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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로 바쁘다.

뭔가를 하다보면 늘 또다른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예전에는 꼼꼼하게 해야할 일들을 체크해두고,

잊지 않고 챙기고, 일을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해치웠다.

나름 유능하다고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로 어이없는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게다가 이 정도쯤 되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대충 눈치를 채는 듯 하다.

저 인간이 요즘 좀 이상하구나! 싶을 것이다.

 

힘들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견디기 어렵다.

최근 몇 달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

어이없는 실수들은 그래서 나온 것이 아닐까.

살짝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분명히 내가 원해서 선택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왜 하나도 즐겁지 않을걸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왜 늘 한숨을 쉬고 있을까?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왜 읽을 시간이 없을까?

쓰고 싶은 글이 많은데, 왜 쓸 시간이 없을까?

왜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걸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제 한 친구에게 걱정과 우려가 섞인 충고를 한참동안 들었다.

나에게 뭔가 기대를 갖고 있던 친구.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나를 우려의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그는 왜 내게 그런 기대를 갖게 되었을까?

나는 그의 기대에 맞춰주어야 했던 것일까?

아니 지금이라도 맞춰줘야 하는 걸까?

 

최근 한 후배에게 상담요청이 들어왔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고 지난 겨울에 처음 만나서,

그동안 몇 번 만나지도 못했지만,

하지만 그 후배는 내게 큰 신뢰를 보내는 눈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약 10년 전에 내가 겪었던 일과 거의 비슷했다.

다행히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내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나름의 충고를 들려줄 수 있었다.

비록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가 보내주는 신뢰 때문이었는지, 나는 진심으로 그가 이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가기를 바랐다.

제발 나처럼 일을 잘못 풀어서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최근 몇몇 사람들이 내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말해 기쁘고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 기대들이 나의 '꼰대 의식'을 자극하여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 양 한껏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우울해지곤 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내게 기대를 거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런 고민들을 풀어보고 싶어도 선뜻 말을 걸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냉정하고 차갑게 그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라고,

내게는 바보처럼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이 마치 나를 비난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뭐 하나 잘난 것도 없으면서 마냥 잘난척 하는 애송이는 아닐까?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게 되면,

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답한다.

어느 상황에서나 남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 역시 남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잘 모르겠다.

진실은 무엇일까?

과연 지금의 내 선택은 내가 원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 원했던 것일까?

 

친구의 책상에서 우연히 [은퇴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동갑이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이가 벌써 '은퇴'를 생각할 나이인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다른 대화를 하느라고 기회를 잃었다.

입으로는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내뱉으면서

손으로는 주르륵 책장을 넘겼다.

눈은 하릴없이 페이지들 사이로 옮겨다녔다.

 

그러다 문득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흥미에 재능을 연결하라!"

번역어 특유의 뭔가 어색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더 이 말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며칠 전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당신과는 대화하기가 어렵다.

당신은 너무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할 지 모르겠다."

그랬던가?

나는 '정치'에만 관심을 둔 사람이었던가?

그가 종종 '녹색당' 이야기를 물어서 말해준 것 밖에 기억이 안나는데,

그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그래서 내가 먼저 정치 이야기를 꺼낸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나는 정치에만 관심을 둔 사람이었구나!

 

과연 내가 가장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내 흥미와 내 재능이 만날 수 있는 일은 과연 뭘까?

 

이 책에서는 사람을 6개의 분류로 나누고 있다.

좌뇌와 우뇌의 발달 여부가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사색적, 관계지향적, 활동적 성향을 또 하나의 기준으로 두었다.

 

1. 분석적이고 사색적인 사람

2. 조정하고 조직하는 사람

3. 기교와 기술이 있는 사람

4. 영적 통찰력이 있는 사람

5. 격려하며 영감을 주는 사람

6. 쾌활하게 행동하는 사람

 

나는 과연 어디에 해당될까?

경우에 따라서 1번, 2번, 4번, 5번이 될 수 있는 듯 하다.

6개의 유형 중에 4개의 유형에 겹치는 사람.

