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화류계'란 네이버 블러그에서 그대로 긁어온 것입니다. 평소, 조영남의 사상이나 활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막연하게나마 '퍽 자유롭고 즐겁다'고 생각해 온 저는 아래 글을 읽고 약간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글쓴이의 말씀이 하나 틀리지 않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한편, 조영남의 행태가 여느 50대와 그렇게 꼭 같지는 않다고 반박하고 싶은 맘도 있습니다. 그만큼 남의 시선에 연연해 하지 않는 50대란, 체면을 세우기보다는 망가뜨리는 데 관심 많은 50대란 흔치 않기 때문이고 그가 쓴 책에 씌어있는 내용을 볼 때, 그는 '사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민해 본 사람같기 때문인데...  (그가 대충대충 혼자만 즐겁게 살려는 박영규 스타일인 것만은 분명하지만요.) 글이나 말로는 지금 시점에서는 잘 설명이 안됩니다. 좀 더 생각해봐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래 글을 잘 읽어보고, 그의 성공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여지는 충분합니다.

우리 시대의 DDR('딴따라'의 조영남식 표현이다) 조영남은 되게 바쁜 사람이다. 조영남 본인의 말만 들으면 더욱 그래 보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표 값이 10만원인 디너쇼를 해도 1000명이 모이고, 열린 음악회에도 늘 3만 인파가 몰려든다. 본업인 '가수'로서도 성공한 사람 처럼 보인다.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과 일본 신주쿠 한 복판에 있는 한식점에서 식사하고, 최은희-신상옥 부부와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있는 한식집에서 냉면을 먹으며, 연극인 박정자와 서울 명동 양식집에서 포도주를 마신다니 사회적으로도 탄탄대로를 달리는 모양이다. 또 조영남의 말로는 본인이 국회의장 박관용과도 친분이 있고, 소설가 출신 국회의원 김홍신과 막역한 사이라니까 권력 실세와도 상당한 연줄을 지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시 조영남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결혼을 세 번이나' 하고, 수많은 스캔들을 뿌리고 다닌 '매력남'이다. 여기에 화투패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기도 하며, 베스트셀러가 된 신학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으니 대중들에게 조영남이 다재다능한 예술인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화면이나 지면으로 드러나는 조영남은, 엄밀히 말해 예능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예능인이라면 어느 정도 언어 사용을 절제하고, '정치적 가치 중립'을 표방하며 사생활의 매체 노출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영남에게는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조영남은 방송에서건 지면에서건 말을 '함부로' 하는 인물이며, 한나라당 당원인데다가 세 번의 결혼을 자랑으로 삼는 특이한 예능인이다. 조영남식으로 표현하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50대 아저씨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조영남의 글과 말과 활동은 사실 대부분의 보편적인 한국 50대 남성을 여과없이 반영하는 것들이다. 좋게 말하면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속물이다. 조영남은 같은 50대라도 세상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어느 정도는 패배주의 성향이 있는 홍세화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대강 살아가는 드라마 속의 박영규(=속물 남성) 쪽에 훨씬 맞닿아 있다.

조영남의 사상

가령 이념적인 면에서 조영남이 보여주는 것은 극도의 순진무구함과 특정 신문 논조 따라 읊기로 대표되는 '백지 상태'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본다"고 2001년 여름(안티 조선이 한창 열을 뿜던)에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은 정치 성향이나 대담함 여부를 떠나서 그가 이념적으로 공백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사상적으로 '제로' 상태임을 은연중에 고백해 버린다.

저는 그전에도 그랬고 10년째 살고 있는 지금 집에서도 계속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들이 많이 보길래 따라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무런 하자가 없었습니다.(조선일보 독자와의 대화 '조영남의 내가 조선일보를 보는 이유' 중에서)

'남들이 많이 보기에' 조선일보 애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조영남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구독자의 대부분은 특별히 그 논조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혹은 '경품과 무가지' 때문에 조선을 본다. 그리고 '아무런 하자 없이' 보다 보면 논조에 동의하게 되어 버린다. 조선일보 사설에 나온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주장인양 줄줄이 읊는 아저씨들과 조영남은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만은 않다. 다음과 같은 조영남의 말은 어떤가.

