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경감 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피터 러브시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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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십 년이 지났지만 가짜 경감 듀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강렬한 첫문장으로 시작되는 <가짜 경감 듀>. 이 책 또한 <환상의 여인>처럼 오래전 동서판으로 읽으려고 사뒀다가 몇 페이지 넘기다가 흥미가 일지 않아 관뒀던 이력(?)이 있어 망설였으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에 반해 내친 김에 집었는데 '탄산수처럼 톡톡 튀는 선상 미스터리'라는 표지 문안처럼 톡톡 튀는 매력 때문에 읽는 내내 몇 번이나 키득거렸다. 영국에 금의환향하는 찰리 채플린과 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이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가짜 경감 듀>. 그리고는 뜬금없이 담당 치과의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꽃집 아가씨와 예쁘장한 소매치기가 연달아 등장한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식으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극단에 소속되어 마술사의 플랜트(관객인 척 객석에 앉아 있는 조수) 생활을 하다 독심술사가 된 월터는 연극배우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내의 도움으로 치과의사가 된다. 이후 줄곧 그녀의 그늘 아래서 아내의 말에 순종하며 별 트러블 없이 살아간다. 치과의사로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자리를 잡아가던 차에 아내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할리우드에 가겠다고 한다. 자신은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다시 시작하고, 월터는 치과의사가 아닌 자신의 매니저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자신의 삶이 부정당한 것 같아 낙담한다. 그런 그의 곁에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꽃집 아가씨 앨마가 있다. 로맨틱 소설을 즐겨 읽던 앨마는 월터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심지어는 월터에게 미국행 여객선에서 가명으로 함께 탄 뒤 선상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신분을 바꿔치기해서 미국에서 둘만의 새 삶을 시작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택한 두 사람. 이들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만 다음 날 바다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놀랍게도 그 시체는 월터의 아내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 명백해보이는 시신의 모습에 고민하던 차에 승객 중에 유명한 살인범 크리펜을 체포한 듀 경감이 있다는 소식에 선장이 그에게 SOS를 청한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는 듀 경감의 이름을 가명으로 쓴 월터. 도망갈 수도 없는 배 위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가짜 경감 듀(월터). 사건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유명한 경감으로 오인받아 타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 새로운 삶을 위해 바다를 건너는 연인. 설정만 보기에는 진지한 정통파일 것 같은데 <가짜 경감 듀>는 허를 찌른다. 배라는 이동수단 안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에서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잘 섞여 있다는 점에서 어쩐지 애거사 크리스티의 몇몇 작품이 떠올랐지만, <가짜 경감 듀>는 그보다 더 유쾌하다. 인물간의 갈등이나 상류사회의 풍속, 살인사건 자체를 구성하는 음모도 물론 등장하지만 <가짜 경감 듀>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음모와 반전이 양념처럼 들어간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월터-앨마 러브의 메인 러브라인뿐만 아니라 배 위에서 그려지는 앨마-조니, 바버라-폴-포피 등 여러 등장인물이 배 위에서 얽키고설키며 서로 사랑의 작대기를 들이대는 모습은 정말 이 배 위에서 살인사건이 있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분홍분홍하다. (하긴 뭐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모든 승객이 범인이 잡힐 때까지 벌벌 떠는 것도 좀 우습긴 하겠다.) 아무튼 명탐정(혹은 명형사)이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휘어잡는 스타일도 아니라 긴장감은 떨어지지만 그런 느슨함이 오히려 매력처럼 느껴져 부담없이 즐겼다. 

