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쓰고 죽어라
스테판 M. 폴란. 마크 레빈 지음, 노혜숙 옮김 / 해냄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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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포함 여느 보통 직장인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뭐냐면.....쉽지 않은 직장살이... 중도하차하고 싶은 맘이 꾸역꾸역 솟아오르는 걸....지그시 눌러 삼키곤 하는 것 말이다. 잘해보자, 잘해보자 스스로를 다독이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경제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조금 원초적으로 이야길 하자면 이렇다. 이 세상이 '돈 나고 사람 나는 (사람 나고 돈 나는 게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이랄까. 맛있는 걸 사먹는 일도, 여행을 가는 일도, 심지어 책을 사보는 일도, 많든 적든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책은 돈에 대한 관리 방식과 돈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읽을 만하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하라는 대로 작은 것까지 실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들자면, 이 책에서는 현금 카드를 절대 사용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번씩 은행에서 현금 찾는 날을 정하여, 그 주에 쓸 돈을 찾아두라고 충고하는데, 일주일에 딱 한번씩 꼬박꼬박 은행을 방문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돈쓰기에 있어서 쪼잔하고도 강박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귀에 딱지 얹힐 만큼 거듭 반복, 강조, 변주해서, 도돌이로 가는 얘기들은 다음 네 가지이며, 지은이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이 네가지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다.

첫째 '오늘 당장 사표를 써라' - 정말로 당장에 회사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던지, 개인 사업을 시작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속에 사표를 써 두고, 직업을 단지 일로만 생각한다면, 직장에 대해, 업무에 대해, 불합리한 기대를 걸지도 않고, 실망할 일도 적어진다는 것이다. 요즘엔 평생 직장의 개념도 없어지고 있고, 보통의 기업들이 수익 올리기와 함께 가차없이 해고하기를 동시에 실행하고 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해고당하고 난 후에, '회사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나'하며, 충격 먹지 않으려면, 평소 이중적인 시각을 갖는 연습이 조금은 필요한 것 같다. 즉, 나 스스로와 회사, 양쪽이 필요로 하는 것을 다 같이 볼 줄 아는 시각말이다.

둘째 '현금으로 지불하라' - 이 부분은 레기네 슈나이더의 '소박한 삶'과 맥락을 같이 한다. 결재 후에 후불로 지불되는 비교적 손쉬운 거래 방식에 매력을 느끼는 나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일으키는 문제인데, 무절제한 신용 카드로 인해, 다달의 월급을 카드빛을 메꾸는데 헌신토록한다. 이러한 기존의 방식을 바꾸어, 소비하는 일을 힘들고 불편한 방식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주장한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을 통해 얻는 것은 물질적인 차익 뿐만아니라, 정신적 보상도 따라 온다고 글쓴이는 강조한다.

셋째 '은퇴하지 말라' -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65세를 정년으로 정했을 때,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63세였다고 한다. 정년이 처음 정해졌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나이까지 살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은퇴를 하고 나서도 평균 15년은 더 산다. 그 15년 동안 흔들 의자에 앉아 지나간 영광을 되씹으며 지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나이 개념에서 65세는 노년의 시작이 아니라 중년의 시작이다. 중년의 나이에 흔들의자는 좀 맥빠진다.

넷째, '다쓰고 죽어라' - 있는 돈 흥청망청 다 쓰고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죽어라. 라는 말과는 좀 다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유산'이라는 형식으로 엄청난 상속세를 물면서 까지, 후대에게 재산을 남기지 말라는 것, 살아 있을 때, 자식들의 삶에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고, 기부금 형식으로 주변에 배풀기도 하면서 살라는 얘기다. 만약, 우리 엄마 아빠께 '적으나마 남아 있는 돈은 노후를 위해 다 쓰시고, 그래도 조금 남으면 저희들에게 조금 나눠 주시고, 아무튼 절대로 유산은 남기지 마세요.' 라고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많이 황당해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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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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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두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맘이 심란해져 왔다. 작년 봄에 설암(혀암)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 필자인 미치에게 화요일마다 함께 했던 루게릭 병에 걸린 모리 교수가 있었듯이, 나에게도 다사롭고 포근하며 모리 교수님처럼 마음이 한없이 부자였던 외할머니가 계셨다. 평소 그렇게 건강하셨던 할머니가 한순간에 턱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말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게 되었으며,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삼킬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몸은 아주 어린 아이처럼 작게 오그라들고 빼빼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가끔씩 외가집으로 할머니를 뵈러 가면, 극심한 통증으로 기진맥진한 얼굴에도 아이같은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시곤 했던 할머니. 내게 아직도 후회스러운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실 즈음에 병상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세상에 없고 돌아가신 분. 하지만 살아생전 할머니와 내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가졌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한, 할머니가 주신 사랑이 내 속에 그대로 남아 있고, 할머니는 다만 육신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을 뿐, 나와의 관계는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내가 죽어 내세에서 할머니와 다시 만나고 예전처럼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여 주시리라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나의 죽음,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모리 교수는 미치에게 그런 말을 한다. '공포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곳에 이르고, 놓여나고 싶네.' 우리가 죽어간다는 생각과 화해하는 것, 그리고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세상에서 진짜 어려운 것을 할 수가 있다고 모리 교수는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면 두 번째로 생각났던 사람은, 얼마 전 싸늘한 몇마디로 서로에게 비수를 꽃고 현재 서로 등을 돌리게 나의 절친했던(?) 벗이다. 곧 관계에 파탄이 날 것만 같은 이 위태로운 상태를 나는 맥놓고 지켜만 보고 있다. 이런 내게 모리 교수는 또 이런 말을 들려 준다. 인간 관계에는 일정한 공식이 없다고. 양쪽이 공간을 넉넉히 가지면서, 사랑이 넘치는 방법으로 협상을 벌여야 하는 것이 '인간 관계'라고.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각자의 삶이 어떤지.

