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야근을 했다. 작년 연말부터 새로 맡은 업무가 영 손에 익지 않아 자꾸만 일이 밀리고 쌓인다. 계속해오던 고유 업무들과 새로 시작하는 업무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도 될 일이라 생각되는데, 막상 해보면 시간이 엄청 걸린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름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잘난척하면서 살았는데, 이거 완전 낭패감이 든다.
12시가 넘기 전에는 그래도 지하철 막차는 타야지 생각했는데, 12시를 딱 넘기는 순간부터 지하철은 포기했다. 이틀 연속 새벽까지(물론 전날엔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버티며 잠을 못 잔 탓에 이미 뇌는 그 한계에 달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잠을 못 잔 시간에 비하면 생각보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택시를 탈 것인가, 사무실 차량을 이용할 것인가 고민을 했다. 솔직히 택시비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멀쩡히 놀고 있는 차가 있는데, 택시비를 쓰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오는 줄은 몰랐다. 물론 눈이 올 거라는 소릴 들은 기억은 났다. 새벽 1시 건물을 막 나섰을 때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고, 거리에도 쌓이지는 않았다. 쌓일 눈은 아니라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새벽임에도 일부 구간은 정체 상태였다. 피곤했고,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좀 답답했다. 우리 차였으면 훨씬 과감하게 운전했을 텐데, 자주 몰던 차가 아니라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눈이 계속 흩뿌렸고, 밤이라 시야가 좁아서 더 조심스러웠다.
집 근처에 도착하니 도로 사정이 갑자기 훨씬 나빠졌다. 바닥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이미 접촉사고가 난 차량 두 대와 경찰차 한 대가 길 한쪽을 막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들을 지나 언덕을 향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고 현장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두뇌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오르막길엔 눈이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차가 못 오를 정도로 많이 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오를 수는 있을 것이다. 조심해서 잘 오르면 될 것이다. 오르막길을 단숨에 오르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났다.
언덕을 오르는 순간부터 바퀴가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는 언덕을 올랐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쭉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멈추는 순간 끝장이다! 가속패달을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고 너무 속도가 올라가면 제어가 어려우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 했다. 언덕길의 중반 즈음부터 바퀴가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바퀴는 맹렬히 헛돌았고, 그때마다 나는 빠르게 핸들을 좌우로 돌려댔으나, 차는 내 의지와는 달리 자꾸만 남의 집 담벼락을 향해 다가갔다.
짧은 순간 마치 영화에서 폭풍을 만난 조타수가 배의 키를 빠르게 좌, 우로 끝까지 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핸들을 좌, 우로 빠르게 끝까지 감았다가 풀기를 반복하는 내 모습이 딱 그랬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무의식중에 이마를 닦아낸 손등엔 흥건하게 땀이 묻어났다. 그냥 차를 버리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저 위가 집인데, 이 짧은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앞도 잘 안 보이는 좁은 차 안에 갇힌 내 모습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강하게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차를 갖고 오지 말걸. 그냥 이번에도 택시를 탈 걸. 젠장!
차는 조금씩 미끄러지다 나아가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오르막을 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디어 내가 사는 빌라 지하 주차장 입구까지 올라왔는데, 이런! 누군가 입구를 차로 막아놓았다. 누구 짓인지는 뻔하다. 위층 아주머니는 운전이 매우 서투른 편인데 자주 차를 몰고 나가셨다. 좁은 지하 주차장에 여러 대의 차가 들어가 있으므로 바짝 붙여서 주차를 해줘야 나머지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데, 자꾸만 앞을 널널하게 비워두고 입구를 막아 놓곤 했다. 게다가 이중, 삼중 주차를 해놓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 놓은 차량은 모두 열쇠를 공유하고, 나가는 사람이 알아서 막고 있는 차를 빼고 나가야 하는데, 이 아주머니는 본인 차도 여기저기 막 긁고 다니는 편이라 남의 차를 절대 몰지 못한다. 평소에도 이 분 때문에 불편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이 난국에 이 아주머니가 또 크게 한 건 해주시는구나.
