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울렸다. 맞은 편에 앉은 후배가 전화기를 꺼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나와 내 옆의 친구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후배는 황급히 술집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음악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한참 떠들어대던 후배 녀석이 자리를 비우고 나니 대화가 끊겼다. 친구 녀석은 술잔을 들어 올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건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기다리며 나도 울릴 리가 없는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테이블로 돌아오려다가,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머리가 멍해서 잠시 바람을 쐬려고 술집 밖으로 나섰다. 밤인데도 더운 열기가 확 얼굴을 덮쳤다. 담배를 피워물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저쪽에서 아까 나간 후배와 또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서너 살 어린 여자 후배였다. 학생회 일로 몇 번 얘길 나눠본 적이 있었는데, 제법 호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친구였다. 그런데 아까 한창 영양가 없는 얘길 떠들다 나갔던 후배 녀석이 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둘은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둘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가고 담배를 마저 피우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집에선 또다시 남자 후배 녀석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 후배. 원래 그렇게 조용한 성격이었던가. 남자 친구 옆이라고 저러고 있는 건가. 애초에 별로 끼고 싶지 않은 자리였건만, 이제 더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남아있던 술잔을 급히 비우고,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섰다. 깜짝 놀란 후배들과 친구에게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고 등을 돌렸다.

 

학교 앞 자취방은 언덕길을 이십여 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술을 한 병 사서 갈까 말까. 고민하며 담배를 빼어 물고 걷는데, 이미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벌써 제법 취했구나. 원치 않는 술자리에선 말도 별로 안 하게 되고, 괜히 술만 더 빨리 들이켜게 된다. 비틀거리는 발걸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1년 반을 만났던 여자. 2달 전에 헤어진 여자. 어지러운 정신에 그 여자와 아까 만났던 여자 후배의 얼굴이 겹쳤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인데, 왜 그 아이를 보고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난 단지 후배들을 질투하는 것인가?

 

 

 

결국, 소주와 과자 하나를 사서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던져놓고, 땀에 젖은 옷을 벗어서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찬물을 맞으니 조금은 취기가 가시는 듯했다.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방으로 들어섰다. 옷을 입기도 전에 잔을 찾아 술을 따랐다. 짜릿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자꾸만 그녀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가만히 눈을 내려 책을 보던 그 얼굴.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나를 의식하고 있을 텐데, 책에만 눈길을 주고 있던 그 얼굴, 간혹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넘기면서도 눈길을 계속 책에 주고 있던 그 얼굴.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지고,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 조용한 모습을 흩트리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던 바로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소주 몇 잔을 거푸 마시고, 과자를 씹고, 담배를 몇 대 피우다 보니 시간은 새벽 1시 15분. 자꾸만 전화기로 손이 가는 것을 참고 또 참았건만, 어느새 전화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 울리지 않는 전화. 울릴 리가 없는 전화. 헤어지고 며칠 후 술에 취해 새벽에 전화를 걸었고, 그 다음 날 아침 머리를 벽에 박아대며 전화번호를 지워버렸건만, 어느새 머릿속에 입력되어 버린 그 번호는 잊고 싶어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다른 번호는 절대 못 외우건만, 심지어 십 년 넘게 같은 번호를 쓰고 있는 집 전화번호도 못 외우건만, 왜 그 번호는 잊히지 않는 걸까?

 

참아야 해! 참아야 해! 술 기운에 전화를 하고 싶진 않아! 아니 전화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더는 유효하지 않은 말들을 함부로 내뱉지는 말자!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도 손은 어느새 전화기 폴더를 열었고, 손가락은 익숙한 그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젠장! 전화기를 벽에 던져버리고 남은 술을 입에 던지듯 털어 넣었다. 젠장! 오늘도 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이다.

 

==========================================================================

 

나는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감정적으로 가장 예민해진다. 그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런 날이면 거의 술을 한잔 마신 날이다. 어제도 그랬다. 후배 하나가 술을 사달라고 해서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 씻고, 컴퓨터를 켠 시간이 대략 1시였다.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문서 창을 하나 띄워놓고, Lady Antebellum 의 Need You Now 를 들었다. 한동안 자주 듣던 음악. 언젠가 이 노래로 글을 하나 써야지 싶었는데, 시간을 보내 딱 1시 15분이다.