 

  하지만 유머러스하고 개구진 것만이 <가짜 경감 듀>의 매력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 때문에 살인과 신분세탁을 감행했던 앨마는 "치과에 드나들 때는 당신을 우상처럼 떠받들었죠.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인 남자와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남자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가족 마고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뿐이었으니까요.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연애 소설 속 주인공 말이에요. (중략) 하지만 그건 집착일 뿐이었어요. 전쟁 기간 내내 꿈꿔왔던 소녀 취향꿈이나 좌절감, 환상 같은 것들을 모두 당신에게 쏟아부었어요. (중략) 배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분별력이 생겼어요"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배 위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로맨스 소설 밖의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다. 아내에게 한 번도 반항해본 적 없었던 소극적인 월터도 변하기는 마찬가지다. 듀 경감으로 오인받아 수사에 나서면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그것이 다른 이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을 드러내고 하나의 중심으로 존중받는다. 그는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죠. 영리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고 숨겨진 단서를 찾을 필요도 없었어요. 형사 일이란 그저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더라고요. 난 듣는 걸 잘하니까. 그것도 리디아 덕분이지만, 어쨌든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게 한 다음 진상에 도달한 공로를 차지하는 거죠"라고 이야기하며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신의 삶에 눈을 뜬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살해당한 여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모두가 즐거운 추리소설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웃으며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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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소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8
마야 유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품절


"그럼 당신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하늘을 바라볼 때는 다 그러는 법 아닌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모르나보군요."
소녀는 눈을 한 번 커다랗게 떴다가 마치 한숨을 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제야 시즈마는 소녀의 양쪽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응달에 있어서 몰랐는데, 오른쪽 눈은 머리카락과 똑같이 칠흑빛이지만 왼쪽 눈은 약간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눈이 촉촉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데 비해 초록빛을 띤 왼쪽 눈은 인공적이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의안인 듯했다. -25~6쪽

"……혹시 야마시나 씨가 용의 연못에 남은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요. 아버지는 내가 슬슬 데뷔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나도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와 같은 탐정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고토노유에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요."
"그럼 미카게가 탐정으로 데뷔를 하느냐 마느냐가 야마시나 씨의 교섭 능력에 달려 있다는 말이네. 살인현장에서 비지니스라. 어쩐지 굉장히 현실적이군."
"원래 탐정이 그런 거예요. 묘한 환상 같은 건 버리는 게 나아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뒤를 잇기 위해 태어난걸요. 이래봬도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요."-62쪽

예민한 시기를 스가루 후보의 대역으로 보낸 사나코는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은 것이리라. 그런 심정은 이와쿠라가 평한 '자유'라는 말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한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카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탐정이 되기 위해 수련해왔어요. 5년 전부터는 경험을 쌓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녔죠. 여러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접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제가 나아가려는 길이 옳다는 걸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됐어요. 사나코 씨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찾고 있던 자신의 길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미카게는 마치 연장자 같은 말투로 말했다. 열일곱 소녀가 스물네 살 여자한테 하는 말이니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하지만 미카게의 목소리에는 그러한 나이차를 뛰어넘은 진실미가 담겨 있었다. -147~8쪽

"내 왼쪽 눈은 미사사기 미카게의 증표야. 하지만 이 눈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건 아니지."
"그건 무슨 소리야? 요전에는 꿰뚫어본다고 큰소리친 것 같은데."
며칠 전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용의 연못에서 수정 눈을 뜨고 침묵으로 주위를 압도하던 아름다운 모습. 그건 거짓이었던 걸까.
"그냥 퍼포먼스야. 나는 점쟁이도 초능력자도 아니고,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탐정이거든.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어머니의 뒤를 이을 탐정으로 자라왔고." (중략)
"중요한 건 오른쪽 눈이야. 실은 이 오른쪽 눈이 내게 힘을 줘. 시즈마는 우뇌와 좌뇌의 활동에 관해 알아? 우뇌는 감성, 좌뇌는 언어를 관할한다고 해. 그리고 뇌는 각각 반대쪽의 감각을 다스리지. 우뇌가 불완전하면 좌반신에 마비가 오는 식으로."
"즉 오른쪽 눈으로 본 걸 좌뇌가 판단한다는 말이야?"
"그런 셈이야. 그러니 내 머리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불완전하고 상황에 좌우되기 쉬운 감성이 아니라,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말로 처리되는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말로 처리할 수 있어. 거기에는 전혀 애매함이 없지."-158~9쪽

