 다 산행, 아니 운동은 퍽 오랫만에 했기에 헉헉거리며 18kg이나 되는 배낭의 무게에 압박을 느껴 내용물을 던져가면서 시작하는 종주.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튿날은 그런대로 괜찮아지고, 점점 속도를 내서 숲을 걷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자연과 사람들. 

  사실 이런 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사는 산을 걸으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다는 식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만약 빌 브라이슨 혼자서 산행을 했더라면 어쩌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사람 한 명 보는 것이 힘들 정도로 한적한 산 속에서 그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진짜 자기 자신을 찾았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동행인 카츠의 존재로 이 책은 위트있는 산행기가 되었다. 시작부터 배낭에서 식량을 미친듯이 던져대며 웃음을 안겨주더니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대피소에서 쥐를 몇 마리나 때려잡았다고 의기양양해하기도 하고, 눈보라가 쳐서 마을에 내려와 묵을 때 크림소다를 잔뜩 사놨다가 저자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자 "오늘 X파일하는데."라며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 등은 자칫 반복될 수 있는 서사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1부에서는 함께 산행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2부 초반에는 카츠가 사정상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 빌 브라이슨 혼자 종주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카츠가 없어서 그런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다소 밋밋한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카츠가 다시 등장하면서 급 생기가 돌긴 하지만.)

  이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애팔래치아 종주에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어쨌든 시도했다. 애팔래치아 산맥을 걸으며 그들은 자연의 위대함을 느꼈고, 그 자연이 파괴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더불어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의 편리함에 대해서도 새삼 느끼게 되고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해도 산책은 좋아하기에 이번 주말에 살랑살랑 바람 맞으며 산책이나 하며 삶을 즐겨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빌 브라이슨의 작품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예전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다가 접은 적이 있지만.) 입소문이 영 헛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었다. 기대보다는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네이버에 황석영이 연재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부터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륜때문인지 왠지 황석영은 앉은뱅이 책상에서 원고지와 씨름하며 연필로 책을 쓸 것 같았기 때문에 컴퓨터와 황석영은 왠지 어색한 조합처럼 느껴졌다. 나름 젊은 독자들과 교감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담긴 연재였지만, 모니터 속에 펼쳐지는 문장의 향연을 느끼는 것이 늘 어색해 미뤄오다 단행본이 나오고서야 드디어 읽어보게 됐다. 

  흔히 청소년기를 말할 때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대부분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방황하며 청춘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간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너무나 당연하게 중,고등학교를 거쳐 남들도 가니까라는 이유로 대학에 진학해 어느덧 졸업을 하고, 남들도 그러니까 용을 써서 취직을 한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찾으려하면 어른들은 "그런 건 대학가서 해도 늦지 않아."라고 궤도를 벗어나려는 이들을 마치 중력이 붙잡는 것처럼 붙잡아놓는다. (대학에 가도 학점이니 취업이니 빡빡한 삶에 뜻대로 행동하는 것은 힘들지만.) 혹자는 이런 패기없는(?) 현대의 젊은이들을 보며 그래도 우리 때는 학점이나 뭐나 신경쓸 거 없었는데.라고 그들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해주곤 한다. 듣고 있으면 정말 한 편의 청춘영화처럼 느껴지는, 지금의 관점으로 볼 때는 비일상적인 이야기들. 황석영도 자신에게 일상적이었던 그런 비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풀어놓는다.

  월남으로 파병을 떠나기 전 집에 돌아온 주인공 준이 자신과 친구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각 챕터마다 준과 그의 친구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등장하고, 더불어 그들의 치열한 젊은 시절이 그려진다. 고등학생이지만 함께 술을 마시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북한산의 암굴에 들어가 몇 달씩 살기도 하고, 무전여행을 하며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노가다 현장에서 뛰기도 하는 등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그저 하고 싶은대로 살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를 살았다하더라도 결국 남들이 정해준대로 대학에 진학해 원하지 않는 전공을 공부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무모하리만큼 체제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물질적인 가치를 떠나 달리 잃을 것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무모하다면 무모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어져 부럽기도 했다.  

