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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벽 1 ㅣ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끔찍한 사회를 조금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서 글을 쓰고 있다. 해가 갈수록 사회의 모습은 열악해지고 있으며, 착취와 굴종이 증가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이러한 사회에 대한 저항에 참여하고 있다."
쿠르트 발란더 수사관을 창조한 헤닝 만켈의 말이다. 발란더 시리즈를 보면, 이 말의 의미를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리라. 그만큼 헤닝 만켈의 소설은 현대사회의 취약점을 잘 보도해왔다. 새 작품에서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거리의 소멸과 확장, 전 세계를 촘촘하게 연결시켜 주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엄청난 편의성과 그 취약성을 짚어보고 있다.
발란더 시리즈의 특징은 전편의 사건이나 인물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쿠르트 발란더라는 한 개인을 마치 살아있는 친구처럼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건해결 도중 순직한 스트로베리, 그리고 지금은 기억으로만 남은 아버지, 경찰 안내실의 에바, 아프리카에 가 있는 오케손 검사, 이제 막 농장을 처분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스텐. 발라던의 주변인 중 우리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익숙함과 편안함을 주는 것은, 발란더가 우리와 함께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기 때문이다.
<방화벽>을 펼쳤을 때, 당신은 옛 친구가 다시 찾아오기라도 한 듯 반가움이 앞설 것이다. 그리고나서야 '흠~, 발란더는 여전한데 그래?' 하고 소파에라도 누운 것처럼 편안해진다. 쿠르드 발란더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사건이 벌어지면 암중모색 속에서 끊임없이 망설이고, 회의하고, 자신의 능력부족에 절망하고 좌절하면서도 끝까지 사건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근성의 수사반장이다. 우리는 그를 볼 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본다. 발란더가 불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설 때, 일종의 동료애를 느끼는 것이다. <방화벽>을 펼쳤을 때, 그리움과 반가움 한편에서 속수무책 비슷한 마음이 들어서는 건 그래서다.
중년의 고독에 찌든 발란더는 촌스러운 외모에 뚱뚱하며 당뇨까지 앓았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날씬해지고 건강도 많이 좋아진 모습이다. 커피는 지금도 많이 마시지만, 사건이 복잡해지기 전에는 그래도 꾸준히 산책을 나갔다. 너무 고독한 나머지 신문에 애인구인 광고를 낼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은 귀여운 그의 단면. 오늘도 공허하고 고독한 발란더(어서 짝을 만나야 할텐데......).
이번 사건은 <하얀 암사자>처럼 무척 스케일이 크다. 엉뚱한 지명과 나라가 한 사건과 연결되고, 전혀 상관없이 보이던 두 사건이 겹쳐지고 연결된다. 그런가 하면 컴퓨터 보안시스템을 꿰뚫고 정보의 불법사용을 도모하는 해킹이 이 소설의 주요 이슈로 등장한다. 애초에 불필요한 접근을 막는 도구였던 '방화벽'(컴퓨터 보안시스템)이 컴퓨터의 세계를 넘어 주변부 사람들--실패자, 각종 중독자들, 실업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부부간, 부모와 자신간, 동료와 친구간의 저마다 보이지 않는 벽이 높아지고 있음을 헤닝 만켈은 예리하게 고발한다. 그의 깊은 주의력과 세밀한 인간사 통찰에 또한번 놀랄 뿐이다.
늦은 밤 산책길에 나선 한 중년 남자가, 은행의 자동예금인출기 앞에서 느닷없는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전 세계를 단방에 무너뜨릴 끔직한 음모가 진행되는 가운데, 살인사건은 나비효과처럼 잇따라 발생하는데.... 택시강도살인사건의 용의자였던 쇼냐는 변전소 고압전류에 끼어 시꺼멓게 타죽은 채로, 또 그녀의 남자친구는 페리호의 프로펠로 굴대에서 갈가리 찢긴 채 발견된다.
도대체 이 사건의 시작과 끝은 어딜까? 헤닝 만켈은 사이버 스페이스의 허약함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읽을수록 더 흥미진진해지는 방화벽! 헤닝 만켈의 팬이라면 반드시, 아직 한번도 읽지 못했다면 <한여름밤의 살인>부터 시작해보라. 장담하건데, 계속 다른 작품을 찾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제 아버지와 같이 지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물론 저도 종종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일들이 이제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군요. 이러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지겠지요"
"같이 지내기 쉬운 사람이 어디 있겠소? 당신은 그런 타입이오?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오. 내 아내에게 물어보면 아실 게요" (1권, p.308 중에서)
"이 방에 있으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요. 시간을 불문하고, 기술은 한편으로는 강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취약한 면도 있지요" (1권, p.72 중에서)
"마틴손은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그는 교활하고 노회한 인물이에요. 서장님에게 가서 반장님이 이번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어요."
"내가 수사를 잘못 지휘하고 있다는 건가?" (2권, p.14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