나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이 책은 이어서 각 유형별로 어떤 일에 재능을 갖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이 내용은 너무 방대하여 여기에 다 소개하기 어렵겠다.

 

그러고보니 이 책은 은퇴를 앞둔 사람에게만 유용한 게 아니라,

삶의 태도를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적절한 생각할 꺼리들을 던져준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차분하게 천천히 고민해보련다.

 

과연 나의 흥미와 재능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긴 호흡으로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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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굿 2012-06-29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마흔도 안 됐지만 은퇴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직/직장생활보다는 개인/독립적인 일을 하고 싶다.

감은빛 2012-06-29 11:3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부분은 '은퇴'가 아니라 '독립'의 개념인 것 같네요.
찾아보시면 개인/독립적인 일들도 종류가 많더라구요.
원하는 방식의 일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blanca 2012-06-2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제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내가 원하는 내가 정말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인 것 같아요. 힘내세요!

감은빛 2012-06-29 11:35   좋아요 0 | URL
어려운 일이죠.
저는 지금까지는 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거든요.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보니 그게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정말 잘 모르겠네요.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비우기, 버리기, 내려놓기

 

한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을 만나면 요새 3 Job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첫번째는 돈버는 직장 일이고, 두번째와 세번째는 돈 못버는 일이다. 육아를 포함한 가사노동과 녹색당 일이 그것들이다. 한 친구가 그랬다. "넌 어떻게 그렇게 돈도 안되는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니?" 모르겠다. 살면서 돈 되는 일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것이 나름 재밌고, 보람도 있었지만 어느순간부터 한계가 느껴졌다. 일단 체력의 한계가 왔다. 새벽까지 밤 잠 못자고(혹은 안자고) 뭔가를 하는 일이 거의 특기에 가까운 나에게도 지금처럼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두번째로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늘 뭔가에 치여서 급하게 처리하고 또 다른 급한 일을 맞이하다보니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번째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점점 더 나 자신에게 투영해서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피곤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만 내 잣대로만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다.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자의식이 너무 강하구나! 내가 나를 자꾸만 고집할 수록 모든 일이 자꾸만 더 어렵게 되어가는게 아닌가 싶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비우고, 나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나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서서히 나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노찌따

 

주말이었던가? 아내는 어딘가 약속(혹은 모임)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어느 오후, 아이들을 준비시켜서 근처에 놀러가는 중이었다. 작은아이에게 어디가느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웃으면서 "노찌다(녹색당)"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아이가 끼어들어 녹색당 가는 거 아니라고 말했는데, 작은아이는 "노찌따 가는 거 아니야?" 라고 물었다. 한참 집 근처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시 작은아이에게 어디 놀러왔냐고 물었다. 역시 아이는 이번에도 "노찌따"라고 답했다.

 

지난 토요일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역시 어디 공원에 바람이나 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작은아이에게 어디 놀러가냐고 물었다. 역시 돌아온 대답은 "노찌따"였다. 어쩌다 작은아이에게 놀러가는 곳은 모두 녹색당이 되어버렸을까? 아마 작년 가을부터 창당준비과정에 참여하면서 회의나 모임에 나가야 할 때,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아이에게 녹색당이 놀이터와 거의 비슷한 의미이듯이, 큰아이도 녹색당에 함께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거기 가면 많은 이모들과 삼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뭔가 먹을 것도 잔뜩 주고, 함께 놀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5월 초에는 실제로 아이 둘을 데리고 녹색당 지역 모임에 참여했다. 퇴근하자마자 아이들을 데려와서 대충 세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 바쁘게 움직이면서 아이들에게 녹색당에 놀러갈 거라고 했더니 두 녀석이 손을 맞잡고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했다. 물론 모든 녹색당 모임이 녀석들에게 재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큰아이의 경우 조금 더 크면 이제 더이상 아빠를 따라다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늘 따라와서 투정부리지 않고 잘 지내주는 녀석들이 고맙다!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나에게도 녀석들처럼 녹색당이 놀이터와 비슷한 의미가 되어, 모임이나 행사에 나가는 것이 재밌고 즐거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맡고 있는 역할이 너무 무거워서 벅차고 힘겹다고 느껴지는 요즘 그런 바램이 더욱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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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2-05-3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히 부러운데용 ㅎ

