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에서 살다
조은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그녀는 사직동 한옥촌에 살고 있어. 좁은 길모퉁이에는 언제나 늙으수레한 어르신들과 아주머니가 나와 앉아서 시시콜콜 남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다닥다닥 맞대어 있는 지붕 한 쪽에서 한바탕 악다구니가 쏟아지면 다른 쪽에서는 한정없이 그 소음을 들어야 하는 곳 말이야. 여지껏 그런 곳이 다 있었냐고 묻고 싶을 만큼 정말 옛스러운 동네지?

그처럼 느리게 변하는 낡은 동네에서 시인은 다독다독 자기 삶을 챙기면서 잘 살고 있더구나. 나이 마흔에 혼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야. 혹시 너도 가끔 혼자 살 생각해 봤니? 궁상맞게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글쎄... 내 나이 40은 아주 활기차고 또 안정된 우아함일 거라고 무조건 믿게 되더라. 전문직에서 오래 활동한 여자들이 내뿜는 삶의 활력과 시원한 우아함에 폭 빠져서 그랬던 거겠지...

근데 말이야.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집안 살림에서부터 그보다 더 복잡한 일까지 자기 손으로 제가끔 깔끔하게 매듭짓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새삼스레 '무엇을 이룰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사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왔었으니까.

뭐랄까... 지금까지는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항상 종종 걸음을 치면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 늘 가까운 미래에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너무 조급해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 역시 나와 별반 다르게 살지 않았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가 않아.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무척 노력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거든. 그걸 왜 꼭 해야 하는지,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그 이유가 스스로에게 납득될 때까지 그 질문을 반복하니까. 너무 까다롭지 않냐고?

글쎄다. 때로는 다른 이를 설득하는 것보다 자신을 이해시키는 것이 더 어렵지 않던?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도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게 되고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 그리고 그 모습이 얼마나 고집스럽던지, 나중에는 어떤 고매함까지 느껴지는 거야.

그녀가 기르는 '또또'라는 개만 해도 그렇다. 정서불안으로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는 개에게 손을 물려가면서까지 정성스레 돌봐주고 있거든. 사람도 아닌 개 때문에 오래 외출도 못한다고 하면 말 다했지, 뭐... 그럴 정도면 개를 구박하거나 미워할 것 같잖아? 근데 그녀는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는 개를 불쌍하게 여긴다구.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폭이 그렇게까지 넓을 수 있는지 그저 궁금할 뿐이야.

그건 마흔이라는 나이 때문만은 아니겠지? 아마도 그건 그녀가 만든 삶의 규칙 때문이 아닐까 해.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그리고 절대 먼저 후회하거나 뒤돌아보지 않을 그런 원칙들. 이제 내 삶에도 그런 확고한 원칙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느라고 정작 제 자신을 놓치고 사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정말 딱 나에게만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다짐하듯이 이렇게 장황한 편지를 쓴 거야. (그래도 너는 '그래, 얼마나 가나 보자.' 하겠지만.) 그리고 그 시작을 그녀의 시「지금은 비가‥‥‥」와 함께 하려고 해. 때로 힘들어 보이거나, 원칙 없이 살려고 할 때는 내 대신 이 시를 읽어주렴. 그럼, 내 다시 정신이 바짝 차릴 테니.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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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분인지 아십니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울울섭섭 했답니다. 다시는 이 집으로 들어올 일은 없겠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미어지던지. 저는 이상하게 장소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입니다. 결국 사람은 그 사람의 내용성은, 장소에 구애를 받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사람이 한꺼번에 늘상 다니던 길과 건물을 포기하려 들 땐 어쩐지 마음이 안 좋단 거지요.

5층까지 오르느라 다소 헉헉댔던 이 계단. 베란다에서 보면 그렇게 풍경이 좋았던 '샘터가든' 정원. 집앞에 있어서 야밤에도 야식 걱정은 할 필요 없었던 패밀리마트(게다가 TTL은 늘 할인까지 해주어 여느 슈퍼 부럽지 않았다), 주인집에서 써붙이곤 하던 작고 앙증맞은 택배 메모 '502호 택배 있음'. 이 모든 것들이 마술처럼 동시에 사라지는 것. 그것이 살던 집을 떠날 때 겪는 마음 아픔이다.