조선일보가 너무 극우라는 말도 웃깁니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남쪽 대한민국에서 극우가 푸대접 받는 걸 다 보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에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일방적인 극우교육을 받고 정신무장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장을 풀고 극좌를 하라니, 이거 어디 얼이 빠져 견디겠습니까.

한마디로 자신이 어릴 때부터 반공 교육을 주입식으로 받고, 성인이 되어서는 개발 독재의 휘하에 일개미가 되어야 했던 세대라는 고백인 셈이다. 극우 아니면 죄다 극좌라는 '한국논단'식 견해는 차치하고서라도.

조선일보는 방송국 친구들 말대로 정부·여당을 심하게 '까는' 경향이 농후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정부와 권력의 잘잘못을 따지고 까는 신문이 아니면 무슨 재미로 신문을 본단 말씀입니까. 신문이 할 일이 솔직히 '까는 것' 말고 뭐가 있습니까. 조선이나 동아나 대대로 잘 까서 오늘날 대표 신문이 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바로 그 '까는 신문'에 얼마나 충심으로 박수를 보냈으며 얼마나 찬양을 해왔습니까.

조선일보가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는 정부-여당을 '전혀' 까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조영남은 무관심하다. 조선이나 동아나 대대로 잘 '용비어천'해서 오늘날 대표 신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심한 모양이다. 이는 단순히 의도된 무관심이라기보다는 '까는 신문'에 충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찬양한 덕분이라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용갑 의원의 '친북 좌파' 발언은 그에게는 색깔론이 아닌 단순히 웃자고 한 얘기로 둔갑한다. 조영남은 그런 Fact를 종합해 본인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물론 이념적으로 공백 상태가 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주체적인 인간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문제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50이 넘은 남자가 온전히 '주체'로서 사상적 백지 상태가 된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그냥' 아무 신문이나 보고, 개발 독재 하에서 반공 기치를 주입받으며 자라고, 가치관 형성의 계기도 없이 돈벌이에 휩쓸려 나이를 먹은 세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거대 신문의 의도에 충실히 영합하는 조영남이란 인물은 한 특정 세대의 사상적 공백 상태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하다.

조영남의 인맥

조영남의 폭넓은 인간 관계는 이미 서두에서도 드러났지만, 연예계와 정치계를 넘나들고 나이와 활동 분야를 막론한다. 조영남은 얼마나 자신의 벗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던지, 이런 글을 스포츠 조선에 기고하기도 했다.

유명인들과 특정 장소가 아닌 그냥 보통 장소에서 보통 옷차림으로 아무 제목도 없이 만나 불고기나 냉면이나 포도주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이쯤에서 당신은 당연히 충격을 받아야 한다. 당신이 사람 같으면 이런 경우에 질투심을 느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럴 때 꼭 삐지는 사람이 있다.
"어머! 난 유명인 안 밝혀! 취미 없어. 밥맛없어!"
이러면서 말이다. 나는 평소에 두리뭉실 비교적 양순한 편인데 DDR(딴따라) 쪽의 이름만 들어도 괜히 눈살을 찌푸리거나 짜증을 내는 인간들,TV를 안 본다거나 연예인들을 모른다며 우아를 떠는 일부 돼먹지 않은 인간들을 보면 나는 울컥 무자비한 살해의 충동을 느끼곤 한다.
살인은 대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도 바락바락 우기다가 졸지에 피해를 당한 경우가 작년 한 해에 74건이나 있었다.
"아! 조영남 저 인간이 뭔데 생긴 건 꼭 뒷마당 머슴처럼 생겼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지휘자를 만나고, 우리나라 최고의 명배우 명감독을 만나고,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배우 박정자 윤석화 등을 줄줄이 사탕으로 만난단 말야?"
이런 식으로 덤비다가 당한 거다.(조영남의 횡설수설 '유명인도 별 게 없다' 중에서)


뿐만 아니라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든든한 '빽'과 유명한 벗들을 자랑하고 글의 소재로 활용한다.