감은빛 2012-06-04 11:20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 뭐가 부럽다는 걸까요?
아이들이랑 놀러다니는 모습이?
그거라면 라주미힌님도 그리 멀지 않았어요! ^^

꼬마요정 2012-05-3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럽습니다.^^

감은빛 2012-06-04 11:21   좋아요 0 | URL
꼬마요정님. 안녕하세요.
어떤 점이 부러운건지 모르겠지만,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2-05-3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찌타^^ 아이들이 크면 이 가치와 아버지가 주셨던 무언의 가르침이 남아있겠지요. 부럽습니다.3

감은빛 2012-06-04 11:22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던 참입니다.
그래도 녹색당이 이 절망적인 세상에 작은 희망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블랑카님. 고맙습니다!
 

별명 부르는 가족

 

어려서부터 본명이 아닌 가명을 쓰거나 필명을 쓰는 것에 대해 멋지다는 생각을 가끔 했지만 별명을 부르는 것은 그닥 내키지 않았다. 아마도 별명이란 것을 스스로 짓는 경우보다는 대개 친구들이 놀리듯이 붙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지금 쓰고 있는 '감은빛'은 온라인에서 필명으로 쓰기 위해 스스로 지은 것이고, 그 전에 불리던 별명은 '갈매기'였다. (야)구도(시)로 유명한 부산의 상징, 갈매기. 형들은 '갈매가'(갱상도 특유의 억양이 중요포인트!)라고 불렀고, 후배들은 '갈매기 오빠야'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서울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이 별명이 내 외모나 내 말투와 그닥 와닿지 않는다는 평을 자주 듣게 되면서, 그리고 그 별명을 주로 부르던 사람들과 더이상 자주 만나지 않게 되면서 스스로도 안쓰게 되었다.

 

엊그제였던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큰아이가 뛰어나오며 우리 집에서는 이제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기로 했단다. 엄마는 '한알', 큰아이는 '딸기', 작은아이는 '당근'이란다. 무엇을 기준으로 지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다들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땀에 젖은 웃옷을 벗고 있는데, 큰아이가 빨리 내 별명을 정하라고 난리다. 그 순간 '갈매기'가 떠올랐으나, 다들 2글자 별명이니 부르기 쉽게 맞춰야겠다 싶었다. 뭐가 있을까? 일단 옷부터 벗고 하면 안될까? 시간을 끌면서 고민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다가 뭐를 연상해서 그랬는지 큰아이가 '감자'라고 불렀다. 그러자 아이엄마는 대뜸 반발하며 '감자'가 얼마나 맛있는데, 이런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오래전에 쓰던 온라인 별명 '흰긴수염고래'를 떠올리며, '고래'라는 별명을 쓰겠다고 큰아이에게 말했더니, 이번에도 아이엄마는 곧바로 '술고래'라고 받아쳤다. 그래! 역시 그 반응이 나올줄 알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엄마가 '매기'라고 불렀다. '갈매기'에서 앞글자 빼고 '매기'란다. 이쯤되면 나도 거의 포기상태. 뭐 좋다. '매기'든, '감자'든, '고래'든 뭐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아니 세개 다 별명으로 쓰면 어떤가?

 

아침에 큰아이 학교 교문 앞에서 "딸기씨, 재밌게 놀다와!" 그랬더니, "매기씨, 다녀올게요!" 하고는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개구쟁이 녀석!

 

찌쭝과 땀똔

 

가족들 호칭 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처음에는 그리 쉽지 않은 발음이다. 큰아이는 함미(할머니)를 먼저 발음했고, 하뻐지(할아버지 - 이 발음은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를 나중에 발음했다. 동생네 조카들은 둘다 함미(할머니), 하삐(할아버지)라고 발음했다. 재밌는 건 우리 작은녀석은 거의 처음부터 원 발음에 가깝게 말했다. 함머니(할머니)와 하라머지(할아버지). 특히 할아버지 발음은 글자가 4개이므로 대부분 처음에는 2글자나 3글자로 줄이는 듯 한데, 요 녀석은 일찍부터 4글자의 발음을 들려줬다. (큰아이에 비해) 말이 늦은 편이지만 알아들을만한 단어를 구사할 때는 제법 원 발음에 가깝게 말하는 편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닫는다.

