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는 여행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여행을 위한 책인지 책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보다 나는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자신을 위한 여행인지 타인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은 진짜 가진 게 없어서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기념품도 사지 않는다. 그건 여행에 방해만 될 뿐이다. 여행은 자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글을 쓰는 건 좋아한다. 글은 사진이나 기념품보다 덜 사치스럽고 진지하고 사려깊다. 여행지에서 쓴 글은 거짓이 아니고, 그때의 글은 과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기를 들여다보고 돌보기 위함이다. 우리의 삶 중 머리와 가슴이 가장 열려 있을 때는 여행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곤 한다. -13쪽
절망하는, 절망했던 청춘은 어딘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 앞에 놓인 절망의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쉬었다 가실 거예요, 주무시고 가실 거예요?"처럼. 물론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모텔 카운터 앞에서처럼 절망의 종류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오로지 한 가지뿐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골치 아픈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란, 눈 딱 감고 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 -18쪽
나도 이 여행이 이렇게까지 길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길어봐야 한두 달 정도면 끝날 거라 예상했다. 여행이 길어진 건 다 편지 때문이었다. 나한테 온 답장을 읽기 위해서라도, 답장에 또다시 답장을 하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일찍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집으로 도착한 답장은 한 통도 없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갈 이유 또한 아직은 생기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는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라는 오기가 발동해 지금까지 오게 된 것도 있었다. -78~9쪽
"그때는 왜 장사꾼이라고 했어요?" "난 틀린 말 안 했어. 소설가도 결국 자기 소설을 팔아야 하는 장사꾼이야.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 좋은 품질의 소설을 써내야 하고, 브랜드 가치를 올려야 하지. 예술을 가장했다는 차이밖에는 없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왜 직접 자기 소설을 파는데요? 서점에 맡기면 알아서 다 팔아주잖아요." 자기가 자기 소설을 파는 일은 자기가 자기 몸을 파는 것만큼 힘든 일 같다. 내가 그 말을 꺼낸다면 여자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가 만든 빵이나 김밥을 자기가 파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나 누구도 김밥을 사면서 그 김밥을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김밥이란 원래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파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남의 손에 의해 팔려나가야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상업적인 이미지와 결합할수록 천박하다는 누명을 쓴다. 자기 소설을 자기가 팔아야 한다면 과연 누가 소설을 쓰려고 할까?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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