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일기>는 세계사에서 펴낸 유하의 첫시집이다. 유하는 키가 크고 얼굴도 허여멀건한 여간 말쑥한 청년이 아니다. 이런 청년을 길에서 본다면 '참 해맑네' 하고 눈길은 주겠지만 스스로 좋아할 타입은 절대 아니다.

유하는 성인의 모습보다 소년기의 모습이 반짝이는 사람이다. 그의 시는 영화보다 훨씬 명석하고 현실개입적이고, 단칼과 같은 차가움이 있다. 그러면서도 서정이, 고운 울림이 있어서 읽고 있으면 마음 속까지 상쾌해지곤 했다.

그의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처음이다. 이 영화에서 유하는 말죽거리(서초 역삼동)에서 보낸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천사같이 착한 '은주', 식모역만 맡는 탤런트 엄마를 둔 '우식', 그리고 나 '현수'. 등장인물은 깔끔하게 3~5명이다. 그밖에는 조연일 뿐이지만, 그 시대의 빛이 올바로 보이도록 효과를 주는, 등갓 만큼이나 필요한 역할이다.

'현수'는 고등학교 시절 유하라 할만큼 얼굴도 하얗고, 키도 큰 허여멀건한 학생이다. 얼굴도 훤해서 떡볶이 아줌마가 연정을 품을 정도. 그런 '현수'지만 가슴에는 '이소룡'을 깊이 품고 산다.

사람을 죽이는 걸 목표로 하는 '철권도', 뜻을 정하면 그 한 길로 매진하다는 '이소룡'은 소년의 우상이다. 현수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싸움을 걸 때 이소룡이 짓는 '체념'의 표정까지 똑같이 따라한다. 양 눈썹 아래에 어눌하게 힘이 들어간, 눈이 살짝 찌푸러진 표정. 싸움을 하겠단 표정인지, 제발 싸우지 말자는 표정인지 분간할 수 없는 걱정스런 표정.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이 표정 연기는 시종일관 계속된다. 그리고, 권상우의 이 주눅든 그러나 도전적인 이 표정은 참 걸작이다. 말투도 그렇고.

그건 그렇다 치고.... 학원 액션 로망이라는 홍보 카피처럼 영화는 액션과 로망 사이에 걸쳐 있다. 사실, '액션'보다는 '폭압'에 더 가깝지만. <품행제로>의 라스트 싸움씬과 같은 숨죽이는 현장감이 종종 등장하고, 고운 눈매의 '은주'(한가인 역)가 가슴을 설레게도 한다. 사이사이 들리는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 Morris Albert의 "Feeling". (캬~! 음악, 진짜 정취있다. 어쩜 그리도 애틋하고,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더불어, '역삼동 아이들'의 겁나게 재수없는 '후까시'도 등장한다. 선도부 '종훈'은 욕나오게 재수없다. 패(거리)를 지어서 교실 분위기나 잡고, 삥 뜯는 애, 빨간책 파는 애 군기잡는다고 쌍욕을 퍼붓질 않나. 지들이 뭐라고 사람을 그렇게 깔보고 짓뭉개는지....

현수는 심약해서 쌈도 욕도 못 하지만, 겁나게 무서운 학교에는 꼬박꼬박 다니고 있다. '햄버거'와 '우식'은 모범생과 다름없던 현수를 '고고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적당히 현실에 눈뜨게 해준다. 본격적으로 날티나게 놀기도 전에, '우식'은 선도부장 '종훈'과의 대결에서 명예를 잃고 '쪽 팔림'을 핑계로 가출해 버린다.

쓸쓸히 남겨진 '현수'는, '은주'마저 자신을 버렸다는 상실감에 괴로워하다 이내 새로운 목표('종훈'을 철권도로 찍어낸다!)를 세우고 체력단련에 들어가는데... (이 장면, 가네시로 카즈키의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서 스즈키 하지메의 트레이닝 장면과 비슷하다. 박순신에게 단련되는 스즈키와 달리 '현수'는 이소룡의 '철권도의 길'을 보며 스스로를 단련한다.)

