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비를 흠뻑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젖은 머리칼이 자꾸 이마에 달라붙었다. 코로 흡입하는 산소로는 도저히 터질듯한 허파를 채우지 못해 입으로 가쁜 숨을 쉬어야 했다. 한발 한발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무거운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다.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기 위해 손등을 가져가는 동작조차 힘겨웠다. 무엇보다 목이 타들어 갔다. 물은 다른 일행의 배낭에 들어있었다. 내 배낭엔 쌀과 참치캔 등 식사거리만 잔뜩 들어있었다. 설마 다른 일행들과 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물을 딱 한 방울만 마셔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철퍼덕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한발씩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다가 오래된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그의 친구 카츠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숲과 언덕을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그날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대학 1학년 때, 설악산이었다. 어려서부터 산동네에서 자랐고, 산을 자주 오르내렸기에 산행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행과 떨어져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곧 페이스를 잃어버려 거의 탈진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초반에 카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소를 보내며 읽다가, 곧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는 부끄러워졌다. 또 산행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상황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영하의 날씨와 폭설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읽을 때는 군대에서 겪었던 한겨울 혹한기 훈련이 생각났고, 며칠씩 비를 맞아가며 걷는 모습을 읽을 때는 여름 유격훈련이 생각나기도 했다.

 

빌 브라이슨과 카츠가 시도했던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험난한 산길을 3천 360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다. 역자 후기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한다면 대략 1천 400킬로미터 가량 될 거라고 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절반도 안 되는 거리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빌 브라이슨 스스로 걸었다고 밝힌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그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1천 392킬로미터 걸었고, 그건 전체 길이의 39.5%밖에 안 된다고 한다.)

 

비록 도중에 차를 얻어타거나, 택시를 타고 일부 구간을 건너뛰기도 했고, 바쁜 일 때문에 몇 달을 집으로 돌아와 지내기도 했고, 결국 종착지인 캐터딘을 밟지 못했지만,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걸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친하게 지냈던 후배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껏 막대한 등록금과 시간을 바친 학교를 떠났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부산에서 강원도 양구(자신이 군 생활을 했던)까지 걸었다. 당시에 나는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배는 더위에 시달리고, 비를 맞으며 약 한 달을 걸었다. 돌아와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를 정리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빌 브라이슨과 카츠와 그들이 만난 수많은 종주객들과 양구를 행해 걸었던 후배가 부러워졌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제주 올레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유행되는 현상도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걷다보면 절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6개월이나 애팔래치아를 걸을 수는 없겠지만, 가깝게 갈 수 있는 산과 숲을 자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추천한 책이었다. 단순히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던 경험만을 담아낸 책은 아니다.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잘 알 것이다. 특유의 위트와 유머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성찰이 엮인 훌륭한 작품이다. 그와 카츠의 좌충우돌 여행기도 재미있지만, 국가 정책이나 자본주의 문명 자체를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가끔 등장하는 마치 신문기사 같은 느낌의 구체적인 사건사례나 역사적 지식들도 이 책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감초 역할을 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숲과 자연을 존중하는 그의 철학적 태도와 사색들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지식과 그를 관통하는 위대한 사색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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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2-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걷다보면 절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맞아요. 저는 아주 춥거나 비 많이 오는 날을 빼면 거의 하루 한 시간을 걷는 날이 많은데, 생각 정리에 정말 도움이 많이 되어요.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고 의사가 말하던데요, 그건 걸으면서 심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서래요. 걷는 건 한가롭게 머리를 식히는 행위라고 하네요. 산책의 효용이 되겠죠. 걸으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요.
걷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2005년부터 걷는 취미를 가진 자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감은빛 2013-03-06 15:44   좋아요 0 | URL
답이 엄청나게 늦었네요! 죄송!

걷는 취미를 갖고 계시다니, 좋네요!
저도 평소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두세 개 거리는 걸어다녀요.
좀 빨리 걸으면, 그리 시간차이가 나지도 않더라구요.

걷다보면 자꾸 글감이 떠오르는데,
빨리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 두드리고픈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서 앉으면 또 멍하니 빈 화면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순오기 2013-02-1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쁘지 않으면 한 시간 정도의 거리는 걸어갑니다.
생각도 정리하고 운동도 하는 일석이조의 시간이죠.
이 책 우리 도서관에서도 구입해야겠어요.
3월부터 11명의 숲해설가들이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매달 1회의 숲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생태관련 도서를 더 장만하려는데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두 공주님들은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지요? 많이 컷겠네요.^^

감은빛 2013-03-06 15:56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순오기님도 많이 걸으시네요.
생태관련 도서를 저도 많이 읽으려하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게으리기도 하고 생각만큼 잘 안되네요.

큰아이는 초등 2학년이구요.
작은아이는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어요.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