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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여행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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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책속의 소제목들이 유독 정감어린 책이다. <거울 위의 여행>, <땟국>, <괘종 시계>,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등등 '작가의 말' 서문을 보면 이 책은 지난날 작가가 내놓았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를 많은 부분 개작하여 다시 내놓은 책이라고 한다. 1950년대 '나와 아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얽히고 설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책. 작가 김주영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 글은 이십대 후반기를 넘어 삽십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마저 많은 추억거리를 회상하게 한다.

작가와 나 사이에는 삼십년 가량의 세대 차를 두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 추억거리란 예를
들면, 내가 기억도 못하는 아주아주 어릴적 갖고놀던 퍼즐조각이며, 조립용 플라스틱 구슬과 막대기 같은 갖가지 장난감과 책들, 못입게 된 세네살적 옷가지 등등의 잡동사니가 그득하던 다락을 떠오르게 한다. 그 시절 우리들은 엄마가 계시지 않을 때면 그 속으로 올라가 해질녁까지 아주오랜 시간을 보내다 내려오곤 하였었다.

둘째의 추억거리는, 주인공이 반친구가 교실 마루 바닥에 난 구멍 속으로 떨어뜨린 돈을 찾아 주기 위해, 들어간 마루바닥 그 밑에 컴컴한 속에서 반아이들이 떨어뜨린 동전, 자, 연필 콤파스 등등을 보게 된다. 흡사 보물 창고를 연상시키던 그 교실 마루바닥 밑을 탐험한 이야기는 어릴 적 연필모으기에 유난을 떨며, 교실마루바닥을 뜯으면 그 속에 많은 몽당연필들이 숨죽이고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들... 하던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또하나의 이야기, 주인공의 당시 가난한 시절엔 유독 육성회비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많아서(육성회비를 못내는 것이 선생님께 죄스러워 어떤 아이들은 돈을 잃어버린 걸로 가장하는 일도 벌리곤 한다.) 한번쯤은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교실 풍경이 나온다. 누구나 선생님으로부터 돈을 가져간 아이로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독 주인공은 그렇게 선생님께 교무실로 따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선생님의 그런 추궁에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던 소년.

이들 형제는 이렇게 땟국물 뚝뚝 흐르는 앳된 어린아이에서 회한 많은 어른들의 아픔도 읽어낼 수 있는 나이에 이르는 중간 과정에서 참 많은 일들을 벌이고 또한 겪어내게 된다. 1950년대였던 당시 사상범으로 발각되어 형사들에게 무자지하게 잡혀가던 이발소 주인 설영도 아저씨, 설영도 아저씨의 연인이던 최영순 선생님마저도 종적을 감춘 일. 그리고 그 두 사람과의 주인공이 얽힌 그림 액자에 관한 이야기.

그림 액자 때문에 술도가에서 고두밥을 지키던 우직한 삼손 아저씨 장석도가 지서에 잡혀가 빨갱이로 몰려 애꿎은 고문을 당한 일. 빨갱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억측과 풍문들. 그리고 삼손 아저씨와 주인공 형제 간의 의리. 특히 삼손 아저씨가 그 고장을 어느날 홀연히 떠나게 된 일은 독자인 내 맘 속에 작은 파문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남의 집 살이를 해가면서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따사롭게 홀로 두 형제를 길러낸 주인공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가난한 그 시절을 애닯고도 그윽하게 보여 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작가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머물다가 가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뒷모습은 때로는 아름다웠고, 때로는 많은 아픔을 주었다. 아마도 우리는 수많은 이별과 그에 얽힌 추억들을 통해, 슬프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밀려오는 울음을 목구멍으로 밀어내야 하는 그런 어른으로 성장을 하게 되는가 보다. 그리고는 가끔 이렇게 '거울 속으로의 여행'을 통해서나마, 이별하였던 사람들을 작은 소리로 호명하며 불러내 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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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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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는 내 연배의 소설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그 작품의 인지도나 평론가들의 평가를 완전히 배제하고, 동년배라는 이유만으로 꼭 하나씩 사 읽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읽게된 소설로는 김현영의 <냉장고>와 이지형의 <죽거나 망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니>가 있지만,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도 나와 동년배이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작품이고, 첫 번째 작품으로 데뷔하여 일본 문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모양이다. 이 소설은 장르로 굳이 구분하자면, 환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딱이 환상 소설에만 국한시킬 수도 없는 것이, 순수문학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환상 소설로서의 면모라 하면 이런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분량도 많지 않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빠르게 쏠쏠 잘 읽힌다. 탄탄한 줄거리의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문체가 빛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자, 나래이터는 절대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순간적인 일체감을 꿈꾸는 묘사가 시시때때로 나타난다.

