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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중에 자신의 현재를 점검한다는 의미다. 적어도 나에게는.                                              친구와 이야길 하다가, 언제 어떻게 정리되었는진 모르지만 최근에 내가 삶에서 받은 느낌이나 생각이 말로 되뇌어진다. 그러면 그때서야 '아.... 내가 이런 생각을 다했어? 아,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절친한 친구와의 만남이 늘 기대된다. 이번엔 내가 어떤 이야길 하게 될까, 뭐가 젤 좋았다고 말할까? 이런 기대. 나에 대해서는, 혹은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꾀고 있으리라 오판하기 쉽지만 나는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결코 뭘 느끼고, 보고 생각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오늘은 "약삭빠른 요즘 여자애들"에 대해서 이야길 나눴다. 친구는 "사장의 애인은 대개가 젊고 예쁜 것들이야. 걔들은 그런 식으로 권력을 쉽게 얻지. 일은 남보다 덜 하지만, 누구보다 더 인정받는 애들.. 그런 얘들을 보면 허탈해져."라고 말했다.

나는 "그애들을 보면 나는 재밌어. 걔들은 어떤 점에서는 나보다 스킬이 좋은 애들이거든. 걔들이 그렇게 사는 건, 어떤 뜻이 있어서거나 뭔가 (사장에 대해서 또는 집착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 의미심장해서가 아니라 단지 쉽게 강 건너는 법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걔들이 깡통처럼 보이거나 가볍게 보이지 않아. 다만, 이래. '대체 쟤는 언제 저런 스킬을 익힌 거지? 내겐 그런 스킬은 없지만, 그걸 볼 줄 아는 눈은 있다고. 야, 부탁인데 사기 치고 살지 말란 말야!' 근데, 그것도 웃기는 거야. 내가 그애들처럼 살지 않는 건 내가 더 도덕적이거나 더 깨끗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런 스킬이 없어서야. 그래서 걔들이 얄미운 거겠지. 솔직한 말로. 대충 즐기면서 향락적으로 사는 걸, 할 수가 없는 거야. '안 하겠다!'가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거지. 그런 게 난 참 재밌어. 뭐랄까, 한없이 통속적인 거 있지?" 

어느새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약삭빠른 계집아이에 대해서. 그들의 그 한없는 속도감에 대해서. 그리고 덧붙이기를...

"내가 허탈할 때는 말이지. 어떤 일이건 너무 쉽게 그것도 깔끔하게 해내는 얘들을 볼 때야. 물론, 그 애 나름대로는 힘들고 어려웠을 테지. 하지만 그 속내를 들키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일을 처리하는 얘들이 있다고. 나는 그런 애들을 볼 때마다 질투 나. <천재들의 방식 스프레차투라>란 책이 나와 있긴 하더만..., 그것도 스킬이겠지? 둘 다 똑같이 내겐 없는 스킬인데...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맥 못추게 하지. 왜냐면... 후자쪽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 같진 않거든. 나도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야.. 근데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까, 답답한 거지. ^^;;"

이런 생각.. 왜 했을까? 되짚어보니까 '사회생활 4년'이 그래도 답이 아닐까 싶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건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개중에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이 몇 있다. 대개가 '끝내주게 일 잘하는 애'다. 완벽한 일처리 솜씨는 상당히 쿨하다. 그 시원함을 나는 한동안 동경했고, 시기했고, 좋아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참 대충대충이지만 그 동경과 시기가 (내게) 어떤 단단함을 만들어 준 것 같다. 그리고, 누구와 견주어 일한대도 완벽한 일처리까지는 못되도, '인상에 남을 만큼의 솜씨'는 가진 것 같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과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중에서 나는 언제나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 왔다.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잘 할 수 있는 일'은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할 수 있으니, 밑지는 게 없다. 그런 신조로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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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4-1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절대로 할 수 없을것 같은 일들은 아예 근처조자 가질 않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고 쓸데없는 발버둥을 줄임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 하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미리 포기해 버렸으므로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사실인지의 여부에 대해 의문이 남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저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들만 골라서 해 왔습니다. 귀찮기도 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하는 타입도 열중하는 타입도 아니여서 말이죠. 님이 말씀하신 인상에 남을 만큼의 솜씨. 저도 그런걸 단 하나라도 가졌는지 되물어보게 됩니다.

