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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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는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란 시집에서 '설겆이'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영혼이 말갛게 씻기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콧노래를 흥~흥~ 불며 이야기했지. 그런데, 나는 도대체 설겆이의 어떤 점이 그토록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도통 모르겠다.

먹고, 치우고의 반복. 그 연장선상에서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이런 과정들이 참 허망하고 이유없어 보이니까. 몸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책을 한 줄 읽는 것'만큼이나 무척 중요할진대, 나는 가끔씩 굶을 수 있다면 굶어본다. 아, 이렇게 잔인한 말이 어디있나? 하지만, 시간이 없으면 나는 굶는 방법을 택한다. (설겆이에서 시작한 말이 어떻게 '굶는 이야기'로 넘어왔는지 갑자기 망연자실... 어휴! 내 글쓰기가 그렇지, 모. -_-)

아니면, 간단하게 때울 수 있는 걸 사먹든가. 편의점에서 파는 건 삼각김밥 빼고는 다 인스턴트 식품이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 중 하나는 '정크 식품'을 거의 혐오했다. 어떻게 그런 걸 먹을 수 있냐며, 1차 식품을 맛있게 조리해서 호호하하하며 잡수셨다. 가끔 우리는 도시락 반찬을 통해서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의 질적 우수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하여간 나는 내 몸에 '쓰레기'를 먹이고도 '하하'하는 인간이었다. 왜? 조리하려면 귀찮고, 시간도 없고, 설겆이도 해야 하고.. 이유는 이랬다. 그런 내가, 요즘은 매번 설겆이를 해가면서 밥을 해먹는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고 짜증이 난다. 왜 이렇게 허무한 일을 할까,  하고.

그런 생각 끝에 이해인 수녀의 '설겆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 수녀님은 설겆이에서 카타르시스까지 느낄까? 그래서 수녀님인가? 암튼... 몸을 사랑하는 법,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한 개체로서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이 모순적인 행동(굶는 행동--어떻게 보면 파렴치한!)을 서슴치 않는다. (여전히 나는 정크푸드가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몸에 좋지 않겠지만.)

아.. 언제쯤이 되어야 나는 설겆이를 사랑하게 될까? 언제쯤이 되야 책읽는 것만큼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길까? 내 몸을 사랑하는 길, 도닦는 수련의 과정만 같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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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7-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살면서 정말이지 절실하게 사고팠던 것이 식기 세척기입니다. 요즘은 작은것도 많이 나오더라구요. 부엌에 조금만 공간이 더 있었더라도 저는 망설임없이 식기 세척기를 샀을 것입니다. 먹고나서 바로 설겆이를 하면 일이 아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지 실제로는 간혹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하죠. (저는 더구나 요리를 하면서 그릇을 무척 많이 사용하는 편이라 뭐 하나 만들면 싱크대가 미어터집니다.)
설겆이를 하면서 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기를 밀때도 걸레질을 할때도 그렇지 않던데 이상하게 가만히 서서 접시들을 퐁퐁뭍힌 수세미로 닦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튼지간에 저는 이해인 수녀님처럼 설겆이를 통한 즐거움을 느끼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물론 아주 투명한 접시나 컵을 씻을때는 흥겨움 비슷한걸 느낀것 같긴 하지만 대부분의 설겆이는 요리를 두렵게 하는 주범입니다.^^

초록미피 2004-07-2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리는 싫고 설거지가 좋아요.
영혼이 말갛게 씻기는 느낌까진 몰라도 설거지를 다 해놓고 행주를 널어놓으면 뭔가 보람찬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더군요. ^^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7월