본문 중에 이런 부분이다.

'마사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정열'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의 그의 숙명적인 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병은 '참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위해서는, 천천히 나날을 쌓아가며 그 끝에 무언가 얻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순간적 초월 지속적이지 않은 단 하나의 순수한 앙양, 일격에 생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뒤 한번 안돌아볼 치열한 충동의 체험을 갈구했다. 피는 끓는 물처럼 소용돌이치지 않으면 금새 괴어 색이 변하고 응고하고 만다. 육신은, 고통스럽도록 거세게 움직이지 않으면 곧 뜨뜻미지근한 권태의 나락에 가라앉는다.'

정말 감동적인 부분이다. 솔직히 나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늘 성실하게 한 길을 닦다보면, 언제가는 내가 뭔가가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꼭 그렇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 단번에, 한번에 크게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그게 언제인지 그런 날이 있을른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말이다.

각설하고, 그의 소설가로서 문체는 정말 흡인력이 있다. 놀랍도록.... 스치듯 그냥 스치듯 드는 생각..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 이 사람의 소설을 읽고부터 부쩍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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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2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왜...과거 그렇게 히라노 게이치로에 열광했었던지....요즘들어서는 그때 그 마음을 잘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정말 그때그때 달라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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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살 보조업자'이다. 그는 고객이 될 만한 의뢰인을 검색한다. 도서관에서, 미술 전시회에서, 극장에서, 길거리에서 그는 의뢰인에게 접근하여 계약을 맺는다. 의뢰인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의뢰인에게 맞는 자살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친절하게, 따뜻하게.. 그래서 의뢰인은 자신이 원한 대로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것을 한 권의 소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주인공이 자살 보조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나'는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을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 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10쪽--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맹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맹점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정말로 너저분한 인생을 압축의 미학(죽음)으로 승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같은 주인공들에게서 죽음의 미학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등장 인물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의 비의 품은 듯 비련 어린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 못한데 말이다. 너무 억지스럽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 소설의 이러한 설정이 매력이 되는 이유는?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살 보조업'이라는 설정 자체가 세상 속에서 상식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믿는 통념상 '살인'의 의미,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자살'의 의미의 그 경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즉 이 작가의 이런 방식은 기존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접근과는 달리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던 맨 처음 얘기로 되돌아가 본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은 냉정을 찾게 되었다. 아무런 교훈도 훈계조의 따끔한 충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소설 속에서 '냉정함'이라는 요소를 꼬집어 내어 내 것으로 취하다니.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증, 집착증은 '멈춰져 있는 기억' 속에서의 허우적거림이 아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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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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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중간 소위 88년도 77년도에 유행했던 게그들도 이합집산 하였고... 그래서 시종일관 사람을 키득거리게 만드는 재주를 발산해 내는 책이다. 거기에 나오던 우스겟 소리 중에서 아직도 뇌리에 떠나지 않는 유머가 있는데...

당시 친구들 중에 유행하던 게,, 그런 거였단다. 팝송을 한국말로 유사하게 부르는 거였는데.. 올리비아 뉴튼존의 physical의 가사 중 일부.. Let me hear your body talk, your body talk, let me hear your body talk 냄비 위에 밥이 타.. 밥이타.. 냄비 위에 밥이 타... 와 같은 게그를 언급한 것...