요다 2004-04-1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플라시보님, 답신이 늦어 죄송하지마는...
인상에 남을 만큼의 솜씨, 그보다 더한 솜씨는 벌써 갖고 계십니다.
서재에 득시글하는 사람들이 그 증거 아닐까요? ^^
(이렇게 글도 남기고 하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지신듯. 앞으로도 더 잘 드세요.)
 

어떤 기분인지 아십니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울울섭섭 했답니다. 다시는 이 집으로 들어올 일은 없겠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미어지던지. 저는 이상하게 장소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입니다. 결국 사람은 그 사람의 내용성은, 장소에 구애를 받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사람이 한꺼번에 늘상 다니던 길과 건물을 포기하려 들 땐 어쩐지 마음이 안 좋단 거지요.

5층까지 오르느라 다소 헉헉댔던 이 계단. 베란다에서 보면 그렇게 풍경이 좋았던 '샘터가든' 정원. 집앞에 있어서 야밤에도 야식 걱정은 할 필요 없었던 패밀리마트(게다가 TTL은 늘 할인까지 해주어 여느 슈퍼 부럽지 않았다), 주인집에서 써붙이곤 하던 작고 앙증맞은 택배 메모 '502호 택배 있음'. 이 모든 것들이 마술처럼 동시에 사라지는 것. 그것이 살던 집을 떠날 때 겪는 마음 아픔이다.

꼬딱지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샤워 부스같은 것도 없었잖아) 원룸이었지만, 거기는 빌린 집이나마 내 집이었다. 그래서 뭘 하든 마음이 편했고 따스했고 좋았다. 집안도 좋았지만, 가게가 즐비한 길목들, 겨울 동안 곧잘 이용하던 동방사우나^^(후후... 언젠가 쓰겠지만, 나는 목욕과 책읽기를 '아오이'만큼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찜질방이 나의 사정권 안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한 번 가면 징하게 오래 있다가 오곤 해서.. 찜질방에서 아작낸--제본이 약하면 열을 견디지 못하고 책이 해체되기 때문--책도 적지 않다), 군것질거리가 즐비했던 시장통 골목 등등 수많은 상점과도 결별한다. 나는 이상하게 자본주의적이라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좋아한다. 쏙 들어가 커피 한 잔이라도 시켜먹고 싶은 까페가 있다면 금상첨화고. 그런 면에서 내가 살던 동네는 나에게 딱 안성맞춤이었는데.