모리 교수와 함께 했던 필자 미치 또한 에필로그에 모리 교수가 한 말과 유사한 말로 내 맘을 약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마치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인양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이다. '연민을 가지세요. 그리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끼세요. 우리가 그런 것을 행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좋은 곳이 될 겁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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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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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이 많은 나는 그렇다. 책을 사서, 읽는 것보다는 소유하는 데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같다. 그런 나는 남에게 책을 빌려 주는 일도 굉장히 인색하다. (못됐다.) 하지만 예외도 있어서, 국내 소설책 만큼은 내가 한번 읽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돌려보고, 나중에 돌려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국내 소설이 소장 가치가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다른 장르의 책들과 달리, 국내 소설책은, 내 속에서 불러 일으키는 반향이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느낌을 준다. 왠지 같이 돌려보고, 같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준달까?

각설하고,(나는 왜, 국내 소설 서평만 쓸라치면, 작품과는 관계없는 사설이 길어지는지 모르겠다.-.-;; ) 전경린의 이 소설은 삼십대 부부의 불륜에 대한 것이다.

후기에서 작가는 말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사랑에 매혹되었다.....중략....그리고 가급적 삶과 연루되지 않는, 관능적이고 부유하는 사랑을 미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쾌락과 감상과 욕망의 비루함과 가벼움과 무상한 환멸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왜 지리멸렬한 삶의 가랭이를 벌리고 그 살점 속에 뿌리를 박아 서로의 악성 종양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숙고하게 되었다.'라고.

나는 이 작가 후기가, 이 소설 전체를 이야기 해 준다고 생각한다. 본래,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을 해야 하고, 기타 등등의 인터뷰나 후기에서 작품에 대해 중언부언 덧붙이는 일은 작품의 미완성을 작가 스스로 시인하는 행동이 되고 만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예외로, 이런 감성적인 멜로 소설(?)은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 무척 궁금해져서 어떤 땐 작품에 앞서 후기부터 읽어보곤 한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나'말고도, 우울하고 꿀꿀한 여러 유형의 '여자의 일생'이 나온다.
먼저, 소설의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주인공 '나'의 남편을 사랑하는 인쇄소 여직원 영우, 그녀는 이종 사촌오빠와 사랑에 빠지고, 사촌 오빠의 약혼녀가 자살하는 데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었고, 주인공 부부의 두터운 애정에 틈을 벌이는 결정적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두 번째, 주인공 부부가 이사간 시골 동네의 어느 빈집, 안주인이었던 부희, (그녀는 과거의 인물이며, 주인공의 앞일을 암시해 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집에서 첫아이 아빠와 일을 벌이다가, 현재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시아버지를 살해하게 된다.

셋째, 휴게소 여인, 비구니가 되고자 절에 들어갔다가, 스님에게 내침을 당하고 속세에서 만난 전과자와 강제로 살다가, 남편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걸 계기로 그와 이혼을 하지만, 현재 출감한 그에게 시시종종 구타를 당한다. 한편으로는 트레일러를 모는 한 가난하고 착한(?) 유부남과 순수한 사랑을 나눈다.

넷째, 주인공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여고 시절에 만나 사랑하게 된 선생님인 아버지와, 원치 않은 임신 끝에, 친정에서 강력히 반대하는 불행한 결혼을 한다. 결혼 직후엔 시어머니로부터 모진 시집살이를 겪다가, 끝내 주인공인 딸마저 홀대하게 된다. 주인공은 어릴 적에 7년 동안, 엄마, 아빠 다른 자매들과 떨어져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다. 주인공은 어린 가슴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며 자란다.

소설 전체적으로, 씁쓸한 뒷맛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은, 이다지도 비루하고 환멸스러운 것이었나.......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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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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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노동이 끝난 다음에 찾아오는 여가의 시간 때문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이 하나도 기쁘지 않다. 노동이 끝난 다음에 반드시 짧으나마 여가의 시간이 찾아와 줌에도 불구하고....... 왜 일까...
최근 나는 내가 추구하는 방식대로, 내게 주어진 일을 소신껏 하고 있지 못하다. 끊임없이 그리고 철저히 누군가(?)의 부림을 받고, 그 사람의 지시에 가장 근접하게 일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것을 어렴풋이 자각하는 순간부터, 일이 너무나 재미없고 지루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책은 위와 같은 여타의 상황에서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는 욕망의 부추김으로 읽게 된 책이다.

