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로 바쁘다.

뭔가를 하다보면 늘 또다른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예전에는 꼼꼼하게 해야할 일들을 체크해두고,

잊지 않고 챙기고, 일을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해치웠다.

나름 유능하다고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로 어이없는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게다가 이 정도쯤 되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대충 눈치를 채는 듯 하다.

저 인간이 요즘 좀 이상하구나! 싶을 것이다.

 

힘들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견디기 어렵다.

최근 몇 달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

어이없는 실수들은 그래서 나온 것이 아닐까.

살짝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분명히 내가 원해서 선택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왜 하나도 즐겁지 않을걸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왜 늘 한숨을 쉬고 있을까?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왜 읽을 시간이 없을까?

쓰고 싶은 글이 많은데, 왜 쓸 시간이 없을까?

왜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걸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제 한 친구에게 걱정과 우려가 섞인 충고를 한참동안 들었다.

나에게 뭔가 기대를 갖고 있던 친구.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나를 우려의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그는 왜 내게 그런 기대를 갖게 되었을까?

나는 그의 기대에 맞춰주어야 했던 것일까?

아니 지금이라도 맞춰줘야 하는 걸까?

 

최근 한 후배에게 상담요청이 들어왔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고 지난 겨울에 처음 만나서,

그동안 몇 번 만나지도 못했지만,

하지만 그 후배는 내게 큰 신뢰를 보내는 눈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약 10년 전에 내가 겪었던 일과 거의 비슷했다.

다행히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내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나름의 충고를 들려줄 수 있었다.

비록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가 보내주는 신뢰 때문이었는지, 나는 진심으로 그가 이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가기를 바랐다.

제발 나처럼 일을 잘못 풀어서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최근 몇몇 사람들이 내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말해 기쁘고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 기대들이 나의 '꼰대 의식'을 자극하여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 양 한껏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우울해지곤 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내게 기대를 거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런 고민들을 풀어보고 싶어도 선뜻 말을 걸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냉정하고 차갑게 그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라고,

내게는 바보처럼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라고 한다.

그 말이 마치 나를 비난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뭐 하나 잘난 것도 없으면서 마냥 잘난척 하는 애송이는 아닐까?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게 되면,

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답한다.

어느 상황에서나 남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 역시 남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잘 모르겠다.

진실은 무엇일까?

과연 지금의 내 선택은 내가 원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 원했던 것일까?

 

친구의 책상에서 우연히 [은퇴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동갑이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이가 벌써 '은퇴'를 생각할 나이인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다른 대화를 하느라고 기회를 잃었다.

입으로는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내뱉으면서

손으로는 주르륵 책장을 넘겼다.

눈은 하릴없이 페이지들 사이로 옮겨다녔다.

 

그러다 문득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흥미에 재능을 연결하라!"

번역어 특유의 뭔가 어색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더 이 말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며칠 전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당신과는 대화하기가 어렵다.

당신은 너무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할 지 모르겠다."

그랬던가?

나는 '정치'에만 관심을 둔 사람이었던가?

그가 종종 '녹색당' 이야기를 물어서 말해준 것 밖에 기억이 안나는데,

그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그래서 내가 먼저 정치 이야기를 꺼낸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나는 정치에만 관심을 둔 사람이었구나!

 

과연 내가 가장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내 흥미와 내 재능이 만날 수 있는 일은 과연 뭘까?

 

이 책에서는 사람을 6개의 분류로 나누고 있다.

좌뇌와 우뇌의 발달 여부가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사색적, 관계지향적, 활동적 성향을 또 하나의 기준으로 두었다.

 

1. 분석적이고 사색적인 사람

2. 조정하고 조직하는 사람

3. 기교와 기술이 있는 사람

4. 영적 통찰력이 있는 사람

5. 격려하며 영감을 주는 사람

6. 쾌활하게 행동하는 사람

 

나는 과연 어디에 해당될까?

경우에 따라서 1번, 2번, 4번, 5번이 될 수 있는 듯 하다.

6개의 유형 중에 4개의 유형에 겹치는 사람.

나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이 책은 이어서 각 유형별로 어떤 일에 재능을 갖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이 내용은 너무 방대하여 여기에 다 소개하기 어렵겠다.

 

그러고보니 이 책은 은퇴를 앞둔 사람에게만 유용한 게 아니라,

삶의 태도를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적절한 생각할 꺼리들을 던져준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차분하게 천천히 고민해보련다.

 

과연 나의 흥미와 재능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긴 호흡으로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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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굿 2012-06-29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마흔도 안 됐지만 은퇴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직/직장생활보다는 개인/독립적인 일을 하고 싶다.

감은빛 2012-06-29 11:3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부분은 '은퇴'가 아니라 '독립'의 개념인 것 같네요.
찾아보시면 개인/독립적인 일들도 종류가 많더라구요.
원하는 방식의 일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blanca 2012-06-2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제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내가 원하는 내가 정말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인 것 같아요. 힘내세요!

감은빛 2012-06-29 11:35   좋아요 0 | URL
어려운 일이죠.
저는 지금까지는 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거든요.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보니 그게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정말 잘 모르겠네요.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