이렇게 사랑했던 공간을 떠나보니까, 내가 그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 이사온 건대 앞에서도 나만의 가게를 발견하고 까페를 찾아내고, 즐겨갈 만한 호프집을 발견하리라. 이전 동네 만큼 감각적이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덜 촌스럽고 덜 상업적인 곳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본다. 더구나, 여긴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재래시장이 바로 코 앞이지 않던가! (호호~^^ 벌써 역발산 찜질방--맞다. 옛날 프로 레슬러 역발산이 운영하는 곳이다--도 다녀왔다. 그렇게 호화로운 시설은 아니었지만 이용할 만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으로 이사오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동부여성발전센터' 때문. 여기서 공부하고 심리상담도 받고, 운동도 하면서 아주 요긴하게 이용할 계획이다. 이 집에서는 한강공원도 가까워서 여름이면 자연학습체험장을 산책하면서 가벼운 마라톤도 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곧 좋아질 동네이기 때문에 '건대 앞'에 이사온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나는 아직 젊고, 그렇기 때문에 기회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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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2-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 7월에 3년동안 살던 원룸에서 지금의 투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말이 3년이지 정말이지 긴 세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나와 살다가 집에 들어가서 한 1년 정도 뭉게다가 다시 나와서 살았기 때문에 그 원룸은 좀 특별했었습니다. 하루만에 집을 보고 그날 당장 이사를 했던 원룸. 서울에서 살림살이를 다 친구 주고 내려와 버려서 제가 그 집에 들어갈때는 달랑 이불한채랑 책, 옷가지 등이 전부였었습니다. 하다못해 숫가락 몽댕이 하나도 없었으니...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살림을 사 모았지요
그런 집에서 이사를 가려고 하니까 참 이상하더라구요. 저는 1층이라서 여름이면 문을 휑하니 열어놓고(집 옆에 바로 경찰서가 있어서 두렵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참 좋은 점이었네요) 참외 갂아 먹으면서 낙서도 하고, 빨래 해서는 탁탁 털어 방에 널기도 하고(원룸이라 베란다가 없어서 늘 빨래와 함께 살았습니다.) 아무튼 이사를 가던날 눈은 멀쩡하지만 마음은 축축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마술처럼 동시에 사라지는 것. 그것이 살던 집을 떠날 때 겪는 마음 아픔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언제부터 '남편'이 비빌 언덕이었는지, 누구는 내가 회사 그만둔다니까 대뜸 "남편 있잖아!" 하대. 그것도 신기하지. 지금 같은 때 남편이 비빌 언덕이 된다는 건지. 아니면, 결혼한 여자가 사표쓰면 누구나 쉽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결혼은 평생직업이라잖아. 그러니 무슨 걱정 있겠어?' 이렇게 힐난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나도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인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를 것 같다가도 알겠다.

이참에 하는 말이지만, 작년 이맘 때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둘까 했었다. 나는 과감하게, "그래 그만 두고 어디 여행 다녀와라" 했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도 나에게 그대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남편은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았고 나는 그만 두었다. 이게 바로 '남편이 있잖아'의 의미일까? 남편은 가장 먼저 비빌 언덕이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보루란 뜻의?

그러면 묻자. 남편이 그런 의미라면 나는 영악해도 너무 영악하다. 그리고 남편 등이나 쳐먹고, 뼈골이나 빼먹는 여자다. 내게는 '남편 있잖아'의 의미가 그렇게 들린다. '당신 남편, 능력있구나', '남편이 있어 든든하겠어' 이런 의미가 아니라, '이 도둑년!' 이렇게.

그러니, 함부로 '남편 있잖아'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생각은 할 수 있겠지. 남편이 있으니까 사표도 쉽게 쓰네라고. 그래, 생각까지 내가 어떻게 재단할 수 있나? 그러나 생각은 하되, 그런 말은 내뱉지 않는 게 좋겠다. 그건 나를 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남편을 '봉'으로 보는 말이기도 하니까.

남편과 나는 사랑해서 결혼했다. 사랑하니까 먹여 살려야 한다고는 둘 다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벌어서 각자 삶을 연명하는 거다. 때로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산다. 그러니 엄한 말로 쓸데없이 결혼을 '모독'하는 건 금물이다.

결혼은 빌미가 아니다. 내 사표의 의미를 결혼에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사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 없는데, 이상하게 보면... 진짜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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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2-1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아주 옛날, 조교할 때이니 세배를 가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때 교수님이 그러시대요... "니는 남편이 있으니..." 하.하.하!

2004-02-18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다 2004-02-2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머... 답글이 늦어서 어쩐답니까.. ㅠㅠ
플라시보 님은 회사 정리가 아직 안 끝났겠지만, 저는 회사 정리다 집 이사다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답니다. 이렇게 자세한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미처 못보고.

플라시보 님. 의외로 저에게 아주 솔직한 면을 보여주셔서 저는 대략 당황하다가, 그러나 진심으로 제 글에 동감하는구나 이렇게 생각되어서 안도했습니다. 플라시보 님은 이제 곧 새로 멋진 일을 시작하시니, 남친에게 부담 지울 일도 없으시잖아요.

