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아십니까
아직 부산에 있을 때였으니 아마 2001년이나 2002년이었을 것이다. 서면에서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좀 늦는다고 연락이 와서 길에서 좀 긴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심심하던 차에 젊은 여성 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딱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분들 그쪽 분들이겠구나. 역시나 첫 마디가 인상이 참 좋으세요. 라고 했다. 나는 심심하던 차에 이분들과 수다나 떨면서 놀아야지 생각했다.
조상님이 어쩌고, 복을 많이 받을 상인데 아직 뭔가 부족하다고 자기들과 어딜 가서 얘길 들어보면 앞으로 만사가 다 잘 풀릴 상이라고 했다. 나는 일부러 좀 어리숙한 티를 내면서 들어주다가 이것저것 질문을 자꾸 던졌다. 이분들은 길에서 이러지 말고 자기들과 같이 가보면 다 알 수 있다고 했으나, 나는 사람을 기다려야 해서 움직일 수는 없고, 궁금하니 여기서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잘 들어주고 또 잘 꼬시면 따라올 것 같으니 그들은 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동조하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인 곳에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들이 나를 설득하려는 핵심적인 내용이 뭔지 알아보려고 했다.
아마 30분 이상 그러나 1시간이 넘지는 않는 정도의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평소에는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얘기해보니 의외로 재밌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재밌었던 건 아니고 부실한 내용으로 나를 설득해보려고 애쓰는 그들의 태도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결국 그들은 여자친구가 나타날 때까지 내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갔다.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잘 될 것 같았는데, 괜히 시간만 날렸다고 생각 했으려나.
보이스 피싱
이것도 꽤 오래 전 일이다. 2010년쯤 되었으려나. 지인들 중에 여러 명이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아봤다고 하길래, 나도 한번은 받아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나를 홀릴지 궁금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내게도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이 어디어디 소속 검사라고 했다. 금융거래 상 문제에 휘말려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뭔가 그럴듯한 용어들을 써가며 겁을 주려고 했다.
드디어 나도 전화를 받아보는 구나. 속으로 웃음을 꾹 참으며 당황한 척 연기를 했다. 뭔가 복잡한 용어를 빠르게 말하길래,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으니 차근차근 하나씩 제대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러니 대뜸 설명해줘도 모를거니까 무조건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하더라. 나는 억지로 겁 먹은 것처럼 연기하면서도 계속 설명을 요구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따라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는 좀 지리하게 비슷한 논리를 반복적으로 강요했던 것 같다. 좀 그럴듯하게 겁을 줄 것을 기대했는데, 실망이었다. 꽤 긴 시간 통화를 했는데도 제대로 설명도 설득도 못 하길래, 나도 좀 지겹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연기를 그만두고 먼저 계속된 고압적인 태도부터 지적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했는데 계속 무시했던 점을 상기시키고, 맨 처음에 빠르게 말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소속을 정확하게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당신 말이 사실인지, 당신 소속이 정확히 맞는지 먼저 확인하고 내가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는 뭔가 빠르게 얼버무리듯 말을 하더니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최근에는 그런 피싱 전화를 받으면 이미 뭔가 악성 프로그램이 설치된 이후라 전화를 끊고 내가 정확한 검찰청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그쪽에서 통화를 가로채서 걔들이 다시 전화를 받는다고 들었다. 앞서 내가 전화를 받았을 당시에는 그런 정도는 아니어서 그렇게 허술하고 실망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알려진 소식 중에 가장 신기했던 건, 해외에서 전화를 걸때 뒤자리 8개의 번호가 같으면 내 폰에 저장된 사람의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온다고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이의 번호가 010-1234-1234 라면 해외에서 같은 번호를 만들어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내 폰에는 아이가 전화를 걸은 것으로 화면에 나온다는 뜻이다. 이건 정말 속을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목소리를 잘 알아채거나, 폰에 저장된 이름을 확인했어도 도중에 끊고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가족이 다쳤다거나, 납치했다거나 하는 전화를 받는다면 놀라고 당황해서 그렇게 할 정신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이런 피싱 범죄가 더욱 기승이라고 하더라. 부디 더는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안 생기기를.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은 싹 잡혀서 감옥에서 긴시간 썩어가기를 바란다.