어느날 똑같이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나란히 체벌을 받은 “하찮은 인연”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4인방'으로 얽히게 된 형준 승주 조국 두환이 주인공들이다. 소설 제목은 학급의 주류로 부각되지 못하고 외곽에서 겉돌기만 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후, 성인이 된 뒤까지도 미미한 사회적 위상에 자족해야 하는 이들의 비주류적 처지를 가리킨다. 어쩌면 그들의 그런 처지야말로 `58년 개띠'라는 말의 함의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전반부는 화자인 형준의 초등학교 동창인 예쁜 여고생 소희를 둘러싼 네 친구의 각축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처음에 소희는 넷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승주의 파트너가 되지만, 결국은 아마추어 깡패나 다름없는 두환과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그 뒤 소설은 소희가 교통사고로 횡사하는 87년까지 나머지 세 명의 이야기만으로 이어진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는 한마디로 끝까지 자신들이 메이저라 믿고 싶어하는 마이너 군단에 속한 사람들의 성장 소설이다. 형준, 승주, 조국, 두환의 삶이래 봤자 지방 출신에다가 보잘것없는 학력, 반복되는 실직, 실패한 결혼, 정치적 무감각 등 마이너리티로서의 모든 요소들을 구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단 책을 덮고 나면 - 읽는 내내는 가벼움으로 유유자적 재미있게 읽어 냈으나 - 뭔가 허전한, 미진한 느낌이 밀려 들어온다.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주변의 남자들로부터 여러 에피소드를 듣고 그것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묶어 놓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네가지 유형마저도 경박한 무엇처럼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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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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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소설을 읽고 나면 꼭 드는 생각이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대학 시절에 서로가 갖고 있던 소설책을 바꿔 가며 읽던 나의 친구 하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우울함을 우울한 이야기로 극복해 보려던 나의 얄팍한 마음이 나에게 이 소설을 집어 들게 했듯이.....

아무개가 쓴 문학 개론을 보니 문학의 효용성에는 쾌락과 교훈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은 한마디로 각성이나 깨달음 갖은 걸 주지 못한다. 어떤 교화의 목적으로 이 소설을 권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배수아의 어느 작품을 읽어 보아도 쉽사리 발견되는 주인공들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낮에는 백화점이나 호프집 혹은 주유소에서 일하고, 밤이면 검은 늑대의 무리처럼 떼를 지어 도시의 어둠을 배회하거나, 카페에서 밀러를 마시면서 한없이 길고 우울한 심포니의 마지막 쯤을 듣는다. 또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사랑을 나누며, 목적도 없이 한데 어울려 갑작스럽게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조금, 아주 조금 다르다. 일단은 배경 부터가 6.25 직후이며, 주인공들은 가난하고 황량한 삶을 꾸려간다.

어린아이이기도 하도 어른이기도 한 '나'는 주문진의 초라한 병원에서 긴 머리칼을 가진 미숙한 아이로 태어난다. 그런데 '나'는 병들고 늙은 친어머니 맡에서 아버지가 누군지 밝힐수도 없는 부도덕의 상징으로 태어난 아이였기에 이모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래서 '나'는 모유가 아닌 우유만 먹고 자라게 된다. 이모이면서 어머니가 된 사람의 집에는 이미 '나'의 친언니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사촌인 되는 연연이 살고 있다. 그리고 연연은 이모부이자 아버지인 사람과 연인 사이이다. 이모이자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고 낭만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불만과 불행만을 경험하게 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이른 결혼으로 학교 선생이 된 이모부이자 아버지 또한 상실과 불안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이모는 이모부보다 여섯살이나 연상이고, 그들 부부사이의 꿈과 현실의 괴리가 불행을 낳는다. 그러던 어느날 이모이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게 되고 언니이자 사촌인 연연도 숲에서 도끼에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심지어 이모부이자 아버지가 그 범인으로 지목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곤 감옥에서 미쳐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들 형제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부유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게 된다.

커 가면서 나는 대학에서 만난 욱이라는 남자아이를 사귀다가 그의 사촌인 유부남 택이와도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나'가 이런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양어머니는 양아버지와 이혼한 후 암으로 유료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그리고 사촌은 자신의 세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나'의 곁을 떠나고 '나'는 나의 남자친구의 자살을 통해 사촌과의 이별을 실감하면서 허무함을 느낀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 이 소설 전면에 흐르는 부도덕함이 하나도 부도덕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위험하고 처절한 이미지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말처럼 모든 아름다움은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일까? 결락과 허무를 실현되지 않을 꿈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일까? 삶이 우연에 지배되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부주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우연에 지배되는 농담 같은 삶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재미로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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