여름이면, 습관적으로 추리소설을 읽는 사람. 있겠지? 그러니까 출판사도 꼭 여름에 때를 맞춰 새 작품을 출시하곤 하지. 쿠르트 발란더. 그는 이년 전 친구가 된 이래,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헤닝 만켈의 소설을 읽을수록 나는 어떤 익숙함, 친숙함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사회 및 현대인의 인간관계와 닮은꼴을 하고 있는 그의 소설은, 발란더와 그의 친구들이 있어서 그나마 정서적으로 안정된다. 스트로베리의 죽음을 시시때때로 애도하는 발란더를 보면서, 나 역시 그를 기억하고 회상한다. 이해하기 힘든 타입이라던 발란더의 아버지, 경찰 안내실의 에바, 수단으로 떠나버린 오케손 검사. 이제 막 새삶을 시작하려는 스텐. 그들은 발란더의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내 친구라고 할 정도로 심리적 거리는 가깝다.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정겹고, 친근한 느낌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 헤닝 만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무한히 삭막해질 수도 있었는데, 결코 삭막함-허망함-쓸쓸함에 머물지 않는다. 헤닝 만켈의 새 작품은, 우리에게 '전율과 충격'을 주는 한편, '편안함'도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서를 하면서,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를 다시 한번 만난다는 건 너무나 특별하다.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나 소설이 지금까지도 가슴 깊이 남아있는 것도 우리가 그 인물들을 창조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작가가 모든 상황과 인물을 창안해내지만 작가가 만든 그 인물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인물과 같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 말이다. 결국, 독서를 통해서 그 인물은 자기 안에서 창조된다.

그래서 발란더는 내게 자별하다. 자기만의 자리를 가진 발란더. 어떤 소설 인물보다도 더 큰 존재감을 주는 발란더. 그를 다시 만나는 건 언제나 헤닝 만켈의 펜촉을 통해서지만, 만날 때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발란더를 끄집어 낸다. 그는 여전히 건재하고, 훌륭하다.

애처롭게도 이번 <방화벽>에서는 용의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경찰관으로 동료들의 의심과 불신을 사고 있지만 그런들 발란더가, 그토록 충직하고 믿음직스런 친구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리 절대 없다. 어서 빨리 이 누명을 벗고, 또 사건도 잘 해결하고 어떻게든 애인도 사귀고 잘 해나가기만을 노심초사 빌 뿐.

발란더. 그는 나의 숨은 얼굴 같고, 내가 아는 세상사람들의 뒷모습 같아서 자꾸만 자꾸만 정이 간다. 이러게 허구의 인물을 정말인 것처럼 느낄 수 있다니. 어느 누가 소설을 쓴다면, 헤닝 만켈처럼 쓰기를. 그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인물을 독자와 함께 만들 수 있기를, 잘 하라고 행운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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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유목주의. 참 좋게 들리는 말이다. 들뢰즈는 왜 동양하면 '중국'을 떠올리지 않고 '몽골(티벳)'을 떠올렸을까? 동양의 대표이미지는 아무래도 중국일텐데 말이다. 

요즘 <노마디즘>을 읽는다. 섣불리 <천의 고원>을 읽자니 너무 두려워서 <노마디즘>을 경유하기로 했다. 그런데 들뢰즈를 읽으면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개념어도 그렇고, 이해를 돕기 위해 드는 예도 진짜 어렵다. 이해는 커녕, 일독에 의미를 둔다지만... 시종 리듬을 타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음악을 듣듯이 노마디즘을 걸고 들어달라는 저자의 요청에 '뭐, 그러지!' 흔쾌히 대답했건만.

그밖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들뢰즈.가타리 지음,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를 보았다. 개념적 인물, 생성, 내재성의 구도, 상대적 탈영토화, 집(House), 우주의 비인간적 힘과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 affection, perception.... 오.. 이렇게 어려운 것 투성이란. 흠. 그냥 책 한 권 다 읽었다에 의미를 둔다. 정복하려는 욕망 때문에 세계를 보지 못한다고 그가 말했다.

아직은 엉성하게 들뢰즈의 사유를 추적하는 중이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으니까, 뭐라고 하든 마냥 좋은 소리로 들린다. 그런 문제는 있지만, 이번에 새롭게 배운 게 있다. 단어 하나, 개념 하나 하나 비교하면서 의미를 파악하는 독법이다. 촘촘하게 읽기.