  흔히 성장소설하면 뭔가 밝고 따뜻한, 그리고 희망에 가득찬 분위기를 떠올리는데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시대적 배경이 어두웠기때문인지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그림자같은 소설이었다. 방황과 방랑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여느 성장소설과 달리 방황과 방랑의 끝에서 뚜렷한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 또한 다르게 느껴졌다. 결국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주어진 '오늘을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책이 독자에게 남겨준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다. 

  어디까지가 작가 황석영이고, 어디까지가 주인공 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책을 읽으며 역시 작가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젊은 작가들에게서 부족한 부분인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성장소설을 기대했기에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작가 황석영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었고, 나의 사춘기를 한 번쯤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그래봐야 나의 사춘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밋밋했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스탕 2008-09-30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처음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겉도는 느낌으로 읽었었어요.
그러다가 중간 조금 넘어가면서 갑자기 확 와 닿더니 다시 앞을 뒤적거리며 읽었지요.
오.. 내가 확실히 조금(어쩜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 맞긴 한가부다..
그래도 물에 기름 뜨듯 완전 겉돌다 책장을 덮은게 아니고 늦게라도 어설프게나마 책의 맛을 느껴서 좋았어요 :)

이매지 2008-09-30 20:18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는 책장이 잘 안 넘어가서 그냥 그만 읽을까 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읽다보니 정들어서 끝까지 읽었어요.
근데 읽으면서 든 생각은 10~20대의 젊은 독자보다는
오히려 그 시절을 살았던 연령층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어요.
나름 얻은 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의 작품보다는 좀 아쉬웠어요.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절판


나는 나를 잘 모른다.
아니 사실은 혼자 있을 적의 나와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의 내가 전혀 다르다고 느낀다. 인호나 정수는 그런 나를 전쟁 때 피난 시절의 경상도 아이들이 그랬듯이 '다마내기'라고 했다. 서울내기는 다마내기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양파처럼 빤질거리는데 속은 아무리 까봐도 모르겠다는 소리다. 상진이가 독서한 깜냥으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누군가 내면에 지닌 것과 외면에 나타나는 게 다르다는 것은 그가 세계를 올바르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나의 내면에 지닌 것과 외면의 것이 조화되게 해주소서'하는 문장은 판 신에게 드리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저 옛날 플라톤이 열었던 아카데미아 학원의 문전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세상을 올바르거나 그릇되게 대하려던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나를 방어하고자 했을 뿐이다. 자유로운 떠돌이 판 신이라 한들 저 혼자 있을 적에, 가령 정신없이 갈대피리를 불고 나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42~3쪽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을은 슬픈 계절이라고 보는 게 어쩐지 통속적이지 않니? 낙엽 태우는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는 대목도 겉멋이라구 보이는데. 정서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야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귀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요.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사이가 중요하지.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84~5쪽

당시에는 명문고교의 어린 '신사들의 모임'을 서로가 대단하게 여겼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 어느 사회에나 있는 엘리트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좌절하거나 아니면 살아남아서 요 모양의 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사회지도층이 되었다. 그들도 그맘때에 벌써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따위를 모조리 읽어치우고 어른들도 읽기 힘든 사회과학이나 철학책들을 읽고 의젓하게 비평을 하며 토론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들은 사창가를 가거나 어두운 대폿집을 드나들며 퇴폐의 흉내도 냈지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지도자가 되는 길인가도 잘 알았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정말 방기하지는 않았다. 인호나 나처럼 온몸을 던지는 일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는 신나는 모험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끝내는 신중한 충고를 하며 한 걸음 비켜섰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매력 가운데 으뜸인 것은 역시 자기 존재와 생각을 서투르게 드러내지 않는 점이었다. 또한 밖으로 드러낼때도 일부러 그것을 보편적인 사물에의 비유나 실제적인 것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184~5쪽

나 권투 좋아해요, 사각 링에 딱 갇히면 각자 무지하게 외로울거야. 온 세상이 바로 코 앞의 적뿐이니까. -205쪽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거야.
거기 씨팔은 왜 붙여요?
내가 물으면 그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신나니까... 그냥 말하면 맨숭맨숭하잖아.
고해 같은 세상살이도 오롯이 자기의 것이며 남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257쪽