대범하게 한 걸음 놓으세요. 첫 걸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일도 아니랍니다. 플라시보 님은, 언제나 화끈하시니 보는 저도 늘 용기백배 한답니다.

플라시보 2004-02-2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그런말이 혹시나 오바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을 좀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비밀(이렇게 말하니 꼭 초등학생 같군요^^) 을 더 쉽게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행복한 페미니즘 / 벨 훅스, 백년글사랑 펴냄

<행복한 페미니즘>(백년글사랑 펴냄)의 지은이이자 미국의 급진적 흑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는 페미니스트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기간 내내 나는 페미니스트였던 선배들과 동료들에게서 ‘여성해방’이 곧 ‘인간해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노동해방’이 ‘인간해방’의 일부라는 말처럼 내게는 자연스런 진실로 느껴졌다. 벨 훅스의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 역시 이런 관점과 동일선상에 있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요컨대 성차별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성차별주의적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나 일단 ‘계몽’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남성지배사회에 남성으로 태어난 ‘나’는 일단 기득권자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거기에 ‘부정’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일단 내게 주어진 유형무형의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 ‘동의와 부정’의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성차별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지양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 성립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체화된 남성으로서의 나의 ‘무의식’은 끈질기고 견고한 반면, ‘의식’으로서의 ‘신념’은 풀잎사귀처럼 자주 흔들렸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극소수의 여성 동료들로부터 간간이 제기된 비판도 나를 흔들리게 했다. “아무리 노력해 봐라. 너의 본질은 남성이니까.” 이런 비판은 마초인 남성 동료들에게서도, 페미니스트인 여성 동료들에게서도 동시에 들려왔다. 남성 동료들의 비판을 들으면서, 나는 비록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남성 지배사회’라는 기득권에 투항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여성 동료들의 비판을 들으면서 나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순간적 절망에 빠졌다. 이 ‘유혹과 절망’은 나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벨 훅스의 지적은 그런 내 혼란을 멈추게 했다. 앞에서 내가 언급한 양극단의 사람들은, 그들의 발언이 비록 차별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성이라고 하는 것을 본질주의로 수렴시킨다는 점에서는, 다 같은 성차별주의자라는 지적 때문이다.

“남성을 투쟁의 동지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남자들이 페미니스트 정치학에서 무어라도 얻는 게 생긴다면 여자들은 무어라도 잃고 말 거라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의심하고 폄하하는 대중의 입지를 자기도 모르게 강화시켜 왔다. 그리고 남성을 혐오하는 그런 여성들은 때때로 페미니즘이 더 이상 발전을 못하거나 말거나 남자들과 함께는 운동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밖에도 지은이는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즘 운동 내부의 격렬한 논란거리를 거리낌없이 조명하고 있다. 대중적인 운동과 멀어진 강단 페미니즘의 폐해, 페미니즘 운동 지형 안에서의 계급정치의 문제, 인종주의와 동성애 혐오를 포함한 분리주의 경향, 가부장적 매스미디어의 가공할 문제점 등등. 이 책을 읽고 나는 또다시 자문해 보았다. 나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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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 2004-01-3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가끔 남편과 남성을 배척하는 여성주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내 스스로도 빠지게 되는 함정이기 때문에 남편의 말은 신선한 자극이 된다.