오랫동안 나는 책을 '오락'으로 읽어왔다. 한 줄 한 줄, 먹어나가는 식이다. 정확하게 의미를 따져보고 사전을 찾아보면서 읽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세세하게 생각하면서 읽으려니까 진도는 참 안 나가고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다. 더듬듯이 읽어나가면서 들뢰즈 철학을 그려보려는 것인데... 이 과정을 잘 거쳐서 들뢰즈를 알게 되면 무척 기쁘겠다. 마냥 좋아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실루엣이 분명한 들뢰즈를 갖는 것... 이게 지금 내가 바라는 바다.

요새 노래는 '불독맨션 1집, Funk', '언니네 이발관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듣는다. 장마가 한창인데, 듣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하다. 빗소리에 아침잠이 늘었다. 잠은... 잠은...., 비가 꾸는 꿈처럼 내게 달려든다. 빗소리... 자장가 소리. 자작자작 저물어가는 소리. 듣기 좋으면서도, 질린다. 아, 이 양가적인 감정이란! 잘수록 기분나빠지는, 들을수록 질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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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섭 사진화랑 개관 1주년 기념 전시회로 열린 '외젠 앗제'전. 사진 초창기의 숨은 장인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하고 특별한 전시다. 나의 경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외젠 앗제를 처음 알게된 후, 그가 사진사에 남긴 빛나는 족적을 흠모하게 되었다. 흠모라고 하기에는 사진에 대한 나의 지식이 짧고 무르지만.

하여간, '외젠 앗제'의 사진을 서울 한복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요새 국내 큐레이터들이 세계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사진시장의 규모와 그 상품성을 뒤늦게 깨닫고, 국내에 그 시장을 이식하느라 분주하단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급속도로 대가들의 사진전이 열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얼마전 시립미술관에서 했었던 '도큐멘트 전'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사진의 기록가치에 주목한 전시기획으로, 교육적 효과가 무척 컸다. 전시 작품의 독자성이나 미적 가치(?)보다는 미술관으로 들어온 사진의 위상(또는 이유를)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까? 나름대로 꽤 의미심장했다(진지했다).

뒤이어 열리고 있는 큰 큐모의 사진전(외젠 앗제-김영섭 사진화랑, 앙리 까리띠에 브레송-뤼미에르 갤러리, 헬무트 뮤튼전-조선일보미술관)은 그에 대면 엄청 발빠른 행보이다. 워낙에 이름있는 사진가들이라 언론 홍보로만도 관람객 모집이 가능하고, 외젠 앗제의 경우는 균일가 판매방식로 전작품 매진을 기록했다고 하니 대중성과 상업적 이익 두 마리 토끼를 잘 좆는 중이랄까.

지난 월요일 외젠 앗제 전시회를 찾았다. 4000원이라는 정말 저렴한 가격에, 60점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4000원이면 비싸지 않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살바도르 달리 입장권은 12,000원이다. 사진은 늘 회화보다 못하다고 평가받아왔지만(서양에서도 사진이 인정받기 시작한 건 몇 십년 되지 않는다) 앗제는 달리와 비등한 사진 거장이다. 아무렴! 사진이란 신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초상사진으로 일관하며 장식적인 회화를 흉내내던 시절, 앗제만이 사진의 독자성을 인식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앗제로 인해 사진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지 않았던가. 앗제 없이 현대 사진은 없다. 그런 앗제의 사진 60점을 4,000원의 가격에 볼 수 있다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다. 전시장 규모는 작았지만, 서울에서 앗제의 사진을 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더이상 불평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 또 앗제의 전시회가 열릴지 불확실한 이 마당에.