 

그럼 가족들을 부르는 말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당연히 삼촌이다! 큰아이는 신기하게도 삼촌을 '찌쭝'이라고 불렀다. 그 발음이 너무 재밌어서 자꾸만 삼촌을 불러보라고 해놓고, 온 식구들이 모두 웃곤 했다. 작은아이는 '땀똔'이다. 역시 말하는 시점이 늦은 대신 원 발음에 가깝다.

 

지난 [뗀뗀님과 넨넨님] 글 마지막즈음에 좋아하는 먹거리에 대한 '유아어'를 떠올리면서 우리 작은아이는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공갈젖꼭지'를 뜻하는 '뚜뚜'를 적어놓았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이후 잘 생각해보니, 요 녀석이 좋아하고 유난히 찾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비줍'이다! 이게 뭘 말하는 걸까? 생협에서 박스채 시켜먹는 '배즙'을 말한다. 이 배즙은 달인 배즙이 아닌 생 배즙이다. 큰아이는 달인 배즙의 경우 잘 안먹는데, 생 배즙은 종종 먹는다. 그리고 작은아이는 아주 생 배즙의 귀신이라고 할만큼 좋아한다. 뭔가 기분 안좋은 일이 있으면 무조건 '비줍'을 찾으며 울어댄다. 기분이 안좋으니 일단 자기가 좋아하는 배즙으로 기분 전환을 하겠다는 뜻이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발달단계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 큰아이는 어떤 물건을 볼때마다 무조건 '엄마꼬', '아빠꼬', '함미꼬', '안야꼬(자기꺼)' 등으로 분류를 하고는 확인하듯이 물어보곤 했다. 무엇이든 물건을 보면 무조건 자신이 생각하기에 주로 쓰는 사람걸로 분류해냈다.

 

물론 작은아이도 짧은 기간동안 '엄마꼬', '아빠꼬'를 했지만, 길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게모야?'라는 질문을 더 많이 했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질문,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 처음에는 아이 말투를 따라해가며 재밌게 대답하다가도 세번, 네번 심지어 열댓번씩 질문이 반복되면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마련이다. 점점 굳어져가는 표정과 말투를 느끼면서도 아이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쯤 대답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제 풀에 지쳐 아이가 먼저 물건의 이름을 말하곤 한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아이의 이름을 말하는 시기와 발음의 차이이다. 큰아이는 비교적 빨리 자기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안야'(물론 유아어)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우리가 뭔가를 대신 해주려고 하면 '안야가! 안야가!'를 큰 소리로 외쳤다. 자기가 하겠다는 소리다. 자기 물건은 '안야꼬!'라고 강조하면서 절대 안주려고 했다.

 

그에 비해 작은아이는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불러줘도 발음이 모호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갑자기 자기 이름에 가까운 발음을 시작했다. '이떵이'(역시 유아어)이라고 말이다. 요 녀석도 요즘 '이떵이가! 이떵이가!'를 외치며 자기가 양말을 신겠다거나, 바지를 입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물론 아직 혼자서는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것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에 대해서도 '이떵이꺼!'를 분명하게 외치며 안뺏기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큰아이보다 개월수로 대략 3~4개월 이상 늦은 것 같다.

