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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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마구마구 책을 읽어 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래서 한 번 잡은 책은 무리하게 속도를 내어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철학 관련 책자들을 읽을라지면, 처음 부분을 읽다가 말다가 하다가 결국엔 내던져 버리기 일수이다. 속도가 붙질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게 무한정 붙들고 늘어져 있을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이젠 이것이 아예 하나의 독서 패턴으로 자리를 잡아,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인문 철학 관련류의 책은 애초에 배제해 놓는다.

누군가 말했다. 책을 현명하게 읽을려면 어려운 책과 가벼운 책을 적절히 배합해 가면 읽어야 한다고, 어제까지는 좀 어려운 책을 붙잡고 씨름을 했으면, 오늘은 심각해지지 않을 책을 잡아야만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균형 감각 같은 것이 생긴다는 요지이다. 나의 경우에는 항상, 읽는 행위가 계속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책읽기에 대해 한없는 애정을 갖도록 하는 책들은 후자, 그러니까 가벼운 소설책이었던 것 같다.

<밑줄 긋는 남자>는 딱 그 쪽이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로맹 가리라는 소설가를 좋아하는 발랄한 스물 다섯 살의 여자 주인공 콩스탕스가 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와 소통을 꿈꾸는 여자이다. 왜 누구나 그렇듯 이 여자도 지금 속이 많이 허하다. 이 때 마침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밑줄 친 부분들이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느낀다.

콩스탕스 또한 밑줄을 긋는 형식으로 알 수 없는 이 타자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 동안에 별 의미없이 다른 남자를 사귀다가 헤어지기도 했고, 한동안 책 읽는 걸 중단하기도 했다. 밑줄을 긋는 남자가 너무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온다고 느꼈고, 콩스탕스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더디게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에 콩스탕스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 밑줄 긋는 남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도서관 사서인 지젤을 통해서.

책은 콩스탕스로 하여금 타자와의 교류를 꿈꾸게 만들었다. 결말에서는 주인공 콩스탕스가 그리던 그 밑줄 긋는 남자를 만났는가? 이건 다음에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여기까지.... 지금 내가 조조거리면 재미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와 이 모든 일상이 모두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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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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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와 어떤 장소나 그만의 냄새가 있다. 심지어는 우리집 강아지에게서도 아무리 샴푸질을 해도 그 녀석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질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낯선 장소에 떨어져도 전에 맡은 적이 있는 냄새를 맡게 되면, 마음이 편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생선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나고 버려진 그르누이는 천성적으로 몸에 냄새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는 냄새에 유난한 집착하며, 가히 후각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급기야 향수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그르누이에게는 야심이 하나 생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향수계의 스승인 발디니나 드뤼오가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그를 죽도록 혹사시키거나 이용해 먹거나, 다른 동료나 세상 사람들이 그 자신을 지루한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 밖에 없다. 향수를 만드는 일. 그 향수로 말할 거 같으면, 그걸 뿌린 사람을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향수. 일단 그 향수를 만들면, 세상은 자기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모두가 자신의 편이 되니까. 정말 시작은 그래서였을까?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서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인가? 

세월이 흘러 드디어 그르누이가 원하는 대망의 향수를 완성하게 되었을 때, 그의 그동안의 살인 행각이 밝혀지고, 시민들이 모인 광장 앞에서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다다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스물 여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이 살인마를 잔인하게 처형시켜야 한다며 아우성이던 사람들이 그르누이가 처형장에 당도한 순간, 처형이 다 뭔가, 그에게 연민과 호감을 느끼며 급기야 사랑하게 된다. 모두 그 향수 덕분이다.

그르누이가 꿈꾸던 것이 드디어 성공했다. 일생일대의 기다리던 그 감격의 순간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 그런데 가만있자 그렇지가 않다. 그르누이 마음이 달라졌다. 사람들로 사랑을 받는 이 상황이 혐오스럽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거지. 사람들은 진짜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에게서 단지 그가 연출한 분위기만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르누이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르누이는 그가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유 고약해라. 

그가 만든 향수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존재가 들키지 않도록 하는 향수, 다른 사람에게 순진하고 가여운 느낌을 주는 향수, 다른 사람들에게 단정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향수.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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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현종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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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은 책을 통해 소개 받는 경우가 많다. 일테면, 밑줄 긋는 남자에서 로맹가리의 소설들을 소개 받고, 상실의 시대를 통해 이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어하듯 말이다. 나는 최근 뉴욕과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읽었는데 시공 디스커버리에서 나온 뉴욕을 읽다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느낀 게 있다. 외국 소설은 번역자를 잘 보고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이 번역한 소설은 남다른 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역시 편견이다. 다른 번역자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더라도 이렇게까지 맥락이 끊기는 단절감을 수시로 경험해야 했을까? 정현종 님의 번역을 에누리없이 말하자면 그거다. 당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이 소설이 유명세를 동반하는 것은 1920년 당시의 뉴욕 상류 사회의 모습, 특히 남녀 관계, 결혼 생활, 부자에 대한 모습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전 중에 고전의 형태인 로망스를 담고 있다는 것. 어릴 적에 읽어대던 하이틴 로맨스들은 <위대한 개츠비>의 형식을 빌어 답보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저 미치었으니.

데이지는 한낱 군인에 지나지 않던 5년 전 신분의 개츠비를 사랑하고는 있었으나, 그가 옥스포드로 파견을 가게 되어 데이지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데이지는 차분히 개츠비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이 타자에 의해 어떤 확실한 형태를 갖추어지길 바랬고, 게츠비가 귀향하지 못하고 있는 그 상황은 무척이나 불안했으리라, 그러다가 만난 부유한 톰에게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고, 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5년만에 만난 부자 개츠비를 보고 그에게 마음이 가는 걸 느꼈지만 현재의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하고 어찌하는 둥의 일련의 일들에 엄두도 안 났으리라.