 

Its a quarter after one, I'm a little drunk,
And I need you now.
Said I wouldn't call but I lost all control and I need you now.

 

이 가사를 오래 되새기며 자판을 두드려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북극곰 2013-03-08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이것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죠. :)

감은빛 2013-03-08 13:29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오늘 서울은 미세먼지 비상이라더니,
목이 칼칼하고 눈도 불편하고 그러네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몸에 대한 이야기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 친한 선배네 돌잔치에 다녀왔다. 막내아들의 돌이었다. 위로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셋째다. 덩치 큰 선배가 한복을 입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돌잔치를 치르는 아빠라고 하기엔 좀 나이가 많아 보였다. 실제로 나이가 많긴 하다. 40대 초반이니까 아마 우리 아버지 세대였다면 벌써 큰 애가 대학을 갔을 수도 있는 시기다. 실제로 예전에 나를 많이 아껴주고 챙겨주셨던 형님은 40대 초반에 큰딸이 대학생이었다. 그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고 덕분에 그 형님은 40대 후반에 벌써 할아버지 소릴 들었다.

 

요즘 전반적으로 결혼과 출산의 시기가 너무 늦춰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일찍 결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늦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사회의 분위기가 일찍 결혼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이른바 ‘3포 세대’ 라는 말을 청년들이 많이 한다고 들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다. 결혼과 출산은 뭐 개인의 선택에 따라 더 늦게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연애마저 포기라니! 그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에 연애를 포기한다니! 게다가 연애를 포기하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니. 이 얼마나 서글픈 말인가.

 

게다가 대학과 대학원, 공무원 고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 및 취직 준비로 사회 진출 시기마저 점점 늦춰지고 있다. 최근 누군가에게 들었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하려면 실제 나이에서 10살 정도 빼고 생각해야 적당하다고 했다. 확실히 요즘 서른 살 언저리의 후배들을 보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와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이 책에서 고미숙 선생은 [동의보감]을 인용하면서 “여성의 생체 주기는 7단위로 변화한다.”고 했다. 14세에 초경을 하고, 49세에 폐경이 된단다. 그리고 “남성은 8단위다.”라고 말하면서 16세부터 남자가 되고, 64세에 생식력이 그친단다. 그래서 여성은 14세, 남성은 16세부터 성인이라고 했다. ‘이팔청춘’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20세기가 되기 전에는 모두 이팔청춘에 혼례를 올렸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딱 그 나이 때 내가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성인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만 갇혀서 어른들(부모와 교사들)이 바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무척 끔찍했다. 쓸데없는 죽은 지식을 외우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버리기보다는,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읽고 싶었고, 몸을 써서 일을 하고 싶었고, 맘껏 놀고 싶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빨리 진급하기 위해, 좀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기 위해, 좀 더 넓은 집과 큰 차를 가지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까? 이 끝없는 경쟁의 구조에서 한 발만 벗어나서 생각해본다면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짓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십 대 후반이면 이미 성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분위기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관계없이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더 이상의 헛된 교육과 쓸데없는 준비는 필요 없다. 그저 온 몸으로 삶에 부딪쳐나가면 그 뿐이다. 상처가 났다가 다시 아물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면서 사는 것이 더 현명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다 자란 청년이 아직도 덜 자란 어린이처럼 보호받고, 간섭받고,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른 살이 넘어서야 사회 활동을 시작하고, 마흔이 다 되어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지금 현재의 모습은 참 비정상적이다. 이는 생태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낭비인 셈이다. 이렇게 이 사회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은 질서로 돌아가고 있지만, 대개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몸이 다 자랐으면 성인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결정권을 줘야 한다. 투표권도 주고, 직업도 갖게 하고, 결혼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이미 이 나이 때의 학생들은 이성교제도 하고, 알바도 뛰고 있고, 어른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도 물론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경쟁과 입시만을 위한 방식이 아닌 정말로 살아가는 것, 즉 삶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이 책은 몸을 화두로 해서 내 삶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다 보면 우리가 몸에 대해 참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가 각 개인이 몸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가고 있다는 섬뜩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신문연재를 묶은 것이라 글 하나의 호흡이 짧고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꺼내다 만 느낌이라 아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곁가지가 좀 뻗었다가 돌아오고, 곧장 가지 않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글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쉽다는 느낌이 남는다. 어쨌거나 고미숙이란 이름만으로 이미 그 내용이 보장되는 책이다.