"그럼 미카게는 컴퓨터에 수식을 쳐넣는 것처럼 사물을 본다는 거야? 못 믿겠는데. 바로 에러가 날 거야." (중략)
"그러니까 오히려 탐정활동에는 수월해. 합리적이지 않으면 반드시 좌뇌가 반응하지. 모순된 현상이라고 말이야. 특히 인간은 우뇌 탓에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어. 어중간하지. 하지만 말로 처리할 때는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해. 어중간한 건 원래 나쁜 일은 아니지만, 탐정한테는 마이너스 요소일 뿐이야."-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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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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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13쪽

곰곰이 생각해 봐도 신기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는 심오한 비밀을 간직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 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두려운 어떤 것, 심지어 죽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나는 애지중지하는 책을 펼칠 수도 없고 끝까지 읽겠다는 희망도 품지 않는다. -25쪽

내 친구도 죽고, 내 이웃도 죽고,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도 죽는다. 죽음은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변함없이 공고화하고 영속화한다. 나 역시 내 비밀을 죽는 날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내가 지나가는 이 도시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나 자신도 이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25~6쪽

때가 오고 있었다. 또다시 포도주가 거리의 자갈 틈으로 쏟아지고, 그 흔적이 그곳의 많은 사람을 붉게 물들일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탕투안, 그 성스러운 얼굴 뒤로 어슴푸레한 빛은 자취를 감추고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그 성스러운 존재를 시중드는 추위와 더러움과 무지와 빈곤은 마치 대단한 권세를 지닌 귀족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는데 그중에서 빈곤이 가장 그러했다. 늙은이를 젊은이로 바꿔주는 마법의 맷돌은 분명히 아닌 맷돌 속에서 끔찍하게 갈리고 또 갈린 적이 있는 몇몇은 모퉁이에서 떨었다. 그들은 모든 집을 들락날락했고, 창문으로 낡은 옷자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을 갈았던 맷돌은 젊은이를 늙은이로 만들어주는 맷돌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찌들었고 목소리에는 근심이 배었으며 그들의 얼굴에나 어른들의 얼굴에나 세월의 고랑이 파였고, 새로 생긴 고랑은 굶주림의 표시였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49쪽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별들의 아치 아래-학자들이 말하기를 어떤 별은 이 작은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고통받고 죽어가는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우리를 비추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밤 그림자는 커다랗고 시커멨다. 새벽이 오기 전 춥고 불안한 시간 동안 유령들은 또다시 자르비스 로리의 귀에 대고 예전 질문을 속삭였다. 로리는 묻혀 있다가 파내어진 지 얼마 안 된 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서 섬세한 감각이 사라졌는지, 회복될 수는 있을지 궁금해하던 터였다.
"되살아나고 싶은가?"
대답은 그때와 같았다.
"잘 모르겠소."-74~5쪽

"나는 말이오, 무엇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을 잊고 싶다오. 이렇게술을 마실 때가 아니면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거든. 하긴 세상도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겠지. 우리는 특히 그 점에서 아주 다르오. 솔직히 난, 당신과 나, 우리가 어떤 점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오."-121쪽

기력은 모두 소진되었고 사방은 황량했다. 남자는 조용한 언덕을 가로질러 가만히 멈춰 서 있다 문득 앞에 펼쳐진 황무지에서 명예에 대한 야망과 자기부정, 불굴의 의지 같은 신기루를 보았다. 그 공평한 도시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중한 사람들이 그를 올려다보는 상상 속의 화랑이 있고, 탐스럽게 익은 삶의 열매가 열린 밭이 있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희망의 샘이 잇었다. 하지만 그 순간뿐, 환상은 사라져버렸다. (중략) 슬프고 슬프게도 태양은 떠올랐다. 햇빛이 비친 광경에서 무엇이 그 남자의 일생보다 더 슬프겠는가. 뛰어난 능력과 선량한 심성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쓰지 못하며, 자신을 파먹는 해충인지 알면서도 그 해충이 자신을 먹어치우도록 보고만 있는 남자였다. -132~3쪽

나리에게는 일반 국사에 관해 참으로 고결한 생각이 한 가지 있었으니 모든 것이 저절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수한 공무에 관해서도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반드시그에게, 이를테면 그의 권력과 주머니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이든 특수하든 자신의 만족에 대해 또하나 고결한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온 세상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계급의 성스러운 경전은 (많이도 아니고 원본에서 대명사만 살짝 바꿨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리께서 이르시되, 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라."-152쪽