결론적으로 남편의 이야기는 '여성만 위하는 운동은 페미니즘이 아니다'란 건데, 그 근거는 이렇다. '성차'에 기반한 차별을 철폐하겠다며 '남성=적'으로 보는 감성적 운동방식은 거꾸로 남성을 차별하는 운동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적'으로 몰고 갈 때,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남자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게 되며, 구태어 '적'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남성 무리로부터 빠져나올 마음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만을 위한 페니미즘'이 함께하려는 남성들을 따돌리고 적대시함으로서 스스로 고립된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에 대해 전적으로, 그리고 심증적으로 동의하는 나는(그런 한편, 성차별이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이런 적대적 태도를 가지기 쉽다. 나 또한 때때로 그러하므로. 그러나 차별의 당사자는 언제나 자신이 희생양이란 사실에 분노하므로, 분노의 화살을 '남성성'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분노는 이성을 잃게 만든다.) 이명원의 글을 읽었을 때,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고로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은 여자든, 남자든, 전업주부든, 커리어우먼이든, 인종적으로 차별받는 사람이든 누가 읽어도 좋은 멋진 책이다. 알라딘 편집자 추천도서기도 하다. 함께 볼만한 책으로는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정유성 지음, 책세상 펴냄)가 있다. 이 책에 붙은 마이리뷰 "함께 빠져 나오지 않을래요?"(나의추억 님의 리뷰)는 정말 잘 쓰셨다.

유희가객 2004-02-0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눌~
어떤 형태든 목적이든간에 "인종주의적" 차별은 그 자체로 죄악이야~!!
그건 여자니까.. 하는 것처럼... 남자니까.. 하는 거랑 다르지 않은거잖아.

그리고, NIMBY 가 절대로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적으로 수렴할 수 없듯이,
적대적 페미니즘은 결코 다 같이 평등하게 잘 살자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거덩.

세상이 거시기한 관계로, 지금은 '서방'이 좀 더 기득권을 갖고 있는건 분명하지만
내 그걸 하루에 한가지씩만 포기하도록 하지.
한번에 포기하기엔, 아무래도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긴 듯도 싶고
아직은 좀 미숙한 마초 근성도 있는듯 싶으이~

이상. 예쁜 마눌의 잘난 서방이었음다~!!(ㅎㅎㅎ)
 

이건 어떻게 보면 자화자찬일 수 있지만,  알라딘에서 일하며 알라딘 리뷰의  글쓴이들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글'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리뷰읽기가 유난히 즐겁다. 더구나, 메인 페이지에서 '추천도서' 페이지로 그 위치를 이동해 아는 사람만 찾아보는 공간이 된 이후로는 나는 마치 '비밀일기'라도 훔쳐보는 듯 기분이 새롭다.

간만에 알라딘 리뷰 코너에 들려, 근 1~2달치 리뷰를 읽는다. 하나씩 클릭해서 서평을 읽고, 얼마나 팔렸는지 세일즈 포인트를 점검해보면서 '애개!+__+ 이건 왜 이것밖에 안 팔렸어? 아, 아쉽다. 아까워...' 하거나, '흠흠...  ^^ 역시 이 사람 센스있고 멋져.' 라든지 '이 따땃한 기분, **는 여전히 좋은데..' 혹은 '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잘 쓰다니. **는 진짜 숨은 보석이야' 혼잣말한다.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알지만,  참 좋은 서평이기에 나 하나만은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쓴 글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게 와닿고, 최소한 '팔아먹으려고 꼼수'를 쓰는 글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나는 가장 좋은 글의 요건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 작품이 줄 수 있는 감동과 사회과학/인문학 책이 줄 수 있는 감동은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제각각 책을 읽고 나름대로 감동한다. 그리고 감동먹은 가슴으로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이 책을 선전하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컴퓨터를 두드리고, 술안주로 꺼내 감상을 늘어놓곤 한다.

자연스럽게 좋은 마음. 이게 '감동'일 거라고, 그렇다면 글이란 '완성도'가 아니라 '울림'에 그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미숙한 글은 괜찮아도, 매만진 글은 창피스럽다. 이렇게 저렇게 뜯어고친 글은, 왠지 보이기에만 신경쓰고 진심은 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그렇다.

편집자에 따라서 글맵시도 표현력도 다 다른 것이지만, 하지만 알라딘 리뷰에는 책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애쓴 흔적이 있다. 나는 내 동료에 대한 그만큼의 믿음으로 알라딘 리뷰를 읽기 때문에 읽는 그 순간순간이 좋은가 보다. 오늘 동료들이 더 가깝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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