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초배드`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알고 있다.
세상사 초탈하거나 한 발 뺀 모양새로 ˝ 화내면 뭐가 달라지니?˝ 라고 얼굴에서 표정 따위를 지우고 내게 말한다.

나는 이 사람이 글을 쓰면 딱 좋겠네, 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란 무엇인가 에서, 카버가 말했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냥 술을 들이켰을 뿐이에요. 아마도 제가 저 자신과 제 글, 제 아내와 아이들과 관련해서 삶에서 가장 원했던 일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나서 술을 엄청나게 마시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상한 일이지요. 파산하거나 알코올 의존자가 되거나 바람피우거나 도둑이 되거나 아니면 거짓말쟁이가 될 의도를 갖고 삶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카버의 단편 소설들이 나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전문직 종사자 혹 서민 계층이다.


주인공들 대부분이 다양한 직업군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들이다. <코끼리>에서는 돈만 빌려달라고 하는 파산 지경의 동생, 이혼한 전부인, 빌어먹을 놈팽이와 결혼한 딸, 혼자 사시는 노모를 둔 중년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비타민>에서는 ‘나’의 아내가 비타민 방문 판매를 힘들여 하고 있고, ‘나’는 병원 잡일을 하면서 술만 마시는 남편이다. <체프의 집>에서 주인공은 알콜 중독인 남편과 별거 상태에 있는 아내.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남편의 애원을 뿌리칠 수가 없어 새로운 애인을 버리고 그에게 향했지만, 결국 집주인의 체프의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희망을 꿈꾸었던 그 집에서 둘은 나오게 된다. 그걸로 끝이다. 

 

둘째, 실패자의 이야기가 있다.


실패자는 카버가 좋아하는 소재인 듯 보이고, 사실 독자인 내가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실패자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들을 목도하노라며 우리들의 ‘생’ 자체에 대해 전율을 하게 된다.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에서도 본다면 그렇다.(사실 이 단편은 실패자의 이야기라 할 수는 없을거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생에서의 행복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성실하게 살았던 한 가족에게 어느 날, 닥친 사소한 사고. 그리고 불행. 아이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막연하고도 간절한 염원. 하지만 아이는 죽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었다 해도, 어쨌든 그들은 할 수 있는데 다 했고 갈 수 있는데까지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제과점 주인을 찾아간 일)은 언젠가는, 정말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사사롭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해볼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이다.  

 

단편 <비타민>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자의 모습이다. <비타민>이 그렇다. 특별히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다. 인생의 패잔병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전부터 그리고 있던 인생과는 전혀 다른 인생 속에 갇혀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실패자이다. 모두가 마을을 나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한다. 딱이 어디에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꼽은 카버의 문장

“누군가가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결국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5-03-12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풋내기들] 읽고 있는데 작품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해요.
싫은 작품도 있더라구요.
같은 책이면서, 다른 책이네요. 저는, 이 책은 읽어야되나 어쩌나 하고 있어요.
저는 카버의 느낌이 그대로인 [풋내기들]이 웬지 더 끌려서 말이지요^^

icaru 2015-03-16 11: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것은 편집자의 손질이 더해져서,,,이 책 안 읽으셔두 되지 않을까요? ㅎㅎ
작가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읽다보니 든 생각이지만, 카버는 20세기 생존했던 다른 작가와는 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계층에서 연유한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술을 우위의 가치로 두지 않는 점,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 점...
제가 서재에 두문불출한 사이에 남겨주신 댓글인지라,,, 답글이 쪼매 늦어버렸어요 이궁...
 
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씩이나 쓴다는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까?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가 쓰는 초고 원고를 음식 쓰레기에 비유했었다. 그리고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소설 쓰기의 11개명에서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하며'를 보면, 그런 말을 한다. 세상살이가 너무 어려운 것으로 보일 때마다 짤막한 이야기를 짓곤 했다고. 자신이 겪는 문제의 요소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이야기를 짓고 나면 이내 마음이 평안해진단다. 아마도 <개미>나, <뇌>와 같은 장편을 쓰면서, 두꺼운 소설 짓기가 주는 부담감이나 긴장감을 풀려했나 보다.

작가는 이 이야기의 소재를 꿈이나,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나, 산책을 하면서 보고 떠오른 것들에서 찾았다고 하는데, 정말 천재이다. 아니면, 창작의 고뇌의 흔적은 차치해 두기로 하고, 쉽고 간결하게 모티브를 프롤로그로 풀어 주는 것이거나.  

우리는 작가도 예술가도 뭣도 아니지만, 때때로 이런 공상을 해보지 않나?
'투명한 피부껍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음식물이 식도로 넘어가 어떻게 소화되어 배설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거고, 몸의 어딘가가 절단나고, 이상한 종양 같은 게 마구마구 자라더라도 투명한 피부껍질의 소유자라면, MRI같은 비싼 의료기기를 굳이 동원하지 않아도 병의 원인을 금방 알 수 있을거고 대책도 빨리 되겠지.
'17세기나 18세기의 조선으로 타임머신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기록되어진 역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이한 체험들을 할 수 있을테고.....
그렇지만 이는 어쩌다 하릴없어 심심할 때 한번쯤 해보는 공상이고, 이에서 더도덜도 생각을 진전시키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부지런하고 똑똑한 작가는 이걸 기발한 소설로 써먹었다. 하나하나의 일련의 '가정'을 두고, 이 '가정'에 '세태의 만상'과 조금은 황당한 '과학적 지식'과 사람들의 '허영과 모순'을 양념처럼 버무려서 극단까지 몰고 갔을 때의 결과를 생각해 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23년의 어느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서 버지니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버지니아는 펜을 잡고, 델러웨이 부인에 대한 글을 시작한다.