꼬딱지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샤워 부스같은 것도 없었잖아) 원룸이었지만, 거기는 빌린 집이나마 내 집이었다. 그래서 뭘 하든 마음이 편했고 따스했고 좋았다. 집안도 좋았지만, 가게가 즐비한 길목들, 겨울 동안 곧잘 이용하던 동방사우나^^(후후... 언젠가 쓰겠지만, 나는 목욕과 책읽기를 '아오이'만큼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찜질방이 나의 사정권 안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한 번 가면 징하게 오래 있다가 오곤 해서.. 찜질방에서 아작낸--제본이 약하면 열을 견디지 못하고 책이 해체되기 때문--책도 적지 않다), 군것질거리가 즐비했던 시장통 골목 등등 수많은 상점과도 결별한다. 나는 이상하게 자본주의적이라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좋아한다. 쏙 들어가 커피 한 잔이라도 시켜먹고 싶은 까페가 있다면 금상첨화고. 그런 면에서 내가 살던 동네는 나에게 딱 안성맞춤이었는데.

이렇게 사랑했던 공간을 떠나보니까, 내가 그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 이사온 건대 앞에서도 나만의 가게를 발견하고 까페를 찾아내고, 즐겨갈 만한 호프집을 발견하리라. 이전 동네 만큼 감각적이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덜 촌스럽고 덜 상업적인 곳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본다. 더구나, 여긴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재래시장이 바로 코 앞이지 않던가! (호호~^^ 벌써 역발산 찜질방--맞다. 옛날 프로 레슬러 역발산이 운영하는 곳이다--도 다녀왔다. 그렇게 호화로운 시설은 아니었지만 이용할 만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으로 이사오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동부여성발전센터' 때문. 여기서 공부하고 심리상담도 받고, 운동도 하면서 아주 요긴하게 이용할 계획이다. 이 집에서는 한강공원도 가까워서 여름이면 자연학습체험장을 산책하면서 가벼운 마라톤도 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곧 좋아질 동네이기 때문에 '건대 앞'에 이사온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나는 아직 젊고, 그렇기 때문에 기회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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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2-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 7월에 3년동안 살던 원룸에서 지금의 투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말이 3년이지 정말이지 긴 세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나와 살다가 집에 들어가서 한 1년 정도 뭉게다가 다시 나와서 살았기 때문에 그 원룸은 좀 특별했었습니다. 하루만에 집을 보고 그날 당장 이사를 했던 원룸. 서울에서 살림살이를 다 친구 주고 내려와 버려서 제가 그 집에 들어갈때는 달랑 이불한채랑 책, 옷가지 등이 전부였었습니다. 하다못해 숫가락 몽댕이 하나도 없었으니...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살림을 사 모았지요
그런 집에서 이사를 가려고 하니까 참 이상하더라구요. 저는 1층이라서 여름이면 문을 휑하니 열어놓고(집 옆에 바로 경찰서가 있어서 두렵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참 좋은 점이었네요) 참외 갂아 먹으면서 낙서도 하고, 빨래 해서는 탁탁 털어 방에 널기도 하고(원룸이라 베란다가 없어서 늘 빨래와 함께 살았습니다.) 아무튼 이사를 가던날 눈은 멀쩡하지만 마음은 축축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마술처럼 동시에 사라지는 것. 그것이 살던 집을 떠날 때 겪는 마음 아픔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지난 주 20일(금)까지 나가던 회사를 정리하고, 그와 함께 나는 이사짐을 쌌다. 집이 이사를 한 것이다. 시댁으로 들어와 내 방을 꾸미느라 월~수 이렇게 3일을 생노가다를 하고 이제야 내 터를 닦은 후 서재에 들어왔다.