 

대신 작은아이는 확실히 행동발달이 빠르다. 큰아이도 아침마다 무겁다고 투덜대는 책가방을 작은아이가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무척 놀랐다. 큰아이는 지금도 거의 하지 않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행동도 작은아이는 겁도 없이 거침없이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역시 사람들은 다 저마다 개성을 갖고 태어나는구나! 새삼 아이들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나 역시 늘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뭔가 남들보다 잘 하는 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서 용기를 얻으며 또 한번 열정을 태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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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5-24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큰애때는 제법 꼼꼼히 기록한 게 많은데, 작은애 기록은 별로 없어 늘 미안해요. 님의 페이퍼를 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감은빛 2012-05-24 09:59   좋아요 0 | URL
저는 큰아이 때도 많이 써놓지 못했구요.
작은아이도 여전히 많이 쓰지 못하고 있네요.
그래도 조선인님이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

봄나무 2012-05-2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사시는군요!

감은빛 2012-05-30 16:55   좋아요 0 | URL
재밌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

hnine 2012-05-2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땀똔'이 무엇인지 제목만 보고 알았어요 ^^
'찌쭝'은 정말, 재미있는 연구대상인데요. 어떻게 그렇게 발음하게 되었을까...

감은빛 2012-05-30 16:56   좋아요 0 | URL
앗! 제목만 보고!
그렇죠. 땀똔은 아무래도 쉽게 알 수 있죠.
찌쭝은 저도 늘 궁금해하고 있어요.
정작 큰아이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구요. ^^
 

며칠 전 아내가 말했다. 큰아이 반 엄마들이 선생님 선물을 준비하는데, @@만원 미만의 선물은 해도 소용없다며 얼마 이상을 내야 한다고 말했단다. 가난한 형편에 선생님 선물로 그런 큰 돈을 쓸 여유도 없지만, 돈이 있다고 해도 '스승의 날'이라는 형식적인 날 그리 큰 돈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 나라의 공교육이라는 것이 참 암담하다는 생각을 또 한번 하면서, 이 지옥같은 학교 생활을 헤쳐나갈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애초에 커피(공정무역)나 차(유기농) 따위의 간단한 선물을 생각했던 아내는 그런 표도 안나는 선물은 하지 말라는 다른 엄마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 역시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가 포장해준 손수건이나 양말 한 켤레를 가져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땐 대부분이 양말이나 손수건이었던 것 같다. 다만 형편에 따라 상표(메이커)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선택의 폭이 넓어졌겠지만, 큰 돈을 들이지 않는 한 선물은 대개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학자금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혹은 먹고 살기 위해 학원 강사 생활을 좀 했었다. 학원 강사도 선생님이라고 스승의 날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다녔던 학원은 제법 규모가 있는 보습학원으로 유명한 우범지역(즉 가난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수업을 맡았으며,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았다. 처음 스승의 날 선물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묘했다. 학원 선생님까지 챙겨야 하는 어머니의 수고로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아이들에게 더 신경써야겠다는 의무감 등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재미있게도 여전히 선물의 대세는 양말이었다. 양말 선물세트가 2개와 와이셔츠 1벌을 받았다. 그리고 담임을 맡지 않았는데도 몇몇 여학생들에게는 카드와 편지, 꽃 한송이 등을 받았다.

 

당연하겠지만 학원 선생님들 중에서도 인기에 따라 선물의 편차는 무척 크다! 대개 여선생님들 보다는 남선생님들이 더 선물을 많이 받거나, 더 좋은 선물을 받고, 학생들에게 편지나 카드나 꽃 등을 받을 때도 남선생님들이 더 많이 받는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원강사를 시작한 한 남선생님은 키도 크고, 얼굴도 비교적 준수한 편이어서 들어오자마자 그 학원 최고의 인기 선생님으로 등극했는데, 스승의 날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았다. 꽃다발과 케이크가 여러개였고, 크고 작은 포장된 상자들이 제법 쌓였다. 그 친구는 받은 선물들을 한번에 집으로 가져갈 수 없어서 책상위에 쌓아놓고 여러날에 걸쳐서 옮기느라, 우리의 질투심에 더욱 불을 질러댔다.