반면, 이미 유부녀가 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되찾으려는 개츠비의 노력은 그가 갖춘 위엄과 재산의 정도로 보았을 때, 가히 귀엽고 순진해 뵈는 수준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야망을 품은 것이었다. 왜냐, 데이지와 게츠비는 너무나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는 데, 둘이 재결합이 불가능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데이지 쪽의 삶의 스타일은 엉성하며, 무책임하고, 산뜻하며 경쾌하다면, 개츠비는 그와 다르다. 개츠비의 뚝심과 책임감은 데이지가 저지른 교통 사고의 책임까지 스스로 짊어질 정도이다. 결국 그 사건이 개츠비의 죽음을 불러오게 된다.

이 스토리는, 태생적으로 부유한 사람과 후천적으로 부유해진 사람이 결합하고자 하는 데서 발생한 비극적인 에피소드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이 작품의 주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면 않을 그런 주변적 문제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소설에 드러난 돈 있는 사람들의 무책임과 삶의 엉성함 대한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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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V 벗기기
김도연 지음 / 산성미디어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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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일본의 TV 라는 매체를 통해 보다 더 일본의 풍속도를 슬쩍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읽게 된 책이다.

일본 텔레비전을 본 유학생들은 처음에 매우 놀라게 된다고 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이 먹는 것과 성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데.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현대 문명의 거울이라고 본다면 일본의 문화를 아주 관능적이고 단순하다고 평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일본인들 스스로조차도 텔레비전은 반은 허구라는 가정 위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문화적 지표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로 텔레비전 만한 게 또 있을까?

그리고 또 이런 다른 나라 텔레비전 보기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의 정서를 읽어 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좀더 잘 살고 좀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으리라는 욕심이 자꾸 내게 이런 책을 읽게끔 만드는 것 같다.

이 책은 일본의 텔레비전에 대한 것들을 포함해서, 지은이가 유학 생활을 하며 느낀 것들에 대해 걸러지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객관적인 소개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유학을 계기로 차(茶) 문화를 좋아하게 되고, 장훈이나 선동렬 선수의 일본에서의 투혼에 감동하여 야구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된 어느 한국 사람의 개인적인 문화 체험기로 읽는 것이 받아들이는 데 편하다.

심야에 불도 켜지 않고 자전거를 탄 일 때문에 경찰들에게 불신 검문을 받으면서 경찰들과 데이트(?)를 한 이야기, 노천 온천에서 벌어진 헤프닝 같은 것들은 실제 벌어진 일들의 기록이라 읽기에 좋고, 일본의 성 문화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난한 부분에서는 필요 이상의 선입견을 독자에게 심어 준다는 느낌도 들고, 일본의 기업들과 비교하여 한국 기업이 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글들은 논리적인 근거가 빈약하여 조금은 터무니없이 느껴지기는 했고, 때때로 일본통 다른 책들에서 수차례 다룬 것들이라 새로울 것이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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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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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는 주변의 다른 발칸 공산국가들보다도 더 엄격한 공산 체제의 나라라고 한다. 역자의 후기를 보면 작가 카다레는 '혹독한 공산 체제하에 비참하게 일그러져가고 있던 알바니아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그는 실제로 알바니아 출생 프랑스 망명 작가이다.) 새롭게 조국을 창조하기 위해 인간의 형법 중 가장 비인간적이라 할 약식 재판과 고문, 연좌법이 횡행하는 공산 체제에 맞서 사라져가는 옛 관습법을 들이대어 만든 것이 이 소설이라고 말했다.

즉, 비인간적인 공산주의는 한 가문의 일원이 다른 가문에게 살해당하면 피로써 복수하는 관습만도 못하다는 요지이다. '피에는 피'라는 이 카눈의 법칙은 누구의 피도 등가로 취급되기에 어느 헌법 체계보다도 '민주적'이고, 피를 잃거나 거두어들이지 않는 법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유혈을 일으킬 수 없게 만들어, 더더욱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얼핏 냉정해 보이는 관습법을 통해 공산주의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은, 이 소설 속 오로쉬성 대공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정부들이 쓰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왕국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까? 그러나 오로쉬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작가 카다레가 만든 주인공 그조르그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연상시킨다.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에 의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운명에 내몰렸듯이,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왜 상대방의 가문에 대해 증오심을 갖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상대방의 가족의 일원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내몰린다. 피가 피를 부르듯, 피의 관습법에 의해 30일간의 휴전이 끝나면 주인공은 상대 가문의 죽음의 표적이 된다.

카눈이라는 관습법의 지배 아래서는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날 주인공 그조르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자유로운가?'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찾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위안을 삼기도 한다.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 할지라도 그런 삶은 그렇기 때문에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 차라리 이런 위업을 안고 가는 사는 삶이 하루하루 계절들이 그 속에 전율이 동반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해지는 것일'거라고.

<부서진 사월>은 개인적인 나의 취향에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 이유는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관습법에 적용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였고(여자와 성직자는 이 관습법에서 제외된다. 즉, 이런 슬프고도 기이한 운명의 주체적인 주인공이 결코 될 수 없다.), 남성 우월주의적인 사회의 일면을 소상히 담고 있는 배경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자 주인공(이 소설 속의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디안에게, 독자인 나는 막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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