회사로 출근하지 않은 후, 참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고. 느낌에는 한 1년 논 것 같은 기분이다.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으며 다음 달이면 떠날 프랑스 미술관 여행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하루하루는, 이상할 만치 평온하다. 하루 두 끼 식사량은 사회생활을 할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집에 있으면 약을 잘 챙겨먹으리란 스스로의 기대와는 달리 약을 데우는 데 까지는 성공하지만 복용하는 걸 곧잘 잊어버리고 하루를 마감하기도 한다. 오늘 저녁엔 매번 밥 먹기가 지겨워 스파게티를 해 먹었고(얌얌쩝쩝 혼자서도 잘 먹었다!) 이 점이 색다르다면 색다를까? 그밖에는 별 거 없다.

내일부터는 시립도서관에 나간다. 고3 처럼 책가방을 싸고, 도시락을 들고서 10시면 집을 나서서 오후 6시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야지~! 라고 각오를 다진다.

오로지 순수하게 '가정주부'로서의 3일은, 무척 바쁘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했다. 아침 10시까지 늘어지게 자는 점은 좋지만. 잠 들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정리하고 쓸고 닦고 하는 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가 이렇게 집정리를 잘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해보니까 썩 잘해서 왠지 어깨가 으쓱으쓱!

자, 이제는 서재놀이도 좀더 본격적으로 잘해 보려 한다. 생각보단, 손이 많이 가는 '서재놀이'. 마이리뷰도 적고, 리스트도 매달 새로 만들며, 하루하루의 일상을 열심히 끄적이다 보면, 이 해도 금방 갈 것이다. 열심히 살아야지. 어느 때보다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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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2-25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달 프랑스로? 오오, 얼마나 있을 예정이신지?

플라시보 2004-02-2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얼마 안있으면 저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느낌이 좀 남다릅니다. 물론 님처럼 이사를 가지도 프랑스로 여행을 가지도 않겠지만 저 역시 며칠만 놀아도 1년이 지난듯 느껴질 것 같습니다. 지난 2년간 별로 쉬지를 못해서 말이지요. 저도 쉬게되면 집이나 좀 깨끗하게 해 놓고 살아야겠습니다.
맘 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외부 조건과 상관없이 님이 행복하시고 웃으시길 말입니다.^^

요다 2004-02-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여러분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프리랜서로서의 첫 발, 그리고 고3 수험생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답니다. 오후 4시, 서평을 써주는 일감을 받으러 삼성역에 들렸다가 반디앤 노블스에 들러 새 책도 보고 유유자적하며 즐거운 오후를 누렸답니다. 물론 프랑스 여행에 도움될 여행서 코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비발님, 제 여행은 14일 일정의 파리+남프랑스 행입니다. 오늘 서점에서 <파리의 보물창고>란 너무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곤 '나를 위해 준비된 여행서야. 올 3월엔 여행갈 운명이군!' 했답니다. 여러분도, 하루하루가 새삼 즐겁길.(다른 한편, 이제 프리랜서로서 첫 발이네... 이렇게 마음먹으니 많이 불안하기도 했어요. 사는 일이 참 힘들구나 오랜만에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어제 동료들과 회식을 하고 집에 오면서, 나의 '못난 구석'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흠잡을 만한, 욕할 만한 나만의 단점은 내가 '노여움을 잘 탄다'는 것이다. 서러움에 약하달까. 이것도 유약함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슬프다' 생각하면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흐르거나, 재밌구나 생각하면 벌써 '크하하' 하고 된통 웃고 난 뒤다. 이런 식으로 '노엽다' 생각하면 이미 얼굴이 붉어져 뒷수습을 하기 난망해지는 것이다. 얼굴에 모든 마음이 드러나 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다(겪어본 이는 잘 알리.ㅜ_ㅠ).

감정선이 발달되었다고 말해주면 감사하지만, 더러는 'It's over'라 해도 변명할 도리가 없다. 요즘같은 때는, 더더구나 감정선이 발달하여 이런 상념, 저런 상념에 젖게 되는데 어제의 회식자리도 그런 떠다니는 상념의 총집합이었고, 마음이 있는대로 얼굴에 다 드러난 최고로 민망한 자리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냥 함께 웃어주고, 분위기를 이끌어주는 동료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때로는 '못난 구석'을 들켜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나의 이 'over'도 나의 한 속성인듯이 자연스럽게 보아주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내 이 '못난 구석'은 어떤 말로 포장해도 결국 단점이기에, 그리고 언젠가는 달라져야 할 모습이기에 그것까지 예쁘게 봐줄 순 없다. 그래도 어제는 동료들이 있어서 내 '못난 구석'이 덜 미울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 곁을 떠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가슴에 사뭇쳤다. 아마 많이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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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ey 2004-02-1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도 많이 그리울 거에요... 어제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자리였음. 좀더 길었으면 좋았을 거 같기도 하고.