짧은 순간 판단했다. 여기서 멈추면 곤란하니, 일단 조금 더 올라가서 오르막길 끝에 평평한 골목으로 차를 올려놓고 다시 주차 공간을 찾아야 했다. 비탈길을 다 올라와서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켜놓고, 차 문도 닫지 않은 채 뛰어 내려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차가 간신히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올라오는 방향에서라면 좀 더 쉽게 들어갈 테고, 내려가는 방향에선 좀 어렵겠지만 그래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돌려 내려오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입구 내리막의 눈을 먼저 치웠다. 이 좁은 곳에서 차가 미끄러진다면 손쓸 틈도 없이 벽에 부딪힐 것 같았다. 차고 구석에 놓인 빗자루로 열심히 눈을 쓸었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쓸다가 차가 올라온 바퀴 자국을 보니 지그재그로 위태롭게 올라왔음이 느껴졌다. 불안해서 차가 내려올 바퀴 위치를 따라 골목길의 눈도 치웠다. 한참 걸렸다. 다시 온몸은 땀에 젖었다.
이제 차를 돌려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을 치워둬서 이번엔 크게 미끄러지진 않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판단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내려오는 방향에선 도무지 각도가 안 나왔다. 몇 차례 굉음을 내면서 왔다갔다를 반복했는데,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다. 차가 큰 각도로 거꾸로 뒤집어져서 후진 기어를 넣어도 앞으로 미끄러졌다. 입구 한쪽을 막고 있는 그 차에 부딪히기 직전 간신히 멈추고선 왼발로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서서히 떼면서, 오른발로 가속패달을 밟았다. 차를 한참 뒤로 빼놓고, 막고 있는 차를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아!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상황이었으면 이 짓을 먼저 해놓고, 차를 끌고 왔을 텐데. 그 차의 열쇠를 찾아 최대한 벽과 앞차에 가깝게 다시 주차를 해줬다. 이제 입구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새 다시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고, 아까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유난히 바퀴가 헛돌았던 지점들을 찾아서 얼어붙은 눈을 치웠다.
이번에도 입구에서 두어 번 왔다갔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차를 지하 주차장에 넣을 수 있었다. 머리칼과 겉옷은 눈에 젖었고, 속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보니, 내일 아침에 다시 차를 끌고 출근할 일도 걱정이었다. 지금 눈을 좀 치워두면 그래도 낫겠지. 다시 빗자루를 들고 나와 집에서 내려가는 방향의 눈을 좀 치웠다. 이미 힘을 많이 쓴 상황이라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대충 쓸다 말고 도저히 더 못하겠다 싶어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었다. 대략 1시간 반을 눈을 쓸고, 차를 주차하는데 허비했다. 택시를 타고 왔으면 2시 전에 잠들었을 텐데. 샤워를 하고 누웠는데,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치른 일들이 마치 먼 옛날 일이거나,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나와보니 골목길 눈은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은 치워져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골목길로 나오는 그 짧은 구간의 눈만 대강 치우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간밤에 그 피곤한 상태에서, 그 고생을 한 걸 다시 떠올리니 끔찍했다. 다시 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못할 일이었다.
※ 본문과 관계없는 책 이야기
친구에게 책선물을 받았다.
앞부분을 조금 읽고 있는데, 역시 고미숙 선생님이다.
천천히 즐기면서 읽고 싶은데,
막 속도가 붙어서 금방 끝내버릴까봐 걱정이다.
지난 달에 받았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솔직히 여기에 담긴 절절한 사연들에 몰입하게 될까 봐
겁나서 조금 망설여진다.
그래도 꼭 읽고 소개해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잊혀진 아니 친일파와 미군정에 의해 의도적으로 삭제된
반쪽 역사를 다시 되찾아야,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되고,
더 많이 읽혀야 한다.
패스트푸드와 슬로푸드에 이어 새로운 개념이 나왔다.
음식문맹자와 음식시민.
따지고보면 그렇다.
몸에 나쁜 음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건 음식이나 재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게 제대로 된 용어로 보인다.
자, 당신은 음식문맹자인가? 음식시민인가?
※ 읽고 싶은 책은 점점 늘어나고, 지금도 보관함과 장바구니에는 새로운 책들이 쌓여간다. 어디 독서휴직이나 독서휴가 같은 건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