지금 사람들의 눈에 앗제의 사진은 범속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앗제에 의해 전파된 사진의 전형에 우리가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이지 그의 사진이 진부하기 때문은 아니다. 어디 그 당시에 풍경사진을 찍기나 했던가.

앗제는 초상사진이 범람하던 시대에 최초의 풍경사진을 탄생시켰다. 마치 범죄현장을 담듯 1890년대 파리 시가지 풍경과 근교 프로방스 지방을 계속해서 목적의식적으로 찍어낸 것. 포토그래퍼의 시작은, 그리고 취재사진의 시작은 앗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사진이 예술의 자리에 앉게 된 그 최초의 순간에 앗제가 있다. 사실, 앗제는 만 레이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자로 세상에 소개되었다. 사물만 가득한 앗제의 사진은 뭔가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의 눈에는, 앗제야말로 자신들의 강령을 앞서 실천한 선구자로 비쳤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앗제 사진을 초현실주의로 읽어내려는 경향은 여전하다(사진이 Fine Art에 발목잡힌 증거). 하지만 만 레이가 아니였다면, 앗제와 그의 사진은 더 깊은 잠을 자야만 했을 것이다.

앞서서 시립미술관의 '도큐멘트전'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앗제 사진은 바로 그 '기록가치'면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앗제 없이는 1890년대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이 점, 너무 명확하다. 사진의 기록가치란, 역사적 증거물... 바로 그 말과 같다. 보도사진만 해도 그렇다. 보도사진이 역사를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각광받지도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나의 느낌일 뿐이지만. 거기 덧붙여서 앗제 사진의 '사물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사물, 그 자체. 다시 말하면 '즉물성'. 이건 뒤샹의 '샘' 이후 생겨난 오브제 아트의 핵심주제이다. 사진은, 비록 입체적이지는 않지만 사물을 보여준다. 사물을 담고 있고, 사물의 어떤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것도 날카로운 기계의 눈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많이 좋아라했던 사진도 그런 류였다. 외진 골목, 손수레, 물통, 열려진 창문, 쓰레기... 대낮의 공동주택.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비의적인 느낌. 다른 세계--사물들의 세계--에 불쑥 들어선 느낌. 그랬다.

140만원. 앗제 사진 1장의 가격이다. 어떤 기준에 따라서 140만원이 책정되는지는 몰라도, 월급쟁이가 큰 맘먹고 구입할 수 있는 가격선이라고 (크게 잡아) 생각해본다(호당 몇 십만원 하는 그림도 있는데 말이지). 앗제 사진이 140만원이라는 건, 달리 보면 사진이 아무리 잘 나가봐야 모나리자 뺨을 칠 수 없단 이야기이기도 하고...(뭐, 작품 거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더 떠들 수도 없지만)느낌상~~ 의외로 쌌다는 말이다. 음... 좀 의외로.

 앗제 사진전에 맞춰서 책도 한 권 소개하자면...

판매가 - 10,800 원
할인폭 - 1,200 원 (10% off)
마일리지 - 3% (324원)
출고예상시간 : 72시간 이내


원제 : Euge'ne Atget (2001)
열화당
2003년 11월 1일 / 128쪽 / 155*137mm
ISBN 893010049X

 

도록(20,000원)보다 싸고 작품수도 많은 편이니 구입해도 손해는 안본다. 아예 열화당 사진문고 시리즈를 다 사면 좋겠지만, 부담이 된다면 이 책 한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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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7-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섭 사진화랑이 어디 있는 거에요? ^^ 보러 가고 싶은데..
브레송은 13점인가 밖에 안된다고 그러던데, 이건 꽤 많네요.

요다 2004-07-17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는 두 곳에 나뉘어서 진행됩니다. 인사동에 '크라운 베이커리' 아시나요? 바로 그 앞에 '유진관'이 있고, '토토의 오래된 물건'(상점 이름)이 있는 빌딩 3층에서(여기가 본관) 나머지 작품이 전시됩니다. 입장권 1장으로 두 곳을 다 둘러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