댓글(9) 먼댓글(1)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몸에 대한 이야기
    from 가보지 못한 길 2013-03-06 15:34 
    추운 날 "아 뚜" 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 바람이 쌩! 아가는 금방 얼굴을 찡그리며 '아 뚜'를 연발한다. "우리 예쁜이가 추워요?"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답한다. 비탈길을 내려간다. 아가는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다시 한번 "아 뚜"하고 소리를 낸다. 아가의 소리에 대답하듯 나도 "아이 추워!"하고 과장이 섞인 말투로 따라한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어린이 집에 도착할 때쯤되면 아가의 뺨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다. 희고 차가운
 
 
blanca 2013-03-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 전 친구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남편이 40대 초반이었답니다.^^;; 축가를 불러주는 친구들 머리도 희끗희끗했어요. 아직 결혼 안한 친구들도 제법 있고요. 점점 성인이 되는 나이도 부모로 독립하는 나이도 늦어지는 것 같은데 이게 사회의 추세이긴 하지만 몸의 성숙이나 노화 나이와는 분명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수명도 늘어가고 있긴 하지만 노화 그 자체의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고미숙 씨 글은 술술 잘 읽히는 것 같아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잘잘라 2013-03-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 읽어요. 화장실에서 한개씩 읽기 딱 좋아요. ^^;;

감은빛 2013-03-08 12:29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화장실에서 한 꼭지씩 읽기 딱 좋네요.
이게 원래 신문 연재꼭지여서 그런 듯 해요.

단발머리 2013-03-0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재미있어서 한 개씩 아껴써요.
생체 주기 이야기 너무 실감나요. 고미숙님 해석이 수긍이 되구요.
저는 곧 성인 자녀를 둔 중년 주부 되나요? ㅍㅎㅎ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그럼 안녕히~~~

감은빛 2013-03-08 13:0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하나씩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는 책이죠.
나중에 관련있는 꼭지만 찾아 읽기도 좋구요.

자녀가 곧 청소년기에 들어서나요?
스스로의 권리와 책임을 잘 알려주고,
친구같은 부모가 되시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 부모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글 읽어주시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북극곰 2013-03-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 책 읽고 있어요. :)
지난 번 감은빛 님 페이퍼에서 보고 사놨다가 요즘처럼 정신없는 와중에 후다닥 읽고 있지요. '나운설'이랑 '..누드 글쓰기'를 재밌게 읽었는데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저도 요 책은 살짝 아쉬워요.

잘 지내시죠?
저는 큰 아들 초등입학에 작은 딸 유치원 입학에 아주 정신없는 나날입니다.

감은빛 2013-03-08 13: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북극곰님.
아, 제 글을 통해 구매하셨다니, 조금 책임감을 느끼게 되네요.
네, 말씀하신 것처럼 중복되는 내용들이 좀 있죠.
저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동의보감'이란 하나의 재료를 갖고,
3번째 쓴 책이라서 아마 더 그런 것 같아요.

아들과 딸의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아이들도 부모도 정신 없는 날이겠어요.
저희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학기라 선생님이 바뀌어서 아이도 부모도 모두 적응해야 하니까요.
큰아이는 1학년때는 거의 정년퇴음을 앞둔 나이많은 선생님이었는데,
이번 2학년에는 젊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작은아이는 작년에 같은 반의 친구 숫자가 적었고,
선생님도 한 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친구들이 확 늘어났고, 선생님도 두 분으로 바뀌었구요.
작은아이는 선생님이 바뀐 영향이 바로 나타나네요.
요며칠 계속 집에서 짜증을 많이 내고, 어리광을 많이 부리네요.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그때까지 잘 쓰다듬어주고 도닥여줘야겠습니다.

순오기 2013-03-1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이웃 작은도서관 동아라 '역학연구회'에 추천했는데...
제가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고요.^^

감은빛 2013-03-11 13:20   좋아요 0 | URL
글의 호흡이 짧아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일단 시작하면 금방 읽으실 거예요.
 