"오래 걸리지요." 아내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 있나요? 특히 복수와 응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자연법칙이에요."
"번개가 사람을 내려칠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그 번개가 만들어져 저장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죠? 말해 봐요."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드파르주는 아내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진이 도시를 집어삼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부인이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지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죠?"
"아마도 오래 걸리겠지." 드파르주가 말했다.
"하짐나 준비가 끝나고 실행에 옮겨지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리죠.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을 편히 가져요. 흔들리지 말고."-255~6쪽

죄수라고 하면 치욕스러운 범죄나 부정을 연상했던 신참 죄수는 감옥의 사람들을 보고 놀라서 멈칫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내내 느꼈던 비현실감은 온갖 세련된 매너와, 몸에 밴 예절과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을 맞는 수감자들을 보는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의 세련된 태도는 음침한 감옥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유령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찰스 다네이가 죽음의 무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유령, 위엄 넘치는 유령, 우아한 유령, 자부심 넘치는 유령, 천박한 유령, 위트 있는 유령, 젊은 유령, 늙은 유령할 것 없이 모두 황량한 해안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왔다 죽어 나간 사람들을 목격한 다음 바뀐 눈빛으로 멍하니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샤를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옆에 서 있는 간수라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간수들의 모습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들, 활짝 핀 젊고 고혹적인 딸들, 젊은 미인, 점잖고 성숙한 여인과 너무도 터무니없이 대비되어 보였다. 이런 환영은 모든 경험과 가능성이 전도된 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365~6쪽

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 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 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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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아가씨 - 근현대 여성 공간의 탄생
김미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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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 우연찮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된 '명동 이야기'를 관람하면서 새삼 한동안 빠져 지냈던 <명동백작>이 떠올랐다. 2004년 EBS에서 방영된 <명동백작>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를 비롯해 박인환, 김수영, 전혜린 등등 당시 명동에서 교류하던 문인들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꼬꼬마 국문학도였던 나는 <명동백작> 덕분에 한국현대문학에 관심이 생겨 이 책 저 책 뒤적여보기도 했었다. 전시회를 본 뒤 <명동백작>이나 다시보기로 볼까 하다가 여느 때처럼 밍기적거리다가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명동에 대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바로 <명동 아가씨>. '명동'이라는 키워드에 쇼윈도를 바라보는 아가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라는 서두처럼 이 책은 <명동백작>과는 다른 관점에서 명동을 바라본다. <명동백작>에서의 명동은 다방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공간이었다면 <명동 아가씨>에서의 명동은 양장점, 미장원 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소비공간이었다. 저자는 당시 명동을 기반으로 생활한 이들의 구술 채록과 신문, 잡지 자료 등을 통해 명동이 "여성들에게 소비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공간이자 문화의 공간"이었음을 드러내고 나아가 명동을 매개로 "한국의 소비문화사를 이해하는 단초"(14쪽)를 제공한다. 