로맨스 스캠
스캠(scam)은 신용사기나 사기라는 뜻이다. 언젠가 실화탐사대 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로맨스 스캠에 대해 나오는 걸 봤다.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외국인과 SNS를 통해 친밀감을 형성하다가 마치 연인인 것처럼 대하는 과정을 겪는 걸 로맨스 스캠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일단 한번 마음이 움직이고 나면 그 다음은 간단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돈을 보내야 하는데, 자신이 어딘가에 보관해놓은 돈을 찾으려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보증료 성격의 돈을 먼저 보내야 한다는 식으로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속임수가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몇 차례 쓴 적이 있는데, 나는 서로 익히고 싶은 언어를 등록한 이용자들을 연결해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앱을 몇 년째 이용하고 있다. 내가 한국어 네이티브에 영어를 익히고 싶다고 등록하면 영어 네이트브 중에 한국어를 익히고 싶다고 등록한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재밌어서 지금까지도 종종 이용하고 있다. 처음에는 영어만 등록했다가 나중에 중국어, 터키어 등을 등록했었다. 중국어를 등록하는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의 패턴은 매우 유사했다. 먼저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나이와 이름, 사는 동네 등을 묻고 직업이 뭔지 묻는다. 사실 이 앱에 가입하려면 생년월일을 반드시 입력해야 하고 이름도 입력해야 하고, 사진도 등록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이 내게 말을 걸기 전에 그들은 분명 내 나이와 얼굴과 이름을 보았다. 아, 이름은 한글로 적어 놓았으니 한글을 읽지 못한다면 모를 수도 있겠다. 다만 한국어를 익히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한글을 읽는 것 정도는 하는 경우가 많아서 굳이 다시 묻는 이유가 궁금하다.
암튼 그렇게 아주 기본적인 대화를 하고 나면 거의 대부분은 위챗으로 대화하기를 요구한다. 해당 앱이 대화를 나누기엔 불편하다는 이유다. 이 앱이 카톡을 비롯한 다른 메신저 처럼 편하지 않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렇게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암튼 그들은 거의 대부분 위챗을 요구한다. 그래서 처음엔 위챗을 깔고 가입을 했다. 가입처리가 되고 나서 대화를 나누려고 하니 한국에서는 이용할 수 없다는 안내가 나왔다.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이용할 수 없는 것인지,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에서는 이용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위챗을 이용할 수 없었고, 이를 그들에게 알렸는데, 그들은 계속 그럴 리가 없다며 끊임없이 위챗을 요구했다. 그런 경우엔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다음으로 왓츠앱이나 라인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 두 앱도 모두 설치하고 가입했다. 그들 중국인 여성들은 대부분 라인과 왓츠앱에서 통역기를 통해 대화했다. 그런데 우리말과 중국어의 어순이 다르고 어법이 달라서 그런지 통역기를 통한 대화는 원활하지 않았다. 자꾸 엉뚱한 말로 번역되어 뜻이 왜곡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영어로 대화하기를 원한다고 전하곤 했다. 영어라면 서로 뜻이 통하니 번역기의 오류를 피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가까스로 왓츠앱이나 라인으로 대화를 이어가게 되고 나면 서로 일상 이야기도 하고, 음식 사진이나 풍경 사진 등을 주고 받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원래 외국어를 익히기 위한 앱에서 만났다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상태가 된다. 즉, 한국어를 익히는데 도움을 주거나 중국어를 익히는데 도움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다시 대다수는 꼭 주식이나 코인 이야기를 꺼냈다. 나중에 투자를 유도하는 경우까지도 봤다. 여기서 이게 혹시 중국에서 유행하는 신종 사기 수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잠시 했었다. 그 앱을 꽤나 오래 사용했었는데, 어느 특정한 시점부터 워낙 압도적으로 많은 대화 요청이 들어오고, 그들 대다수가 꽤 매력적인 젊은 여성의 사진을 프로필로 사용하고, 대부분이 자신이 패션(의류, 화장품, 미용 등) 계통 사업(혹은 가게)을 하고 있다고 했으며, 거의 반드시 주식이나 코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 물론 그렇지 않고 그냥 일상 이야기만 주고 받으며 길게 대화를 나눈 경우도 소수였지만, 분명 있었고, 제법 한국어를 잘 했던 어느 여성은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한국어를 많이 물어보기도 했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정말 소수였고, 아주 많은 수는 바로 위에 언급한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어쩜 그렇게 젊고 아리따운 사업가 여성들이 중국에는 그렇게 많은 것인가. 그들 대다수가 주식과 코인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그걸 곧이 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간 수많은 경우를 겪어보다가 그 앱의 익히고 싶은 언어에서 중국어를 삭제해버렸다.