 

그리 오래지 않은 기간동안 여러 학원을 옮겨다니며 담임을 맡았던 게 너댓번 쯤 된다. 몇 차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기억나는 선물은 역시 양말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학생. 조용한 편이어서 차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간고사를 치고보니 성적이 무척 좋지 않았다. 전화상담 결과 부모님들도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셨다. 아이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부모님들은 시장에서 가게를 하시는 데, 새벽에 일찍 나가시고, 밤 늦게 돌아오셔서 아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셨다. 부모님께서는 이왕 학원에 보내고 있으니,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하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아이가 더 빗나가지 않기를 바랬다. 학원 강사로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개별적으로 공부를 좀 더 봐주는 것으로 그 아이를 붙잡으려 했다. 처음에는 성공이었다. 거의 전 과목을 1대1로 봐주었더니, 기말고사에서 그 아이의 성적이 확 올랐다. 아이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까지 학원으로 끌어들여서 더욱 열심히 다니는 듯 했다. 다음 해 그 아이가 중3이 되어서도 나는 계속 담임을 맡았다. 그 양말은 그해 스승의 날에 받은 것이다. 전화를 통해 작년에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우리 아이가 성적이 많이 올라서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차례 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이의 성적은 다시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1학기를 마치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나를 대신하여 담임이 된 친구와 친하게 지냈기에 종종 그 아이의 소식을 물었다. 성적은 계속 떨어졌으며, 같은 학교에 다니는 조금 불량해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을 더 학원으로 데려와서 같이 다니고 있으며, 예전보다 수업태도도 많이 나빠졌다는 소식이 돌아왔다. 안타까웠다. 그 친구 역시 학원 방침에 따라 부모님과 전화상담을 종종 하는데, 예전 담임이었던 내 얘기를 가끔 한다고 했다. 나에게는 아르바이트로 잠깐 스쳐가는 학원 강사였는데, 그 아이와 부모님들께는 또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채 2년이 안되지만, 그때 받은 양말은 한 4~5년쯤 신었던 것 같다.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 양말을 찾아 신다가 문득 그 양말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아이가 생각났다. 지금쯤 얼마나 자랐을까? 이젠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겠지. 부디 더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았기를,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그 아이을 떠올리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옷을 껴입곤 했다.

 

선물이라는 건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면 잠시 선물했던 사람을 떠올리고,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선물 아닐까? 값비싼 선물들이 잔뜩 받는 선생님이라면 과연 나중에 그 선물로 인해 아이들을 떠올리고, 아이들의 안부를 궁금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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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5-16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글은 참 감동적이네요.
근데 촌지와 관련해서 사실 서울의 몇몇 지역은 뭐 그냥 한번 인사가는데 몇 십만원은 기본이라고 하더군요.그래선지 몇 지역은 5년이 한도라고 합니다.정말로 아이들 교육에 헌신하는 많은 교사분들이 몇몇 미꾸라지 선생덕분에 도매급으로 욕을 먹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감은빛 2012-05-18 14:21   좋아요 0 | URL
촌지 문제는 마치 다 해결된 것인양,
이제는 그런 선생님은 아예 없는 것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보니 여전히 촌지 문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스승의 날 선물은 차라리 상징적인 문제이구요.
소풍, 견학, 체육대회 등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각종 행사들에
아이들 간식이나 선생님 식사 등이 부모들의 몫으로 떨어지고,
교실청소나 급식담당 등의 자잘한 일들에 학부모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참, 우습지도 않은 현실입니다.
부모들이 학교에가서 아이들, 선생님들 뒷바라지나 하고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의 어느 도시에 학교촌지가 번지기 시작했다네요.처음엔 미국교사들이 질겁을 했는데 나중엔 적응이 되어 은근히 바라는 교사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알다시피 미국교사들은 방학 때는 급료를 못받아 수입이 낮으니 한국학부모들이 주는 돈이 살림에 보탬이 된 게 아니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이런 것도 문화수출인가요...

감은빛 2012-05-18 14:24   좋아요 0 | URL
허! 참 자랑스러운 한국문화의 세계화로군요!
미국에서는 교사들이 방학때 급료를 못받는 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교사가 최고라는 인식이 있는데,
(공무원이고, 방학도 있잖아요!)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겠군요.