nutmeg 2004-02-1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어제 재미있었죠.(적어도 식빵에 핀 곰팡이보다는 희희낙락이 낫지 않겠어 ㅋㅋ) 근데 말이지 요다 님, 이런 거에 감동하지 말라고, 당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훨씬 훨씬 더 크다니까... (잠시 민망 -_-;;;)

zooey 2004-02-1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냐. 곰팡이가 나아. ㅠ.ㅠ

비로그인 2004-02-18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런 분위기였군요, 제가 없는 회식 자리는..(아아 가고 싶었음)
 

언제부터 '남편'이 비빌 언덕이었는지, 누구는 내가 회사 그만둔다니까 대뜸 "남편 있잖아!" 하대. 그것도 신기하지. 지금 같은 때 남편이 비빌 언덕이 된다는 건지. 아니면, 결혼한 여자가 사표쓰면 누구나 쉽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결혼은 평생직업이라잖아. 그러니 무슨 걱정 있겠어?' 이렇게 힐난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나도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인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를 것 같다가도 알겠다.

이참에 하는 말이지만, 작년 이맘 때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둘까 했었다. 나는 과감하게, "그래 그만 두고 어디 여행 다녀와라" 했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도 나에게 그대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남편은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았고 나는 그만 두었다. 이게 바로 '남편이 있잖아'의 의미일까? 남편은 가장 먼저 비빌 언덕이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보루란 뜻의?

그러면 묻자. 남편이 그런 의미라면 나는 영악해도 너무 영악하다. 그리고 남편 등이나 쳐먹고, 뼈골이나 빼먹는 여자다. 내게는 '남편 있잖아'의 의미가 그렇게 들린다. '당신 남편, 능력있구나', '남편이 있어 든든하겠어' 이런 의미가 아니라, '이 도둑년!' 이렇게.

그러니, 함부로 '남편 있잖아'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생각은 할 수 있겠지. 남편이 있으니까 사표도 쉽게 쓰네라고. 그래, 생각까지 내가 어떻게 재단할 수 있나? 그러나 생각은 하되, 그런 말은 내뱉지 않는 게 좋겠다. 그건 나를 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남편을 '봉'으로 보는 말이기도 하니까.

남편과 나는 사랑해서 결혼했다. 사랑하니까 먹여 살려야 한다고는 둘 다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벌어서 각자 삶을 연명하는 거다. 때로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산다. 그러니 엄한 말로 쓸데없이 결혼을 '모독'하는 건 금물이다.

결혼은 빌미가 아니다. 내 사표의 의미를 결혼에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사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 없는데, 이상하게 보면... 진짜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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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2-1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아주 옛날, 조교할 때이니 세배를 가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때 교수님이 그러시대요... "니는 남편이 있으니..." 하.하.하!

2004-02-18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다 2004-02-2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머... 답글이 늦어서 어쩐답니까.. ㅠㅠ
플라시보 님은 회사 정리가 아직 안 끝났겠지만, 저는 회사 정리다 집 이사다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답니다. 이렇게 자세한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미처 못보고.

플라시보 님. 의외로 저에게 아주 솔직한 면을 보여주셔서 저는 대략 당황하다가, 그러나 진심으로 제 글에 동감하는구나 이렇게 생각되어서 안도했습니다. 플라시보 님은 이제 곧 새로 멋진 일을 시작하시니, 남친에게 부담 지울 일도 없으시잖아요.

대범하게 한 걸음 놓으세요. 첫 걸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일도 아니랍니다. 플라시보 님은, 언제나 화끈하시니 보는 저도 늘 용기백배 한답니다.

플라시보 2004-02-2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그런말이 혹시나 오바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을 좀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비밀(이렇게 말하니 꼭 초등학생 같군요^^) 을 더 쉽게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