이건 작년 초에 겪었던 일인데, 이름에 Kim 이라고 적은 동양계 여성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미국인인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현재 중국의 어느 중소 도시에서 건설 노동자들을 위해 식당을 운영 중이라고 했고, 공사가 완료되면 식당 계약이 끝나니 한국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내게 이 앱은 대화하기 불편하니 카톡으로 대화하자고 했다. 또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자신의 성인 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내가 나 역시도 성이 김씨라고 했는데, 성이 같다고 더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카톡으로 대화의 장을 옮겨오면서부터 더 자주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나에게 친근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자주 설명했다. 우리 개념으로 따지면 함바집 같은 식당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현장소장과의 마찰이 종종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반복적으로 이 힘든 식당 일을 빨리 마치고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고, 한국에 오면 내게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서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나를 달링이라거나 마이 디어 라고 부르며 마치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부터 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서로 나눈 대화 내용만 봐서는 그가 나를 연인처럼 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점점 친해지는 단계라고 봐야지. 처음엔 그런 표현이 자신이 힘들다고 할 때 호응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 같은 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오겠구나. 돈을 요구하거나 무리한 요청을 해올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의심은 중국어로 말을 걸어봐도 반응이 없음을 확인하고 생겼다. 계속 영어로 소통했지만, 중국에 있다고 하길래 나는 가끔 중국어 문장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어 연습도 함께 할 겸해서. 그런데 중국어 문장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었을 때, 그는 큰 일이 생겼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엄마가 많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는데, 자신은 식당을 비울 수 없어서 병간호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병원비가 걱정이라고 했다. 곧 공사를 마치면 현장 소장이 약속한 잔금을 주기로 했지만, 지금 당장은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음, 이거였구나 싶었다.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대하더니 (아, 그렇다고 막 사랑한다는 등의 애정표현을 했던 건 아니었다.) 이런 걸 노린 거였구나 싶었다. 만약 사기가 아니었다고 하고 정말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해도 나는 도울 여력이 없었다.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중국으로 가서 뭔가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작년은 코로나로 인해 중국도 우리나라도 서로 봉쇄 중이 아니었던가.
나는 의심스러운 마음에도 최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자주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빨리 회복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빌려줄 돈도 없고, 내가 갈 수도 없는데 뭘 도울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동안 그는 내게 원망의 말을 몇 차례 보냈고, 나는 그때마다 미안한 마음과 걱정스런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더이상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약 한 달 정도의 긴 여정이 그렇게 끝났다.
이 일을 돌아보며 나는 계속 헷갈렸다. 이게 처음부터 사기를 치기 위해 접근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을까? 사실 의심의 여지는 너무나도 많았다. 처음부터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 아버지의 나라라는 것 말고는 다른 연고는 없는데 계속 곧 한국으로 갈 거라고 말한 것. 의도적으로 보이는 과도한 친밀감 형성과 표현들. 등등. 그런데 혹시라도 그게 아니었을 가능성을 하나 생각해본다면 거의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었고, 그 시간동안 어쨌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생긴 나름의 친밀감이었다. 사기를 노리고 일부러 접근한 것이었다면 왜 한 달씩이나 시간을 끌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최근에 겪은 일 덕분에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전날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전 반차를 썼던 날이었다. 아침에 그 외국어 익힘 앱에서 이름을 Hi 라고 적어놓은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은 분명 한국인 같았다. 중국인이나 일본인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아버지는 미국인이라고 했고,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8살때 교통사고로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다. 누군가 친척이(누군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음)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서 미국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군인이 되어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복무중이라고 했다.