이제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린다. 수일간 쌍철곤을 날리며 연습만 일삼던 현수는, 교실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종훈'에게 '옥상행'을 제안한다. 전력투구, 임진무퇴, 초반 한방의 기세로 '종훈'을 아작낸 '현수'.(굳세어라, 현수!) 학교밖으로 나가며 현수가 외치는 대사가 일품이다. "대한민국 학교 개좆이다!"(하여간 이 비슷한 멘트)

후련했다. 욕먹어 싼 학교, (그보다 더 후려칠 수 있다면 더 세게 갈겨주고 싶었으니) 그쯤에서 쏟아진 현수의 '욕'은 아주 손뼉을 쳐주고 싶을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하여간에, 역삼동 소재 <말죽거리 잔혹사>는 허여멀건하니 키만 큰 유하를 '제법 깡다구도 있잖아. 멋져! 멋져!' 이렇게 순간 좋아하게 한 영화다. (길에서 보면 '추파' 던져야지~)

하얀 얼굴에 키가 큰, '은륜의 텅 빈 중심'(<천일마화>, '無의 페달을 밞으며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1' 중에서)을 닮고 싶어한 유하는 멋지게 내게로 골인해 들어왔다. 영화 2편을 찍을 동안 시는 싹 잊어버렸는가?, 그 해맑고 당찬 시가 그리워진다.

빨리 나와라, 유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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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진 2004-01-2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죽거리 잔혹사. 실미도를 누른 영화죠.^ -^ 저는 실미도를 보고싶어한답니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ㅠ_ㅠ 허준호 아저씨랑 연기가 많이 보고싶답니다.^^ 제가 허준호 아저씨를 많이 좋아하거든요.^^'말죽거리 잔혹사'를 보시고 이렇게 긴 글을 쓰시다니.ㅇ_ㅇ 저도 실미도를 보고 이렇게 긴 글을 쓰는 날이 오길 바라며..^-^
 

토요일 저녁 8시 30분. '연결된 좌석이 없습니다'는 멘트를 네 차례나 확인한 뒤에 가까스로 예매한 영화, <실미도>. 나는 궁금했다. 북파 간첩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그리고 살인기계의 자의식을 어떻게 그릴까?

실제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영화를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스크린에 담았을까 궁금했던 것인데... 솔직히 말해 기대만 못했다. 그러나, 애초에 감독은 그 이상을 말하고자 애쓰지 않았던 것 같다. 충실한 재현에만, 그리고 그 혹독했던 684부대도 사람사는 곳이라는 '따뜻함'을 전하는데만 족한 듯 했으니까.

내가 실망한 건 너무 간단하게(물 흐르듯이) 684 부대를 말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의미가 이 부대엔 녹아 있다. 정말 건드릴 수 있는게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그리고 그 중에 어떤 것을 '훅'으로 잡아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것은 강우석 감독의 '훅'이었다. 난 좀체로 684부대를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으니 그의 해석에 기대겠다는 생각. 

684부대는 군대에 의해서 조직되고 훈련된 정예살인부대다. "하면 된다!"는 슬로건 아래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조직. 그 조직은 '김일성의 목을 딴다'는 목표하에 움직이고, 그것를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가차없고, 냉정한 곳에서 부대원들은 '살인기계'가 되어간다.

그런데 부대원들은 '죽임'에 대한 고민이 없다. '김일성'은 민족의 철천지 원수인데다, 그를 죽여야 '자유'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니 당연하다. 김일성 죽이자고 훈련받다가 병신되거나 죽는다면, 그건 운이 없는 것이고.

사람 목숨이 파리보다 못하다는 말은, 이 영화가 여실히 보여준다. 죽을 뻔한 사람 살려서 훈련시키더니, 끝내는 훈련받은 기술도 써먹지 못하게 부대원들을 사지로 내몬다. 684대원들은 분노가 극에 달해 청와대로 진격한다. 마을버스를 강탈하고,  서울까진 진입했지만 무지막지한 공권력 앞에서 부대원 모두 자폭한다.

자폭한다. 살인기계로 단련된 그들은 극도로 단순명료하다. '죽임' 아니면 '죽음'이다. 다른 방식의 삶도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 왜 차선을 노리지 않았을까? 영화는 그들의 '자폭'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한계상황에서 자포자기한다? 삶이 죽음보다 고달프기 때문에 죽는다? 684부대가 왜 모두 자폭해야만 했는지 보다 잘 설명했다면, 그들의 절망과 그들의 고통을 보다 더 리얼하게 다루었다면, '외인부대' 같은 영화가 아니라 부대원들의 실존을 다루었다면...

이야기가 되는 영화가 아니더라도, 좀더 사람에게 집중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권'이 말살된 시대를 말하지 말고 그냥 보여주기만 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영화가 사실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냥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더라면...

크게 모자르지 않게 괜찮게 만든 영화지만 그래서 더 아쉽다. 더 치밀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보다 더 심리적으로 그렇게. '외인부대' 처럼 보여져서는 안되는 역사니까. 말할 수 없이 폭력적인 현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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