마녀고양이 2012-05-17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는 일체 선물 금지 공문이 5년째 날아오고 있어요.
심지어 카네이션도 안 된다고 하네요, 비싼 선물을 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슬프지만
이렇게 일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날아오는 것도 슬퍼요.... 자연스럽지 않아요. ㅠ

감은빛 2012-05-18 14:25   좋아요 0 | URL
자연스럽지 않죠!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물이라면 주고 받는 것이 정상일텐데,
그것을 강제로 막는 다는 것도 참 웃기는 짓이네요.
부모와 학부모는 또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아침에 큰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한마디 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재밌게 놀다와!" 그말에 아! 오늘이 스승의 날이구나 싶었다. 아이는 오늘 학교에서 작년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께 그림편지를 쓸 거라고 했다. 교문 앞에서 재밌게 놀다오라고 머리를 쓰다듬은 후 들여보내고, 지하철 역을 향하면서 새삼스레 스승의 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실 학창시절부터 선생님께 감사나 존경의 감정을 느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내가 겪어 온 여러 선생님들 중에서 스승답다고 생각할만한 분은 거의 안계셨다.

 

유일하게 '스승'이란 표현을 인정해 주고 싶은 분은 중학교 1, 2학년 2년간 담임을 맡았던 음악선생님이다. 키가 크고, 근육질 몸매에 아주 잘생긴 얼굴의 남자 음악선생님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권투를 했다고 했는데, 어깨에서부터 팔뚝까지 내려오는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주먹은 또 어찌나 컸는지 그 큰 주먹이 정면으로 날아오는 상상만으로도 맞설 생각이 싹 달아날 것 같았다. 그 선생님은 여러모로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늘 관대하고 공평하고 학생들을 믿어주는 태도 때문이다. 나는 조금 말썽을 일으키는 편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그런 관대함과 공평함과 무심함(실은 무심함을 가장한 신뢰)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키가 작고, 덩치가 작은 편이었기에 약해보였던 나는 곧잘 덩치 큰 아이들과 부딪치곤 했다. 점심 도시락 반찬을 뺏아먹으려는 녀석들과 한 판. 샤프나 볼펜 따위의 학용품을 뺏으려는 녀석들과 한 판. 회수권이나 푼돈 따위를 뺏으려는 녀석들과 한 판. 예쁜 여배우(소피마르소?) 사진을 코팅한 책받침을 뺏으려는 녀석들과 또 한 판. 별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거나 장난을 거는 녀석들과도 한 판. 어쩌다보니 나는 우리 반에서 싸움을 제일 많이 한 녀석으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상대 전적도 나쁘지 않았다. 완승을 거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완패를 당한 경우는 아예 없었다. 당시의 기준(코피, 울음, 패배시인)으로 봤을 때, 대부분은 판정승 정도로 인정받았다.

 

치고 받고 싸우고나면 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순하게 생긴 놈이 심심하면 싸움박질이나 하고 상처투성이였으니, 담임 선생님이 몰랐을 리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싸운 건으로 훈계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학년이 바뀔 때 마지막으로 개별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는 한마디 하셨다. "내년에는 싸움 좀 고마해라! 니가 우리반에서 싸움 제일 많이 한다매? 덩치도 작은 놈이 무슨 싸움을 그리 하노?" 그러나 다음 해에도 나는 또다시 싸움을 반복해야 했다. 먼저 시비를 걸고, 뭔가를 뺏으려 드는 놈들에게 맞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봄에는 덩치가 엄청 큰 - 마치 곰같은- 놈과 싸우다가 눈 아래를 찢어놓았다. 그 놈은 이틀인가 학교를 못나왔다. 선생님은 잘못해서 눈을 다쳤으면 큰일 났을 거라고 한마디 하셨지만 심하게 야단치지는 않았다. 가을에는 내 물건을 훔쳐간 녀석과 싸움이 붙었는데,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좀 심하게 패버렸다. 바닥에 쓰러뜨려놓고, 몸통을 깔고 앉아서 두들겼는데, 나중에는 주먹 쥘 힘이 없어서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 녀석은 얼굴이 완전히 부어올라서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고, 나도 초반에 얻어맞은 덕분에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때도 선생님은 싸움을 했다는 사실보다는 너무 과하게 때렸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조심하라고 하셨다.