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비를 흠뻑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젖은 머리칼이 자꾸 이마에 달라붙었다. 코로 흡입하는 산소로는 도저히 터질듯한 허파를 채우지 못해 입으로 가쁜 숨을 쉬어야 했다. 한발 한발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무거운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다.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기 위해 손등을 가져가는 동작조차 힘겨웠다. 무엇보다 목이 타들어 갔다. 물은 다른 일행의 배낭에 들어있었다. 내 배낭엔 쌀과 참치캔 등 식사거리만 잔뜩 들어있었다. 설마 다른 일행들과 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물을 딱 한 방울만 마셔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철퍼덕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한발씩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다가 오래된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그의 친구 카츠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숲과 언덕을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그날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대학 1학년 때, 설악산이었다. 어려서부터 산동네에서 자랐고, 산을 자주 오르내렸기에 산행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행과 떨어져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곧 페이스를 잃어버려 거의 탈진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초반에 카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소를 보내며 읽다가, 곧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는 부끄러워졌다. 또 산행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상황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영하의 날씨와 폭설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읽을 때는 군대에서 겪었던 한겨울 혹한기 훈련이 생각났고, 며칠씩 비를 맞아가며 걷는 모습을 읽을 때는 여름 유격훈련이 생각나기도 했다.

 

빌 브라이슨과 카츠가 시도했던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험난한 산길을 3천 360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다. 역자 후기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한다면 대략 1천 400킬로미터 가량 될 거라고 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절반도 안 되는 거리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빌 브라이슨 스스로 걸었다고 밝힌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그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1천 392킬로미터 걸었고, 그건 전체 길이의 39.5%밖에 안 된다고 한다.)

 

비록 도중에 차를 얻어타거나, 택시를 타고 일부 구간을 건너뛰기도 했고, 바쁜 일 때문에 몇 달을 집으로 돌아와 지내기도 했고, 결국 종착지인 캐터딘을 밟지 못했지만,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걸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친하게 지냈던 후배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껏 막대한 등록금과 시간을 바친 학교를 떠났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부산에서 강원도 양구(자신이 군 생활을 했던)까지 걸었다. 당시에 나는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배는 더위에 시달리고, 비를 맞으며 약 한 달을 걸었다. 돌아와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를 정리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빌 브라이슨과 카츠와 그들이 만난 수많은 종주객들과 양구를 행해 걸었던 후배가 부러워졌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제주 올레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유행되는 현상도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걷다보면 절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6개월이나 애팔래치아를 걸을 수는 없겠지만, 가깝게 갈 수 있는 산과 숲을 자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추천한 책이었다. 단순히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던 경험만을 담아낸 책은 아니다.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잘 알 것이다. 특유의 위트와 유머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성찰이 엮인 훌륭한 작품이다. 그와 카츠의 좌충우돌 여행기도 재미있지만, 국가 정책이나 자본주의 문명 자체를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가끔 등장하는 마치 신문기사 같은 느낌의 구체적인 사건사례나 역사적 지식들도 이 책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감초 역할을 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숲과 자연을 존중하는 그의 철학적 태도와 사색들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지식과 그를 관통하는 위대한 사색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3-02-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걷다보면 절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맞아요. 저는 아주 춥거나 비 많이 오는 날을 빼면 거의 하루 한 시간을 걷는 날이 많은데, 생각 정리에 정말 도움이 많이 되어요.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고 의사가 말하던데요, 그건 걸으면서 심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서래요. 걷는 건 한가롭게 머리를 식히는 행위라고 하네요. 산책의 효용이 되겠죠. 걸으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요.
걷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2005년부터 걷는 취미를 가진 자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감은빛 2013-03-06 15:44   좋아요 0 | URL
답이 엄청나게 늦었네요! 죄송!

걷는 취미를 갖고 계시다니, 좋네요!
저도 평소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두세 개 거리는 걸어다녀요.
좀 빨리 걸으면, 그리 시간차이가 나지도 않더라구요.