  명동이 소비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남산골 진고개에 공사관을 세우고 이 일대를 독점적인 거류지로 정한다. 이후 이곳에 통감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며 이 일대는 "일본과 서양에서 들어온 낯설고 신기한 외래문화의 집합지"이자 "일종의 기호품이자 취미와 유행이 반영된 소비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환락과 허영의 거리"로 거듭난다. 심지어 신문기사에서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라고 소개할 만큼 명동은 일제시대 이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이 유행의 공간 명동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생활한 것일까? 백화점을 비롯해, 100곳이 넘는 양장점과 미용실이 명동에 있었다. 하지만 명동은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양장과 미용을 비롯해 타이핑, 편물, 기계자수 등 여성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고등기술학교가 자리해 "전후 여성들이 기술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거나 교육 시설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다방, 제과점, 식당 등에서는 친구나 애인과의 네트워크도 형성되었고, 극장 등에서 문화도 향유했다. 요컨대 명동은 점차적으로 여성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공간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장소이자 자신의 세계를 정립해가고 자립할 수 있는 장소로 변화해갔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근대 여성의 이미지가 정립되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역시 그 당시의 기록이다. 특히 여성들의 거리 패션을 지적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여학생의 모습으로 걸음걸이가 낙제"라는 둥, "완전히 품위를 잊어버린 옷이다. 지나칠 정도의 노출도 자기의 체격을 봐서 해야 할 텐데, 이 옷의 노출은 체격의 결점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식으로 거침없이 날리는 독설에 나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이런 기사 외에도 당시 명동을 경험한 이들의 녹취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한국전쟁 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선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급변해버린 명동의 과거 모습을 살피는 것도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어도 새삼스러웠다. 다만 논문을 토대로 단행본 체제에 맞게 새롭게 작업한 책이라 그런지 조금 쉽게 풀어 쓴 논문을 읽는 듯 딱딱한 부분이 있었고, 수록된 몇몇 사진의 망점이 심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다소간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 나아가 한국이라는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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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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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선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스터리로 꼽히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그런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기껏 해야 일본어 중역판이나 요약본 정도가 나왔던 터라 '유명한 작품이라니 읽기는 읽는데 이거 어쩐지 손에 안 붙는데…' 하며 내가 작품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것인지 원래 그냥 그런 작품인 건지 영 헷갈렸었다. 그러던 차에 엘릭시르에서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를 론칭하면서 『환상의 여인』을 새롭게 번역해 선보여 이번에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구나 기대를 안고 다시 읽었다. 엘릭시르판 『환상의 여인』을 읽기 전만 해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환상의 여인』 하면 '오렌지색 모자'만 떠올랐을 뿐 딱히 어떤 인상이 남지 않았고, 수작이라는데 왜 그런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새 옷을 입고 나온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샌가 점점 이야기에 몰입해 '그 여자'를 찾기 위한 피 말리는 조사에 합류하게 됐다.  


  『환상의 여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내와 다툰 스콧 헨더슨이란 남자가 무작정 거리로 나와 아내에게 홧김에 얘기한 것처럼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아내와 예약해둔 데이트 코스를 즐긴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고, 그는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 여자뿐. 하지만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심지어는 신체적 특징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녀가 쓴 오렌지색 모자만이 떠오를 뿐이다. 경찰과 변호사 등은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나 그를 봤다는 사람들은 있으나 그와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증언은 나오지 않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무고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을 선도받은 스콧 헨더슨. 그는 담당 형사의 조언을 듣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절친에게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생사가 오직 한 여자의 손에 걸려 있는 상황. 하지만 헨더슨의 절친 존 롬바드와 헨더슨의 애인 캐럴 리치먼이 '환상의 여인'의 흔적을 더듬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결정적 증언을 해줄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은 살인일까 단순한 사고일까? 사형 집행 전까지 과연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환상의 여인』은 본격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허술하다. 그래도 몇 시간이나 함께 있었던 여자에 대해 오렌지색 모자를 썼다는 사실 말고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야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주요 증인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것이나 사형선고 받아놓고 한참 손놓고 있다가 날짜가 임박해져서야 해외에 파견근무 나간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도 '읭?!'스럽다. 하지만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여인』은 매력적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허점 때문에 매력적인 건지도 모른다. '환상'의 여인이라는 제목답게 어딘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존재도 그렇지만 주인공 헨더슨도 도무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 사랑에 대한 환영을 쫓을 뿐 도무지 현실감각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답답한 인물인데, 그 점이 이 책에서는 되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현실감이 있는 것은 헨더슨의 죽은 아내의 웃음 소리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건 자체도,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도 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긴가 싶지만 그러면서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어느샌가 이야기에 빠져버린다. "초심자를 위한 추리소설 No.1"이라는 띠지문구처럼 『환상의 여인』은 단순한 '누가 범인인가'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소설이 아니라 사랑, 질투, 배신 같은 통속드라마 같은 내용에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는 작품이라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반전이 주는 충격은 없지만 그 분위기와 매력만큼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한 책. 세계3대 미스터리라는 과장된 수식어가 아니어도 한번쯤 읽어봄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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