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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 믿는 대로 된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5년 5월
평점 :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기독교인)가 있는데, 어느 날 둘이 만나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친구의 다섯 살짜리 조카이야기, 새로 식구가 된 새언니 이야기, 직장 생활이야기, 몸이 아팠던 이야기 등을 나누는.. 사이사이마다 언급되는 책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가 되는 형부가 권해 주어서 읽게 된 책이라고 했다. 제목이 긍정의 힘이라고 했고,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땐 그냥 저 친구가 대단히 감화 받은 책인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몇 일 몇 날이 흘렀는데도 그 책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내게서 잘 잊혀지지가 않았다.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물었다. 친구는 ‘기독교 서적인데 괜찮겠냐’ 고 되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서를 사들였지만, 그 숱한 책들 중에서 진정 도움을 받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나 또한 장르 불문하고 기독교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덥석 책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긍정’하는 일에 대해 논리를 실어 주는 책이라면 기꺼이 읽고 싶을 만큼 그 땐 긍정의 힘이 실로 내게 간절했나 보다.
‘개떡 같이 이야기 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듣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책이 개떡인지 찰떡인지는 논외로 두고, 내가 알아 듣기를 좀 미흡하게 한 것 같다. 아쉬웠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문단.
오늘을 온전히 사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이기주의 유혹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의 삶을 누리고 번영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기쁨을 맛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을 잊으라. 남이 나를 위해 뭘 해줄까 계산하지 말고 내가 남을 위해 뭘 해줄까 고민하라. 베풀며 사는 법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받는 법이 아니라 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화가 나거나 걱정이 밀려올 때, 또는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때는 십중팔구 내 문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다. 내 인생의 걱정거리나 불만, 내일 내가 뭘 해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이다.
행복은 선택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행복한 하루를 살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한번에 하루씩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에서 와 닿은 데가 있어 내가 접어놓은 문단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또 석연치 않은 느낌이 오는 것은 정말 지울 수 없다. 개인적인 자기 개선과 자기 자신 속의 세속적인 요구에 따르는 삶(크고 넓은 집에서 살기를 한결 같이 소망했던 저자의 아내는 곧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이 영적인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책의 전반적 요지이다. 이는 영적인 삶이란 생산 중심 상품 문화의 가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부와 특권(하나님의 자녀)과 권력을 미덕을 찬양하는 저자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그들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고, 고통을 선택했다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행복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있으면, 이 말이 진짜로 하나님이 설파하셨을 말씀, 그러니까 '사랑'과 '더 큰 공동체를 받아들이라'는 지침에는 귀를 멀게 하는 거 같다. 왜냐면 그런 생각의 기저에는 특권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서 책임감이라는 부담감을 덜어 주기 때문에.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는 더 관심을 기울이는 책이 되었더라면 이 책은 아마 더 좋은 책으로 이 비기독교인에게도 감동을 주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삐닥한 이 영혼이 성공한 미국의 차세대 주자 목사의 개인적이고 화려한 영적 수사 같은 것에 먼저 눈을 떴기에 저자가 진심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을 귀담아 듣지 못하는 우를 범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독자가 받아들일 나름이기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 중에서...(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해석)
기독교 전통이 그렇듯이 현세의 삶은 심판의 대상으로서만 의미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사후의 심판 그리고 심판 이후의 영원한 삶이라고 보았으니까.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의무로 간주하는 . 지금도 'vocation'이라는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함께 있다. 프로텐스탄티즘에게 직업이란 종교저 천직을 의미함. 산업자본주의에 들어서면서 천직이란 결국 자본가가 아니면 노동자로양분될 수밖에 없었음. 이지점에서 베버의 보수성이 드러남. 자본가라는 계급과 노동자라는 계급이 수행하는 임무를 천직으로, 다시말해 신이 정해준 숙명처럼 사유하기 때문. 그런데, 산업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누가 구매하는 것일까?
보드리야르 " 상품의 사용 가치보다 기호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