걷다보면 자꾸 글감이 떠오르는데,
빨리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 두드리고픈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서 앉으면 또 멍하니 빈 화면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순오기 2013-02-1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쁘지 않으면 한 시간 정도의 거리는 걸어갑니다.
생각도 정리하고 운동도 하는 일석이조의 시간이죠.
이 책 우리 도서관에서도 구입해야겠어요.
3월부터 11명의 숲해설가들이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매달 1회의 숲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생태관련 도서를 더 장만하려는데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두 공주님들은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지요? 많이 컷겠네요.^^

감은빛 2013-03-06 15:56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순오기님도 많이 걸으시네요.
생태관련 도서를 저도 많이 읽으려하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게으리기도 하고 생각만큼 잘 안되네요.

큰아이는 초등 2학년이구요.
작은아이는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어요.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바다맛 기행 -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맛의 문화사 바다맛 기행 1
김준 지음 / 자연과생태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배경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가진다. 제일 크게는 성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고, 성씨에 따라서(전주 이씨나 경주 김씨 등)도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 사회에서는 부모의 경제력과 학업성적 그리고 직업 등이 아마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고향과 현재 사는 지역에 따라 갖게 되는 정체성도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부산싸나이’였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서울남성이다. 말투도 바뀌었고,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가끔 고향 친구나 가족과 전화할 때는 예전의 그 억센 말투가 다시 나오곤 하지만, 평소에는 부산 사투리를 쓸 일이 없다. 빠르고 거친 말투가 차분하고 느려지니까 성격도 확실히 바뀌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인간관계를 맺게 되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가장 자주 들었던 얘기는 ‘해산물’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다. “부산에서 왔으면 회 좋아하겠네. 다음에 회 먹으러 같이 가자고. 내가 한 잔 살 테니.” 한때 내 직속상관이었던 분은 본인의 부산출신 친구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그 친구가 그렇게 해산물을 그리워했다고 과장해서 말하곤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일부러 데리고 가준 횟집이 나는 영 별로였다. 요즘은 새벽에 잡은 해산물이 곧바로 서울로 온다지만, 그래도 바닷가에서 먹는 거랑 서울 시내에서 먹는 거랑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건 아무리 말로 설명해줘도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 확실히 맛은 그저 혀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이 바로 그런 점이다. 그냥 그저 먹는 것과 잘 알고 먹는 것은 다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단순히 술안주로 먹어왔던 수많은 해산물들이 다르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겨울에 즐겨 먹었던 굴이었건만, 실은 그때가 가장 맛있는 때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사람들이 ‘가을 전어’라고 말할 때에도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 왜 가을에 맛있을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뿐인가 올겨울 과메기를 맛있게 많이 먹었건만, 왜 구룡포 과메기가 유명한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 외에도 이 책을 통해 다양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밴댕이가 사실은 반지라는 이름의 생선이라는 것. 오징어가 기후변화 때문에 동해를 떠나 남해안으로 내려왔다는 사실. 잡초로 여겨지던 함초(퉁퉁마디)가 사실은 부작용이 없는 명약이었다는 것. 김 양식장에서 김값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 웬수로 여겨졌던 매생이가 요즘은 청정무공해 음식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 등 처음 알게 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지적 호기심을 마구 자극했다.

 

안타까운 사실들도 많았다. 드넓었던 갯벌을 게판으로 만들었던 칠게가 무분별한 개발과 어민들의 과욕 때문에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철새들도 발길을 끊었다는 것. 과메기의 원조였던 청어가 더는 잡히지 않아 이젠 꽁치로 과메기를 만든다는 사실. 그 흔했던 명태를 더 이상 구경하기 어려워 현상금까지 걸렸다는 사실 등을 읽으며 언젠가 우리가 즐겨 먹었던 음식들을 다시는 구경하기 어려운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책에 의하면 전어도 몇 해째 어획량이 감소하고 있다고 했다. 흑산도 홍어도 남획으로 어장이 사라졌다가 간신히 회복되는 중이라고 했다. 과메기는 다행히 비슷한 맛이 나는 꽁치로 대체되었지만, 이제 청어 과메기는 더는 맛보기 어렵다.

 

이 책에는 다양한 해산물들에 대한 지식도 들어있지만,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도 들어있다. 이게 또 무척 흥미롭다. 과연 우리 조상은 언제부터 이들을 먹었던 건지. 당시에는 어떻게 먹었던 건지 하는 것들 말이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바로 정약전의 [자산어보]다. 정약용의 형으로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어부들에게서 듣고 배운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덕분에 지금 우리가 해산물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서울 사람들이 전어를 많이 먹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전복이나 밴댕이를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따로 관리를 파견하여 관청을 두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단순히 바다생물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점이 무척 반갑고 좋다.