사실 그 앱에서는 처음에 조금 인사를 나누다가 카톡으로 대화를 요구했고, 카톡으로 옮겨와서 위 정보들을 쏟아내듯이 내게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군복을 입은 사진이었는데, 명찰에 GARDEN 이라고 적혀 있었다. 먼저 내가 이름을 물었을 때 자신의 성이 Seo 이고, 이름이 가든 이라고 말했었다. 군복은 영화에서 보면 중동 쪽에서 작전을 펼치는 미군들이 주로 입고 다닌 것과 같은 형태로 보였다. 여기까지만 읽고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시리아에 복무중인 한국계 미군 여성이라니.
그런데 이 사람은 성질이 급해도 너무 급했다. 내가 제대로 소화할 틈도 없이 계속 뭔가 긴 문장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법에 맞지 않는 이상한 한글이라서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영어로 적어서 보내라고 했다. 내용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엄마의 고향은 부산이고, 복무기간이 끝나면 부산으로 올 생각인데,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다. 자신은 지금 군대에서 너무 힘들다고 하루빨리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작전 중에 큰 돈을 찾았는데, 이 중에 일부를 받았고, 이 돈을 금고에 넣어두었다. 이 금고를 한국에 보내려면 한국에서 누군가 보증금을 내야 한다. 돈을 내면 이 금고를 무사히 받을 수 있다. 제발 도와달라. 뭐 이런 내용을 계속 반복적으로 보냈다.
돈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바로 눈치를 챘다. 그리고 인터넷에 seo garden 을 검색해보니 이미 누군가 올린 글이 있었다. 다마스쿠스에 복무한다면서 이름과 얼굴을 바꿔가며 연락해오는 사기꾼 여성들이 많다고 적어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서가든이었다.
지금 내용을 적으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저 앞의 중국 식당의 Kim 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 건은 한 달 후에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건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돈 얘기를 바로 꺼냈다. 나는 여기서 바로 대화를 끊지 않고, 일단 잠시 속아주는 것처럼 연기를 해보기로 했다.
아, 근데 속는 척 하려고 해도 뭔가 이야기가 진척이 되어서 친밀감이 형성이 되었어야 속아줄텐데, 다짜고짜 돈 이야기부터 꺼냈으니 연기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스스로 이야기에 구멍이 있음을 깨닫게 하려고 돈이 어떻게 생겼고, 왜 그 돈을 보내려고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들을 물었다. 그런데 그는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미리 만들어놓은 문장인 것 같은 장문을 계속 보내왔다. 그가 보내온 내용 중에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이용자들을 타겟으로 한 것 같은 부분도 있었다. (검색했을 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도 확인했다. 심지어 인스타는 계정이 여러개였다.) 즉, 나에게는 처음부터 다른 앱에서 말을 걸었으니 완전 말이 안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어법에 맞지 않는 한글 문장은 정말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일부러 자신이 우리말이 서툴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컨셉인건지, 번역기를 돌리고 있다는 걸 어필하려는 컨셉인건지.
암튼 내 질문들에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아 연기를 하는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그가 계속 돈을 강조할 수록 나는 왜 그러냐고 이유를 요구하기만 했다. 결국 디테일한 내용에서 헛점을 들쑤셔 보려고 했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계속된 돈 요구에 질문으로 귀찮게 하는 것으로 그를 괴롭혀 보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에게 다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할테니 별로 괴롭히는 것이 되지는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나도 로맨스 스캠을 겪어보는 구나 하고 잠시 신기해 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곧바로 돈 얘기부터 꺼내는 안일함에 좀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나와 대화를 나눈 이가 과연 어느 나라의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누군지 모를 사기꾼이 나한테 쏟은 시간만큼 다른 사람에게 사기칠 시간을 빼았겼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 카톡 대화방에서 나가지 않고 대기 중이다. 또 말을 걸면 자꾸 질문을 해서 시간을 빼았아야지.
다시 아까 중국에서 식당을 운영한다던 Kim 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보면, 한 달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걸 제외하면 사실 서가든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도 실제로는 어느 나라의 누군지 모를 사기꾼이었을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공을 들여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일 확률이 높다.
마지막으로 서가든 이란 이름을 가진 미군은 실제로 존재하는데, 사진을 도용당한 것일까라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으나, 서가든은 그냥 만든 이름이고, 사진에서 본 군복의 명찰 글씨 정도는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으리라고 깨닫는다. 얼굴 역시도 딥페이크나 합성 등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