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구판절판


그러니 릴케에 의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자격이 필요해서, 먼저 나 스스로의 성숙한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안일주의에 빠져 어려운 것을 피하고 나의 '고유함'을 잃은 지 오래고, 남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옹졸한 마음으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사랑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는지 모른다.
-21쪽

간혹 이제 내 삶이 다하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 생애 마지막 말, 즉 나의 유언이 된다면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 본다..... 말을 통한 자기 표현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의 유언은 무얼까. 문득 궁금해져서 찾아본 적이 있다. 의식적으로 준비해 두었다 한 말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마지막 말이 되었는지, 게다가 정말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는지,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지만 그래도 통설로 알려진 바로 몇 개의 유명한 유언이 있다. 예컨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헤리엇 스토 부인은 자신을 돌봐주는 간호사들에게 "사랑합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빨간 무공훈장을 쓴 스티븐 크레인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마치 중계방송하듯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넘게 마련인 경계선에 도달했을 때,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다. 좀 졸리고, 그리고 모든 게 무관심해진다. 그냥 내가 지금 삶과 죽음 중 어느 세계에 있는가에 대한 몽롱한 의구심과 걱정, 그것뿐이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 게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 말했고, 마찬가지로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임종시 이모가 "죽기 전에 하느님과 화해해라"라고 말하자 "내가 하느님과 언제 싸웠는데?" 하고 반문했다. 작가들의 유언 중 가장 유명한 말은 괴테의 "좀더 빛을"이라는 말일 것이다.
-82~83쪽

"이자벨,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남지. 그걸 모르고 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삶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고, 그리고 너는 아직 젊어."
-85쪽

사전을 찾아 보면 '유머 감각'이란 '우습거나 재미있는 것을 감지하고 즐기고 표현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유머 감각은 그보다 좀더 넓은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누군가 무슨 일을 할 때 상황의 정곡을 찔러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상황 판단력과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이는 또한 근시안적 판단을 유보하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좀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관한 확신, 그리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정직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122쪽

펄 벅은 한국의 고아를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했지만, 그녀의 친자는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고백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장애 자녀를 낳아 길러 본 어머니로서의 체험을 마음으로 토로한 책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행복감, 그러나 정신지체아로 일생 동안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게 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정말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딸아이가 지금 죽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의 기대와 실망, 끝없는 고통, 그러나 결국 그 딸에게서 배운 점을 담담하게 그러나 그녀의 고백대로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며" 서술하고 있다.
"나는 그 누구에게든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습니다."


-129쪽

그러면서 얼룩빼기 말 홀스또메르의 대사를 생각했다.
"늙은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라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다. 늙고 병들고 불구자가 된 것이 내 허물은 아니잖나?"

-165쪽

따지고 보면 동화 속에서 '착한 일'이 보상 받는 길도 매우 '육체적'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아름다운 백조가 되고, 징그러운 두꺼비는 잘생긴 왕자님이 되고, 괴물같이 생긴 짐승은 멋진 왕이 되고, (...)
신체장애는 단지 의학적 케이스일 뿐, 악이든 선이든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다. 또한 인간 치유의 역할을 가진 문학이 한 집단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문학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경기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고, 장애물 하나 뛰어 남고 이젠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 장애가 신체 장애이든, 인간 관계 장애이든, 돈이 없는 장애이든, 돈이 너무 만은 장애이든- 아무리 권력 있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왜 유독 신체 장애에만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224~227쪽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했다. 맞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는 사람만이 절망이기도 하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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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7-1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빨리 사야지

icaru 2005-07-1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전 후배 꺼 빌려 읽었는데.. 저것 보세요...베껴놓느라구 손노동을 적잖이 했잖겠어요 ^^

잉크냄새 2005-07-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교수님의 체험이 녹아들어있는 부분을 발췌하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님은 벌써 문학의 숲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셨군요. 저도 이책 가지고 있는데 제가 보는 오솔길의 풍경은 어떨까 사뭇 기대됩니다. ^^

icaru 2005-07-1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리뷰로는 어떻게 써야 할지... 도통...
그래서... 밑줄 그었던 부분만 부랴부랴 옮겨 놨어요~
님 이 책 갖고 계시다고요~ 아하...좋은 책 갖고 계시네요 ^^

2005-07-18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7-1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잔잔해요. 어려운 책, 요즘 손에 잘 안 잡히는데 휴가철에 읽어야겠어요. 멋져요!

2005-07-19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7-1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너무 잔잔해서 심심한 책이었는데 님은 좋으셨나봐요.
역쉬 우린 안맞는게여...그런거였으..흐흑..
아니, 저도 좋았지요 뭐. 심심한 거 빼고는..
그나저나 잉크님은 이 책 왜 읽지 않고 계십니까!!!!!

2005-07-19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벌써 주문했어요~ 죄송해요 ^^v

icaru 2005-07-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 님... 소금이 필요하신 게지라~ 흐흐

2005-07-2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