 

바다맛 기행은 단순히 맛집을 소개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여행 책이 아니다. 생물에 대한 지식과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다. 다 읽고 보니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맛의 문화사’라는 부제를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저자가 말한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해산물을 찾아 먹어봐야겠다. 여름에는 양반들만 먹었다는 민어복달임을 꼭 먹어보고 싶고 또 송도에서 된장빵으로 병어도 먹어보고 싶다. 칼로 썰지 않은 전복을 그대로 베어 먹으면 진짜 더 맛있는지도 궁금하다. 아! 생각만 해도 자꾸 입에 침이 고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3-02-1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감은빛님 리류를 읽으니 절로 침이 입에 괴네요.저도 이책 읽어봐야 될것 같아요^^

감은빛 2013-02-18 12: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생각만해도 자꾸만 침이 흘러요. ^^
한번 읽어보세요. 재밌어요.

2013-02-1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 야근을 했다. 작년 연말부터 새로 맡은 업무가 영 손에 익지 않아 자꾸만 일이 밀리고 쌓인다. 계속해오던 고유 업무들과 새로 시작하는 업무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도 될 일이라 생각되는데, 막상 해보면 시간이 엄청 걸린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름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잘난척하면서 살았는데, 이거 완전 낭패감이 든다.

 

 

 

12시가 넘기 전에는 그래도 지하철 막차는 타야지 생각했는데, 12시를 딱 넘기는 순간부터 지하철은 포기했다. 이틀 연속 새벽까지(물론 전날엔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버티며 잠을 못 잔 탓에 이미 뇌는 그 한계에 달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잠을 못 잔 시간에 비하면 생각보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택시를 탈 것인가, 사무실 차량을 이용할 것인가 고민을 했다. 솔직히 택시비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멀쩡히 놀고 있는 차가 있는데, 택시비를 쓰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오는 줄은 몰랐다. 물론 눈이 올 거라는 소릴 들은 기억은 났다. 새벽 1시 건물을 막 나섰을 때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고, 거리에도 쌓이지는 않았다. 쌓일 눈은 아니라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새벽임에도 일부 구간은 정체 상태였다. 피곤했고,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좀 답답했다. 우리 차였으면 훨씬 과감하게 운전했을 텐데, 자주 몰던 차가 아니라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눈이 계속 흩뿌렸고, 밤이라 시야가 좁아서 더 조심스러웠다.

 

 

 

집 근처에 도착하니 도로 사정이 갑자기 훨씬 나빠졌다. 바닥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이미 접촉사고가 난 차량 두 대와 경찰차 한 대가 길 한쪽을 막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들을 지나 언덕을 향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고 현장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두뇌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오르막길엔 눈이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차가 못 오를 정도로 많이 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오를 수는 있을 것이다. 조심해서 잘 오르면 될 것이다. 오르막길을 단숨에 오르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났다.

 

 

 

언덕을 오르는 순간부터 바퀴가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는 언덕을 올랐다. 이대로 멈추지 않고 쭉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멈추는 순간 끝장이다! 가속패달을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고 너무 속도가 올라가면 제어가 어려우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 했다. 언덕길의 중반 즈음부터 바퀴가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바퀴는 맹렬히 헛돌았고, 그때마다 나는 빠르게 핸들을 좌우로 돌려댔으나, 차는 내 의지와는 달리 자꾸만 남의 집 담벼락을 향해 다가갔다.

 

 

 

짧은 순간 마치 영화에서 폭풍을 만난 조타수가 배의 키를 빠르게 좌, 우로 끝까지 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핸들을 좌, 우로 빠르게 끝까지 감았다가 풀기를 반복하는 내 모습이 딱 그랬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무의식중에 이마를 닦아낸 손등엔 흥건하게 땀이 묻어났다. 그냥 차를 버리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저 위가 집인데, 이 짧은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앞도 잘 안 보이는 좁은 차 안에 갇힌 내 모습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강하게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차를 갖고 오지 말걸. 그냥 이번에도 택시를 탈 걸. 젠장!