예전에 심혜진과 여러 패널들이 스타급 인사를 초대해 인터뷰를 하는 <파워 인터뷰>란 티비 프로를 기억한다. 한번은 김창완 초대되어 인터뷰를 했었는데, 패널 중 한 사람이 그에게 '시간이 나면 무엇을 하며 보내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김창완이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특별히 하는 일없이 빈둥댄다는 대답을 했다. 참으로 우문명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는 강박적으로 사람들에게 목표 달성을 위해 항상 진행형이길 요구하고, 노동의 미덕을 소리 높여 외친다. 노동을 유달리 찬양하고 신성시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체로 감독이거나 관리자인 경우가 많다. 러셀도 이런 점을 지적하면서, 하루 4시간 노동이 보편화될 수 있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하루 4시간 일하는 노동자의 임금으로 식구들을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까. 다분히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내용으로 비춰진다.

이 책은 1935년에 쓰여진 책이며, 게으름을 주제로한 부분은 이 책에서 앞의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밖에 지은이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이유들과, 교육을 바라보는 입장, 여성과 아동 복지에 대한 내용이 후반에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책의 제목을 '러셀의 바라본 사회, 그 사회의 각 현안들에 대한 견해 모음집' 쯤으로 붙여졌어야 정확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붙은 제목이라면 판매 부수가 확실히 딸렸겠지. 이 보단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제목이 더 호소력이 있긴하다. 그리고 게으름을 시종일관 찬양하는 내용보다야 읽을 거리도 많고, 논란의 여지를 불러일으키는 코멘트도 많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 보다는 훨씬 재밌게 읽었지, 싶기도 하다.

게으름을 진가를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러셀 말고도, 같은 시기에 체코의 극작가이자, 수필가였던 카펙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카펙이 말하는 게으름은 '사람이 정신 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게으름인, 거의 명상의 상태에 가까운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무위라기보다는 여가와 재미있는 사색의 결합 쪽에 가깝다.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을 추구한 인생의 요점은 바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힘들게 고군분투하며 악바리처럼 사는 쪽보단,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 선한 본성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인생 쪽이 행복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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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진단 3 - 만화로보는
이원복 / 조선일보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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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의 만화를 대할 때마다, 학교 다닐 때 알았던 어느 선배가 생각난다. 그 선배는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곤 했다. 신문은 다른 면 안 보고, <해외 토픽>란만 보면 된다고... 그리고, 이 선배도 이원복처럼 남이 모르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자료들을 인용하며, 과장해서 나름대로는 재밌게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뭐, 좋은 말로 박학다식했다고나 할까. 일본 섬자락 어느 촌 구석의 동네 락밴드 이름까지 줄줄 읊을 정도였으니까. 이원복이 그렇듯이 말이다.

해외 토픽엔, '이 세상에 과연 그런 일이...'라는 말이 나올성 싶게 이례적이고, 희안한 일들이 보도된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르면 토픽에 나올법한 그런 일들은 금방 우리의 일상사가 되곤 한다. 그만큼 인간 사고의 패러다임은 쉬이 바뀌고, 지난 세기말과 근례에도 국내,외로 돌발적인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우리 나라가 개최하는 월드컵 시즌이다 보니까, 요즘 들어 자꾸만 내 속에서는 다국적인 문명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 같다. (다국적인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이 책이 채워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만화 책은 세계 각국의 문명 진단에 관한 내용이라기 보단 유럽과 미국 일본의 문명 진단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

만화의 내용은 크게 6가지의 주제로 나뉘어 진다. Y세대 혹은 X세대 N세대라고도 불리는 신세대들의 문명 적응 세태법, 세계 여러 나라들의 결혼에 대한 인식 방식,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으로 처세하는 소비자들의 권리 찾기의 행태, 성에 대한 풍속도, 경제 전쟁이 곧 문화 전쟁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모습 등이다.

이원복의 만화는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재주에 있는 것 같다. 정말 대단한 재주라고 본다. 이 책은 재작년 회사에서 하는 작업에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사 본 것이었다. 작업이란 주어진 각각의 주제에 대한 네 칸짜리 도입 만화의 원고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쉽게, 재밌게, 강렬하게 조금은 과장되게 주제를 환기시킬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다. 그런데 만화 스토리를 짜는 내내, 머리에서 쥐가 났다. 그렇게 일의 진전없이 한참을 시달리다 못해, 그 작업에서 피하고 싶기만 했다. 정말 지독하고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쪽 방면으로는 쥐뿔만큼의 재주도 없어서였을 것이다.

이 만화들은 구구절절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다 소화하기에 현기증이 난다. 세상이 너무 빨리빨리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따라잡기 자신없어서인지..아마 둘 다 이유가 될 것이다. 갑자기 몇일전에 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가 생각난다. 그 영화에서 그랬다. 우리가 평생 동안 접하는 모든 정보는 가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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