오래간만에 조영남의 이름으로된 초대장 하나를 만들었다.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한달가량 공연되는 진짜 브로드웨이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구경오라는 초대장이다. 만일 돈을 내고 구경할 경우 얼마짜리 티켓에 해당되는 거냐. 10만원이상 내야되는 티켓이다...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초대장을 보냈느냐, 아니면 무슨 빽이 있는거냐?... 전번에 '캐츠'를 우리나라에 들여왔던 사람이 다름아닌 CMI 회사의 대표 정명근씨다. 정명화, 경화, 명훈 음악형제의 제일 윗형이다... 어느날 정사장을 만나 "전번에 내가 내 친구들한테 '오페라의 유령' 표 10장을 사서 내 친구 이성미, 주병진, 류시현 등등한테 줬더니 그렇게들 좋아하더라. 그런데 방송국의 이남기 김영선 신종인 등등한테 표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가 펑크를 내서 이번엔 하늘이 무너져도 표를 사줘야 한다"고 했더니, 정사장 왈 "거, 표 10장으론 해결이 되겠소? 아는 사람 죄다 부르시오. 표 값은 내가 계산하리다."
이렇게 된 것이다...나는 내가 아는 친구들, 지인들, 정치인들, 문화계 인사들의 이름을 죄다 댔다. 그래서 무려 400명으로 늘어났다. (조영남의 횡설수설 '여름밤 우정의 초대장' 중에서)

지난주 금요일(12일) 오후 6시 나는 박관용 국회의장과 저녁을 함께 했다. 그것은 일종의 특별한 체험같은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식사를 함께 하겠다는 상상이나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상책이다. 동네 어른이나 학교의 스승 정도로 여기고 "식사나 한번 하실까요?" 했다간 냥패를 겪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영남의 횡설수설 '국회의장과의 만찬' 중에서)


이렇듯 조영남에게 있어 인간관계, 광범위한 커넥션은 일종의 '권력'이다. 하다못해 영화 한 편 보러 갔던 얘기를 하는데도 함께 간 여자들이 어떤 유명인인지 시시콜콜 털어놓는다. 김홍신 의원 이야기는 거의 모든 글에서 빠지질 않는다. 입당을 놓고 민주당이냐 한나라당이냐로 고민하다가 친구가 있는 한나라당 쪽을 택한다는 이야기는 사상적 공백의 차원을 넘어 '인맥'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세대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만 같다.

이는 사실 조영남 개인만의 특성이 아니라, 그가 속한 세대 차원의 광범위한 '삶의 포즈'이다. 그리고 일반화된 한국 사회의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꿀리지 않아야' 하고, 나에게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직장을 다니는, 좋은 학교를 나온, 명망있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친분을 맺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 상대와 친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내 아는 사람 중에 검사가 있는데' 내지는 '내 친구가 대기업 이사를 지내는데' 하는 식으로 만방에 떠벌인다. 대단한 사람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스로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속성을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인도 유명인이면서 유명인들과 친함을 과시하는 조영남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냥 순수해서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속물'의 태가 묻어 난다.

조영남의 성공시대

조영남이 그가 속한 세대를 대변하는 사례는 그 외에도 더 있다. 이혼 경력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젊은 여성들을 편력한다고 과시하는 조영남은 지하철에서 여성의 몸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년 남성의 시선을 상기시킨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농담과 조소와 궤변으로 대충 마무리짓는 그의 글은 목청 높은 사람이 승리하는 중년 세대의 법칙을 간접 증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서두에 언급한 조영남의 '성공한 인생'이 그가 대변한 세대의 특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조영남은 끊임없이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며 쉴 틈 없는 인생을 보낸다. 하지만 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예술 활동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성취'라고 부를만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공이란 것이 실제는 '인간관계'와 '언론권력'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가짜'임을 깨닫게 해 준다.