 

 

 

차는 조금씩 미끄러지다 나아가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오르막을 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디어 내가 사는 빌라 지하 주차장 입구까지 올라왔는데, 이런! 누군가 입구를 차로 막아놓았다. 누구 짓인지는 뻔하다. 위층 아주머니는 운전이 매우 서투른 편인데 자주 차를 몰고 나가셨다. 좁은 지하 주차장에 여러 대의 차가 들어가 있으므로 바짝 붙여서 주차를 해줘야 나머지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데, 자꾸만 앞을 널널하게 비워두고 입구를 막아 놓곤 했다. 게다가 이중, 삼중 주차를 해놓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 놓은 차량은 모두 열쇠를 공유하고, 나가는 사람이 알아서 막고 있는 차를 빼고 나가야 하는데, 이 아주머니는 본인 차도 여기저기 막 긁고 다니는 편이라 남의 차를 절대 몰지 못한다. 평소에도 이 분 때문에 불편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이 난국에 이 아주머니가 또 크게 한 건 해주시는구나.

 

 

 

짧은 순간 판단했다. 여기서 멈추면 곤란하니, 일단 조금 더 올라가서 오르막길 끝에 평평한 골목으로 차를 올려놓고 다시 주차 공간을 찾아야 했다. 비탈길을 다 올라와서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켜놓고, 차 문도 닫지 않은 채 뛰어 내려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차가 간신히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올라오는 방향에서라면 좀 더 쉽게 들어갈 테고, 내려가는 방향에선 좀 어렵겠지만 그래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돌려 내려오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입구 내리막의 눈을 먼저 치웠다. 이 좁은 곳에서 차가 미끄러진다면 손쓸 틈도 없이 벽에 부딪힐 것 같았다. 차고 구석에 놓인 빗자루로 열심히 눈을 쓸었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쓸다가 차가 올라온 바퀴 자국을 보니 지그재그로 위태롭게 올라왔음이 느껴졌다. 불안해서 차가 내려올 바퀴 위치를 따라 골목길의 눈도 치웠다. 한참 걸렸다. 다시 온몸은 땀에 젖었다.

 

 

 

이제 차를 돌려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을 치워둬서 이번엔 크게 미끄러지진 않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판단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내려오는 방향에선 도무지 각도가 안 나왔다. 몇 차례 굉음을 내면서 왔다갔다를 반복했는데,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다. 차가 큰 각도로 거꾸로 뒤집어져서 후진 기어를 넣어도 앞으로 미끄러졌다. 입구 한쪽을 막고 있는 그 차에 부딪히기 직전 간신히 멈추고선 왼발로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서서히 떼면서, 오른발로 가속패달을 밟았다. 차를 한참 뒤로 빼놓고, 막고 있는 차를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아!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상황이었으면 이 짓을 먼저 해놓고, 차를 끌고 왔을 텐데. 그 차의 열쇠를 찾아 최대한 벽과 앞차에 가깝게 다시 주차를 해줬다. 이제 입구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새 다시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고, 아까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유난히 바퀴가 헛돌았던 지점들을 찾아서 얼어붙은 눈을 치웠다.

 

 

 

이번에도 입구에서 두어 번 왔다갔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차를 지하 주차장에 넣을 수 있었다. 머리칼과 겉옷은 눈에 젖었고, 속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보니, 내일 아침에 다시 차를 끌고 출근할 일도 걱정이었다. 지금 눈을 좀 치워두면 그래도 낫겠지. 다시 빗자루를 들고 나와 집에서 내려가는 방향의 눈을 좀 치웠다. 이미 힘을 많이 쓴 상황이라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대충 쓸다 말고 도저히 더 못하겠다 싶어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었다. 대략 1시간 반을 눈을 쓸고, 차를 주차하는데 허비했다. 택시를 타고 왔으면 2시 전에 잠들었을 텐데. 샤워를 하고 누웠는데,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치른 일들이 마치 먼 옛날 일이거나,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나와보니 골목길 눈은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은 치워져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골목길로 나오는 그 짧은 구간의 눈만 대강 치우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간밤에 그 피곤한 상태에서, 그 고생을 한 걸 다시 떠올리니 끔찍했다. 다시 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못할 일이었다.

 

 

※ 본문과 관계없는 책 이야기

 

 

 친구에게 책선물을 받았다.