 

당시 다른 반 담임선생님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개인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싸운 사실만으로 매질을 했다. 만약 내가 다른 선생님을 만났다면 그 2년동안 수없이 매질을 당하느라 허벅지와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선생님은 단지 싸움질만 용서해 준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학생들 일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숙제를 안해가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던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숙제 좀 안할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오는 게 니한테 좋을끼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형편에 육성회비나 보충수업비 따위의 학비를 제때 내지 못했던 나를 위해 소액의 장학금을 알아봐주시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별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로 정말 많이 맞으면서 자랐는데, 당시 기준으로 맞을 짓을 많이 하고도 그 선생님께 매를 맞은 기억은 없는 듯 하다.(혹 반 전체가 손바닥을 맞거나, 아주 사소한 일로 맞은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선생님이건 남선생님이건 당시에 한번도 나를 때리지 않은 선생님은 거의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솔직히 별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없어서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는데, 아주 가끔 그 선생님은 어디서 뭘하고 계실까 궁금하기는 하다. 당시 선생님 나이가 아마도 지금 내 나이쯤 되었을까? 아니 좀 더 젊었으리라 생각된다. 이후로도 계속 관대함과 공평함과 무심함을 가장한 신뢰로 나 처럼 예민한 학생들을 더 빗나가지 않게, 스스로의 가치 판단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주셨으리라. 비록 직접 들려드릴 수는 없지만, 이 미욱한 글로서라도 감사하고 또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본다.

 

※ 아래는 본문과는 관계없는 스승의 날 권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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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2-05-15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대함은 선생으로서의 덕목뿐 아니라 부모가 지녀야 할 덕목이지요.. 저는 그닥 인상적인 선생님을 못 만났어요.

한창훈의 꽃의 나라를 묘사된 기시감을 느꼈어요. 저는 여중여고라 맞지 않고 다녔는데 남자학교는 아니였나 봅니다. 다음에 남동생 만나면 너도 그렇게ㅡ맞았냐고 물어봐야겠어요.

감은빛 2012-05-16 12:05   좋아요 0 | URL
네, 관대함은 기본적으로 어른이 아이들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꽃의 나라]를 강추하는 분들이 계셔서 읽어야지 생각만했는데,
기억의집님께서도 언급하시네요. 정말 꼭 읽어야겠어요.

남학생들은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물론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달랐겠지만, 폭력이 일상화된 공간이 바로 학교였죠.

blanca 2012-05-1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평함. 맞아요. 저 학창시절에도 좋은 선생님을 얘기할 때 이 대목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너무 충격적이었던 교사를 만나--;;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시작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가 처음 하는 학교 생활에서는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그런데 감은빛님 학창 시절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참 짠하네요.

감은빛 2012-05-16 12:10   좋아요 0 | URL
뭐든 시작이 중요하죠.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충격적인 교사를 만나셨다니!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저희 큰 아이도 올해 1학년이라 첫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이가 많고, 많이 보수적이고, 아이들에게 엄하게 대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으로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대부분 나이 많은 선생님들이 저학년(특히 1학년)을 맡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구요.

차트랑 2012-05-16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등학교 때 어느 국어 선생님께서는
무더운 여름 나 깜빡 졸기라도하면
등에 손을 가만히..얹으시고 수업을 하셨습니다.
등이 따듯해서 눈을 떠보면
바로 국어선생님이었죠.

너무도 죄송해서
다음부터는 졸 수가 없었답니다.
멋진 선생님이시죠?

감은빛 2012-05-16 12:12   좋아요 0 | URL
정말 멋진 선생님이시네요!
대개는 분필을 집어던지거나,
호통을 치거나,
옆으로 가서 책상을 쾅 두드리거나,
머리를 쥐어박거나 했던 것 같은데요.

차트랑 2012-05-16 12:55   좋아요 0 | URL
출석부로 머리를 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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