조영남의 성공에는 일종의 패턴이 존재한다. 가령 그의 전시회 같은 경우. 전시회에 수 백 명의 각계 인사(전부 친한 사람들이다)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작품의 예술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대신 각계에 걸친 인간관계는 없는 예술성도 만들어내는 마법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 '조선일보' 문화면에서 조영남의 전시회를 보도하고, 방송의 연예 프로그램에서 취재함으로 '홍보'의 기회를 얻는다. 아울러 전시회와 관련해 예술계 인사들의 '립서비스' 몇 마디가 이어지면 이는 작품을 실제로 본 일이 없는 대중들에게 '그림도 잘 그리는 구나'하는 식의 '고정관념'을 부어 넣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가 노래하는 공간은 실상은 관제 노래자랑 대회로 전락한 '열린 음악회' 뿐이며, 그곳에서 그는 성악도 가요도 아닌 모호한 창법으로 남의 노래들과 본인의 유일한 히트곡 '화개장터'를 열창한다. 이따금씩 음반도 내지만, 거기서 예술적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조영남의 글을 정기적으로 실어주는 매체는 '스포츠조선'과 '조선일보' 뿐이다. 정상적인 편집장이라면 '비속어'가 난무하고 자기 자랑 이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조영남의 칼럼 같은 것은 지면에 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조영남은 공개적으로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친 조선 필자이므로 조선 편집장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이쯤 되면 조영남의 불가사의한 성공 신화에 조금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못생긴 외모와 난삽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 칭송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거두는 보편적인 방식을 잘 말해준다 하는 편이 올바를 것이다. 조영남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기득권층에 면밀히 영합'하는 사상과 생활 방식을 지니며, 그 둘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영리하게 활용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일반적인 중년의, 속물 남성들의 살아온 방식과 궤적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비극적인 개발 독재의 철퇴를 미처 사고와 판단이 성숙되기도 전에 두들겨 맞은 '어른 세대'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 남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조영남과 그의 세대는 20대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뻘' 되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는 엄청난 비극이다. 얼마 전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은 "50대가 20대를 잘 이끌어서 좌편향의 30대를 압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단순무식한 극우 논객(보수층에게조차 놀림감이 되는)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치밀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조영남과 같은 '아버지뻘'의 50대가, 비슷한 특성을 지닌 20대를 구슬러서 '속물'의 인생 패턴을 답습하게 한다면 이는 역사의 퇴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행히도 20대는 많은 부분에서 조영남과 그 세대의 특성을 닮아가고 있다. 미디어를 맹신하고 주류와 권위에 순응하며, 정치와 이념 문제에 있어 최대한 무관심하고 물질적인 성취에 경도되는 특성은 50대나 20대나 부전자전이다. 아버지가 구독하는 조선일보를 아들이 함께 보는 현상은 굳이 소년조선의 유소년 세뇌 전술이 아니라도 필연적이다. (20대 청년 조성모는 광고 화면을 통해 '저는 조선일보를 봐요'라고 속삭인다) 이는 반공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자라 '극우의 이론화'의 경지에 이른 60대와 아들뻘인 386의 관계와는 경우가 다르다. 386은 세상과 마찰하려는 이론적-현실적 필요를 느낀 이들이지만, 그나마 민주화된 지금의 20대는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쿨'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실제로는 주류 입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속물의 성장 과정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인 영역 하나만을 놓고 스스로 쿨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조영남, 혹은 그의 세대에 대해서는 가급적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최대한 '싫어하는' 혹은 '부정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돌려 말하면, 조영남처럼 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조영남처럼 조선일보만 보지 말고 다른 좋은 책도 좀 읽고, 없는 능력으로 여러 분야 손대지 말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좀 더 진솔하고 대가 없는 인간관계를 맺어 나가는 등의 노력 말이다. 조영남 세대는 죽고 나면 비참할 뿐이다. 문상객으로 이성미-이경실이 찾아올지는 몰라도 정명훈이나 조수미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고, 남겨놓은 업적이 없으니 나중에 이름 석자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달라진 건 조선일보 구독자가 하나 줄었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이런 삶이 되면 굉장히 심난할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조영남은 조갑제와는 달리 '무시'나 '폄하'의 대상이 아니다. 적극적인 '부정'의 대상이다. 조갑제야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없으니 무시해도 상관이 없지만, 조영남은 그 백지와도 같은 천진함을 무기로 삼아온 인물이다. 그래서 조영남에 대해서는 무시하지 말고 '철저히' 싫어해 줄 것을 권한다. 최소한 그래야 '가짜'나 '속물'이나 DDR 인생은 되지 않을 것 아닌가. 어찌보면 이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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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4-2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갑니다. 별 관심 없는 사람이었는데...히트곡은 거의 없는데 노래는 꾸준히한다고하고 화투 그림 잘 그리고 방송에서 오버하는 스캔들 많은 아저씨 정도?

플라시보 2004-04-2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좋은글 읽었습니다. 평소 조영남이나 전유성에 대해 생각이 많았었는데 조영남에 관한 저 글을 읽으니 여태 해 왔던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기우기 2009-12-21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글에 동감합니다.
미술하는 사람으로서 그사람의 화투그림에 관한 부정적인 관점이 저 만의 잣대로 생각했던게 아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