 앞부분을 조금 읽고 있는데, 역시 고미숙 선생님이다.

 천천히 즐기면서 읽고 싶은데,

 막 속도가 붙어서 금방 끝내버릴까봐 걱정이다.

 

 

 

 

 

 

 

 지난 달에 받았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솔직히 여기에 담긴 절절한 사연들에 몰입하게 될까 봐

 겁나서 조금 망설여진다.

 그래도 꼭 읽고 소개해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잊혀진 아니 친일파와 미군정에 의해 의도적으로 삭제된

 반쪽 역사를 다시 되찾아야,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되고,

 더 많이 읽혀야 한다.

 

 

 

 패스트푸드와 슬로푸드에 이어 새로운 개념이 나왔다.

 음식문맹자와 음식시민.

 따지고보면 그렇다.

 몸에 나쁜 음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건 음식이나 재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게 제대로 된 용어로 보인다.

 자, 당신은 음식문맹자인가? 음식시민인가? 

 

 

 

※ 읽고 싶은 책은 점점 늘어나고, 지금도 보관함과 장바구니에는 새로운 책들이 쌓여간다. 어디 독서휴직이나 독서휴가 같은 건 없나?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3-02-0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오랜만이예요. 늘 글은 잘 읽고 있답니다~
항상 극적인 삶(!)을 사시는 것 같아요. 때로는 고단하지만, 그래도 성실히 열심히 사시는 것 같아 응원하고 싶네요^^
저도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 차 끌고 다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예요.
최근에 스노우타이어 대신 타이어에 뿌리는 스프레이 하나를 샀어요. 그거 뿌리니까 눈길에서도 2시간 정도는 괜찮더라구요. 미리 장만해 놓으셨다가 사용해 보시는 것도 괜찮으실 것 같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건강하세요^^

감은빛 2013-02-08 12: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현맘님.
저는 최근엔 찾아뵙지 못했는데, 이제 가볼게요. ^^
극적인 삶이라! 조금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주변 친구들도 가끔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스프레이가 있군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스노우타이어는 비싸고, 눈 안내릴때 쓰기에는 아깝죠.
타이어 닳는 속도가 또 장난이 아니니까요.

설 연휴 고생하시겠죠?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조선인 2013-02-07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읽기만 해도 진땀이 나네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은빛 2013-02-08 12:47   좋아요 0 | URL
네, 그땐 차 안에서 정말 후회를 많이 했어요.
긴 글 읽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선인님.

Shining 2013-02-0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집중력으로 리액션을 발휘해가며 읽었습니다. 혹시 다치신건가, 아니야 다치셨으면 이 글을 못 쓰고 계실거야.. 하면서ㅠ 큰 일이 없었다니 다행이에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은빛 2013-02-08 12:49   좋아요 0 | URL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시엔 1초에 한번씩 담벼락에 차가 들이받는 상상을 했습니다.
무사히 차를 주차해놓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차가 올라온 궤적을 보면서,
미친 짓을 했구나 싶었어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샤이닝님.

북극곰 2013-02-0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정말 식은 땀이 삐질.
계속 이렇게 피곤해서 어쩌십니까요?

고미숙 님의 저 책도 좋군요~
'동의보감'이 있던 터라 살짝 망설였는데 또 훅 끌리네요~!


감은빛 2013-02-08 12:55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염려 말씀 고맙습니다!
근데 이 글 쓴 날도 역시 야근했어요. 새벽 3시까지.
그리고 어제는 11시쯤 기절하듯이 쓰러져 잤습니다.
내일 아침엔 좀 게으름 피우며 늦잠 자고 싶네요.

고미숙 쌤 말로는 자신의 사주팔자에 숫자 3이 있어서,
책도 3권 세트로 낸다고 하네요.
열하일기도 3종세트,
동의보감도 3종세트,
달인시리즈도 3종세트를 냈다구요.
이 책 읽어보시면 [동의보감]과는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

아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꿈꾸는섬 2013-02-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정말 아찔한 이야기였어요. 고생많으셨네요. 정말 다행스럽구요.

감은빛 2013-02-08 12:57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 님, 고맙습니다!
모두들 염려해주신 덕분에 아무 일 없이 무사했던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