어쨌든 어디서나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고 가장 힘든 고비가 지나면 나날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껴지기 시작한다. -268쪽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27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차왕자 애장판 2
야마다 난페이 지음, 최미애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홍차의 나라 영국의 그리 미덥지 않은 민화. 밤 12시의 백자컵의 다즐링, 보름달이 비추는 컵 속을 은스푼으로 한 번 저으면 달은 일그러진다. 그리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은 홍차 동호회 소속의 3명의 아이들이 보름달 아래서 홍차를 마시다가 홍차왕자인 얼 그레이와 아삼이 등장하며 동화처럼 진행된다.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자신을 불러낸 주인의 소원을 3가지를 들어준다, 소원을 다 들어줄 때까지는 자신들은 돌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홍차 왕자들. 하지만 이들에게 소원을 말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친구가 되어 생활하기 시작한다. 

  2권에서는 문화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려진다. 페코가 등장할 때부터 페코와 얼 그레이, 아삼의 관계는 대체 뭘까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페코가 얼의 여동생이였구나. 어쨌거나 문화제도 무사히 끝내고 크리스마스, 새해를 보내는 이야기, 새학기가 되서 등장한 의문의 전학생 등이 2권에 등장한다. 작았다 커졌다하는 아삼과 얼, 페코의 변신(?)이 나름 코믹한 요소였지만 2권에서는 두 번째 소원을 아삼과 얼을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라 앞으로는 작고 귀여운 얼과 아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살짝 들었다.

  1권은 아무래도 초반이라 캐릭터 잡기에 치중하는 것 같았는데 2권이 되면서 슬슬 이야기의 가지를 쳐가는 모습이 보여서 1권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마법으로 남의 힘을 빌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먼가를 이뤄가려는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학생회장과의 은근한 대립도 볼거리인듯. 6개의 소원 중 4개를 이뤘기에 이제 2개의 소원만 더 말하면 아삼과 얼은 사라질 운명인데 과연 이들의 앞날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물론, 구판으로 25권까지 나왔으니 앞으로 갈 길이 멀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차왕자 애장판 1
야마다 난페이 지음, 최미애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갑자기 커피를 끊어야겠다고 분연히 결심하고 마시기 시작한 것이 홍차였다. 한 잔 한 잔 홍차를 마시면서 관심이 생겨서 관련 카페에도 가입하고, 이런 저런 책들도 읽어보면서 많이 접한 이름이 바로 이 책 <홍차 왕자>다. 이 책을 통해 홍차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다는 분들도 많고해서 대체 어떤 책이길래 궁금한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홍차의 나라 영국의 그리 미덥지 않은 민화. 밤 12시의 백자컵의 다즐링, 보름달이 비추는 컵 속을 은스푼으로 한 번 저으면 달은 일그러진다. 그리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은 홍차 동호회 소속의 3명의 아이들이 보름달 아래서 홍차를 마시다가 홍차왕자인 얼 그레이와 아삼이 등장하며 동화처럼 진행된다.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자신을 불러낸 주인의 소원을 3가지를 들어준다, 소원을 다 들어줄 때까지는 자신들은 돌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홍차 왕자들. 하지만 이들에게 소원을 말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친구가 되어 생활하기 시작한다. 

 첫 권에서는 홍차 왕자의 첫 만남이나 홍차에 대한 곁가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주된 이야기는 회원수 달랑 3명인 동호회이기에 박해(?)를 받는 홍차 동호회와 학생회의 대립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이랄까. 어딘가 동화같은 구석이 있지만, 홍차 동호회를 배경으로 한 학원물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 곱상하게 생긴 얼 그레이와 와일드한 느낌의 아삼. 매력이 다른 두 홍차 왕자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 같다. (홍차 처음 마실 때는 얼 그레이 특유의 베르가못 향이 너무 싫었는데 요새는 슬슬 그 향을 즐기게되서 얼군이 반가웠다랄까. 아삼은 아직 못 마셔본 듯.)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오렌지 페코 공주도 재미를 불어넣을 것 같다.

  전문 홍차 만화를 기대하고 봤기에 나름 실망한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은근히 재미가 있어서 계속 보게 될 것 같다. 아빠의 홍차를 그리워하며 홍차 동호회를 만든 승아(타이코)와 친구들의 이야이가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가벼운 감동을 안겨줬다. 차 한 잔 마시면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만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