1949년의 남편 생일날 아침, 로라는 읽던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의 책을 접어두면서 침대 맡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의 생일 준비나 하는 평범한 일상이 그녀를 기다린다.

1999년의 클라리사는 소설 속의 델러웨이 부인처럼,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한 다음, 한아름의 꽃을 안고 거리를 나선다. 클라리사는 세 인물 중, 가장 현실적으로 강하고(생활력이 있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일견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설 속, 세 인물은 서로서로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23년의 49년의, 20세기말의 각각 어느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이제 막 집약하여 보여 주려 한다.

1923년의 '버지니아'는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지극한 간병을 받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이고,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한다는 편집자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그 간병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일견 버지니아의 자유롭고 활기찬 도시 생활에의 갈망을 저지하고 있는 무엇처럼 보인다.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들은 그녀를 까탈스럽게만 여기며, 그녀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많이 의지하고 자랐던 버지니아의 언니마저도 버지니아를 심정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껴한다. 고로, 위대한 예술 작품을 쓰는 버지니아는, 사실 현실 속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완벽히 구하지 못하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1949년의 '로라'는 놓쳐버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탐험되지 못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도, 미련을 접고, 아들에게, 남편에게, 자신의 가정과 의무들에 헌신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들다.(그래서 그녀의 시선은 시종일관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는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하였다.)

1999년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 편집자인 클래리사. 그녀는 지금 옛 애인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한다. 그녀는 버지니아 쓴 소설 속의 델러웨이 부인처럼 '도시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삶의 평범한 즐거움을 계속 사랑하려 한다.

처음에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로 보고, 다시 마이클 커닝헴의 소설을 찾아 읽고, 다시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조각조각의 몽롱한 여운들이, 영화의 그것인지 책 속의 그것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하지만 이 감상의 근원지가 둘 중 어느 것인지 출처를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같은 작품을 두고 영화 쪽이 전달하려는 이미지가 좀더 강렬하고 선명했다면, 원작인 소설 쪽은 독자마다 다양한 해석과 느낌을 담을 자리를 넉넉히 마련해 두고 있었다는 차이일 것이다. 한 작품에 대해 한번 이상 읽을 줄을 모르는, 인내심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내가......왜 보고 또 읽고 또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 일어나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것이 하루하루 반복되어 일상이 되고 세월이 된다. 그런데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전혀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 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 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 (물론 그 앞뒤에는 항상 더 암울하고 어려운 시간이 따르기도 하지만)

'세월'이라는 서사시를 통째로 읽는다는 건, 그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처럼'인생무상'한 행위가 아니라, '내일의 아침'을, '희망'을 품게 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보여 주려 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자살을 생각했던 로라는 결국엔 죽지 않고, 집을 나와 자기가 희망하던 도서관 사서로서의 삶을 살았고, 클라리사는 옛애인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또다른 내일을 희망하며 잠자리에 든다.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 스티브 달드리가 만든 동명의 영화. 삽입된 피아노 음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경은 중세 수도원이다. 주인공 수도사 '나'가 또다른 주인공(?)인 어느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를 만나면서 사건(어쩜 사건이라고 붙일 수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 자체보다 '나'의 의문들과 호기심의 흔적들을 따라가 보는 것이, 이 작품에서 더 건질만한 무엇인지도 모르겠다.)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나'는 먼저 연금술사의 강인하고 총명한 모습에 반한다. 그에게서 정신의 위대함을 통찰한다. 그러면서 연금술에 수행되는 이교 철학에 호기심을 느끼는데 이 과정에서는 속속 빨려들듯 읽힌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 연금술사 피에르가 숲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어느 동굴로 향하는 그의 뒤를 밟게 되는데.....

스티븐 킹의 원작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면 일식 때에 생기는 잠깐의 어둠을 틈타 아내(클레이본의 엄마)는 시시종종 자식(클레이본)을 성희롱하던 주정뱅이 폭력 남편이 구덩이에 빠져 죽게 만든다. 일식 때에서야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죄의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보여 진다.
이 소설에서의 '일식',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빛에 의해서 생기는 달의 그림자가 지구에 생겨 태양이 보이지 않고 깜깜해지는 이 때는 어떠했던지....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이단자인 '나'. 상반된 두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는 '나'처럼,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안드로규스의 어마어마한 실체가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영(靈)인 동시에 육(肉)이며, 태양과 달 그 둘의 결합이기도 했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주제다. 상반된 것들의 결합과 관한 것이라니, 그래서 이 소설의 문체가 현학적인 포즈를 취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혹 이제 막,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을 접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의 작품 <일식>을 읽은 다음에, 이후 작품인 <달>을 읽는 것이, 작가의 행보를 관찰하기 좋을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면 <달>이 <일식>보다는 좀더 다듬어진 수작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식>은 <달>에 비해 작품의 뒷부분이 주제의 무거움(영혼과 육체, 남자인 동시에 여자, 금단의 지식 등등)에 깔려서 엉성함을 면치 못했다는 혐의를 남긴다. 그럼에도 <일식>이 아쿠다카와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또 이 작가의 첫 작품이었기 그런지 뒷부분에 심사평과 작가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염불 보다 잿밥에 더 구미가 당겼던지, 본 작품보다도 이 글을 쓴 어린 작가가 어디서 튀어나왔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무엇무엇을 준비한 끝에 이 소설을 썼으며, 종합하여 어떻게 생겨먹은 작가인지를 말하는 그 부분이 더 읽는 재미를 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